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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을 통해 본 기독교 가족관 / 창세기17:1-8

by 【고동엽】 2021. 12. 24.

아브람을 통해 본 기독교 가족관

창세기17:1-8

가족들과 함께 여러분들이 설을 잘 지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국 문화는 철저한 가족 중심의 문화를 형성해 왔습니다. 한국인의 모든 가 치 가운데서 가장 우선하는, 으뜸되 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효도의 가 치일 것입니다. 아마도 한국인의 예 절 가운데서 가장 중시한 예절이 있 다면 그것은 가례 라고 할 수가 있 습니다. 가정의 예들 이죠. 어른을 섬기는 일, 제사를 지내는 일, 형제 우애 하는 일, 일가족 사이에 신의 를 지키는 일 등이 우리의 가장 중 요한 예절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한 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욕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집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집안을 망칠 놈, 또 집안을 욕되게 하는 놈, 놈만 하면 이상한 데 집안을 욕되게 하는 년, 집안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 이렇게 집하고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통 문화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끈끈한 가족의 유 대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또 가족 에서 느끼는 이런 정겨운 에너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한국인의 창조성과 근면성을 발달시 켜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 은 가족 중심의 문화가 가진 일종의 순기능적 요소들이라고 할 수가 있 습니다. 그러나 역기능적 요소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작년에 김경일 이라는 분이 쓴 책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 이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유교가 초래한 가족 문화, 가족 문화가 다시 우리 가운 데 가져 다 줄 수 있는 역기능적 요 소들을 많이 지적해 내고 있습니다. 상당한 부분 우리가 공감할 수가 있 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효도 문화만 해도 그것이 지나치게 감정 적이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지나치 게 정과 마음에 호소한 나머지 오늘 처럼 급속도로 발전하는 이런 산업 사회, 그런 지식사회 속에서는 효율 적인 우리들의 필요, 현대인들의 필 요에 대처할 수 있는 그런 효과적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그가 지 적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족 가운데 치매 환자가 발생했을 때 단순한 효 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것은 더 많은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 다고 우리는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나 국가는 때때로 이것 을 효도의 이름으로 가족에게만 떠 맡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적으 로 자녀들의, 자식들의 활동영역이 제한되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환경이 묶여 버릴 수가 있습니다. 효도도 필요하지만 전문적인 의료의 혜택이나 간호사들의 도움, 또 레크 리에이션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공간 이 마련되어서 노인들이 치료 받고 쉬면서 또 마음껏 활동하면서 동시 에 자식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면 훨씬 더 이것이 실제적으로 노인과 자녀들에 게 함께 도움이 될 수가 있다는 사 실입니다. 소화기능이 떨어져 있는 노인과 그리고 펄펄 뛰는 손주들을 한 밥상에 앉혀 놓는 것만이 효도의 본질은 아닐 지는 모릅니다. 또 갈 등을 겪고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를 한 부엌 안에서 묶어 놓고 그 갈 등을 인내하라고 촉구하는 것만이 효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아닐 수 도 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김경일 씨는 조상 숭배의 기 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본래 우리가 조상을 아름답게 섬기자는 그런 의도에서부터 발상 된 것이 아니라 고대 옛날 중국 부 족국가 시절에 조갑 이라는 사람이 왕이 된 후에 정치적 동기에서부터 조상숭배의식을 발달시켰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족, 내 조상, 우리 조상이 네 조상보다 훨 씬 더 낫다 선전하기 위한 시위의 의도로 조상숭배의식이 시작되었다 고 그는 지적합니다. 이것이 한국에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매 우 다른 씨족이나 가족들을 향해서 배타적인 배타주의 그리고 지역주의 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도 우 리가 간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는 이웃들과 열린 대화를 갖고 그리고 함께 더불어 살 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훨 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시대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족관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은 어 떤 가족관을 가르칠까요? 기독교인 들의 가족관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요? 저는 오늘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고 싶은 것입니 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고 백하는, 우리의 최고의 조상이라고 고백하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추적하 면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가족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그의 가족관은 성경적 가족관을 대표하는 것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적 가족관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비성경적 가족관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성경적 이지 않은, 비성경적 가족관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비성경적 가족관 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경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 극단 적인 견해, 하나는 가족 우상주의라 고 말할 수가 있고 또 하나는 가족 무시주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 우상주의 어떤 것입니까? 하나 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 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면서 맨 처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명령이 어떤 명령이었습니까? 네 친 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것이었습 니다. 떠남이 없이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가치체계,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떠남 이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 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누가복음 14장26절에 보시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 매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 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 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 자 그대로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습 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제자 의 도리를 통해서 말씀하신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목숨 이것은 가장 중요한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 서 우리가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들 이 바로 우리의 부모 그리고 처자, 형제, 자매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들의 목숨 이것 없이는 우리들 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 나님의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왜 이 것을 성경은 미워하라고, 떠나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부모를 버리라 그런 뜻이 아니 예요. 더 중요한 의 미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데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생각할수록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하나 님의 선물 이예요.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누가 부모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그 부모 는 우리의 부모가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부모가 아 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 습니다. 그리고 또 내 사랑하는 아 내, 남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 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의 자식들, 우리의 형제와 자매, 하나님의 선물 입니다. 그리고 내 목숨, 하나 밖에 없는 목숨,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것이 중요하다고, 소중하다고 느끼 면 느끼실 수록 그것들을 주신 하나 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에 몰 두한 나머지 선물을 주신 그 분을 망각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 선물이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 니까? 선물이 우상으로 변질될 수가 있어요. 우상의 정의가 어떤 것입니 까? 우상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 님과 나 사이에 끼어 드는 모든 것, 그것이 우상 이예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가 없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섬기는 일에 방 해가 되는 일체의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는 내 부모, 자식, 처자, 형제 돌보는 것, 이것은 당연 한 것이고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다 그러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전형적 실례의 사건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이삭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삭, 얼마나 기 막힌 아들 이예요. 완전히 포기했지 요. 나는 아들 가질 수가 없다. 그러 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이삭을 선 물로 주셨습니다. 이 아들을 받은 후에 아브라함은 얼마나 흥분했을까 요? 뭐 내 자식 이삭, 이삭을 바라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가슴이 뛰었 을 것입니다. 기적의 선물,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삭에게 몰두해가면서 아브라함은 서 서히 이삭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 다는 사실을 망각해 가고 있었을 것 입니다. 서서히 이삭이 아브라함의 삶에서 우상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 을 보신 하나님이 어느 날, 이 우상 을 헐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 칠 수가 있느냐? 네 아들 독자 이삭 을 나에게 바칠 수가 있느냐? 네 아 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치라. 바 치라. 그때야 비로소 아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가져 가시는구나. 아마 이걸 깨달았을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뇌의 밤이, 고 민의 밤이 지나갔을까요? 몇일 고민 한 후에 드디어 아브라함은 아마도 욥과 같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욥 이 어떤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 그 다음에 뭐예 요?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 주신 분 도 하나님,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 시니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따르겠 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 을 드디어 제단에 올려놓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알았어. 네 아들 바치지 않아도 돼. 내가 다른 어린 양을 제 물로 준비했다. 이게 바로 우상의 사건 이예요.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서 우상을 제거하려는 사건, 하나님 이 이삭 가져 가고 싶어서 그런 것 은 아니 예요. 우리가 미워하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 습니다. 같은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서는 너희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 지 아니하고 그랬습니다. 우선순위 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나 처자나 자매가 소중 하다고 느낄수록 이것들을 주신 하 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 께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살 때 사 랑하시는 여러분, 이 소중한 존재들 도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 다.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 족 우상주의의 본질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가족 우상주의가 아 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가족 무시주의도 또한 아 니라는 사실입니다. 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네 친척을 떠나라. 아비 집도 떠나 라. 아비도 떠나라는 말 이예요. 그 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하란 까지 왔습니다. 조카 롯도 따라 왔던지 데려 왔던지 하여튼 조카 롯도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사건을 가지고 노골적으로 문자 그대로 하 나님이 아브라함을 비난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기서 무얼 발견하 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 해하셨다고 생각해요. 비록 아브라 함이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 마음에 안타까웠다 하셨을 지라도 가족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 는 그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비난 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는 너를 이 해한다. 오늘 우리라고 쉽게 떠날 수가 있겠어요? 우리 핏줄이란 것, 얼마나 극복하기가 어렵습니까? 하 나님 벌써 이해하셨어요. 이해하신 정도가 아니 예요. 하나님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존중하셨다는 증거를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7절.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 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 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
우리가 이 말씀을 2절과 비교해 보시면 2절에서는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누구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세워 그랬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 과 언약을 다시 갱신하시고 있는 장 면입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하겠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를 축복하고 번성케 하겠다. 그리 고 내가 너와 언약을 맺자. 그런데 이것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 만의 언약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 해 보세요. 왜냐하면 7절에 보시면 내가 내 언약을 세워 나와 너와 거 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언약을 세운다 그랬 어요.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 이만의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포함한 언약이었어요. 하 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 언약의 혜택이, 또 언약의 정신 이 자식에게 계속해서 계승될 것을 기대하셨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뭐라고 말씀 하셨느냐 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 아 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7절 의 마지막 부분에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 라 누구의 하나님 이예요? 이삭의 하나님, 그 다음에 또 야곱의 하나 님 그 자자손손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family란 가족의 시스템 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전승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의 시스템이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 나님의 기대 예요. 신앙을 전승하고 축복도 전승하고 좋은 전통도 전승 하고 가치도 전승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하 나님이 가족을 사용하기를 원하셨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창조의 계 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지막 6일 최 고의 정점 클라이맥스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로 부 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정이 탄생 했어요. 이 걸로 창조가 끝나요. 그 리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 니다. 이 부부를 통해서, 만들어진 가정을 통해서 자녀가 출생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시편 127편3절에 보시면 자식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라 그랬습니다. 하 나님의 기업. 바로 이러한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승하기를 요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잘못하면 우상에 빠져서 하 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그러한 도구 도 될 수가 있지만 그러나 가정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을 때는 그 뜻을 계승하고 또 하나님의 믿음 을 계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하 나님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족을 귀히 여기십니다. 기독교는 결코 가 족 무시주의가 아닙니다. 제가 어떤 심리학자가 쓴 에세이를,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아파트에 많이 살지만 단독 주택으로 살아가는 상황에 있어서 집의 주변에 울타리가 있습니다. 여 러분, 울타리가 높은 것이 좋을까요 울타리가 없는 것이 좋을까요? 둘 중에 선택한다면 여러분 울타리가 높은 집, 울타리가 아예 없는 집, 어 떤 집에 사시겠습니까? 한 심리학자 가 통계를 내어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정서에 끼치는 영향도를 조 사했습니다. 우리집 근처에 fence를, 집 주변에 울타리를 높이 해 놨을 때 심리적으로 그렇게 좋지 못하다 는 결론이 나왔어요. 왜냐하면 울타 리를 높이 하면 밖이 보이지 않습니 다. 폐쇄적이 됩니다. 우리는 폐쇄적 인 공간 안에서 폐쇄적인 삶을 영위 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반대로 또 울타리를 아예 없애 버려요. 울타리를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여전히 사람들의 마 음이 불안해 해요. 보호할 수 있는 어떤 보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역시 불안해 해요. 그래서 제일 이상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높은 울 타리도 아니고 울타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무얼까요? 낮은 울타리, 낮 은 울타리가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다는 그런 통계를 에세이로 풀어 쓴 글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 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가 지향하 는 가족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지 나치게 폐쇄적인 가족관, 이것은 성 경적 가족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 경은 결코 가족의 존재, 울타리가 있는 가족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습 니다. 그러면 성경적 가족관 어떤 것일까요? 전 두 가지를 특별히 강조하고 싶어 요. 성경적 가족관, 첫째로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귀히 여기십시오.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참 귀 히 여기십시오. 여기서 귀하게 여긴 다는 말은 단순히 중요하다 라는 것 을 인지적으로 가지고 있으라는 의 미가 아닙니다. 책임을 다 하라는 말입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맡겨 주 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구성 원은 저마다 자기의 위치에서 가정 을 향한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 다. 자식은 하나님의 기업이라. 하나 님의 숙제란 말입니다. 숙제는 잘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의 청지 기입니다. 저마다 자기의 자리에서 남편의 자리에서, 아내의 자리에서 주부의 자리에서 가장의 자리에서 자식의 자리에서 저마다 가정을 향 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 책임 을 다했습니다. 자, 우선 이삭을 향 한 책임을 다한 것은 물론이고 이삭 이 나오기 전에 약속한 아들이 나오 지 않으니까 조바심이 난 아브라함 이 자기 부인 사라를 통해서가 아니 라 하갈 이라는 계집종을 통해서 아 들을 낳게 되었죠. 그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이스마엘 이라는 아들 이예요. 별로 바람직한 아들이 아니 었어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얻어진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가 창세기 16장을 읽어 보시면 17장 들어가기 전에 16장을 읽어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축복하십니다. 16장10절 한 번 보세 요. 창세기 16장10절에 보시면
"여 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 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가 없게 하리라"
11 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 르되 내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 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 라"
하나님이 축복하셨어요. 일단 태어난 그 아들을 축복하시고 아브 라함을 보고 그를 잘 기르라고 말씀 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태어난 후에 이스마엘이 이삭 과 지나친 갈등을 일으켰을 때 하나 님은 그를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역 시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최선의 뜻 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 아니었음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이 생 명을 축복하십니다. 그도 하나의 민 족이 되게 하리라고 하나님이 약속 하시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 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직계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조카인 롯을 향하여서도 책임을 다하죠. 롯이 어 려움에 처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 고 롯을 구출합니다. 책임을 다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성경에 보시면 성경 문화 속에서 하 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 무책임 한 사람, 특별히 가정을 향해서 무 책임한 사람. 가족 중의 한 형제가 가정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옛날 이스라엘 문화에는 이런 습관 이 있었습니다. 룻기 같은 데 보면 나오는데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 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이렇게 조 치하도록 했습니다. 우선 신발을 벗 겨요. 많은 사람 앞에서 신발을 벗 겨요. 그 다음에 침을 뱉어요. 그리 고 이 사람의 집 앞에다가 간판을 세워요. 신을 벗기운 자의 집이라. 이것은 책임지기를 거절했다. 하나 님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안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일단 가족 의 구성원이 된 이상 하나님은 책임 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 5장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의 가족을 돌아 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신한 자요 그 다음에 불신자 보다 더 악 한 자니라.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 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족을 향한 책임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너에게 맡겼 다, 책임을 다하라. 그렇다면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책임을 다하 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적 가 족관의 첫 번째,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귀히 여기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가 중 요해요. 두 번째는 나의 가족을 넘 어서서 더 큰 가족을 바라보고 살아 갈 줄 알아야 합니다. 내 가족을 넘 어서서 더 커다란 가족을 바라보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 4절 한 번 보겠습니다. 본문의 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본문의 4절 다같이 시작.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그 다음에 5절
"이제 후로는 네 이 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 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 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혹은 언약을 갱신하면서 한 가지 흥 미 있는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름을 바꾸셨어요. 이름을. 자,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이 뭡니 까? 오리지날한 이름이 아브람 이예 요.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갱신 하시면서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렇 습니다. 그 새 이름이 뭡니까? 아브 라함. 무슨 차이가 있어요? 우선 아 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 그런 뜻 입니다. 존경 받을 만한 아버지. 그 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이 한 가족 안 에서 존경 받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은 바람직하지만 거기서 머 물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것 이예 요. 아브람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될 것을 기대하신 하나 님,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히브리어 가 아니라 본래 아람어입니다. 아람 어에서 이것은 모든 열국들의 아비, 많은 나라들의 아버지, 많은 무리 들의 아버지. 이제 아브라함의 영향 권은 한 가족 안에서만 존경 받는 아버지가 아니라 헤일 수 없이 수많 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 는,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 에게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열국 들의 아버지. 그래서 생각해 보세요. 저와 여러분은 다 배달겨레인데, 단 군의 후손인데 그런데 우리가 아브 라함을 존경하고 또 아브라함을 공 부하고 그러잖아요. 성경 예언 그대 로 된 거예요. 그는 아브라함, 열국 들의 아버지가 되었어요. 이 메시지를 받는 순간 저는 아브라 함의 인생의 지평선이 넒어졌을 거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나는 가족 을 향한 책임 뿐만 아니라 가족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어야 해. 이건 굉장한 사건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 님의 처음부터의 기대였습니다. 처 음 부르셨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어 요?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그 다 음에 천하만민이 너에게 복되다고 하게 될 것이다. 천하만민이. 너는 좁다란 변경 안에서, 가족이라는 테 두리 안에서만 영향을 끼치는 존재 가 아니라 가족을 넘어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라. 그들에게 축복 된 존재가 되어라. 열국의 아버지가 되어라 이 렇게 말씀하신 것 이예요. 저는 이것이 비단 아브라함만을 위 한 기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 인, 아브라함이 믿었던 동일하신 하 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 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라 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 평선이 넓어야 돼요. 우리의 가족관 이 넓어져야 돼요. 내 가족에게 책 임을 다하는 것 반드시 해야 돼요. 거기서 끝나면 안 돼요. 한평생 자 기 가족, 자기 자식 잘 먹이고 살리 는 것, 그것만 하다 죽는 사람이 많 아요. 그것을 좀 넘어서야 돼요. 다 른 사람들도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 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여기에 가족의 더 커다란 그림, 더 커다란 환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급속도로 지구촌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의 가족관은 아직도 너무나 좁아요. 너무나 좁은 가족관을 갖고 있어요. 한국 사람들이 내 집, 우리 집, 이 집이라는 것을 너무 강조하 다 보니까 우리집 바깥의 일은 무관 심한 존재들이 상당히 되어 왔어요. 집 안에서는 집안 정리 잘 하고 깨 끗이 일을 하다가도 교회 같은 데 와서 공공시설을 쓸 때 교회나 학 교, 여러분들이 공공건물에 가서는 전혀 마음대로 써요. 의식의 밑바탕 에 어떤 생각이 숨어 있습니까? 내 집이 아니니까. 내 집이 아니 예요? 큰 집을 생각해야 돼요. 크게 말하 면 이 사회도 우리의 집이라는 인식 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가 지나치게 내 집, 내 핏줄에 사로잡 히다가 보니까 내가 낳지 않은 사람 들에게는 무관심해 졌어요. 한국이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다고 하지만 사랑하시는 여러분, 세계에 서 아직도 고아 수출국 랭킹에 들어 간다는 사실을 아세요? 1위, 2위, 3 위. 왜 그렇습니까? 입양하는 사람 이 없어요. 입양하는 사람이. 저는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 저희 교회에 서 일년에 한 번씩 입양자, 한국 사 람을 자식으로 입양하고 있는 미국 사람들을 교회에서 초청해 다가 잔 치를 열곤 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씩. 아주 감동적 이어요. 미국 사람 들이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식이 넷, 다섯, 여섯 있는데 도 불구하고 또 입양을 하는 거예 요.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지구촌 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자기가 도울 수 있는 데까 지 돕는다. 축복할 수 있는 데까지 축복한다. 우리는 내 핏줄이 아니니까 나와 상 관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얼마나 좋 겠습니까? 예수님의 가족관, 어떤 가족관 이었을까요? 마가복음 3장에 보시면 3장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 인, 또 서기관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뒤섞여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육 신의 가족들이 거기에 와있었을 지 도 몰라요. 그런데 예수께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아마 그 질문을 들은, 대답을 들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나 형제들은 굉장히 실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 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 여기 큰 가족의 그림이 필요하다 말 이예요. 큰 가족의 그림. 그런데 우리가 이 것을 벗어나지 못해요. 아직도 벗어 나지 못해. 거의 맹목적인 편애만 가지고 자기 자식에게만 집착하고 있는 한국의 부모들, 언제 이것을 벗어날 수가 있을까? 작년 초인가요. 역시 베스트셀러로 팔렸던 일본 사람 이께하라 마모루 라는 사람이 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인 비판, 그 책에 보면 한국인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 이 너무나 맹목적이다. 너무나 맹목 적이다. 주로 동네 아이들끼리 싸우 게 되면 한국에서는 보통 그것이 부 모싸움이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 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상 상할 수도 없다. 자식들이 일단 싸 우면 그 자식을 데리고 가서 상대방 부모에게 반드시 사과를 시킵니다. 그것이 일본의 습관이라고 그래요. 한국은 자식 싸움 한참 하다 보면 누구 싸움이 돼요? 부모 싸움이 돼 요. 뭐 우리 자식 가지고 내 자식 가지고 누가 건드려. 그러다가 싸움 이 된다 말이죠. 누가 잘 했는가 못 했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맹목 적인 편애란 말이죠. 또 이께하라 씨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자기가 한국에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왜 입시 철이 되면 전국이 난리를 치고 부모 들이 나서야 하느냐 어차피 커야 할 자식들이라면 자기들이 가서 손수 시험도 치루고 오지 부모들이 나서 서 아우성을 친다 말이죠. 온 국가 에 무슨 난리가 생긴 것처럼 입시철 이 되면. 그래서 그 분은 이런 얘기 를 해요. 일본 사람들은 바깥의 본 사람들의 견해일진 모르지만 입시철 마다 날씨가 추운 이유, 한국의 부 모들이여 빨리 깨달으라는 하늘의 심판이라고 믿는다. 이 사람이 그래 요. 거의 맹목적인 자식에 대한 편애, 그 편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들의 모습, 좀 냉정하게 생각할 필 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크게 볼 필 요가 있어요. 우리는 주님의 가족관 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 나님이 일단 내게 주신 자식을 향해 서 책임 다해야 해요. 제대로 교육 시키고 길러야 돼요. 책임 다하자고 이미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나 거기 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전체를 하 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 의 집으로 바라보고 이 주변에 우리 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자 녀들을 넓은 눈으로 바라볼 수가 있 어야 합니다. 내 자식만 자식이 아 니라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 특별 히 소외된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 을 내 자식처럼 생각하는 우리의 사 랑이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훈훈한 세상이 될까요?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예수님, 유 대 땅에서 태어나 거기서 33년을 살 다간 젊은 예수,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유태인입니다. 그가 나를 위 해서 죽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 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 자라면 나도 이제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사 람들을 내 형제처럼 자매처럼 자식 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 는 큰 가족관을 가질 수 있을 때 비 로소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 세상을 바꾸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좋 은 날, 이 좋은 명절 가족을 귀히 여깁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넓은 그림, 하나님의 가족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환상을 주시기를 주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같이 기도하 시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함 께 기도하실 때 여러분과 저에게 주 신 가정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가정 될 수 있도록, 가 족이 될 수 있도록. 동시에 이런 기 도를 하십시다. 우리 가정 바깥에서 방황하고 있는, 내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형제와 자매, 나의 자식들, 우 리 집 밖에 있는 내 자식들, 그들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십시다. 여러 분, 저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청 소년이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 어요?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 니까? 그들에게 달려가서 그들의 손 을 만져주지 않겠습니까? 그들도 우 리의 자식일 수가 있다. 우리의 자 식일 수도 있다. 구정에 KBS드라마 가운데 아름다운 비밀이라는 드라마 가 있었어요. 저는 슬쩍 지나가는 드라마를 보다가 여기서 한 단편의 문구가 제 가슴에 깊이 새겨지더라 구요. 핏줄만 가족이 아니지요. 더불 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다 가족일 수가 있지요. 핏줄만 가족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족일 수가 있지요.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 입니다. 나와 같은 삶의 공간에서, 역사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을 내 형제로 내 자매로 내 가족으로 생각하라고 성경은 요구합니다. 하나님, 이 땅에 방황하는 청소년들, 소외된 그늘 속에서 고통 받고 아파 하는 수많은 이웃들을 내 가족으로 생각하고 다가서는 우리들. 이런 마 음을 갖는다면 내년의 명절은 아니 금년에 남아있는 또 다른 명절들은 조금은 다르게 지켜질 수가 있을 것 입니다. 우리가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지면서도 우리 주변에 단 한 사람, 짤막한 한 시간이라도 그 들과 사랑을 베푸는 시간을 가질 수 가 있다면 우리의 사회, 얼마나 달 라지겠어요? 하나님, 그들을 내 형 제로 내 자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슴을, 그 사랑을 우리들에게 베풀 어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 도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 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도 하시는 자비로우신 주님, 이 시간 주신 말씀을 우리 가슴에 받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 가운데 주의 뜻 을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하 신 섭리를 이루어 주시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 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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