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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의 목회 (롬 1:13-15) |(목회자세미나)

by 【고동엽】 2022. 1. 3.

이중표목사/(목회자세미나) 빚진 자의 목회 (롬 1:13-15)

목회자의 최대의 과제는 교회를 얼마나 부흥시키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회자요 설교가인 죤 스토트는 '목회는 예수의 인격을 닮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회자의 인격을 목회 기능적인 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인격을 어떤 기능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장 21~23절) 하였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는 많은 권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수천 군중이 환호하는 설교가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대 기업가와 같이 주의 사업을 경영할 수도 있고 종교 재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하시는 데 있습니다. 평생을 주의 선한 사역에 몸바쳐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예수님이 몰라라 하는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의 기능인은 되었으나 예수의 인격자가 되지 않은 데 있습니다. 목회자가 일생을 헌신하고 받은 축복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면 무슨 대답을 하시렵니까? 하늘나라 면류관입니까? 상급입니까? 기념비입니까? 총회장되는 것입니까? 한가지 대답은 분명히 하여야겠습니다.
"일생동안 목회하고 받은 복이 무엇이요?" 물으면 "예수요, 예수 믿고 얻은 것이 예수요, 목회하고 남은 것이 예수요."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목회자의 최대의 인격은 예수님이 그의 삶의 전부가 되는 데 있습니다. 목회자의 인격을 이번 세미나에서 세 가지 측면으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은혜 받은 자, 둘째는 나누는 자, 셋째는 순교자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러 금번 세미나에 참석하였습니다. 목회자의 인격 개발은 은혜를 받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로 인격이 개발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하는 과업이요, 은혜는 목회의 생명입니다. 은혜 없이는 목회가 안됩니다.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 은혜 때문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요, 구원입니다.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은혜인데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이 납니다. 목회가 은혜로 시작되었다면 은혜로 마쳐져야 합니다.
이 종은 교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은혜를 많이 받고 싶습니까? 하면 교인들은 모두 '아멘' 합니다. 그때 저는 은혜를 조금만 받으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은혜를 조금 받으면 편히 살 수 있지만 많이 받으면 빚진 자가 되어 그 빚 때문에 재산과 생명을 뺏길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은혜를 많이 받겠느냐 할 때는 '아멘'이 적어집니다.
목회자가 은혜를 받으면 교회가 부흥되고 받는 것도 많고 살기가 좋아집니다. 은혜란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거저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은혜를 좋아합니다. 아마 은혜를 축복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무엇입니까? 은혜란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공짜를 좋아하고, 그 중에 목사는 가장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저 자신도 교인들이 대접해 주는 것을 좋아하고 선물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면 공짜를 좋아하는 심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신 교회에서 전국 목회자들에게 도서를 보내 드립니다. 그러나 받은 후 회답은 '십분의 일' 정도입니다. 그때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은혜 받기만 좋아해서 교회로 몰리는 현대 교인들의 생리에는 심히 위험한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짜만 좋아하고 공짜로 믿음을 얻으려는 기복성의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공짜로 알므로 해서 결국 복음이 변질되고 기독교는 타락하여 역사에 악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빚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역사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는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은혜를 받는 높은 단계는 빚으로 받는 단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받게 하시는데 이는 빚진 자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 단계는 큰 은혜요, 큰 영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빚진 자로 고백하고 있는 로마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때 회심한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로마에 들어가 세운 교회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복음 전도로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이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큰 관심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다. 그러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이처럼 로마에 가기를 원한 것은 철저하게 빚진 자로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사명감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빚에 쪼들려 못살겠다 소리칩니다. "나는 빚진 자다. 한 사람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사도 바울의 '빚진 자'는 은혜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은혜를 받아 겸손하고 행복해지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보통 사람은 여기까지 은혜를 받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되 크게 주어 빚진 자로 만들어서 새 역사를 창조하는 희생적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목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사랑하는 자에게 이런 사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맵소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가 감당할 수 없이 큰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라 하였습니다. 자기는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교회까지 핍박한 사람이니 실상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나는 어느 사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위대한 사도가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알고 살았습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절대적인 충성이 가능했습니다. 부흥되는 교회의 목사는 은혜가 많이 있고 작은 교회는 은혜가 적은 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크기가 크고 작은 것으로 은혜의 과다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게 향하신 구속적 은혜가 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장 12~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요, 옥중에서 이대로 죽어도 감하요, 받은 은혜가 족하기에 기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받은 은혜는 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은 일을 하였지만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고 현재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뜻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는이 은혜를 알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이제 빚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받은 은혜가 큰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의 전 삶은 그 은혜 때문에 살고 그 은혜 때문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대로 죽어도 그저 고맙고 그 주어진 고난이 감사하고, 은혜를 생각하니 매맞고 굶주리고 헐벗어도 그 하는 일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은혜를 힘입어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된 것과 사도로 부름 받은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래서 그저 값없이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종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보니 일생토록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 노력해서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라 일생을 바쳐 갚아도 부족한 빚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스스로 종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나서 자기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경륜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이방땅 길리기야 다소에서 태어났기에 결국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것은 많은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계획 가운데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특별히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깨달아야겠습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나를 살려 주십니다. 내게 건강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었습니다. 여름철 어느 날 교회 정원의 나무그늘 아래서 성경을 펴고 로마서를 읽다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장 14절) 하는 이 말씀을 읽다가 저는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땅에 무릎을 꿇었고 이렇게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주님, 이 종은 빚진 자입니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불효자입니다. 형제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저는 무정한 사람입니다. 교인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이 종은 삯군 목자입니다. 내 조국에 빚진 자입니다. 이 종은 민족의 고난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성령은 이 종을 빚진 자로 사로잡았습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연 모두에게 빚진 자임을 알았습니다. 하늘의 바람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만 들려도 이 종은 빚진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송이를 보아도 빚진 자임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입 속에서는 빚진 자, 빚진 자, 빚진 자의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모두가 다 나를 위해 주었건만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죄인임을 깨닫고 한없이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빚진 자다' 하는 하늘의 음성이 가슴에 메아리 쳤고 온 지역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빚진 자임을 실감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심정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을 감동케 하여 빚진 자임을 고백하게 하던 그 은혜가 이 종에게도 임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내가 받은 은혜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습니까? 내가 축복 받았다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더욱더 겸손하므로 더 큰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내가 빚진 자구나! 이렇게 되어졌습니까?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로 고백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많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은 빚을 많이 졌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입장에서는 긍휼이요 받는 우리에게는 거저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거저 받으면(공짜로) 은혜를 헛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빚으로 받아야하고, 은혜 받은 자는 자신을 빚진 자로 고백하여야 합니다.
본 회퍼는 "은혜를 값싸게 받으려는 것이 교회의 원수이다. 은혜가 비싼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가로 세운 희생이기 때문이요, 우리를 비싸게 샀다. 하나님께 비싼 것이 우리에게 쌀 리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비싸게 받는 것은 은혜를 빚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 수록 은혜는 커지고 빚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 되사 나를 주께 맵소서


옛날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가 되어 몸으로 일을 해서라도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평생 일을 하면서도 그 빚 때문에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 수록 자기 일은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일이 있을 뿐입니다. 주의 일을 할 때는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종은 성공이나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일하면 됩니다. 빚을 많이 질수록 빚진 자는 빚을 위해 전생을 다 바칩니다.
빚진 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됩니다.(롬 14장 7~8절)
그리스도인들은 죽도록 충성할지라도 '희생'이란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보답할 뿐이요 빚진 자는 빚을 갚을 뿐입니다. 희생은 받은 은혜가 없이 자기 몸을 제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희생이 없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보내며 치른 희생에 대하여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진 큰 빚, 결코 갚을 수 없는 그 빚의 극히 일부를 갚은 것에 불과한 것이 어찌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건강한 활동 속에서 그 자체의 가장 최고의 보답 즉 선한 일을 행한다는 자각, 마음의 평온, 내세에 있을 영광스런 운명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어떻게 희생입니까? 나는 결코 희생한 일이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큰사랑을 안다면 어떤 충성도 결코 희생은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빚진 자로서 살은 것입니다.
은혜가 빚이 되었다면 그 은혜를 보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빚을 진자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약탈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참으로 크게 받았던 위대한 종들은 그 은혜(빚)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헌신이요, 순교가 됩니다.


둘째, 목회자는 교회에 빚진 자입니다.
목회자는 일생동안 교회가 일터요, 밥줄이요, 생명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배시간에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왔다 가지만 교인들은 바치고 믿고 반대로 우리는 대접받고 믿습니다.
이 종이 목회하면서 마음에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목회의 스승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세계적인 석학이나 신학교 교수나 어느 선배가 아닙니다. 이들은 바로 저를 받들어 섬기는 교인들입니다. 세미나에서 감동적인 순간들이 있지만 잠시 뿐이요 눈을 감고 생각할 때 머리에 기억되는 살아있는 분들의 형상이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 한 노인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따님이 시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겨울철이면 따님 댁에서 쉬라 하셨지만 시골집 추운 방에서 사셨습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심방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추운 집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따님 댁에 가시면 어머님이 택시를 타도록 돈을 줍니다. 그러면 그 돈을 가지고 8킬로를 걷습니다. 그리고 음료수를 사들고 목사 관에 오십니다. 한번은 사모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모님, 나는 목사님에게 내 살을 깎아드려도 부족하지만 이 적은 것 목사님에게 드립니다. 목사님 목마르실 때 잡수도록 하세요."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그 음료수를 들었을 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것을 앞에 놓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옥합이요, 향유입니다. 이 정성과 피어린 향유를 먹고도 게으르고 악한 이 종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교인들은 자기들이 먹지 못하는 것을 먹도록 했고 헐벗고 살면서도 주의 사자라고 양복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저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저의 방은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목사는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의 교인들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많은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목회자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빚은 사람에게 지게 된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여기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고 빚은 사람에게 졌다고 고백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랑과 은혜를 보답하는 길을 바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빚을 지고 사람에게 갚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던 사람을 내가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주고자 했던 그 생명의 복음을 내가 전하고 그리스도가 돌보던 사람을 내가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요 자신의 의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학생시절에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근심으로 싸우고 있는데 나만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는 것이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동급생들의 비참한 가정 형편과 나의 부요한 가정 생활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도 나는 물질적 환경과 건강 때문에 누리는 행복에 대하여 부단히 채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21세되던 어느 맑게 개인 여름 아침 성경강림절에 나는 이러한 행복을 남에게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30세까지는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고 그 다음은 빚진 자로 인간에게 봉사하는 일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신학교 시절 기숙사 한 방에서 지내던 선배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학교 4년을 7년에 걸쳐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학비가 없으면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면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폐결핵으로 고생도 많이 한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이런 저런 얘기를 피차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가 황해도 옹진반도 어느 중학교 2학년 때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이 배를 타고 밤에 월남하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여 바다에 흩어졌는데, 자기는 간신히 살아서 구조를 받아 인천에 와서 고아원을 전전하면서 살다가 결국 신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 이제 사는 것은 그 은혜로 알고 빚진 몸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는 신학교를 졸업하면 자기처럼 부모 없이 고아가 된 사람들과 외로이 살고 있는 형제들을 찾아 도와주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하나남이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나도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 구별할 것 없이 사랑을 갚아야 할 빚진 자로 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큰사랑을 받고 보니 이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큰사랑에 미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날 이렇게 구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의인들이 묻기를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나이까? 할 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또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장 35~35절, 40절 ,45절)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없으므로 빚진 자요, 우리는 가졌으므로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은혜를 은혜로 아는 신앙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의 빚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공산주의의 심판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정 러시아의 권력과 물질을 가진 교회가 안 가진 민중에게 빚진 자임을 모르고 그 빚을 갚지 않을 때 가난한 자의 혁명으로 결국 다 빼앗기며 슬피 울며 쫓겨나는 비극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가난한 민중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빚과 그리스도인들의 빚은 다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빚이요, 필요한 자는 곧 채권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자에게 주도록 나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 입장이 해방신학이요, 민중신학이라고 합니다. 배운 사람은 배웠기 때문에 배운 지식이 빚이 되며, 가진 자는 자기의 것을 필요한 자에게 주어야 할 빚진 자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몸으로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물질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자에게 빚진 자라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무슨 은혜를 입지 않았어도 갚아 주어야 할 빚진 자입니다. 은혜를 위로 하나님(예수)에게서 받고 땅에 계신 예수(민중)에게 갚아야 할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받은 은혜를 네가 돌보아야 할 사람에게 갚아 주라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가진 것을 빚으로 알지 못하면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가진 것이 빚임을 알고 갚을 자를 찾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가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을 가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최대의 은혜로 받았기에 이 은혜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진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받은 은혜는 무엇입니까? 복음이라면 이 복음은 필요한 자에게 갚아야 할 빚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늘의 사회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이 있다면 필요한 자에게 주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주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주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 큰 은혜를 받고서 빚을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목숨인들 아까우랴, 나는 주님을 위해 내놓은 몸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심령(성령)에 매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무슨 일을 만날지는 알지 못하나 나는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으로 예루살렘에 갔고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로마로 갔습니다.
베드로는 성전 문 앞에 있는 거지에게 자기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 복음이기에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복음이 있다면 복음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제가 고부에서 목회할 때 일입니다. 하루는 심방을 갔다가 밤에 돌아오면서 산언덕에서 무릎을 꿇고 이런 기도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고을 사람들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면 제 생명을 기쁨으로 바치겠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제가 죽는 것은 조금도 아까운 마음이 없습니다. 순교자가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에게 미쳐서 살던 그때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이런 감동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묻는다. 한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느냐?"
"주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일대일로는 죽을 수 없습니다. 맞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위해 죽을 필요가 없다. 생명은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나는 그때 많은 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이 위선이요, 자기 교만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장 3절)는 말씀의 뜻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목회는 자기가 빚진 자임을 알게 될 때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알고 필요로 하는 자를 찾게 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하나님의 그 큰사랑에서 오는 의무감에서 복음의 빚진 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은혜를 많이 받고 빚도 많이 진자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그 큰사랑으로 빚진 자가 되어 복음에 미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은혜로 산다면 은혜를 많이 받고 많은 빚을 지고 그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어 빚진 자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은혜 때문에 빚진 자로 사로잡아 그의 재산, 재능, 시간, 생명까지 전부 빼앗아 가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여러분을 빼앗아 가셨습니까? 많이 빼앗긴 자는 은혜가 큰 자요, 큰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그에게 충성하여야겠습니다. 결국 목회자의최대의 영광은 빚진 자가 되는 것이며, 이 복음을 위해 소중한 생명까지 아낌없이 바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오늘 이 역사 속에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빚진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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