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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으로*이재철 목사
사도행전 9:1-9
몇년 전 연말 살인적인 태풍이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최고 시속 250Km의 광풍이 휩쓸고 간 영국 프랑스 독일 스위스에서는 무려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건물 도로 항만 삼림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전국 96개 주중에서 무려 60개 주가 '자연재해지역'으로 선포될 정도였습니다. 이곳 제네바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너편 라르브 강변에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들이 쓰러져 밀려가는 것을 제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태풍이 완전히 지나간 뒤, 라르브강 상류 쪽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곳에도 수많은 나무들이 나자빠져 있었습니다. 살인태풍을 이기지 못해 뿌리 채 뽑혀버린 거목들이었습니다. 태풍의 위력이 얼마나 가공스러웠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쓰러진 나무들은 한결같이 뿌리가 옆으로만 퍼져 있고 밑으로는 전혀 뻗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키에 비해 뿌리의 깊이가 턱없이 얕았다는 말입니다. 평균 20m가 넘는 거목들의 뿌리 깊이가 고작 50cm-100cm 정도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겨울철에 한국과 같은 혹한이 없는 이곳 서부 유럽에는 1년 내내 많은 비가 내립니다. 그래서 한국과는 달리 겨울에도 새파란 잔디가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시사철 땅이 항상 습하기 때문에, 이곳 나무뿌리들은 구태여 애써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쉽게 옆으로 퍼지기만 해도 어디든 물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처럼 안이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살인강풍이 몰아치면,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속수무책으로 나자빠지게 됩니다. 처참한 몰골로 말입니다. 비단 이번 태풍뿐만 아니라, 서부 유럽에서 강풍이 있을 때마다 으레 같은 풍경을 보게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처럼 우기보다 건기가 훨씬 길기에, 나무들이 수맥을 찾기 위해 땅속 깊이 파고 들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그로부터 몇 주 지나 다시 같은 장소로 나가 보았습니다. 그 동안 쓰러진 나무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습니다. 뿌리가 뽑히는 것은 용케 모면했지만 대신 꺾어져 두 동강이 났던 나무들은, 아예 톱으로 잘라버린 자리에 밑동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밑동들 위에는 짓궂은 개들이 싸둔 오물들이 점잖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태풍이 한 그루의 예외도 없이 모든 나무를 다 쓸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쓰러져 없어져버린 나무보다, 여전히 늠름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쓰러졌던 나무들보다 더 키가 높고 몸체가 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목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 같은 날,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살인강풍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광풍을 뚫고 살아 남은 나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광풍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쓰러진 나무들에 비해 그들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풍을 이기기에 넉넉한 깊은 뿌리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나무들 역시 쓰러진 나무들처럼 모두 나자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쓰러진 나무들은 누구를 탓할 수 없습니다. 태풍을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뿌리 채 뽑혀 쓰러지거나 부러진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저 안이하게 편한 대로 살아온 자기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나무가 나무로서 자신에 대한 바른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어느 순간 불현듯 그 삶 자체가 부러져버리고 맙니다. 요행히 밑동이 남는다 한들 생명에 관한 한, 그 가치란 개들의 변기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부러져나간 나무에겐 또 다른 생명의 기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울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후에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바울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 걸쳐 스스로 자신만만한 젊은이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이란 지금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의 히브리식 발음입니다. 그날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 지에 대해 본문 3절-5절이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태풍을 만났습니다. 진리의 태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땅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눈이 멀고 식음도 전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인생이 뿌리 채 뽑혀져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인생이란 다시는 볼 가치도, 더 이상 먹고 마실 의미도 없는 부러진 인생이었습니다. 설령 밑동이 남는다 해도 생명에 관한 한, 개의 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기자신의 책임이었습니다.
참 진리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 박지 아니한 그 자신 말입니다. 그릇 되이 자기 신념과 자기 판단에만 안이하게 뿌리를 내렸던 자기자신 말입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인생이 동강 난 그 순간이야말로 생명에 관한 한, 그의 인생은 종말이어야만 했습니다. 마치 라르브 강변의, 뿌리 채 뽑혀 나자빠진 나무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습니다만, 그리스어 사본 중에는 본문 6절이 '그러나(alla)'란 접속사로 시작되는 사본들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그러나'란 용어는 그 이전의 내용을 뒤집을 때에 사용되는 접속부사입니다. 6절 이전 구절인 5절의 내용은, 사울의 인생이 그처럼 뿌리 채 뽑혀 고꾸라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에 뿌리 박지 않았기 때문이란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그처럼 뿌리뽑힌 사울의 인생은 이제 끝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내용이 주님의 '그러나'란 말씀 속에서 대역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진리의 대적자로 그릇 살아오다 뿌리 채 뽑혀버린 바울의 인생이 완전 끝장임엔 틀림없지만 그렇게 의미 없이 끝나도록 그냥 내버려두시지는 않겠다는 주님의 선언이었습니다. 그 끝이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되도록 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끝장인 것은 그 동안 죽음에 뿌리를 내렸던 그릇된 삶이요 시작이라 함은 진리에 뿌리박은 새 생명의 삶이란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삶을 살던 바울을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한 손으로 꺾으셨던 것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다른 한 손으로 그를 참 생명에 접붙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진리의 태풍으로 그릇된 바울의 인생을 꺾으시기 전에, 그가 새 생명의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를 도울 사람을 이미 예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먼저 그를 꺾으신 뒤에 누구를 그에게 붙여줄까 그제야 사방을 두리번거리신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필요한 사람을 당신의 손으로 미리 예비해 놓으신 뒤에 잘못된 그의 삶을 꺾으셨습니다. 마치 의사가 무조건 환자의 환부를 도려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수술에 필요한 모든 도구와 조처를 취한 뒤에 집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죄인을 꺾으시는 공의의 손만 가지신 분이라면, 바울은 뿌리 뽑힌 사울로 그 인생이 종국을 맞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손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또한 사랑의 손을 가지셨기에, 그는 전혀 새로운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본문 8-9절은 그 이후의 일을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그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좇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눈이 멀어버린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야 비로소 다메섹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문 3절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명령이 있기 이전부터 다메섹은 이미 바울의 행선지였습니다. 3절에서도 바울은 다메섹을 향했고 8절에서도 다메섹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의 태풍으로 그의 인생이 꺾어진 이전이나 이후나 그의 행선지가 다메섹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행선지가 동일하다고 해서, 그 행보의 의미마저 동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두 행보의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이전에 바울은 스스로 다메섹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지금은 사람의 손에 끌려, 아니 그 배후에 계시는 주님의 손에 끌려 나아갑니다. 예전엔 자신의 신념을 위해, 진리를 짓밟기 위해 그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지금은 진리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전엔 자신이 인생의 주체가 되어 죽음의 씨와 열매를 뿌리고 거두기 위해 나아갔습니다. 지금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주님의 생명에 자신을 뿌리내리기 위해 나아갑니다. 더욱이 본문 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바울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접붙여지던 그 순간, 그 역사적인 현장에는 바울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분명 바울의 일행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바울에게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바울보다 더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그 일행의 괴수는 도리어 바울이었습니다. 악하기로 따진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이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괴수 중의 괴수였던 바울 한 사람만 그 날 새 생명에 접붙임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불가사의한 섭리였습니다. 그 신비한 주님의 섭리 앞에서 바울이 과연 무엇을 본다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전엔 자신을 과신하며 교만의 눈을 부릅뜨고 다메섹을 향했지만, 지금은 두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낮고 낮은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예전엔 자신의 뜻을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오직 주님의 뜻을 위해서입니다.
본문 3절에서도 바울은 다메섹을 향했고 8절에서도 다메섹이 행선지였지만, 그러나 그 동기와 의미 그리고 목적은 이처럼 달랐습니다. 우리 역시 모두 다메섹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겉으로 보면 늘 같은 삶이 반복되고 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모습은 본문 3절의 사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당하고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무가치한 삶을 반복하다가, 라르브 강변의 나무처럼 순식간에 뿌리 채 뽑혀 나자빠져버린 사울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바울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전과 똑 같이 다메섹을 향하고 있으나, 실은 새 생명에 뿌리를 박고 진리를 따라 나선 바울 말입니다. 바울의 삶의 의미가 이처럼 새로워진 그 변화의 한 가운데는 주님께서 자리잡고 계셨습니다. 한 손으로는 꺾으시고 다른 한 손으로는 새롭게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어제와 같은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가 오늘 바울이 될 수 있음은, 아니 반드시 되어야함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의 열매를 맺는 우리의 삶을 반드시 꺾으십니다. 그분의 손은 공의, 즉 정의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정의 아닌 모든 것은 그 공의의 손에서 뿌리 채 뽑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릇된 우리의 삶을 꺾으시되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허물과 죄의 책임을 당신 자신에게로 돌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친히 그 책임을 지시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란 또 다른 손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전까지는 우리가 라르브 강변의 나무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이 이후부터는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됩니다. 태풍에 뿌리 채 뽑힌 라르브 강의 나무들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지만, 그릇된 삶이 꺾여진 우리에게는 전혀 새로운 삶의 기회가 다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손안에서 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오늘도 우리의 행선지가 어제처럼 여전히 다메섹이라 할지라도 그 의미와 가치는 전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무자비한 인간처럼 결코 두 손으로 우리를 꺾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공의의 한 손으로는 우리의 잘못을 꺾으시되 나머지 사랑의 손으로는 반드시 우리를 새롭게 세우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공의는 사랑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공의는 곧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절제한 인간처럼 두 손으로 우리를 쓰다듬으시지 않습니다. 사랑의 손으로 우리를 쓰다듬으시되, 공의의 손으론 자기교만 욕망 속으로 침몰하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은 공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곧 공의를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사랑 없는 정의란 무자비한 폭력에 지나지 않고 정의가 상실된 사랑이란 무책임한 방치에 불과하기에, 주님께서는 정의를 가능케 하는 힘인 사랑의 손을, 사랑하게 하는 능력인 공의의 손을 동시에 갖고 계십니다. 그분에겐 정의의 다른 모습이 사랑이오, 사랑의 다른 이름이 공의인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그 공의와 사랑의 손안에서 사울과 같던 우리의 옛 사람은 꺾어지고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손안에서 우리가 걷고 있는 다메섹 도상의 의미와 가치가 새로워졌습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믿는다면 우리 역시 두 손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정의와 사랑의 두 손을 말입니다. 세상의 불의를 향해 정의의 손을 내밀되 반드시 사랑의 손이 함께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때에만 우리의 정의가 산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손으로 이웃을 품되 그 손은 언제나 진리인 공의의 손과 겹쳐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미명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수 있고, 우리의 사랑이 상대를 타락시키는 마약이 아니라 참 생명의 묘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공의와 사랑의 두 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께로부터 얻은 새 삶에 대해 책임을 다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르브 강변의 뿌리 뽑힌 나무는 철저하게, 땅 속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그 자신의 책임입니다. 누구도 대신 그 책임을 져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된 삶을 뿌리뽑아 내시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책임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주어진 새로운 삶에 대한 책임은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몫이 된 것입니다.
바로 성화의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답게 거룩한 삶을 실천하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우리가 정의와 사랑의 두 손을 지니는 것으로 완수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두 손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공의와 사랑에 우리 삶의 뿌리를 박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다메섹을 향하고 있지만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다메섹은 그 자신이 사도행전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공의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바울은, 이번에는 그 자신이 공의와 사랑의 손을 지니고 다메섹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그의 삶은 사도행전이 되었습니다. 아니 그 순간부터 세계의 역사가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르게 뿌리를 내리지 않는 나무는 짐승의 변기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설령 그런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의 법칙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어둠에 짓눌린 세계의 역사는 또 다른 사도행전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의 두 손을 지닌 여러분의 삶으로 기록될 이 시대의 사도행전을 말입니다.-ⓗ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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