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십니까?
누가복음17:11-19
해마다 감사의 계절 11월이 돌아오면 저는 늘 중3 때의 추수 감사절이 아련한 기억 속에 떠오르곤 합니다. 그 시절 교회에서는 한창 '추수 감사절'행사로 분주했었고 그 행사의 하나로 중등부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 쓰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제 기억에 중등부와 고등부를 총망라한 꽤 큰 대회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마지못해 감사의 편지를 쓰느라 한 시간 내내 끙끙거렸습니다. '내게 무슨 감사의 제목이 있을까?' 생각하며 막상 쓰려고 하니 잘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거의 한시간을 지루하게 보내던 저는 끝나기 바로 몇 분전 이렇게 2-3줄 정도의 짧은 글을 겨우 쓰고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생님이 쓰라고 해서 억지로 감사의 편지를 쓰려고 하니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잘 써지지가 않네요. 죄송합니다. 어쨋든 지금까지 저를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한 철부지 학생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성의 없이 써내려 간 그야말로 내용 없는 편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철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다음주일에 이 대회의 시상식이 열렸는데요, 제 친구 영찬이가 영예의 대상을 받았습니다. 예배 후 시상식 자리에서 대상을 받은 영찬이가 자기가 쓴 감사의 편지를 발표하는데요,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 친구의 편지가 생생한 것은 어린 나이에 받았던 충격이 가히 컸었기 때문입니다. 영찬이의 편지는 그저 성의 없이 몇 자 적고 끝내버린 저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써 내려간 그야말로 완벽한 감사편지의 원형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병원에 가면 몸이 불편한 사람도 많은데 제게 이렇게 건강한 몸을 주셔서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고아원에 가면 부모 없는 아이들도 많은데 제게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비록 아버지가 교회를 싫어해서 제가 교회 갔다 오기만 하면 매를 드시지만 그래도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에 비하면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또 세상에 굶어 죽어 가는 아이들도 많은데 날마다 한끼도 거르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약 1장 반 정도의 편지를 정성껏 읽어 내려가는 영찬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한없이 부끄러워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당연시되었던 환경과 조건들이 그 친구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뼈에 사무치도록 감사한 기도의 제목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매일 아침이면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에서 독실한 부모님과 함께 살며 누렸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인 양 감사치도 않았던 저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낯이 뜨거워지곤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에 보면 마치 중학교 시절 철없던 저와 같이 예수님께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감사하지 않았던 9명의 유대인과 내 친구 영찬이 처럼 유대사회의 뒤안길에서 늘 소외 받은 자로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받은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한 명의 사마리아인이 매우 대조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열 문둥병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귀한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시면서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접경을 지나게 되었는데 길에서 우연히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 문둥병자들은 일반 정상인들과는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매우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도 그들은 정상인들과는 적어도 100보를 유지해서 걸어야 하고 혹 정상인들이 모르고 그들 곁에 왔을 때는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며 그들의 위치를 알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가까이 하지 못하고 멀리서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들이었습니다. 오늘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을 품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긍휼히 여기소서'란 부르짖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그 중심에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렘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사58:9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하리라"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참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부르짖을 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대로 우리의 기도에 귀기울이시고 작은 신음에도 기꺼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시며 역사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구체적인 응답의 현장이 오늘 본문 눅17장에 자세히 소개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고 10명의 문둥병환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도중에 깨끗이 나았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사람 한사람을 붙잡고 안수기도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깨끗함을 받으라' 선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도중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셨는데 그들이 그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순종한 결과 결국 자신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치유와 병 고침 그리고 기적의 현장에서는 항상 당사자들의 믿음을 근거로 하였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각색 병든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한결같이 이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정녕 네가 믿느냐?''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그중에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요11장입니다. 거기에 보면 죽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슬피 울고 있던 마르다에게 우리 주님이 친히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한 여인을 향하여 결국 이 본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는, 믿는 자는, 믿느냐? 네가 믿으면" 마침내 마르다가 이 믿음을 회복했을 때 죽은 오라비 나사로를 살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들 역시 우리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고 외칠 때 주님께서는 그 중심에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히11:6에"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들 처럼 믿음으로 주님께 담대히 나가 은혜를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이 14절까지 '믿음'이란 주제로 한 단락을 엮어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그런데요, 주님께서는 계속되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믿음과 순종으로 은혜를 체험한 이후에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한가지를 더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던 열 명의 문둥병자가 모두 고침을 받았는데 그중 아홉은 주님께 감사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러 갔고 단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홉은 스스로 의롭게 여겼던 유대인들이었고 유일한 감사의 사람은 그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 당하였던 사마리아인이란 사실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비록 유대인들에게 소외를 받고 왕따를 당하였지만 우리 예수님을 감동시킴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사례할 때에 약간의 위로는 받으셨지만 그 나머지 아홉명의 유대인에 관하여는 여전히 아쉬움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서도"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자가 없느냐?" 다시 확인하시면서 재차 묻고 계십니다. 참으로 감사를 잃어버린 세대를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고 계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 실상 그 아홉명의 유대인의 모습은 오늘날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지만 그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여 살고 있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자화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요, 구약에 보니까 마치 이 아홉명의 유대인들처럼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르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왕상9장에 나오는 히람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히람은 솔로몬이 건축할 당시 솔로몬을 도와 성전에 쓸 재료로 백향목과 잣나무 그리고 수많은 금을 제공하였던 두로의 왕입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이 끝나자 그의 은혜가 하도 고마워 감사의 표시로 갈릴리 땅의 성읍 20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성읍 이십이라 하면 결코 작은 영역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람은 결코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상9:12이하에 보니까 히람은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이 눈에 들지 아니 하여 그 땅 이름을 '가불'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가불'이란 "쓸모 없이 버려진 땅"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어떤 사람인데 아무 쓸모 없이 버려진 땅을 주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람은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은혜로 준 그 땅을 '가불'이라 하여 격하시켜 버리고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이 몸 찢고 피 흘려 죽으시사 그 피 뭍은 손으로 안겨주신 고귀한 은혜를 아무 쓸모 없는 것처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버린 현대판 히람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솔로몬의 호의를 무시하여버린 저 두로 왕 히람 처럼, 또 감사를 망각한 채 오로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미련 없이 주님을 떠나버린 배은망덕한 9명의 유대인들처럼 그렇게, 그렇게 우리 주님께 날마다 배반의 상처를 안겨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잘 아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섬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아주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리고 어려서 부터 꿈을 묻는 어른들에게 자신은 커서 꼭 목사님이 되겠다고 당당히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친구의 가정은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생선을 파시면서 힘겹게 아들들을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그런데요, 그 친구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국민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정 환경 조사서를 작성해 오라고 할 때 노동판을 전전하시며 막노동을 하시던 아버지와 시장에서 행상을 하시며 생선을 파시던 어머니의 직업이 너무 부끄러워 부모 의 직업란을 쓸 때 고민하다 결국 거짓으로 고상한 직업을 바꿔 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 어느 추운 겨울날 소년이 당시 교회 밑에 위치한 시장을 우연히 지나게 되었는데 친구들과 함께 지나가다 갑자기 저 만치서 생선을 파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자 너무나 부끄러워 혹시 친구들이 자기 어머니를 알아볼까 하여 다른 길로 빙 돌아서 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한때나마 부모님을 부끄러워 하였던 자신이 한 없이 죄스럽게 부모님께 큰 불효를 저지른 것만 같다고 안타까워 합니다. 그런데요, 그의 어머니는 이렇듯 넉넉치 못한 살림이셨지만 늘 기쁨으로 사셨기에 시장 안에서도 별명이 '교회 아줌마'로 통할만큼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오신 귀한 어르신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으로 점철되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속에서 그리고 가난이 사무칠 만큼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6-70년대의 보릿고개를 겪으면서도 자식들에게 만큼은 자신이 경험한 가난을 결코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생을 감내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남 1녀의 형제들을 훌륭하게 다 키우셨습니다.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내시면서 교회의 안수집사인 아버지와 권사이신 어머니는 아침이면 자녀들을 불러모아 놓고 늘상 가정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둘러앉은 자녀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축복 기도해 주셨습니다. 현재 60대 중반의 할머니가 되신 친구의 어머니는 그동안 희생하신 대가로 극심한 당뇨에 걸려 고생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분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이면 교회로 달려가서 다 장성한 5형제와 손자 손녀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눈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기도가 지금까지 있었기에 성장하여 다 자란 친구는 지금 이 시간 이렇게 영락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이 아름다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들어서 제가 맡은 교구에서 장례를 많이 치루고 있는데요, 특별히 연세 드신 어르신들을 장례를 치룰 때마다 그 영정 사진에 저의 부모님 얼굴이 자꾸 오버 랩 되면서 부모님의 얼굴들이 어른거릴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 여름에 휴가를 가서 아버님을 오랜만에 뵈었는데 내년에 칠순을 바라보시는 아버님께서 저에게 조그만 증명사진 하나를 주시면서 당신이 돌아가시면 이 사진으로 영정사진 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하나님이 우리 부모님을 부르실 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지 않는가 생각이 들면서 살아 계시는 동안 지난날 수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해 드리며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해 보곤 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고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을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제 할 수 만 있으면 부모님의 상처 난 몸과 마음에 이제는 '감사'란 이름의 아교풀과 '사랑'이란 이름의 시멘트로 정성껏 발라서 메워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부모님께 자식키운 보람을 안겨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목사 이전에 자식된 도리로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일찍이 사도 바울은 롬1장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라고 말합니다. 또 딤전3장에서도 말세에 나타날 징조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2절에 보시면"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이 감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부모에게 대한 감사, 스승에 대한 감사 등등. 마땅히 감사해야 할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는 세대가 바로 지금 우리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대표적인 감사의 시 100편에 보면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신약의 사도 바울은 살전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엡5장에서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누추하고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자, 한번 따라 합시다.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그렇습니다. 감사해야합니다. 그 이유는 시50편의 말씀처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시50:23)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인처럼 늘 주님 안에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결코 잊지 않음으로 참으로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매월 받아보는 '낮은 울타리'란 기독교 잡지에 실렸던 감사의 기도문을 여러분께 한번 읽어 드리면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 제목: 제가 징징 울거들랑 >
오늘 버스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아주 명랑해 보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질투를 느끼며
나도 그녀처럼 미인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하차하려고 할 때 자세히 보니 지팡이를 짚고 문 앞까지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소아 마비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내 옆을 지나며 예쁜 미소를 지었을 때,/
"오 하나님,/ 제가 징징 우는 소리를 내거들랑 저를 용서해 주소서/
저는 멀쩡한 두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온 세상이 저의 것입니다."
사탕을 좀 사려고 가게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용모가 아주 단정한 청년이 그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상냥하던 지 나는 그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내게 "당신처럼 친절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다니 정말 기분 좋은 일이군요,/
당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쯤 보고 싶은데 안타깝네요,/
저는 보시다시피 앞을 보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 하나님,/ 제가 징징 우는 소리를 내거들랑 저를 용서해 주소서/
저는 두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모두 저의 것입니다."
길을 좀 걸어 내려가다 보니 파아란 눈빛을 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서서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좋을 지 모르는 아이처럼./
나는 잠시 멈추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애야, 너 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지 않니?"/
그 아이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앞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그 아이가 듣지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오 하나님,/ 제가 징징 우는 소리를 내거들랑 저를 용서해 주소서./
저는 두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저의 것입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두 다리와/ 이글대는 태양 빛을 볼 수 있는 두 눈 과/ 꼭 알아야 할 것을 들을 수 있는 두 귀를 가진 제가 징징 우는 소리 를 내거들랑/ 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소서./ 저는 정말 축복 받은 자 입니다./ 온 세상이 저의 것이니까요.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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