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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순종의 역사 요20:1∼18

by 【고동엽】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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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순종의 역사 요20:1∼18

 

 

 

◑아리마대 요셉은 몰랐을 것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공동굴이나 자연동굴을 무덤으로 사용했습니다.

수의로 싸여진 죽은 사람의 시신은 동굴 속 의자 위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의 입구는 큰 돌로 막아 언제든 여닫을 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시체가 완전히 썩고 나면

사람들은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유골을 수습하여 유골함에 넣은 뒤,

무덤의 한쪽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나마 이런 가족 공동묘지가 없는 가난한 자들은

죽는 즉시 땅 속에 매장되어 버렸고, 흉악한 범죄자나 저주받은 자들의 시체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일반공동묘지’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장사된다는 것은

여간 부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의 경우에는, 시신이 그냥 땅 속에 매장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흉악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기에

기드론 골짜기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던져져야만 할 판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19:41~42.

 

예수님께서는 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빈민중의 빈민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장사된 일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아리마대의 거부 요셉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새 무덤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단지 자기에게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을 사랑했기에

그렇게 했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의 그와 같은 행동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1. 첫째로 아리마대 요셉 때문에, 이사야53:9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죽음)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53:9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의 새무덤을 주님께 드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땅속에 매장되거나 일반 공동묘지 속에 버려졌더라면

이사야의 예언은, 아니 구약성경은 거짓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2. 둘째, 아리마대 요셉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아니었더라면,

주님께서는 땅속에서 온몸에 흙을 뒤집어쓰신 채 일어 나셨거나,(땅 속 매장)

기드론 공동묘지로 부터 다른 시체의 썩은 물에 흠뻑 젖으신 채

부활하셨을 터인데,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셋째, 무엇보다도 아리마대 요셉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꼭두새벽처럼 주님의 무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시신이 비천한 자처럼 땅속에 매장되었더라면

어찌 막달라 마리아가 땅을 파헤치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릴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흉악한 범죄자들의 시체가 우글거리는 기드론 공동묘지라면,

어찌 그녀가 겁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을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완전 새 무덤에 안치되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목격했기에, 다시 말해 그 속에는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녀는 연약한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안았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몰랐을 것임 

아리마대 요셉이 사랑하는 주님께 자신의 새 무덤을 드릴 때

이와 같이 위대한 역사가 그곳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은 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은 상상치도 못할 위대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잘 개어져 놓여있던 수의 

 

그는 예수님의 머리를 감았던 천도 보았습니다. 그 천은 고운 베와 겹쳐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요20:7


 

안식 후 첫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는 한숨에 달려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 말에 놀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 왔을 때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수의―즉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쌓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요20:6~7

 

▲‘놓였다’ 와 ‘개켜 있더라’ - 부활의 증거물

‘놓였다’는 동사 kemai는 아무렇게나 놓아진 상태가 아니라

정돈되어 놓여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또 `개켜 있더라'는 동사 entuliss 는 마치 붕대를 감듯

정성을 다한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 버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의와 수건만 남아 있되,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기록한 요한 사도는 무엇을 강조하려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결코 도난당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장한 군인들이 서슬 퍼렇게 경비를 서고 있는 그 무덤에서

무슨 여유가 있다고 수의를 벗겨 정돈해 둔 뒤 시신만 훔쳐가겠습니까?

시간이 급한 만큼 수의가 입혀진 시신을 그대로 들고 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수의를 아무렇게나 버려놓고 도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채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와 수건이

무덤 속에 정성스럽게 개켜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무덤 속에서 부활하셨음을 웅변하는 말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아니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 천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을 정성스럽게 개켜놓아 두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귀중한 증거품이 되었습니다.

 

 

▲질서 - 부활의 증거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는 그 부활의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는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까?

질서 정연하게 개켜진 세마포와 수건이었습니다.

 

만약 그 무덤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무질서 하였더라면,

그것은 단지 무덤이었을 뿐이요,

예수님의 시신은 도난당했음이 분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 있는 질서―그것이야말로 부활의 증거였습니다.

 

(오늘도 은혜 받은 사람의 증거,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 질서가 있습니다.

자기 삶이 아무리 바빠도 정돈되어 있습니다. ‘정중동’입니다.

예를 들면, 잘 준비된 성가대는... 차분하고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덜렁대고 분주하다면... 내면과 외면이 모두 다 잘 준비되지 못한 겁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함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무질서하던 삶이, 생명의 질서를 되찾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함인지 아십니까?

이 생명의 영원한 질서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생명에서 오는 질서를 자기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하며 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이 질서를 생활화하고 매일 구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질서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 생명이 무질서 속에 빠져 있다면 설령 그의 육체가 호흡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죽은 자와 진배없는 것입니다.

 

<97.08.24.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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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정돈

 

이것저것 할 일로 가득 찼던 책상과 책장을 정리하고 있는 제게

동료 수녀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나보네요?”

“아! 예~”

 

왠지 제 영혼의 상태를 들킨 것만 같아 화들짝 놀랍니다.

그러고 보니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는

습관처럼 제 주위를 정리하곤 합니다.

더러는 소소한 주변정리로 끝나지만,

책장은 물론 서랍속의 소지품까지 몽땅 꺼내어놓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가며 대청소를 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인연으로 만났던 이들에게서 받은 명함,

수첩 귀퉁이에 급히 적어놓았던 연락처들,

감명 깊게 읽었던 책에서 베낀 글귀 한 줄,

책상 언저리에 붙여놓았던 메모지들….

여기저기에 정리되지 않고 쌓아두었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비수녀시절 지도수녀님께서는

수도생활의 기본은 정리정돈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영혼이 정리정돈 되어있지 않으면 영성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서요.

생활이 정리되어있지 않는 것은 영혼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는 것이죠.

 

일상을 잘 정돈하는 일은, 어쩌면 흐트러져있던 마음을 추슬러 가며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행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달의 한 번쯤은 바쁜 일 눈 딱 감고,

일상을 정돈하듯 내 내면의 일들도

그 분 앞에서 정돈하는 시간을 더불어 가져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펀 글)

 

[주제별 분류] 부활절 http://blog.daum.net/bible3/142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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