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교회( 제 17세기 대륙의 교회들 )
1. 웨스트팔리아 평화(1648)이후 독일교회의 발전.
(1) 정통주의시대(the Age of Lutheran Orthodoxy) : 17세기 전반에 걸침.
(2) 독일 경건주의(German Pietism) : 보편적운동은 아니나1690-1730대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3) 독일 계몽신학(German Rationalism) : 1730-1750대의 신학문(Neology)의 발달.
2. 독일 정통주의 신학.
(1) 협정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77)이후, 30년 종교전쟁(1618-48)을 거쳐, 웨스트팔리아 종교형화로, 로마교회와 개혁교회(칼빈주의)가 루터파 교회와 대등한 위치에 셔ㅓ게 되자, 루터교회는 (1) 자파의 정통성에 대한 변증과 (2) 정통신학의 정립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후 17세기 전반에 걸쳐 정통신학시대가 전개된다.
(2) “순수 교리” (reinen Lehre, l pure doctrine)의 수호와 “조직신학의 체계화”를 기치로 추구된 정통신학은, 루터의 교리를 스클라 철학의 방법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이었다
루터+아리스토텔레스). 방법론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따라 경직된 형식주의를 취하고, 전통적교리를 준거로 하는 엄격한 보수주의 태도를 취하였다.
(3) 성경을 교리의 법전으로 삼아, 특정교리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페단도 있었다. 축자 영감설(Plenary lnspiarition of the original texts)을 믿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의 기본교리가 체계화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신앙생활에 유익을 끼치지 못한 점도 있어 나중에 경건주의가 일어나 그 결점을 보충하려 하였다.
(4) 이 시대에 훌륭한 정통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a)켐니츠(Martin Chemnitz-d. 1586) : 신학 논제(Loci Theologici)와 트렌트 공회 비 등의 저자이며, 정통주의의 원조이다.
(b)게르하르트(Johann Gerhard ?-d. 1637)예나 대학교수로 루터정통파 신학의 대표적 신학서인 신학존제(Loci Theologici)저술.
(c)칼로프(Abraham calov -1686) : 루터파 변증 신학자.
3. 조정주의자
(1) 조정주의자 또는 화평주의자(Ireniker)는 정통적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조정 역할을 하였다. 특별히 개혁파 쪽에서 이러한 노력이 현저하였다.
특히 하이델베르그 신학교수 유니어스(Franciscus Junius)와 파로이스(David pareus)는 신앙고백의 자유를 위해 조정 역할을 하였다. 영국인 존 듀리(John Durie 1596-1680)는 대륙의 루터파와 칼빈파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2) 17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조정주의자는 게올그 칼릭스토스(Georg Calixtus, 1586-1656)이다. 헬름슈테트 대학 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루터파의 엄격한 고백주의를 버리고 혼합주의 신학노선을 걷게 되었다. 자신은 정통교리를 가지지만, 각 교파간에 가장 공통성인 범 基督敎的 교리를 찾아내서 교파간의 화해를 도모하고 자 하였다 루터파 개혁파 심지어 로마 카토릭까지 연합 할 수 있는 근거로 (a) 성경 (b) 사도신경 (c)빈센트율(vincentian canon, 보편성, 역사성, 만인의 동의)에 근거한 초대교회 5세기 까지의 신학을 들었다. 1646년에 혼합주의 논쟁이 크게 일어났고 칼로프는 칼릭스터스를 공격하였다.
(3) 루터파와 개혁파의 화해 노력은 계속 되었으며 베를린 종교회의 (1662-63)는 그 한 예이다. 이러한 노력은 프러시아에서 연합교회의 설립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4) 요한 안드레(Johnann Andreae, 1586-1654)는 기독교 이상사회(Christianopolis)를 통해서, 그로티우스는 “교회 평화안”을 통하여, 각기 교회의 연합을 모색하였고, 심지어 로마 카토릭 측에서는 노이슈타트의 주교 스피놀라를 통하여 개신교와 연합 가능성을 찾기도 하였다. 또한 라이프니츠(G . W . Leibnitz, 1646-1716)는 프러시아의 연합교회 성립에 공헌을 하였을 뿐만아니라, 불란서 카톨릭 감독인 보수에(J . B . Bossnet, 1627-1704)와 교회 연합가능성을 논의하였다. 서구의 방향은 점차 교파간의 차이를 조정하려는 목표로 움직이게 되었다.
4. 엄격한 정통주의에 대한 또 다른 반발.
(1) 극단적 신비주의가 발생하였다. 야곱 뵈머(Jacob Bohme ? -1624)는 환상적이며 신비한 神知學(Theosophy)의 체계를 세웠다. 1612년 예명(Aurord ......)이란 저작을 출판하였다. 또한 신비주의자들의 비밀결사인 장미 십자단(Rosicrucians)이 생겨났다.
(2) 경건 문학이 나타났다. 요한 안드레와, “진정한 기독교”전 사권을 저작한 요한 아른트 (Johann Arndt -1621)는 기독교인 생활을 강조하여 신비주의자로 물렸으나 나중에 18세기 경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B . 제 17세기 서구 개혁파 교회
1.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
(1) 개혁파 정통주의는 노르트 공회(Dordt Synod, 1618-1619)이후 알미니안 주의를 배격하고 푸티어스(G . Voetius-1676)고마러스(Francis Gomarus, 1563-1641)등의 억격한 칼빈주의가 정통으로 득세하였다.
신학적인 방법은 루터파 정통신학과 같이 스콜라 신학적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신학체계 정립에 힘을 썻다.
(2) 화란 개혁교회는 교리적으로는 억격한 칼빈주의를 취하였으나 정부는 여러 가지 자유사 상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도덕적 엄격주의는 퇴조하고 소수의 무리에 국한되었다.
(3) 정통적 칼빈주의에 대한 하나의 교정적 신학 방법으로 칵시어스(Cocceius 1603-1699)의 “계약 신학” (Covenant theology 또는 Federal theology)이 각광을 받았다.
순수한 성경 신학(Biblical theology)임을 표방하고 아섰다. 그의 주저는 1648년 출간된“계약 교리론”이다(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 mento Dei)영국 청교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정통파에게서는 비 정통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2. 알미니안 주의의 영향.
(1) 1609년 알미니우스의 사후, 에피스코푸스(Simon Episcopius, 1583-1643)와 그로타우스(H. Grotius)등이 이 파를 지도하였으며, 1618-1619년 도르트 공회 직후에 국외로 추방 되었다가 1630년 종교관용령에 따라 제한적 자유를 허용받았으며, 1795년 완전한 법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2) 그러나 알미니안 주의의 영향은컸다. 본래 화란의 에라스무적 종교관 및 신학방법의 전통이 있었으므로, 알미니안 주의는 그러한 전통에 영합하여 자유로운 성경해석과 본문에 대한 비평을 하였다. 이것이 18세기의 계몽신학의 시발이 되었다. 과격한 알미니안들은 소시니인파와 합세하여 일위론자(Unitarian)로 전신하게 되었다.
3. 아미로 주의
(1) 모이즈 아미로(Mouse Amyrault)는 17세기 불란서 유그노 신학교인 소무르(Saumur)신 학교의 교수로서 선택교리의 설명에서 후속설(後贖設 Post-redemptionism)또는 가정적만인구원설(Hypothetical Universalism)을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특별 구원설((particularism)과 보편구원설(Universalism)의 조화책으로, 하나님께서 만민의 구원을 가정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도 설정하셨으나, 실제로 그 공로를 힘입어 구원함을 받을 사람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나, 예정된 사람들만 믿게 되며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시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2) 이 학설에 대하여 스위스 제네바의 마지막 정통신학자 투레틴(Turretin)과 츄리히의 하이덱거(Heidegger)가 헬베틱 협정신조(Formula concensus Helvetica, 1675)를 작성하여 정통적 구속도리와 예정론을 수호하였다.
C. 제 17세기 프랑스 가톨릭 교회
1. 루이 14세의 절대군주권(Absolutism)과 불란서 교회의 관계.
(1) 루이 14세(Louis XIV, 1643-1715, 1661이후는 독제)는 절대권의 신봉자이며, 교회를 그 의 지배하에 두었다.
1685년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Hevocation of the Edict of Nantes,1685)위그노를 국외로 추방시키고 개혁교회는 불법 단체로서 1789년 불란서 혁명시 까지 지하교회가 되었다.
(2) 그의 독재는 불란서 카톨릭 교회에도 철저하게 미쳐, 1682년 불란서 공의회(National Curncil0를 열고 “불란서 성직자의 四個집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a) 통치자는 교권에 대하여 독립한다. (b)영적 문제에 대한 교황의 권한도 공의회에 의하여 제한된다.
(c)교황권은 불란서 관습과 법에 의하여 제헌된다.
(d)교회가 확정하지 않는 한 영적 문제에 대한 교황의 판단도 틀릴 수 있다.
1693년에 왕은 교황과 합의한 후 四個安를 철회하고, 왕은 공석중인 주고 임명권과 수입을 취하였다. 불란서 교회는 영국처럼 독립한“불란서 교회”(Gallican Church / Gallicanism)를 성립시키지 못하고, 다만 루이 14세가 교황청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2. 잔센파(Jansenists)의 사상과 활동
(1) 잔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은 로마 카톨릭교도로, 이쁘르의 감독(Bishop of Ypres)이였다. 쌍 시랑(St Cyran)의 영향으로 어거스틴을 연구허여 “아우구스티누스”란 연구서(사후 1640에 출판됨)를 저작하였다. 그의 주장은 칼빈의 은혜론과 흡사하였다. 즉
(a) 하나님의 특별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b)은혜의 역사는 불가항력이다.
(2) 잔센의 후계자인 상 시랑이 뽀르로얄(Port-Royal)수녀원을 중심으로 잔센파의 가르침과 행위를 힘썼다. 그는 사랑에 동기를 둔 진정한 회개와 사죄를 강조하였다. 이것이 형식주의적인 예수회와 마찰하여, 그는 투옥되기도 하였다.
상 시랑 다음에 아르노(Anton Arnauld)가 후계자가 되어 예수회의 도덕신학인 개연주의(Probabilism)에 반대하고 : 도덕적 엄격함과 권징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3) 잔센주의는 17세기 카톨릭 교회의 일종의 개혁운동이었으며, 깊은 종교성과 심각한 도덕관념으로 중산층, 시골신부, 지성인, 하급귀족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쳐 회개하고 참된 신앙생활에 힘쓰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교황과 예수회(the Jesuits)는 1653, 1656에 이들을 정죄하고, 루이 14세는 1709년 뽀르 로얄수녀원을 훼파하고 죽은 이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마지막으로 1713년 교황은 칙서“우니게네투스”(Unigenitus)를 발표하여 정죄하였다.
이후 잔센파는 화란으로 피난하여 우트레히트에서 로마 교회와 분리하여 1723년“화란 고 카톨릭교회”(the Old Roman Catholic Church of Netherland)를 세우고 19세기에는 교황 무오설에 반대하는 카톨릭 교도와 합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3. 파스칼의 생애와 신학.
(1)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은 유명한 프랑스 신학자, 수학자, 철인이다.
1646년 자센파와 접촉이 되어 첫 개심을 하였다. 1651년 부친의 사망으로 누이동생 자크린이 뽀르 로얄 수녀원에 입소하였고 그는 계속 파리에서 과학과 수학연구에 물두하다가 1654년 완전히 개심하고 뽀로 로얄에 가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며 남은 8년의 여생을 살았다.
(2) 1656년 소르본느 신학자들이 잔센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하자, 빠스칼은 익명으로 “프로방스 서간집” (Lettres prbvinciales, 1656-1667)을 써서 로마 카토릭교회(특히 예수회)의 은혜론과 도덕신학을 비판하였다. 문화적으로도 불란서 고전시대의 명문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서한에서 초대교회의 근엄한 생활과 행위를 모본으로 한 잔센파의 엄격한 신앙생활을 변호하였다. 그의 사후에 정리되어 출간된 “명상록(pensees)"은 위대한 기독교 신앙 변증서이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종교적 세계는 믿음으로 알 수 있을 뿐이며, 이 세계에 대해서는 ”기하학적 정신“ 으로 오직 추론할 뿐이며, 이 세계를 마음(Coeur)으로 느낄 뿐이라 하였다. 그는 유명한 ”노름 원“ (Wager theory)로 신앙에는 하나님을 따르든지 않든지 의지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과학자와 철학자 하나님”은 아니었다. 위대성과 비극성의 틈바구니에 낀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성을 초월한 신앙의 실제적 경험적 세계를 변증하였다.
4. 정숙주의(Quietism).
정숙주의는 17세개 불란서 카토릭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서 특히 물리노(M . de Molinos C . 1640-1697)와 귀용(Mme Guyon), 페느롱 감독(Archbishop Fenelon)등이 보편화 시켰다.
근본 원리는 인간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완전에 이르려면 완전한 수동적 태도와 자의지(字意志)의 소멸, 심지어 자기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정도로 전적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해야한다. 그리하여 기도에 들어가면, 예수님의 사랑, 덕성, 삼위일체에 대한 흠모와 같은 것 조차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순수한 신앙” 으로 하나님 안에서 휴식하게 된다. 이런 완전에 이르면, 자연히 외부로 도덕적인 행동애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은 “완전주의” 이다. 완전한, 신비적 상태에 이르면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일이 된다고 한다.
자의지가 하나님 앞에서 파쇄 되었으므로 마귀의 유혹을 받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되는 행위도 완전 상태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다. 조심할 것은 산심(散心)으로 “정숙”을 깨뜨리는 일이다.
정숙주의의 도덕적 결과는 거의 범신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1687년 교황 인노선트 11세의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주의 겨향은 대륙 각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경견주의와 관계가 맺어 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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