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Άλλα σε προετοιμασία

나눔의 목회 (마 26:17-29/행 2:42-47) |(목회자세미나)

by 【고동엽】 2022. 1. 3.

이중표목사/(목회자세미나) 나눔의 목회 (마 26:17-29/행 2:42-47)


우리는 목회를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완성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의 일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는 동시적 사건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어느 면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목회방향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셨습니다.(마 4장 23절) 그리고 식사할 시간도 없이 바쁘셨습니다.(막 3장 20절) 그러나 예수님은 일보다 자기 인격을 중히 여겼고 자기 목숨을 나누어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시작되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마쳐졌습니다. 그러나 구속적 의미에서 그의 일생을 조명하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므로 그의 공생애가 시작되었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므로 그의 구속의 공생애가 완성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알파와 오메가는 세례와 성찬으로 상징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세례와 성찬을 교회의 유전으로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장 15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세례를 받고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을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먹을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들고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식후에 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일생을 제자들에게 성찬을 나누어줌으로 그의 사역을 완성시켰습니다. 수천 군중이 따르며 환호하는 정치적 메시야로 군림하지 않으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던 권능으로 자신의 위대성을 역사에 남기지도 않으시고, 자신의 몸을 생명을 나누는 밥으로, 자신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생명의 음료로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목회자가 가야 할 길은 우리 자신이 나눔의 제물이 되는 것임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나눔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선언하셨고, 성찬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것이 되는 삶의 극치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세례는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내 안에 있는 삶의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고 성찬은 내가 모든 사람 안에 있고 모든 사람이 내 안에 있는 공유의 삶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가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므로 이제 모든 사람에게 하늘의 생명을 나누어 인간들에게 임마누엘이 되었습니다. 하늘을 개인적으로 사유화할 수 없듯이 참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그의 모든 것은 다 우리에게 주셨고 그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눌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나눔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십자가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을 아시고 뒤돌아보지 않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피흘리기 위함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피흘림은 만백성에게 나누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살아 있어서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죽어야만 나누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누어 졌습니다. 그리고 나눔의 생명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눔의 생명이며 성령은 나눔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천국운동은 나눔의 운동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결국 목회는 나눔의 인격 완성입니다.


복음은 은혜의 나눔입니다.
복음은 나누어주는 은혜입니다. 나눌 수 없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어느 권력자나 돈 많은 부자가 독점해 버린다면 복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누구가 독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혼자서는 갖지 못하고 나누어줄 수밖에 없는 이 은혜가 복음인 것입니다. 혼자만 갖고 참 좋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혼자 가지면 화가 미칠 것 같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나누어주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장 16절)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자신에게 복음이 되었다면 혼자 이 복음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나누어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예수님이 자기에게 복음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이란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D. T. Niles) 거지는 공짜로 먹습니다. 거저 먹습니다. 거저 얻은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너도 빨리 가서 거저 먹으라고 전해 줍니다. 이것이 거지의 양심입니다. 만약에 거지가 잔칫집에 가서 혼자 먹고 다른 거지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거지 양심이 아닙니다. 거지는 공짜로 먹고 나면 공짜로 나누어 먹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로 받은 것은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수고로 얻은 것은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은혜로 받은 것이 많아야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나누어주고 싶은 것이 많습니까? 그렇다면 은혜 받은 자입니다. 나누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불타고 있을 때는 사명에 사는 순간이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은혜로 받았다면 복음이 내 속에 역사하게 될 때는 나눔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이 종은 어린 시절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식구는 많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밥을 담아 주시고 당신은 누룽지를 담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것마저 더 먹기를 원하는 자녀들에게 다 나누어주시고 빈 그릇에 물을 담으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무도 그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누어주고도 또 나누어 줄 것이 없는 그 마음 때문에 우시는 것을 어린 자식들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 그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하나님 마음의 표현일 것입니다. 나누어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목회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을 때만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은 좋은 집(House)이 있다고 해서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Family)이 함께 산다고 가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은 어머니가 있는 집입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가정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나누어주려는 그 마음이 있을 때 어머니요 곧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건물이 좋아서 교회가 아니요, 교인이 많아서 교회가 아닙니다. 목자의 마음이 있는 곳이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목자가 있어야 교회가 됩니다.
이 종의 마음을 교인들이 알면 오해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 교인들을 보면 어떻게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까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인생 끝나는 날 어차피 놓고 갈 것이라면 필요한 자에게 주고 가면 주님 앞에 설 때 자랑스런 일이 되겠기에 이 일에 양심상 전혀 가책이 없습니다.
우리 교단에는 가난한 달동네나 공단이나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는 민중교회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초청하여 그 지역의 삶의 현장과 목회의 고뇌를 교인들에게 소개하고 저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가 흘러 나갈 수 있도록 기회를 가집니다.
가진 자의 호주머니와 장롱 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자원하여 나누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양심에 충격을 주어 빼앗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요, 목회라고 생각이 됩니다.


나눔은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나누어주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식에서 떡을 나눔으로 기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눔으로 기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자기 부정은 자기 죽음이요, 여기에서만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자기를 나누어주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지고 자신이 죽는다면 그때부터 예수님처럼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속한 사람은 자신을 나누어 주어야 하며 나눌 것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누어지는 것은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아나니 계명을 지키라 할 때 청년은, 계명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이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부자 청년은 이 나눔의 길에 참여를 거절하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지옥에 있는 부자가 이 청년이었나 싶습니다. 이생이나 내생에 지옥은 나눔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 후 자기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뒤를 삼년 동안 따를 때에는 얻을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네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따르라 할 때 나눔의 운동에 동참하지 못하고 되돌아 그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여 주셨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장 29절~30절)"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버린 것입니다. 철저하게 타산적이요, 이기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자리다툼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서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거지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였습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자기를 위해 버렸으니 은혜 받은 후에는 남에게 나누어주려고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찬은 십자가의 나눔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복음을 나눔으로 얻었고 천국의 길은 나눔의 길임을 알았습니다. 나눔에 참여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성 암브로스는 궁핍한 자를 돕는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의 소유 일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바실(Basil)은 말했습니다. 네 찬장에 있는 빵은 굶주린 자의 것이요, 네 옷장에 있는 옷들은 헐벗은 자의 옷이며, 네가 신고 있는 구두는 신이 없는 자의 것이며 네가 저장해 둔 것은 궁핍한 자의 재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은 막연하게 천국 가서 영생복락을 누린다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나눔의 복음이며 나눔에서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종이 고부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수난 주간에 금식하고 금요일 12시에 성전에 있었습니다. 조용히 묵상하며 주님의 수난을 생각할 때 하늘로부터 우뢰소리처럼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어린 종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울게 했습니다. 이 종은 통곡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 몸을 나누어주었건만 너는 무엇을 나누어주고 있느냐? 책망하실 때 나누어 줄 수 없는 연약한 자신을 고백하면서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원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종은 나눔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에게 일치시켰습니다.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장 35~36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의 나눔 속에, 거기에 계시고 거기서 만날 수 있음을 계시하셨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가 구제 비를 만들어 큰 은혜르 베푸는 것으로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려운 형제를 구제하는 것이 선행이요,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이 성자의 삶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며, 불법을 행하는 것인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제하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구제 받을 자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의 의미는 우리의 손으로 구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자에게 그들의 것이 되돌려졌을 뿐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 큰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나누어주지 않고 혼자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의 것을 다 팔아 무소유가 되란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하고 살아야겠습니다. 서로 마음을 나눕시다. 용서를 나눕시다. 약한 자에게 나의 강함을 나눕시다. 나의 있는 것을 없는 자와 나눕시다. 현재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나누어 봅시다. 나눔은 겸손이요, 사랑입니다. 나눔은 분열을 치료합니다. 나눔을 갈등을 치료합니다.
주님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는 날마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으니 자신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는 나그네들입니다. 우리가 이기와 탐욕에서 해방될 때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위한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주님의 것이요, 주님이 주고자 하는 자에게로 가야 할 것입니다.


나눔은 삶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나눔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은 나눔으로 삶을 풍요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나눔을 부정하는 곳에 분쟁과 갈등이 있습니다. 증오가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나눔은 분열을 치료합니다. 나눔은 갈등을 치료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행복은 어디 있습니까? 서로 나누는 곳에 행복이 있고 나누지 않으려는 데 분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록 나누지 못하고 혼자 고립되는 생활로 빠져 들어갑니다. 자가용도 혼자 탑니다. 음식점도 독방으로 들어갑니다. 목욕탕도 독탕으로 들어갑니다. 집도 담을 높이고 대문은 경비가 지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나누며 삽니다. 목욕도 공중목욕탕에서 하고 기차도 삼 등 칸에 타고 음식도 나누어 먹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동정하고 슬퍼해 줍니다. 마음을 쉽게 나눕니다. 그러므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그들 속에 삶의 풍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사는 것은 혼자 독점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며 사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예수님의 나눔의 복음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밥도 혼자 먹으면 밥맛이 없습니다. 밥상에 둘러앉아 나누어 먹어야 밥맛이 납니다. 밥맛이 있어야 살맛이 납니다. 밥맛이 없으면 살맛이 없습니다. 결국 살맛은 밥맛입니다. 밥맛은 나누어 먹어야 납니다. 그러므로 살맛은 나눔에 있습니다.
김지하의 시가 있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 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여럿이 나누면 밥맛이 납니다. 주신 물질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 때 맛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사유화하면 맛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바로 알면 밥맛이 나고 살맛이 납니다.
우리가 잘 살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혼자 독점하려 하지말고 서로 나누어서 먹는 나눔의 생활을 하여야 됩니다. 시골에서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 살다가 동생이 결혼하여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이 분가한 새 살림이라 부족한 것이 많겠지 생각하고 벼 한 섬을 지고 갔습니다. 그 날 밤 동생도 생각하기를 형님 댁은 식구도 많아 부족한 것이 많겠구나 생각하고 벼 한 섬을 지고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가다가 그만 서고 부딪쳐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형제인지라 착한 형제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서로 나누어주려는 마음은 행복한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풍요가 있고 부족함이 없는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고후 8장 9절) 예수님의 가난은 나누어줌이요, 그의 나누어줌은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풍요가 넘칩니다. 그것은 생산의 풍요보다 나눔의 풍요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한 기적은 물질적으로 재산이 증식되었다는 기적이 아니라 부족한 음식이지만 여러 사람이 풍족하게 나누어 먹었다는 나눔의 기적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서로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고 여전히 궁핍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자꾸 욕심을 내서 자기 창고에 쌓아 놓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고 온통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나눔을 통하여 공동체가 풍부하여지고 나누면 나눌수록 사랑과 유대는 깊어지고 삶은 풍성해졌던 것입니다.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으로 십자가의 구속을 확증시켰고 삼 년 동안 훈련시킨 제자들을 나눔의 공동체로 출범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인 만찬의 자리에서 그의 공생애를 마감하고 역사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나눔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십자가의 정신이요, 십자가의 정신은 나눔에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졌다면 나눔의 정신이 교회의 본질이요 생명력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나눔과 섬김의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도 부자도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수탈과 지배의 현실을 거부하고 서로 나눔으로서 부자와 가난한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참된 화해를 이루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때에 화해는 절실한 복음이며 이 민족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입니다. 이 역사 속에 평화를 창조하는 화해의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최대 문제인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극복하며, 기업의 노사간의 갈등, 세대간 의식의 대립, 지역 감정의 심화 등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눔의 복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평화(平和)는 平(공평), 禾(쌀-먹는 것), 口(입)의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이는 입으로 먹는 것이 공평해야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나눔의 복음이 되지 않고는 화해도 없고 평화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교회가 사유화의 기복을 강조할 때 개인적으로는 복을 받고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성장하고 사람이 많이 모입니다. 그러나 나눔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교회는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그 역사에서 버림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로서 역사 속에서 영적인 나눔의 사명을 다할 뿐 아니라 나눔의 그리스도의 정신에 반역하는 세력에 대하여 투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의 영성을 가진 사람은 나눔의 신비를 알고 그 뜻에 동참하게 됩니다.
교회는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세력에 대하여 권리가 나누어지는 민주화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부를 독점하려는 소수의 지배세력에 대하여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눔의 질서를 실현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약한 자가 억울하게 지배당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가치와 사랑을 나누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나눔의 공동체로서 이상적인 주님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한 교회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목회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가장 이상적인 교회 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종은 한신교회가 1977년 6월 5일, 창립 선언을 할때 미래의 교회 상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었습니다. 예배 공동체, 선교공동체, 봉사공동체, 화해공동체, 민중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 속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나눔에 있습니다.
예배는 은혜의 나눔입니다. 봉사는 섬김의 나눔입니다. 선교는 복음의 나눔입니다. 화해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민중은 작은 자의 나눔입니다.
가장 아름다웠던 초대교회의 본질은 나눔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나눔의 공동체로서 본질을 상실하면 역사 속에 맛을 잃은 소금처럼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저는 오늘 초대교회를 보면서 나눔의 목회를 위하여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제자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중들이 따를 때에는 저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병든 자에게는 병을 치료하여 주었고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배부르게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을 계시하고 닮고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으로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면서 계시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의 주요 관심사는 제자를 훈련하고, 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대했던 제자들이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이후였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제자를 양성하려면 먼저 목회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리십니까? 제자는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나누어주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인격을 통하여 양성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먼저 사도들이 가졌던 나눔의 인격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자신이 제자가 되지 않고는 제자를 양성할 수가 없습니다.


둘째, 나눔의 목회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서 나눔의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회는 제자를 양성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청중이 있고 제자가 있습니다.
청중은 예수에게서 얻을 것을 생각하고 제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가 기복 성을 강조하면 청중은 모였으나 예수의 인격이 없는 종교인으로 결국 전락되고 맙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성경공부에 열심입니다. 성전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권능 있는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 이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급성장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한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와 같이 나눔의 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청중은 많으나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들에게 나눔의 목회철학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므로 제자의 수가 3천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설교할 때 청중의 수가 수만 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처럼 믿는 사람들이 필요를 따라 그 소유를 나누어 주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짜를 더 얻으려고 열심히 기도하고 불로소득의 기적만 바라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목회자의 인격 그대로입니다. 그 시대 그 교회는 그 시대의 목회자의 인격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나눔의 목회자의 인격을 갖추는 데 최선을 다하여야겠습니다.


셋째, 교회는 오늘 이 시대의 나눔의 운동에서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물질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너도 나도 사유재산 확보에 여념이 없습니다. 큰 빌딩이 교회요, 쓰러져 가는 달동네에 교회당은 높아만 가고 화려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산을 사서 수양관을 세우고 있습니다.
물질이 교회로 몰리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교인들의 헌신의 표시입니다.
13세기 로마 카톨릭 전성시대였습니다. 그때 로마 교황청에는 재물과 보배가 무수히 쌓였습니다. 교황은 그 부를 자랑하며 말하기를 "이제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하는 베드로 시대는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때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황 폐하여, 옳습니다. 그렇기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하던 시대도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에 물질이 쌓이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요가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는 금과 은이 많은 것을 축복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요 때문에 힘을 잃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처럼 "다 나누어 주었기에 너에게 줄 은과 금은 없다. 내게 있는 것은 예수밖에 없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이때부터 살아있는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배고플 때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능력 받아 큰 권능이 나타나면 금, 은이 모아지고 그것에 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유화하여 모든 보물을 땅에 쌓습니다. 그때부터 무능한 목회자가 되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이미 죽은 자가 되어 버립니다.
교회는 과감하게 나누어주고 또 나누어주어 끝까지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베드로와 같이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됩니다. 교회는 가진 것이 없어야 하고 가진 자 편에 있어서도 안됩니다. 교회의 가진 것은 오직 예수요, 성령이요, 믿음이요, 사랑이요, 소망이어야 합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주의 사업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의 인격이 재현된 목회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에, 모든 교회가 사유화에 혈안이 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나누는 일에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그리고 십자가로 올라갑시다. 죽으면 나누어집니다. 나눔은 순교자의 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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