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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용, 교통

by 【고동엽】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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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용, 교통 행10:14~15 11.12.18.설교녹취

 

코이노니아(교통)를 나누려면, 코이노스(통용, 더럼힘)를 감수해야 합니다...

 

 

◑1. 코이노스

 

▲1. common / 통용, 공동의 라는 뜻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초대교회는 많이 가졌거나, 혹은 적게 가졌거나 따지지 않고,

모든 교인들이 서로 자신이 지닌 것을 통용했다.

 

우리말 ‘통용’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스’는 ‘공동의 common’ 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 나눌 수 있게끔,

자신이 지닌 것들을, 공동의(코이노스) 상태에 두었다.

 

▲2. 부정한 이라는 뜻 unclean *不淨

같은 말 ‘코이노스’가

‘부정한 unclean’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막7: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주1)

 

행10:14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15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사도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부정한 unclean 짐승을 먹어야 했다.

그것은 이방인을 수용하고, 함께 교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리하면,

행4:32 등에서 ‘공동의’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코이노스가

행10:14 등에서는 ‘더러운’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헬라어 코이노스가

공동의 라는 의미와

더러운 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나 소중한 메시지인지!

 

만약에 누군가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물건을 자기 혼자만 사용하면,

그 물건을 보다 깨끗하게 간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물건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내어놓으면,

그 물건은 쉬 더러워진다.

 

(헬라어 코이노스가 ‘공동의’ 라는 의미와

더러운’의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은,

헬라어가 얼마나 논리적인 언어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 준다.)

 

 

◑2. 코이노니아

 

▲교통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코이노스’와 관련된 단어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이노니아’ 이다.

 

‘코이노니아’를 보통 친교, 혹은 교제로 번역한다.

그런데 그 원래 뜻은 피상적인 친교/교제/사귐을 의미하지 않는다.

속마음까지 터놓고, 나누는 그런 깊은 교제/사귐을 의미한다.

 

그래서 고후13:13에서 ‘코이노니아’를 ‘교통’으로 번역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의) ‘교제’라는 말을 써도 될 것을, 굳이 ‘교통’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것은,

단순한 피상적이고 외적인 사귐, 교제를 뛰어넘어

생각과 뜻과 마음까지 깊이 통하는 깊은 사귐 (즉, 교통)임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코이노니아코이노스에서 파생된 말이다.

교통을 뜻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와 연관된 단어가

공동의 라는 의미와 더러운의 뜻을 동시에 지닌 ‘코이노스’ 라는 것

이것은 얼마나 귀한 메시지인가?

 

내가 누군가와 ‘교통’하는 (코이노니아)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공동의’(코이노스) 삶을 추구하는 것이요,

동시에 그것은 내 인생에 그의 더러움 (unclean, 코이노스)를 묻혀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

*코이노스에 '공동의'와 '더러운'의 뜻이 둘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물건에, 다른 사람의 손때가 묻는 것(코이노스)을 꺼려하는 사람은,

이 세상 그 누구와도 자기 물건을 통용(코이노스)할 수 없는 사람은,

 

그 누구와도 교통(코이노니아)할 수 없다.

 

따라서 교통을 뜻하는 ‘코이노니아’ 가

더러운 공동의 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 ‘코이노스’에서 파생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초라하기 짝이 없는 초대교회가,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인들이,

누군가와 교통하는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자기를 기꺼이 더럽히는 ‘코이노스’의 삶을 주저하지 않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친히 역사하신 결과였다.

 

 

◑적용

 

▲룻기에 보면

과부가 된 이방 여인 룻이, 자기 민족을 등지면서까지

역시 과부인 시모 나오미를 봉양했고,

젊은 며느리 룻의 효심에 감동 받은 시모 나오미의 주선으로

개가(재혼)한 룻은, 오벳이란 아들을 얻었다.

 

전혀 대수로운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 나라에서든지 들을 수 있는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흔한 이야기는, 보기 드문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즉 시모의 주선으로 개가한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룻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시모 나오미를 봉양하지 않았던들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다윗은, 룻의 피를 이어받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한 다윗이

룻의 증손자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은,

룻의 삶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축복)하신 결과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룻은,

애초 시모의 권유에 따라서 얼마든지 친정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룻은,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나이 든 시모를 봉양하는 삶을 선택했다.

 

젊은 룻이, 나이 든 나오미와 교통하는 ‘코이노니아’의 삶을 결단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젊은 룻이,

자기 인생이 나이 든 시모의 인생 때가 묻는 것을,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늙은 여인과 ‘교통’하는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또는 공동의) ‘코이노스’의 삶을 기꺼이 실천한 룻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다윗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코이노니아(깊은 교제)를 위해, 코이노스(더러움, 섞임)를 사신 예수님

이상 살펴본 것처럼, 룻의 경우에서나 초대교회의 경우에서나

왜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와 교통하는 ‘코이노니아’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자신을 ‘코이노스’ 시키는(더럽히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또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그 시대 속에 이루어 가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도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해 주시는 코이노니아의 하나님이시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요, 십자가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당신 자신을 코이노스 시키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세상과 당신을 격리시켜

고고한 신성의 삶을 사신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불쌍하고 비천한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사시면서,

당신 자신을 늘 코이노스 시키셔야만 하셨다.

 

가난한 빈민들과 더불어, 불품 없는 음식을 함께 나누시고,

온갖 병자들의 환부를 당신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느라고

예수님의 손은 언제나 더러운 코이노스의 손이었다.

 

그리고 끝내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놓으심으로써,

당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당신의 사지백체를 온통 코이노스 시키셨다.

 

그런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코이노스 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코이노스의 주님이시기에,

코이노스의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감히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

 

▲코이노니아(깊은 교제)를 위해, 코이노스(더러움, 섞임)를 살아야 하는 성도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기에

누군가와 교통하는 코이노니아를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코이노스 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고,

또 그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에, 그리스도인을 다시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와 코이노니아를 위해

당신 자신을 코이노스 시켜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받아,

그 누군가와 교통하는 코이노니아를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코이노스(섞임, 더러움) 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

 

주1) 그 외 행10:28, 11:8 구절이 ‘부정한’ 뜻으로 코이노스가 사용되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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