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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진실! (마태복음 6:1-5)/고.이중표목사

by 【고동엽】 2021. 12. 19.

은밀한 진실! (마태복음 6:1-5)

 

사람에게는 세 가지 본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은 각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욕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가지고 싶어하는 욕망, 먹고싶어 하는 의욕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노력하고 힘써 재산을 모으기도 합니다. 둘째, 우리에게는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야심이며, 명예를 얻고 성공하려고 하는 의욕입니다. 높이 되고싶은 마음,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성취해서 업적을 남기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특별한 욕망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욕망이라고도 말합니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욕망, 동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고, 어떤 수양을 하고, 거룩한 성자가 되려고 하는 것도 인정을 받고싶은 욕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1절)
이런 욕망 때문에 우리는 노력하고 발전합니다. 이런 본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거짓과 악한 생각이 그 속에 잠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깊이 경계했습니다.
당시 종교적인 신앙 행위인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는 바리새인들의 경건한 생활의 3대 원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적인 의식적인 생활을 경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남에게 구제할 때는 대인적인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신 관계이고, 금욕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런 관계를 다 저버리고 그 속에 인간적인 것만 남게 되었습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전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생각을 가졌기에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1절) 이것은 마태복음 6장에 있는 전체의 말씀을 서론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이나, 기도하는 일이나, 금식하는 일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2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5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16절)
예수님께서 계속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랑하려고, 사람에게 나타내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헌금할 때 크게 나팔을 불었다고 합니다.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와서 구제 헌금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여기 나팔을 불지 말라는 원래 근거는 거기 있었지만 예수님은 '너희가 선을 행할 때 나팔을 불듯이 소리내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은밀한 가운데 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번씩 회당에서 기도했는데 기도 시간이 아침 9시, 12시, 오후 3시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 시간에 혹시 외출 중이면 길거리에서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외출해서 그 시간에 길거리에 서서 기도하는 척 했습니다.
여기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무대에 서서 연극하는 배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는 자기 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역을 맡아서 하는 사람입니다. 또 배우는 관중을 많이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당시에 외식하지 말라는 말은 배우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자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신앙행위에서 금식은 높은 경건 행위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금식하는 모양을 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오히려 금식 안하는 것처럼 해야지 금식하는 척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금식할 때 목사들도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내가 금식하면 교인들이 알아주겠지 또 내가 밥을 굶고 금식하니까 우리 교인들이 나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겠지' 그래서 그런 식으로 금식하려고 하는 유혹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구제를 하든,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네 마음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삶이란 바로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밀은 사람이 안본다고 해서 은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안본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머리속에 생각한다면 이미 그것은 은밀이 아닌 것이요, 많은 사람 앞에서 행할지라도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생각했다면 그것이 바로 은밀한 진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하는 위선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서 십일조 바치는 것도 어렵고, 주일성수 하는 것도 어렵고, 밤 예배 나오는 것도 어렵고, 기도하는 것도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위선을 보게 됩니다. 행동하는 것이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행동하는 것은 남이 알 수 없으니까요. 남들에게 뭘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와주면서도 속으로는 '못된 것들' 하면서 도와주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가 인사하면서도 웃으면서 인사하지만 속으로는 '못된 놈'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자기 속에 있는 중심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한점 부끄러움이 없이 산다는 것이 최대의 그리스도인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앞에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하고, 찬송도 하나님 앞에 하고, 기도도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시절을 생각할 때 위선자에 대한 책망이 계속 오는 것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어느날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한 학생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그 상은 학교 울타리가 넘어졌는데 그것을 혼자 잘 세워서 정리한 착한 학생에게 주는 상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나도 착한 일해서 상 받아야지' 하고 그때부터 혼자 선생님도 가고 학생들도 다 간 오후 시간에 혼자 남아서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화장실 청소를 해도 누구 하나 와서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화장실 냄새를 맡으면서 묵묵히 청소를 했습니다. 이렇게 몇달을 해도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청소하는 것을 그만 두고 제가 공부하는 교실에 들어가서 다른 학생들이 다 간 후에 교실을 깨끗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교실 청소를 하고 나면 주번 선생이 한번씩 돌면서 교실을 검토해가지고 청소 잘한 교실은 칭찬하고 그러는데 웬일인지 제가 청소한 후부터는 한번도 안오는 것입니다. 혼자 열심히 청소해도 한번도 안와요. 어떤 때는 교실 청소를 다 하고 누가 오나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오기는 누가 옵니까 아무도 안왔습니다. 그래서 '에이 그만 두자' 하고는 그만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며칠 전에 맹천수 집사님이 쓴「맹집사 이야기」라고 하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맹집사는 조그만한 시골교회를 섬기는 분이었는데 하루는 임집사라는 분이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몸도 비대한 분이 중풍으로 쓰러져가지고 눕게 되어서 거동을 못하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를 못드립니다. 그래서 맹집사님이 늘 예배드리고 임집사 집에 가서 교회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는 이렇게 했고, 외부에서 손님은 누가 왔고, 교인들은 이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얘기를 하면 그 임집사는 누워서 아, 그러느냐고 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를 마치고 교회소식을 전하려고 맹집사가 임지사 집에 갔는데 임집사가 그럽니다. '나도 교회당에 가서 예배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을 들은 맹집사가 부담이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 주시여, 휠체어 한대만 주시면 제가 평생동안 임집사를 밀고 다니면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맹집사님이 기도한다는 얘기를 듣고 목사님께서 예산을 세워서 휠체어를 하나 사 주었습니다. 맹집사님도 기뻐했고 임집사님도 기뻐했습니다. 맹집사님이 휠체어를 끌고 임집사를 모시고 예배당에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휠체어를 끌고 임집사를 끌고 오는 맹집사를 보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받을 때 느꼈던 흥분이 돌아갈 때 휠체어를 밀고 갈 때는 별로 그 기분이 없었습니다. 이것도 하루 이틀지 주일날, 주일밤, 수요일 밤을 밀고 다니려고 하니까 너무 힘들고 더군다나 휠체어라는 것이 아스팔트 길 같으면 잘 가는데 시골 자갈밭 길을 가니까 비대한 몸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휠체어를 밀고 가면서 '많이도 먹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휠체어를 밀고 가는데 비가 쏟아졌습니다. 비온다고 안갈 수도 없고 비오는 날 우산을 받쳐가면서 휠체어를 밀고 가는데 진흙탕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때 마음 속에 살인을 합니다. "중풍 들었으면 죽어야지 무엇 때문에 살면서 사람을 괴롭히나" 하면서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날도 비가 오는데 휠체어를 끌고 왔다고 교인들이 박수를 치면서 칭찬을 합니다. 그 다음 주일 아침 임집사님을 또 휠체어에 태우고 예배당으로 가는데 예배당 입구에 조그만한 구멍 가게가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면서 맹 집사를 보면서 이렇게 칭찬합니다. "맹 집사는 천사야 어떻게 자식도 못하는 일을 저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칭찬합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예배당 앞에 도착한 맹집사는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안집사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제에 내가 어떻게 예배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겠는가 마음으로 살인을 했는데...' 맹집사는 감히 예배당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임집사를 안으로 들여보내놓고 자기는 밖에 서서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임집사를 데리고 다녔지 주님에게 보이기 위해서 데리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저는 날마다 예배당 안으로는 들어갔으나 주님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계신 주님 안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예배당 밖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때 주님의 십자가의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맹집사야, 내가 너를 용서한다." 맹집사는 주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 내가 수없는 세월을 여기에 와서 예배를 드렸지만 교회당만 왔다갔지 주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채 나는 지금까지 예배를 드렸구나! 오, 나의 마음속에 계신 주님이시여,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소서.' 그가 중심으로 회개하고 예배당 밖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주님 앞에 세웁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기 존재를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 서서 살아왔는지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로 전진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헌금도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 앞에 헌금할 때 제가 위선자인 것을 고백합니다. 헌금을 드릴 때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옵니다. '내가 목사니까 교인들보다 더 많이 바쳐야지 그래야 내가 떳떳하지' 그러고, 어떤 때는 '내가 많이 바쳐야 재정부에서 헌금 집계하는 분들이 볼 때 "우리 목사님은 헌금을 많이 바치는구나!" 그렇게 인정을 하겠지'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자신이 위선자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헌금 넣은 것을 빼버립니다. "주님, 이 헌금은 헌금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하고 돈을 다시 빼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생각나면 얼른 헌금 봉투에 넣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생각이 들더라도 이 헌금 만큼은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운다는 것이 참 힘듭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은밀한 구제, 은밀한 기도, 은밀한 금식, 구제는 대인 관계요, 기도는 대신 관계요, 금식은 대아 관계입니다. '남에게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은 전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구제할 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자신도 잊어야 합니다. 구제한 사람도 잊어야 되고, 자기 자신도 잊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잊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다만 무익한 종입니다. 할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남에게 좋은 일을 해놓고도 억울해 하는 때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이러한 선은 선이 아닙니다.
인도에 가면 스님들의 일화들이 많은데 인도에 달마 스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선의 원조라고 말합니다. 달마 스님이 AD 520년경에 중국에 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9년동안 도를 닦습니다. 선은 스님들이 깊은 명상을 하면서 무아지경으로 자기를 들어서 득도하는 경지를 선이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왕이 먼 나라에서 위대한 고승이 왔다고 하니까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스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스님들을 많이 돌보고 사찰을 많이 세웠는데 내 적선의 공적이 어느 정도입니까?" 하면서 자기를 과시했습니다. 그때 달마 스님이 "공적 무" 하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왕의 얼굴빛이 바뀌면서 "제가 그렇게 사찰을 세우고 적선을 많이 했는데 공적 무라니요" 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때 달마 스님이 마음이 적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선을 쌓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해놓고 달마 스님이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칩니다.
그가 다른 절로 도망을 쳐서 벽만 보고 도를 닦는데 하루는 장군이 찾아왔습니다. "오, 스님이시여, 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 마음을 편케 하옵소서. 제가 장군으로서 수없는 승리를 하고 남을 죽이면서 싸움에서 이겼는데 내 마음속에 싸우고 있는 이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서 내 마음이 괴롭사오니 내 마음을 편케 하소서." 그런데 달마 스님이 전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밤에 무릎을 꿇고 밤이 새도록 떠나지 않고 "오, 스님이시여, 내 마음을 편케 하소서." 하니까 달마 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마음을 괴롭히는 것을 네가 내려놓아라" 그 말을 듣고 '아, 내 마음의 문제를 내가 내려놓아야지 누구보고 내려놓으라고 하나' 하고는 삭발을 하고 스님이 되어서 위대한 해가 스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을 쌓아야 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은 사람에게 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때는 얼마나 악한지 모릅니다. 함께 사는 아내에게도 악한 생각을 갖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식구가 오랫동안 몸이 아팠습니다. 우리 식구가 몸이 아파서 힘들어 하니까 병원을 하시는 장로님이 그래요. "사모님, 얼른 돌아가셔야 되겠네. 그렇게 몸이 아파가지고 어디 살겠어요" 우리 식구가 저에게 물어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 말 한마디 때문에 한달동안 등돌리고 살았습니다. 제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아야지" 그래야 되는데 그냥 제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해버렸습니다. 우리 식구가 한달동안 안산다고 해서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위선을 쓰고 없는척 하고 살아야 되는데 제가 너무 솔직해서 말한 것이 화를 자처한 것입니다.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스친 생각이라도 한번 한 것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진실하게 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 60세 된 분이 오래 전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5-6년동안 늘 약을 지어 다리고 이부자리 갈아주고 그렇게 지냈습니다. 60대 할머니가 80된 할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서 가시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그런데 그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고린도전서 13장 설교를 하셨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1-2)
이 말씀을 들을 때 지금까지 자기가 약을 드리고 병 간호를 한 것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고 그가 약을 다리면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 그 모습으로 약을 들고 갔는데 시어머니가 쳐다보더니 "얘야, 네 눈동자가 오늘 따라 다르구나! 네 얼굴 모습이 여느때와는 다르다." 그러더랍니다. 그러면서 그 약을 마시면서 "약이 오늘따라 달다" 하시고는 가셨습니다.
그 여종이 저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이 얘기를 해요. "목사님, 저는 수없는 세월동안 시어머니에게 살인약을 드렸습니다. '돌아가시지 돌아가시지' 그 생각을 가지고 약을 드렸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의 잘못됨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약을 드렸을 때 그 약은 천국 가는 약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그 약을 마시고 편안하게 가셨습니다.
"제가 그 날이 없었다고 한다면 영원히 후회하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내 위선을 고백하고 살아야 할 것이거늘 하나님께서 이 여종을 불쌍히 여기셔서 마지막 한 순간 나로 하여금 진실하게 살게 했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중심을 언제나 내놓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 최상의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광이요, 축복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상입니다. '네 하는 일이 옳다.' 이것이 상입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건너가서 일생을 희생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나의 생을 보낸 것을 희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내가 조금 헌신한 것 뿐인데 이것을 어떻게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건강한 활동, 좋은 일만 하는 생각, 마음의 평화, 이후에 올 영광스러운 운명의 밝은 소망의 모든 그 날을 기대한 나의 삶을 어찌 내 희생이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체가 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라 나는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언제나 그 진실함이 인정받으므로 하나님의 상이 나의 삶속에 평화, 기쁨, 위로,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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