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그 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사람 낚는 어부" 계2:1~3, 마4:19

by 【고동엽】 2021. 12. 30.
 
처음 목록가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좇는다는 것은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각과 마음과 뜻이 달라지고

결과적으로 그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주님을 영접하기 이전에 비해서 얼마나 삶이 새로워졌습니까?

만약 새로워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또는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기쁨에 겨워서 새로운 삶을 살고

새로운 삶의 감격을 누구 못지않게 깊이 누렸는데

어느 샌가 내 삶이 옛날의 삶으로 회귀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요?

 

오늘 우리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토대로 본문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절 말씀입니다.

 

계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여기서 '일곱 금촛대'는 지금 터키 대륙 중부지역을 일컫는

2천년 전 이름으로 소위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일곱 금촛대'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별은, 그 한 교회, 한 교회를 지키는 사자,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 의하면 그 한 교회를 지키는 천사, 사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별을 당신의 장중(손바닥)에 붙잡고 계신 분 만 아니라

이 땅에 세워진 교회를 그냥 내팽겨쳐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언제든지 거니시면서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본문 내용은 그 일곱 개 교회 가운데

지금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 내용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촛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당신의 교회는 빛의 통로가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빛의 통로인 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중요하고 아름다우면

주님께서 그냥 촛대가 아니라 '금촛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힘은, 예배당의 크기나 헌금의 액수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힘은 얼마나 진리의 빛을 발하는가?

그것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에서만 나옵니다.

 

그때 교회는 금촛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몸담고 있는 내 교회가 촛대인가, 금촛대인가? .. 늘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이 내용은 아시아 7 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제국 수도인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서

로마제국 4대 도시였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일뿐만 아니라, 상업 문화 경제 중심지입니다.

게다가 고대사회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동서 각지에서 매일 그 아데미 신전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 참배객들에게 기념품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람들의 가게가 있겠지요.

그 사람들에게 밥을 파는 식당, 그 사람들 잠재워주는 숙박 업체가 있겠죠.

그러니까 에베소 사람들 전부 다가 직접 간접적으로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을 통해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 시민들의 풍요로움에 큰 역할을 차지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아데미신전 속에 있는 여자사제 1500명은 모두 합법적인 종교 매춘부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는 돈과 유흥과 쾌락이 넘쳐나는 도시인데

더욱이 이 에베소 한가운데는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황제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로마황제는 살아있는 신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경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데미 신전과 로마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고

돈과 쾌락과 유흥인 난무하는 에베소에서

황제와 우상의 길이 아니라, 예수의 길을 좇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얼마나 숭고한 사람들입니까!

 

그 숭고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계2:2~3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 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안다'는 동사가 2번 나왔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안다'는 동사가 중간에, 그리고 뒤에 나옵니다만,

 

헬라어 원문에는 '안다'는 동사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내가 안다'로 문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가 아신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안다'는 동사가 헬라어로 '에이도' 입니다.

에이도는 '본다' 즉 '내가 본다' *to perceive with the eyes, to see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도 내가 무엇을 하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만 여러분들이 잊지 않으시면

여러분들은 평생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걸 잊어버립니다.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십니다.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의 그 교인들을 다 보시고 알고 계십니다.

무엇을 아시는가?

 

첫째로 그들의 "행위"를 아십니다.

헬라 말로 에르곤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deed, doing, labour

 

에베소 교회 교인 너희들이 황제의 길과 우상의 길을 좇지 않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과 진리의 길을 좇은

너희들의 삶 전체, 그 전반적 행위를 내가 다 보고 알고 있다! .. 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수고"를 안다. 헬라어로 코포스

이 수고는 반드시 손과 발이 동원된 노동을 통한 수고를 의미합니다.

 

그냥 우리는 뭐 조금만 뭘 해도 '수고했다' 이렇게 얘기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손과 발이 동원된 노동이 아니구는 수고(코포스)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보시고

'얘들아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마태복음 4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이제부터 전도자로 삼겠다, 내 제자 삼겠다, 사도의 삶을 살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자, 사도, 당신의 제자를 주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 라고 표현하셨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역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하면, 누가 무엇을 낚든지 무언가를 낚는 사람은

낚는 이유가 <자기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여러분 전도자가, 목사가, 예수의 제자가

만약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된다면

그건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낚는 거예요.

교인이 많아지면 내일은 내가 유익을 보는 겁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일 경우에는요!

 

내가 전도 많이 하면, 내가 뭔가 득을 보는 겁니다.

그게 사람을 '낚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낚는' 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알리에이스 안드로폰' 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어부' fishers of men 이란 뜻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의 어부'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는 자기를 위해서 사람을 낚지만

'사람의 어부'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철학은 머리로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입으로 공기를 진동시켜서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전신의 세포를 움직이지 않으면

어부는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에게 '내가 지금 너희들을 전도자로 만드는데,

지금부터 너희들은 <사람의 어부>가 되어야 돼!

지금부터 너희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누군가 사람들을 위해서

너희들의 몸을 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돼!' 그게 전도자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수고를 에베소 교인들의 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 보셨다는 것입니다.

 

말로 하는지, 지식으로만 하는지,

남들 보는 앞에서만 하는지, 아니면 누가 보던 보지 않든

사람의 어부로 자기의 전신을, 손과 발을 사람 섬기는 도구로 쓰는지

주님께서 다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이름 때문에 맞아야 될

온갖 세상의 비바람, 풍상, 시련, 도전을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다 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이름 때문에 도전과 맞딱뜨려서 그 시련을 감수할 때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주저앉고 야합하고 타협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다 보고 계신다는 겁니다.

'네가 내 이름 때문에, 네가 어떤 고통을 감수하는지 내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 나 자신을 알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도전도 뚫고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기도하시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