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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평안을 주노라

by 【고동엽】 2021. 12. 31.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5~27)

유럽연합(EU) 연구팀이 최근 그린랜드 빙하바닥 3천 84미터까지 파내려가 얼음을 채취했다고 합니다. 3천 84미터까지 파내려 가는데 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연구팀의 발표에 의하면 파 올린 빙하 덩어리로 12만년전의 환경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빙하에 무거운 산소동위원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면 그 해의 온도가 높았다는 것이고 미세한 공기방울이 포함되어 있으면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먼지가 포함되어 있으면 대기에 포함된 물질의 양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음 조각으로 12만년전의 환경상태를 추정할 수 있게 된 과학의 힘이 놀랍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의과대학 심리학과 폴에크먼 교수는 전 세계 20여개 문명권에 속한 사람들의 표정을 연구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선진문명과 미개문명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얼굴표정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감정은 얼굴을 통해 나타나는데 얼굴근육은 뇌의 명령을 다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에크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진짜 웃음은 눈을 유심히 관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웃음은 윗 눈두덩과 눈썹 사이의 근육과 양쪽눈썹이 살짝 내려오지만 가짜 웃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웃을 때는 좌뇌가 움직이고 가짜 웃을 때는 우뇌가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시편 42:11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불안의 출처가 얼굴이나 손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속'이 뭡니까? 영혼이 속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이란 영혼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근심, 불안, 염려의 시발점은 사건자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12만년전의 환경도 3천 84미터 빙하에서 파올린 얼음조각으로 측정하는 것처럼, 그리고 얼굴이나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표정이나 몸짓이 뇌의 지시를 받는 것처럼 인간이 내리는 모든 행동의 결정은 영혼이 내린다는 것이 시인의 고백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영혼이 편하면 얼굴도 편해지고 말도 편해지고 행동도 편해지고 생활도 편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집을 떠나 산으로 바다로 들로 나갑니다. 그러나 산이나 바다가 기분을 바꿔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에 망한 사업가가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어느 날 의사가 집에만 있지 말고 기분전환을 위해 산에도 가보고 툭 터진 바닷바람도 쏘여 보라고 했습니다. 의사의 말을 따라 했습니다. 의사의 말을 따라 어느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땐 몰랐는데 정상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니 고공공포증과 함께 나무며 바위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댑니다. "뛰어 내려라, 뛰어 내려라."

그는 겁이 덜컥 나 부들부들 떨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며칠 후 부산으로 내려가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바닷물이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닷물 소리가 갑자기 "들어오너라, 들어오너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바다를 떠났습니다.

어느 날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 날 설교제목은 "길은 있습니다."였고, 설교 후 부른 찬송은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어라. 바다에 뛰어내려 죽어라. 너는 살 가치도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사탄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길이 있다 고통을 피하고 슬픔을 이기고 낭패와 실망을 벗어날 길이 있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날 그 남자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실컷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웃으며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로 시작됩니다. 근심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이 커져서 믿음을 파괴하고 인생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저녁 저희 교회에서 설교한 존 폴 잭슨 목사님은 근심이나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행이 일어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행복이 반드시 이뤄질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둘 다 믿는 것인데 불행을 믿는 것과 행복을 믿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행을 믿으면 불행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행복을 믿으면 행복한 일이 일어납니다.
제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시간마다 "나는 중병에 걸렸어 나는 죽을꺼야. 나는 석달 안에 죽게 될꺼야."라고 자신에게 불행하고 부정적인 암시를 걸면 석달안에 병 걸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석달밖에 못산다는 최종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도 "아니야 나는 그렇게 죽을 수 없어. 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병이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살리실거야 나를 고치실꺼야."라고 믿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작은 병 앞에 무릎 꿇는 사람도 있고 큰 병도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수술 받고난 후 저보다 경미한 병으로 입원해 있는 어떤 사람을 문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수술 후 치료를 하고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빨리 퇴원하고 건강을 회복하시게 될 겁니다."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저하고 목사님은 다르죠. 목사님이야 믿음도 좋고, 목사님이시니까 빨리 회복되셨지만 저야 어디 목사님한테 댈수 있습니까?"
놀라운 것은 지금도 그 사람은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에겐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 꼴은 뭐가 되나? 어떻게 사나? 뭘 해야 하나? 어떻게 먹고 사나? 한두가지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평안은 근심과 두려움을 몰아낸다, 근심 걱정은 평안을 가로막는다, 참 평안은 주님이 주신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본래 근심 걱정이란 개념일 뿐 실체가 없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산처럼 우뚝 서있는 것도 아니고 소포나 택배로 부칠 수 있는 물건도 아닙니다. 형체도 색깔도 모양도 냄새도 없습니다. 그런데 근심 걱정은 머리를 점령하고, 가정을 점령하고, 생활을 점령합니다. 전 세계를 점령합니다. 근심에 사로잡히면 영혼도 죽고, 육체도 죽고 맙니다. 근심은 마귀의 선물입니다. 단잠을 앗아가고 한숨 쉬게 만들고 절망하게 합니다. 마지막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을 보면 부활주일아침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세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무덤을 찾아가며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했습니다. 무덤 문을 막고 있는 큰 돌을 여인들의 힘으로는 옮겨 놓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심하며 간 것입니다.

그러나 4절 보면 "눈을 들어본 즉 돌이 벌써 굴려 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고 했습니다. 그녀들은 괜한 걱정을 한 것입니다. 이미 돌은 굴려졌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돌 문 걱정으로 한숨 쉬며 무덤으로 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온 세상 걱정 근심으로 땅이 꺼집니다.

동경 나리타공항은 모래로 바다를 메꿔 만든 공항입니다. 그래서 매년 땅이 조금씩 내려앉는다고 합니다.
근심파들은 당이 내려앉으면 어떡하나 공항은 실패작이다라며 법석을 떱니다. 그러나 여유파들은 별 걱정 다한다, 땅이 내려앉으면 수륙양용 비행기 개발하면 되지라며 여유만만 합니다.

이태리 베네치아도 점점 당이 침하돼 베네치아를 에워싸고 있는 바닷물이 높아져 갑니다. 걱정 파들은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러나 낭만파들은 얼마나 환상적이냐 세계의 관광객들이 더 몰려 올 것이라며 태평입니다.

어느 편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정치, 경제, 불경기, 불황, 실직, 실업,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 이라크 문제 등 이것들은 지나가는 역사의 돌풍입니다. 356일 폭풍우 몰아치고 토네이도가 부는 것은 아닙니다. 다 지나갈 것들입니다.

돌문대문에 걱정했던 여인들처럼 살면 안 됩니다.
세상 돌아가는 꼴 때문에 열 받아 잠도 못자고, 밥맛도 떨어지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챨스 베어드의 말대로 "하나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철저히 부숴뜨린다."
그렇습니다.

"너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나 더 크게 할 수 있느냐"라는 주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27절 첫머리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고 했습니다. '끼친다'는 것은 골고루 물을 뿌리듯 비료를 부리듯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부입니다. 더 있고 더 가져야 하고 내가 원하는 것들이 충족됐을 때 평안해 집니다. 세상 평안은 상대적이어서 만족이 없습니다.

13평 연탄아파트 살 땐 21평 민영아파트에 사는 것이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LG자이나 대우 트럼프에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세상 편안이고 만족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떤 평안입니까?
영원한 평안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평안입니다. 돈 주고 사는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참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6:33을 보면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에베소서 2:17을 보면 "평안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시편 25:12~13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영혼은 평안히 거한다."고 했습니다.

마귀와 친하면 불안, 걱정, 염려를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평안을 선물로 주십니다. 지금 여기서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영접합시다. 평안을 받읍시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아멘"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들을 바라보지 맙시다.
베드로처럼 풍랑 바라보고, 물결 바라보고, 바다 바라보다가 침몰하지 맙시다.
예수님 바라보고 평안을 얻고 삽시다. 평안을 주노라. 아멘.

 
출처 : 여호와닛시♥
글쓴이 : 주님의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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