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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
글/이재철 목사
인생이란 반복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날이 밝습니다. 으레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
밥을 먹습니다. 어제와 같은 사무실 륵은 집안에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합니다. 점심식사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이 되면 어제 퇴근했던 집으로 귀가하여 동일한 잠자리에서 잠을 잡니다.
물론 내일 역시도 똑같은 하루가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일이 되면, 지난 주일과 같은 교회에서 같은 형식의 예배를 드리고,동일한 봉사를
되풀이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확실히 인생은 반복입니다. 여기에서 예외인 인생이 없습니다. 그
러나 거기에도 차이는 있게 마련입니다. 반복이긴 반복이되, 그 반복이 무엇을 위한, 무엇에 의
한, 무엇을 향한 반복이냐에 따라,그 과정과 결과는 확연하게 구별됩 니다.
23년 전, 한국 탐험대가 지구의 최극지인 북극을 정복한 적이 있었습니다. 1827년 영국의 월리
엄 페리가 처음으로 북극 도전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래, 163년 동안 65개 팀이 도전하였지만
성공한 예는 그때까지 17개 팀에 블과했습니다. 따라서 한국팀은 북극 도전에 성공한 열여덟 번
째 팀이었고,국가별로는 열한 번째였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위업이 아닐 수 없었습니
다 •
그런데 당시 한국 담험대 대장이었던 최종열 님은 후에, 자신이 북극점을 정복하던 순간의 감회
를 모 일간지에 게재한 수기를 통해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1明1년 5월 7일 새벽 1시 정각,내
가 지구존 제1의 극지인 북극점에 서는 순간,허무감 그리고 허탈감뿐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
에, 무엇을 얻기 우ᅵ해, 그 술한 어려웅을 겪으며 목숨까지 내던질 각오로, 지구의 꼭짓점을 향해
3년이란 긴 세월을 허비했던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북극을, 단지 걸어서 정복하기 위해서,3년 동안 밤낮으로 얼마나 피눈
물 나는 툰련을 반복했겠습니까? 그 반복의 경험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재산이요, 앞
으로 살아가는 동안 당사자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열여덟 번째로 북극을 정복하는 쾌거를 이루는 순간,허무감과 허탈감을 가
장 먼저 느꼈다는 그의 고백은, 오늘도 반복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합
니다. 목적이 성취되었다고 후회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큰 업적을 이루었다고 마냥 즐겁기
만 한 것도 아님니다. 오히려 남보다 더 큰 목적이나 업적을 달성할수록,그로 인해 더 큰 허무
감과 허탈감에 빠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학 2학년 때 연극에 줄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어로 하는 원어 연극이었기에 준비기간
이 1년이나 되었습니다. 대사를 몸에 밴 둣 외우는 기간이 약 8개월이었고, 나머지 기간엔 대사
와 몸동작을 함께 익혔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에야 연습을 할 수 있었으므로. 밤 12시면 통행
금지가 실시되던 당시 매일 밤, 통금 직전이 되어서야 귀가하였습니다. 그 1년 동안 연극 이외
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강행군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공연일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한국 최고의 연줄자로 인정받던 김정옥 교수님의 연줄로,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막이 오르기 직전이었습니다. 의상을 갈아입고 분장까지 마친 저는 다른
줄연자들과 함께,얼마나 많은 관객이 와 있는지 무대 안쪽에서 커튼 사이로 객석을 내다보며,
주체할 수 없는 통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대의 막은 올랐고,사틀에 걸친 6회 공연
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순식간에 스쳐 가는 바람과도 같았습니
다. 마지막 날 마지막회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막이 내려오는 순간, 갑자기 허탈감이 저를 엄습
하였습니다.
분장실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분장을 지울 때까지도 그 허탈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
러 분장이 지워질수록 허탈감은 더 증폭되었습니다. 고작 이 사틀을 위해 지난 1년 동안 그토
록 고생했단 말인가? 참으로 허전하였습니다. 그날 밤, 가슴에 한 아름 꽂다발을 안고 버스를
타러 남산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저는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열다섯 살 되던 해 겨울 밤. 갑작스런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난생 처음으
로 숙고해 보았다면, 그날 밤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한 두 번째 밤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인생의 무대 위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무대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반드
시 끝나고야 마는 한정된 무대입니다. 관객은 떠나고, 화러한 조명도 꺼지며, 막은 내리기 마련
입니다. 그때 허탈감에 치를 떨며 무대를 내러올 수도 있고, 비록 부족했을망정 자신의 소임 다
하였음을 감사하며 하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대 위에 있는 동안, 그 무대에서 무엇을, 무엇을 위해 반복했느냐에 의해 판가름 나
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라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도I,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온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성경 마태복음 16장 13~16절 말씀
본문은 시기적으로,3년에 걸친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무리에 돌입한 마지막 시점의 이야기입니
다 •
이제 주님께 남은 최후의 과업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
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는 정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변화산에
이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모습이 해같이 눈부시게 변형됨과 동시에, 하늘에서
내려온 두 사람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그리고 주님께서 그들
과 나누신 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다음 말씀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 성경 누가복음 9장 30~31절 말씀
하늘에서 내려온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나누신 대화의 내용은, 죄와
죽음에 빠진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제물 되어 돌아가시는 것 이외에
는,달리 방법이 없음을 재확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직후 주님께서는 갈릴리를 거쳐, 예루살
렘으로 향하는 십자가의 대장정에 나서셨습니다.
본문의 시점은 주님의 생애에서 그만큼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마지막 그 중요한 시점,북쪽 변
화산으로 향하시던 주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를 통과하시게 되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는
본래 이스라엘 최북방 헬몬 산 기슭 해발 345미터 지점에 위치한, 머리 위로 헬몬 산 정상의 만
년설이 올려다 보이는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
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로마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에 자신의 이름 '빌립'을 덧붙여. '가
이샤라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 명명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 속한 영토 내에는,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를 붙인 도시가 여럿 있었습니
다. 하지만 아무나,아무 도시에나 로마 황제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의 조건이 중족되어야만 했습니다.
첫째는 로마 황제의 위용에 걸맞는 규모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지중해 세계의 제1인자인 황제
의 이름을 아무 곳에나 붙인다면, 그것은 황제에 대한 모독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도
시의 중심이나 톡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반드시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자리잡고 있어야 했습
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명목상의 신이 아니라,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실질적인 신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봉왕 헤롯 빌립이 건설한 도시에 황제의 칭호가 붙었다는 것은,바로 이 두 조건이
중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가이샤라 빌립보는 한마디로,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그 황제의 도시에 지금 주님 일행이 나타났습니다. 황제의 도시 사람들에 비해,
갈릴리 빈민 줄신인 주님 일행의 행색은. 유행이나 세련과는 전혀 동떨어진, 마치 거지처럼 옹
색했을 것입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보다도 로마 황제 신전의 문지기가,될씬 더
값진 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처럼 초라한 모습의 주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 여기
고 있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황량한 벌판에서 던져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에서 던저진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추구하고
또 자랑하던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힘이었습니다. 권력,군사력,경제력이 절대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그 들은 도시나 건물
올 세울 때면 으레 웅장한 석재와 화려한 대리석을 동원하였습니다. 둘째, 지식이었습니다. 그들
은 자신들의 높은 학문을 자랑하기 위하여, 도시마다 대형 도서관을 건립하였고, 가정마다 서재
의 크기를 경쟁하였습니다. 셋째, 인간 육제의 아름다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가지는 울
론이요 집 안 곳곳에,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여인의 나신상과 우람한 근육의 남자 조각상을 즐
비하게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로마의 도시 장관을 중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웅장한 황
제의 도시를 배경으로 주님께서,세상 사람들이 당신 자신을 누구로 여기고 있는지를 물으셨습
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세론. 즉 세례 요한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고,엘리야라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또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분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음을 그대로 말씀드
렸습니다. 이것은 언뜻 주님에 대한 칭송의 여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이 황제의 도시임을 감안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그처럼 초라한 행색의 예수님이라면, 로마 활제처럼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
는 신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몰골이라면, 고작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을 이미 거져
간 유대 선지자 이상일 수는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주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친히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주저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도I,주는 그
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성경 마태복움 16장 161 말씀 그리스어 원
문에는 '주'란 말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
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심산계곡에서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신전이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를 배경으로, 주님께 드러진 고백임이 전제될 때에만, 이
고백의 깊고도 참된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먼저,당신은 그리스도 즉 구원자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권력의 힘. 경제력의 힘으로
인간에게 풍요로움을 안겨다 주고,학문적 지식을 고양시켜 주며, 육체의 아륨다웅을 누리게 해
주는,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궁이 황금보좌에 앉아 있는 로마 황제
가 아닌, 비록 걸인 같은 을골 일망정 •나사렛 예수' 바로 당신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시
라는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계속하여,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의 아들이란 또 무슨 말일까요? 개의 새끼는 언제나 개입니다. 부자의 대저택에서 사랑보다 더
비싼 용식을 먹으며 호강한다고 해서, 그 개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논리로 사람의
자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빈민존에서 영양실조로 죽어 간다 해도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개의 새끼는 항상 개요, 사람의 자식은 언제나 사람임이 당연하다면. 하나님의 이들 역시 용당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고, 이 고백의 배경은 황
제의 도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고백의 참 의미를 건져 을틸 수 있습니다. 즉, 저 웅
장한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콜 받고 있는 로마의 황제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권을 장악하
고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즉 바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고백을 받으시는 주님께서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십니까? 황제의 신전이 장엄하게
버티고 있는,용장하고 화러한 황제의 도시 앞에서,갈릴리 빈민의 모습으로 서 계십니다. 그 W
제의 도시와 주님의 모습을 비교해 그러 블수록, 베드로의 이 고백이 얼마나 심오한 고백인지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활제의 논리콜 따르지 않고,주님의 논리콜 따
르겠다는 고백입니다.
경쟁자콜 가차없이 짓밟고 최고 최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대주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
조건 목5콜 달성해야 한다는 성공제일주의,인간의 인격마저 물질로 가능하는 할금만눙주의로
대변되는 황제의 논리, 즉 매머니즘의 경제논리콜 배격하고,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님의 논리. 그 영원한 논리콜 따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다시말해,로마 제국이 추구하고 자랑
하는 세상의 링, 인간의 지식, 육체의 아륨다웅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서 친히 보여 주신 진리의 말씀을 종아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이것이 황제의 도시에서 있었던 일임을 상기한다면, 베드로의 고백이야1말로 인간이 주님을 향
해 드릴 수 있는 고백 중에, 가장 위대한 고백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드로를 다융
과 같이 극찬하신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도I, 바요나 시온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콜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성경 마태복융 16장 17
절 말씀
그렇지 않습니까?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종을 입는 복을 받지 않고서야,어찌 확실하게 눈에 보
이는 황제의 논리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니 오히러 초라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주님의 논리
콜 더 귀히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콜 '바요나 시온’이라고 부르셨습니
다. '바'는 아람어로서 •아들'을. •요나•는 베드로의 아버지인 •요하나■콜,그리고 '시몬'은 베드로
의 옛 히브리식 이륨을 가리집니다. 하나님의 은종이 아니고서는, 부모콜 포함하여 그 어떤 인
간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는 은혜임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가지 사실을 천명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콜 세우리 니, 융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콜 네게 주리니,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
이든지 둘면,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성경 마태복용 내장 18-19® ■말씀
첫째,반석(베드로란 이름의 뜻이 '반석'입니다)과도 같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
콜 친히 세우시겠다고 천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요,그렇기에 주님 외에 인간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일 수 없습
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오직 주님의 영원한 논리콜 증아 살아가
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 사랑들로부터 썩었노라 지탄받고 있다면,그
것은 제도나 건물이 낡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속의 사람들이 영원한 논리가 아닌, 황제의 논
리에 침몰해 있융을 뜻하기 때운입니다.
들째,주님의 교회콜 융부의 권세,즉 사망의 권세, 사단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할 것임을 전
명하셨습니다.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영원한 논리콜 추구하는 자들 가운데 영원하신 주
님께서 함께하고 계실 것인즉, 어찌 죽융의 권세 혹은 사단의 권세가 득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분열과 다품의 소용들이에 휘말려 있다면,그 역시 그 속의 사
람들이 II제의 논리콜 신봉하고 있융입니다. 황제의 논리는 무자비한 경쟁을 초래하고, 그것은
필히 대립과 반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고 푸는 대로, 하늘에서도 그대로 될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한마디
로 응답해 주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또한 당연한 사필귀정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
고 주님의 영원한 논리콜 따라 사는 자들에게, 영원하신 주님께서 용답해 주심은 너무나도 자명
한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외형은 엄청나게 비대해졌융에도 블구하고, 세상을 변화시길 생명
력도 감화력도 상실하였다면, 교회가 사회에 새 생명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면,그 또한
그 속의 사랑들이 함제의 논리콜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까닭입니다.
11제의 논리는 반드시 폐허로 결말나게 마련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오늘날 로마 제국은
오직 폐허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로마 황제의 무명과도 같은 그 허무하고 II량한 폐허 말입니
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많고 많은 도시와 마을 중에서, 왜 하필이면 II제의 도
시인 가이사라 빌립보콜 택하시어,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콜 누구라 하느냐?"라는 존재적 잘문
을 던지셨는지 그 연유콜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을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콜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영원한 논리콜 추구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향한 참된 믿융이 결코, 시작될 수 없융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졸은님,잊지
마십시오! 영원한 논리콜 종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참된 크리스천이 되는 방도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반드시 황량한 폐허로 끝나 버일,
허망한 황제의 논리에 빠저 있융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줄처: 이재철 목사 저서 •내게 있는 것'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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