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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죽음 / 마 14:1-12

by 【고동엽】 2021. 12. 25.

세례요한의 죽음

마태복음 14:1-12

 

상식의 허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중에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상식의 허실이 우리의 신앙 속에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신앙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의 허실 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무조건 위로의 하나님이라고만 알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신 것이 맞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조건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는 정자나무 같아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큰 뜻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을 통하여 나름대로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교회는 정자나무 같은 교회가 아니라 유격훈련장과 같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히 쉬게 해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를 잠시도 가만있게 하지 않으시고 강하게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데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쉼과 생명입니다. 그래야만 정말 쉼을 얻을 수 있고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뇨병 환자입니다. 꽤 오랫동안 앓아 왔지만 식사 후 30분씩만 걷는다면 아마 별 큰 탈없이 잘 이겨낼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식사를 하고 나면 한숨 자고 싶지 걷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하고 난 후 온 몸이 노곤할 때 쉬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한시간 정도 열심히 걷고 내려오면 오히려 가뿐하고 상쾌해 집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볼 때 당뇨병 환자와 같습니다. 잘못 관리하면 온갖 합병증으로 비참해 질 수 있는 당뇨병 환자와 같습니다. 당뇨병 환자와 같은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 쉬고 싶습니다. 눞고 싶습니다. 한 숨 편히 자고 싶습니다. 그럴 마음과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왔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쉬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산으로 내 모십니다. 때로는 몽둥이를 들고 때려서 산으로 쫓으십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고 그래야만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에 은혜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제 설교에 은혜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대부분 틀렸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왔는데 밤낮 율법적인 설교만 하기 때문에 쉽게 말해 혹 떼러 왔다가 혹 하나 더 붙이고 무거운 마음으로 교회 문을 나서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틀린 말씀입니다.

 

 

 

혹을 떼려면 혹을 붙여야만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훈련을 할 때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면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가벼워집니다. 하나님은 혹을 떼러 온 당신의 자녀들에게 혹을 붙여주십니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에게 모래주머니를 달아 주는 것과 같은 이치와 원리입니다. 그렇게 훈련을 받으면 전에 달고 있었던 혹이 혹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이 힘들고 어려우세요? 그럴수록 정자나무로 가지 마시고 유격훈련장으로 가세요. 힘이 들수록 힘을 내세요. 당하고만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세요. 어차피 힘든 인생이라면 쓸데없는 일에 힘 뺏기지 말고 옳은 일, 귀한 일, 좋은 일을 하는데 힘을 쓰세요. 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쓸데없이 개죽음 당하지 말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처럼 의로운 일에 용기 있게 죽으세요. 저는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참 역설적입니다. 살려면 죽어야 하고 쉬려면 멍에를 매야만 합니다. 살려고 하면 죽게 되고 무조건 쉬려고 멍에를 벗으면 오히려 삶이 무거워지는 법이랍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전에 나아온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오늘 주시는 말씀은 세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살겠다고 하나님 전에 나아온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죽음입니다. 세례요한처럼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좀 쉬고 위로를 받겠다고 나아온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례요한과 같이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죽었고 헤롯은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고난을 받았으며 결국에는 억울하게 목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 어떤 고난도 없었습니다. 세례요한과 헤롯의 일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악인은 오히려 형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으로 불공평해 보입니다. 어떤 때는 참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을까?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단견(短見)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라면, 이 땅에서 사는 것만이 우리의 삶의 전부라면 그와 같은 생각도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생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세상과 시간은 믿지 않는 사람과 다릅니다. 때문에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가 믿지 않는 사람과 달아야만 합니다.

 

 

 

과연 세례요한은 죽었고 헤롯은 살았습니까? 영생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례요한은 살았고 헤롯은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성공했고 헤롯은 망했습니다. 세례요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었지만 헤롯은 그의 이름과 수치스러운 삶이 성경에까지 기록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영생을 믿는 사람이라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공격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 왜 죽음이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세례요한이라고 왜 광야에서의 생활이 피곤치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영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제가 그와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가난의 고난을 받으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물론 그것이 너무 심하신 분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무조건 하나님과 사람의 도움을 받기 이전에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자신 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찾아 다른 사람의 가난과 한번 싸워 보시면 어떨까요?

 

 

 

적극적으로 이삭줍기 헌금도 내시고 이웃사랑회 같은 모임에도 참여하셔서 돈이 안되면 몸으로라도 참여하시면 어떨까요? 가만있어도 가난 할 것이라면, 그냥 앉아서 당하지만 말고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가난해 지는 것이 어떨까요? 그런 정신으로 살다보면 가난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저런 일로 고통을 당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고통을 선택하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어차피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라면 그것을 벗을 생각만 하지 말고,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가 오히려 짐을 선택하면 어떨까요?

 

 

 

이왕에 당할 고통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를 행하다가 고통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왕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짐을 지는 것이 어떨까요?

 

 

 

백화점을 운영하시는 장로님 한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크게 성공을 하신 분이시지만 한 때 재정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부도의 위험 속에서 정말 피가 마르는 하루하루를 보내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의 특기는 헌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나 구제를 위하여 헌금할 일이 생기면 현금이 없으니 어음으로 헌금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지나친 것이 아니냐 말하면 자기 사업을 위해서는 어음을 끊으면서 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어음을 끊으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또 그 어음을 막기 위하여 피 마르는 고통을 당하곤 하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어차피 피 마르는 고통을 당할 바에는 자기 사업만을 위하여 그 고통 당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고통 당할 바에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고통 당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그 장로님은 성공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큰 성공을 하셨습니다.

 

 

 

힘들고 지치신 분들 계십니까? 눕지 마세요. 쉬지 마세요. 위로 받으려고 기대하지 마세요. 일어나세요. 짐을 지세요. 멍에를 메세요. 이왕 죽을 목숨 주를 위하여 일하다가 죽고, 이왕 힘든 세상 주를 위하여 힘을 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할 일 많습니다. 근사한 일 많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가볍지도 않지만 죽어도 좋고 힘들어도 정말 좋은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쓸데도 없는 일에 치여 삽니까? 수고와 무거운 짐에 쫓겨다니지 말고 우리가 오히려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을 좇아 다닙시다.

 

 

 

저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교회개혁을 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건강한 교회 운동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청소년과 청년들 전도집회를 하려고 합니다. 올 한해 동안 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내년에는 최소한 국내집회도 네 다섯 곳 정도 할 예정이고 미국 집회도 그 정도 할 예정입니다. 돈 정도가 아니라 피를 쏟는 심정으로 헌신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훌륭한 기독인재를 양성하는 장학사업도 본격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 모든 일이 나의 귀한 생명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와 같은 일을 위하여 헌금하는 정도가 아닌 헌신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관심이 있으시면 함께 헌신하시면 어떨까요?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제가 좋아해서 가끔 설교 시간에 인용하는 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함석헌 선생의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고 하는 시입니다.

 

 

 

만리 길 떠나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라 할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사람은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하지만 그와 함께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없는 사람 불행한 사람입니다. 실패한 인생입니다.

 

 

 

죽으면 가지고 가지도 못할 재물 쓰지도 못하고 아끼기만 하다가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하여 물려주지만 그것이 도리어 화가 되어 자식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부패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죽음을 두려워하여 비겁하게 살려고만 하다가 정작 죽을 자리 찾지 못해 의롭고 가치 있는 죽음 죽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이 세상만이 전부인 줄 알고 어리석게 그리고 악하게 헤롯처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의롭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도전하려고 하지 않고 나약한 환자처럼 드러누우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졸면 죽습니다. 누우면 죽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여러분의 인생에 도전하세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세례요한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과연 죽은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세례요한이 안 되 보이십니까? 불쌍해 보이십니까? 불행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이 부러우시다는 것입니까? 아무렇게 살아도 그냥 잘 먹고 편히만 살면 된다는 것입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저도 인간적으로 헤롯 만큼은 몰라도 헤롯과 같은 식으로 제법 편히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을 헤롯에 걸지 않겠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죽는 한이 있어도 저는 제 인생을 세례요한에 걸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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