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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성령

엡 4:1-6 성령으로 하나되는 교회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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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하나되는 교회

에베소서 4:1-6

 

설교방송 (설교전문)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 이전 모든 사람의 언어는 하나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온 지면으로 흩으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3장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 저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난 현상은 방언이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라는 말씀을 보면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마음입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마음이 통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은 말과 마음이 통하지 않아 온 지면으로 흩어졌지만 오순절 사건 이후 사람들은 말과 마음이 통하여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천국의 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여 함께 떡을 떼면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많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구원 얻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값진 진주와 같아서 어떤 것을 팔아서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잠언 17장 1절에도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먹으며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며 불편한 일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나아가 가난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음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화목하게 산다면 그래도 얼마든지 행복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무리 생활이 넉넉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산다고 하여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평생을 다투며 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행복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직장과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결혼을 할 때 하나님께 '말 통하는 여자하고 살게 해주십시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의 그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말 통하는 사람과 한 평생 가정을 이루어 산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기도에 덤을 더 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녀들과 말이 통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말이 통하는 것도 축복인데 자녀들하고도 말이 통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복이 끝까지 저를 떠나지 않기를 기대하고 소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한 가지 기도를 더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말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게 해 주십시요'라는 기도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교회는 가정만큼이나 소중한 곳입니다. 말과 마음이 서로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고집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고 그것을 주장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끌고라도 가곤 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일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피곤함이 느껴질 때마다 함께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 무릎을 치면서 기쁜 마음으로 목회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면서 기대하는 것 중의 하나는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기쁨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여기서 높은 뜻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제 뜻을 삼고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뜻으로 여러분의 뜻을 삼으면 자연스럽게 여러분과 저의 뜻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같은 뜻을 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소원을 가지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함께 교회를 섬겨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섬기면서 그와 같은 복을 받도록 우리 모두 욕심을 가지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날마다의 기도 속에 이 기도를 빠트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기도만으로는 안 됩니다. 기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욕심을 버리는 일이요 둘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자기와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 까지 인간의 언어는 하나이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면서부터 말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죄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가지고 살면서 서로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복을 받으려고 하면 먼저 내 마음속에 있는 죄와 욕심을 먼저 버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욕심을 버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죄와 욕심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신이 살아가는 가정과 세상과 교회를 천국과 같은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비법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심을 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다 나은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욕심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의로운 욕심(義慾)이라고 부릅니다. 보다 나은 가치 즉 義를 발견하고 그것에 욕심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보다 낮은 가치 즉 利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전에 욕심을 부리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팔아 그 밭을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긍정적인 어법으로 바꾸면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땅에 속한 모든 욕심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이 땅에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땅의 욕심을 버리려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보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라고 하면서도 땅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을 기분으로 받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땅의 욕심을 버릴 수 있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그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생활하게 된다면 그곳이 곧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받는 은사와 축복이 많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말과 마음이 통하는 관계의 축복을 받으려면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여도 우리가 모든 면에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모든 은사를 한 사람에게 모두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나 한 부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부분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연합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과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인정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생각합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떤 사람은 뜨겁게 예수를 믿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예수를 믿습니다.

 

여러 해 전 저희와 다른 어떤 교단 교회의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 전에 찬송을 부르는데 얼마나 열심히 부르는지 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거기서 처음으로 통성 기도 할 때 '주여 삼창'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도저히 저들과 함께 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를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혼자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경기(驚氣) 하시겠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막상 설교를 시작하니 생각과 달랐습니다. 참으로 많은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를 하였는데 그 어느 교회 교인들 보다 설교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렇게 제 설교를 잘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저는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와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 할 때 (그렇다고 틀린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이 건강해지고 튼튼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돌아와 제가 섬기는 교인들에게 '주여 삼창'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부목사님을 청빙 할 때 '주여 삼창'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일부러 청빙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꾸짖으시면서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양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찬 면과 뜨거운 면입니다. 하나님은 그 양면을 다 인정하셨습니다. 신앙은 그 양면을 다 갖추었을 때 가장 완전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서 그 양면을 다 갖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뜨겁게 예수를 믿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조용히 이성적으로 믿습니다. 그랬을 때 자기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오른 손 잡이가 있는가 하면 왼 손 잡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생각과 신앙에도 왼 손 잡이가 있고 오른 손 잡이가 있습니다. 흔히들 생각의 오른 손 잡이를 우익이라고 하고 생각의 왼 손 잡이를 좌익이라고 합니다.

 

왼 손 잡이 보다는 오른 손 잡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른 잡이가 많다고 오른 손이 바른 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오른 손을 바른 손이라고도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과 말입니다. 왼 손 잡이 에게는 왼 손이 바른 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좌익적인 사상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있었습니다. 오대식 목사님이 지도하는 청년부에 속해 있던 청년이었는데 어느 날 새벽기도회 후 그 청년부에서 나온 주보를 읽다가 그 청년이 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위험해 보이는 글이었습니다.

 

오 목사님을 통하여 그 청년을 불렀습니다. 제가 그 때 숭실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때가 한참 데모가 극심하던 때였기 때문에 마지막 강의를 해방신학에 대하여 특강을 하곤 했었습니다. 때문에 해방신학과 맑시즘에 대해 조금 공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지고 그 청년을 꺽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자고 있는 청년을 불러 놓고 나서야 그와 같은 생각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상과 신앙의 문제는 생각처럼 쉽게 한 두 번의 논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괜히 시끄러운 논쟁이 벌어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교회 청년부가 어려워지게 될 것이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청년부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도 많았던 저는 그와 같은 논쟁 때문에 청년부가 혼란에 빠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도와 달라고 애가 타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드디어 그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인사를 하고 앉았지만 아주 전투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전투적으로 앉아있는 청년이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야 임마 내가 너 좋아하는거 아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당황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예상 문제(?)에 없는 문제가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청년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내가 왜 너를 좋아하는지 아느냐?'를 또 물었습니다. 모르겠다는 청년에게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네가 나하고 달라서 내가 너를 좋아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본래 진리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이 아니란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도 그렇지를 못해 어떤 사람은 좌로 치우치고 또 어떤 사람은 우로 치우친단다. 나는 솔직히 우로 치우치는 사람이다.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나는 언제나 우로 치우치는 생각을 해. 그래서 정말 치우치지 않은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너와 같이 좌로 치우치는 사람을 이해하고 좋아해야만 생각의 균형을 잡아 치우치지 않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거든. 그래서 나는 너를 좋아해'

 

그 때 저는 그 청년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청년에게 한 마디 더 하였습니다. '그래서 임마 너도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야 되'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맑스와 앵갤스 그리고 구티 에레즈와 같은 사람의 이야기 하나도 하지 않고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매우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 청년을 부를 때 저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청년들의 뿌리를 뽑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청년들을 보호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청년과 메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그 청년을 저에게 메일을 보낼 때 '사랑하는 목사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저는 그것이 그렇게 기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 청년은 아직도 저와 다른 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청년의 생각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물론 때로 비판도 하지만.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각기 다른 신앙의 경험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연합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연합군입니다. 그것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가장 큰 약점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점 정도가 아니라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의 화약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거듭나고 거듭나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 중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받아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자기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교인들의 생각과 취향을 서로 인정하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정말 이 시대에 그 어느 교회보다도 하나님을 위하여 큰 일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획일적인 것이 싫습니다. 저는 다양한 것이 좋습니다. 획일적인 것에는 다양성이 없어서 저는 싫습니다. 그러나 다양성 속에는 통일성이 결여되기 쉽습니다. 통일성이 없는 다양성은 혼돈과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통일성이 있는 다양성(unity in variety)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말과 마음이 통하는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는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복을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복을 받기 위해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로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찬송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보고 열심히 설교를 들으심으로 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자랑과 욕심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똑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똑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여 다양하면서도 통일된 높은 뜻 숭의교회를 만들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이루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렇게 된다면 정말 마른 떡 한 조각만 가지고 살아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복을 받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 속에 있는 죄와 욕심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것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시고 그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고, 하늘을 보고 살므로 땅의 욕심 버릴 수 있어 말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가정에서도 만나고 직장에서도 만나고 교회에서도 만나는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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