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가복음 4:1-9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 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 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시험 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 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 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 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 느니라 하시니 5이에 마귀가 예수 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가로되 네가 만 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 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 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 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 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마귀가 또 그 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 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제가 전에도 한번 그런 이야기 를 나누었지만 저는 찬양 잘하시는 분이나 음악하는 분들이 너무너무 부럽더라구요. 왜냐하면 이분들은 천국 가서도 실업사태가 없습니다. 천국에서 찬양은 계속됩니다. 그러 나 저는 천국에 가면 실업자가 되 요. 설교가 없쟎아요.천국에 가면 예수님 계신데 그 앞에서 설교할 수도 없고. 그러나 저에게도 유일 한 소망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음치가 치유될 줄 믿습니다. 이 설 교한다는거요, 오늘날은 특별한 일 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설교에 대 해 특별한 기대를 사회에서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 던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 리는 부흥의 시대라고 부르는데요. 이런 부흥의 시대가 되면 그때는 설교가 특별한 것이 됩니다. 부흥 의 시대의 설교는 최고의 특권이었 고, 사람들은 설교를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처럼 설교가 영향력 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는 어떤 의 미에서 보자면 설교의 위기 시대라 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가 얼마 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부정적인 인상으로 남아있느냐하는 것은 이 런 경우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두 사람이 한창 싸움이 붙어서 그 시비가 높아지다 보면 흔히 이런 소리가 나오죠? '야, 나한테 설교 하지마.'설교하지마, 이런 말의 뉘 앙스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설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 을까? 설교의 위기. 이것은 설교 자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설교를 듣는 청중 때문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두가지 차원에서 다 접근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요.
저는 먼저 설교자의 책임이 상 당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적으 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그 인격이 실추될 때 그 메시지도 그 설득력을 상실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 그 자체가 그 내용이 빈곤하다, 천 박한 설교들, 이 시대에 유행하는 천박한 설교들은 설교의 위기를 가 져온 한 원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 니다. 그러나 이 설교의 위기는 설 교자 때문만은 아니고, 저는 청중 들도 상당히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 각해요. 얼마나 오늘의 청중들이 설교에 대해서 진지한 자세를 갖고 있겠습니까? 청취의 자세, 이것이 설교의 질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설교가 영향력을 상 실한 한 중요한 원인이 청중들에게 있다는 쪽에서 주께서 말씀하십니 다. 왜냐하면 예수님하고 시비를 걸 수가 없잖아요? 설교자로서의 예수님, 흔히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나는 예수는 싫다고 말하 지 않습니다. 예수님 보고는 뭐라 고 그럴 수는 없고, 어떤 사람이 예수의 설교를 듣고도 변하지 않았 다. 그건 전적으로 누구의 책임입 니까? 그건 청중의 책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리켜 우리는소위 '씨 뿌리는 비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크게 하나님 나라라는 그런 일련의 메시지의 한 토막을 형성합 니다. 예수께서 해안 가에 띄운 배를 강단으로 삼아 말씀을 증거 하시고 청중들은 해안 육지가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는 그들, 그들이 그들의 삶에서 바람 직한 변화의 열매를 맺으려면 무엇 보다 진지한 청취의 자세가 필요하 다. 이것을 주께서 역설하고 계십 니다. 자,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이 라고 할 수가 있는 마가 복음 4장 9절을 한번 읽어 보세요. ' 또 이 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들으라 이것이 강조가 되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 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 다. 하나는 씨, 하나는 밭, 하나는 열매입니다. 씨와 밭과 열매. 자, 이 씨는 똑같은 씨였습니다. 똑 같 은 씨가 다양한 밭에 떨어졌습니 다. 어떤 밭에서는 30배 60배 100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씨가 떨어졌는데 어떤 밭에서 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밭이 잘못 가꾸어 졌다. 자, 네가지 밭을 주께서 말씀 하시죠? 네 가지 종류의 밭, 첫째 는 무엇입니까? 길 가. 둘째는 돌 짝밭, 세번째는 가시 떨기밭, 네 번 째는 좋은 땅입니다. 자, 이 네가지 우리 마음 밭을 대표하고 있는 말 씀울 반응하는 마음 밭을 대표하 고 있는 네가지의 유형의 밭 가운 데 오늘 설교를 청취하고 있는 여 러분의 마음 밭은 어느 밭에 속할 까요?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 자 수해서 광명찾아요. 나는 어느 밭 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길가를 생각해 봅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이들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예요. 왜냐하면 적어도 이들은 말씀을 들 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잘 못 들은 것이 문제예요. 일단 말씀 을 들었다는 면에서 이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우리가 간주할 수가 있 습니다. 교인이라면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은 어떤 교인 이었을까? 명 목상의 기독교인.이름뿐인 기독교 인,그러나 실제로 말씀에 대한 열 정도 없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말씀이 그 의 삶 속에 전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길가 .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가라는 것은 주로 팔레스타인에 서는 밭과 밭 사이에 난 길을 의미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로마의 영향으로 그 당시 이미 하이웨이가 닦아지고 있었습니다마는 팔레스타 인의 대부분의 길가라는 것은 밭과 밭 사이로 난 그런 길였습니다. 거 기에 농부들도 다니고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다닙니다. 또 지나가는 여행객들도 다닙니다. 한참 다니다 보면 그 길은 아주 빤들빤들해지고 아주 굳은 땅이 됩니다. 여기에 씨 가 떨어졌어요. 그런데 씨가 떨어 지자 마자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 까? 씨가 떨어지자 마자 새가 그 것을 쪼아 먹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 9절이 끝난 후에 9 절이 끝나면 몇 절이죠? 10절 이하 에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친 히 주님 자신이 해석을 하십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시는가 보세요. 자, 이 길가에 대한 주님 자신의 해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5 절입니다.'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 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 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 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이것이 주님의 해석이예요. 말씀이 길가에 뿌리워 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어요. 그런데 듣는 순간 즉시 로 뭐가 찾아왔습니까? 사단 마귀 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간 사람 들. 이것이 바로 길가와 같다. 이게 무슨 얘기냐? 도대체, 새를 무엇에 비교한 것이예요? 새가 사탄이다. 새가 그 씨를 쪼아 먹듯 내 마음에 말씀이 떨어져서 말씀이 내 마음속 에 들어가기 전에 그 말씀을 낚아 채 갔다는 말이죠. 마귀가 그렇게 했다. 그러면 마귀에 의해 말씀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 그래서 말씀 을 정말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오늘 같 은 교회 상황에서 어떤 사람일까? 저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습관적으로 교회에 오면 조는 사 람. 이것이 바로 길가를 대표하는 사람. 네, 존다는것 자체는 나쁜 것 이 아니예요. 졸 수도 있죠. 교회에 와서 너무 피곤해서 졸 수도 있죠.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떤 청 년 형제가 몇 주에 걸쳐서 계속 졸 아요. 제가 그래서 예배 끝난 다음 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왜 그렇 게 조느냐고 그러니까. '목사님, 목 사님은 우리 이민 생활을 잘 모르 실 거예요. 내 말도 아닌 영어로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러니 스트레스 받고 그렇게 직장 생활 하다가, 아버지 집에 들어 오기만 하면 저절로 잠이와요. '아 그렇구 나, 내가 저분들을 이해해 줘야겠 구나.' 이런 생가을 했어요. 저는 조는 것 자체가 무조건 다 마귀가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설교가 중간 쯤 진행 되었을때 조는 분들 은 이 설교자인 제가 상당히 책임 을 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 가 오죽하게 설교를 했으면 중간에 졸음에 빠지겠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앞에 앉아서, 뒤에 앉아서 졸 면 괜찮은데, 앞에 빤히 보이는데 서 조니까 어떤 설교자가 열을 받 은 모양이예요. 목사님이 그 옆에 있는 사람보고 '집사님, 좀 깨워요, 깨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 사 람을 깨우면서 중얼거리면서 이렇 게 말하더래요. '자기가 재워 놓고 누구보고 깨우래?' 그러니까 설교 자도 굉장히 책임이 있어요. 그런 데 문제는 어떤가 하면 초장부터 존다. 그리고 어쩌다 피곤해서 한 번 조는 것이 아니라 주일마다 존 다. 뭐 잘못된 것 아니예요? 그래 서 전혀 말씀이 들어 오지 못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재미있는 것 이 뭐냐하면 설교가 딱 끝나면 용 하게 깨어나요. 저는 이런 사람들, 그래서 말씀을 도무지 자기의 것으 로 삼을 기회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사탄의 역사도 있지 않으 냐? 진짜 마귀의 역사도 있지 않느 냐?.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데 사탄의 역사도 있을 수가 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가르 쳤던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습 니다. 많은 기독교 변증 서적들을 쓰기도 하고, 어린이 문학을 많이 쓰기도 했죠. 그런데 이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분이 쓴 책 가 운데서 'The screwtape letter' 라 는 책이 있습니다. 악마의 편지. 한국 말로도 번역이 되었어요. 왕 마귀가 조카 마귀에게 쓰는 편지예 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거기에 사 탄의 전략이 아주 투명하게 나타나 있어요. 그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 니다. 어느 날 영국의 노신사, 아주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노신사 한 분이 도서실에 갔어요. 책을 읽습 니다. 그러다 기독교 책이 하나 손 에 잡혔어요. 그래서 기독교 책을 읽다가 감동을 받기 시작합니다. 나도 이젠 제대로 믿어야 돼. 제대 로 신앙 생활 해야돼. 내 일생이 얼마 남았는데 하나님 앞에 설 준 비를 해야지.뭐 이런 도전을 막 받 으면서 숙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결단을 하고 새로와 져야 되 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은 중요한 생각입니다. 이 생각 때문에 이 사람의 인생이 바 뀔 수가 있습니다. 운명이 바뀔 수 가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생각이 지요. 이렇게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속에 무슨 생 각이 나냐하면 점심 시간이 다되었 는데, 그런 생각이 나요.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식당에 들 어 가서 밥을 먹는 거예요. 밥을 먹다보니까 식권증도 오고, 밥을 먹고 나니까 인생이 다 그런거지 뭐. 나라고 뭐 특별하게 이 나이에 와서 내가 다시 인생의 길을 바꾸 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점 심 먹고 나서 버스타고 집으로 돌 아 옵니다. 돌아 올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그때 악마는 이 버스 타고 집에 돌아가는 이 노 신사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짖습 니다. 그런 얘기예요. 저는 이런 이 야기를 읽으면서 이것이 오늘날 교 회당을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자, 교회와서 주일날 아침 말씀 을 들으면서 어떤 날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날은 그래도 좀 마음에 말씀이 와 닿습니다. ' 맞았어, 나도 새로워져야지. 나도 좀 제대로 믿어보고, 나도 신앙의 길을 추구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 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딱 드는 순간에 '오늘 설교가 길다. 왜 안 끝나나? 오늘 점심 메뉴가 뭘까? 점심이 괜찮더라 식당에 아주. 이 천원 IMF메뉴, 값도 싸고 그래서 식구들이 함께 내려가서 예배 끝나 고 식사하고 이분이 교회 출석하 는 매우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설교에 대한 관심 보다 점심 시간 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분도 있 데요. 어떤 자매님이 나한테 와서 일러바치더라고. '목사님 저희 남 편은 점심 먹는 취미로 나와요.' 그것도 안 나오는 것 보다 나아요. 그래도 괜찮아요.그러다 바뀔 수가 있으니까. 헌데 점심 먹고 이제 집 으로 가면서 마치, 잘 들으세요. 아무 일이 일어 나지 않았던 것처 럼 집으로 갑니다. 그때 이 사람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연상해 보셨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후서 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신이, 이 세상 신.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사탄 마귀는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인것처럼 행세합니다. 바로 그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 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복음의 광 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가지 못하 도록 사단이 방해하고 있다. 그렇 다면 여러분, 이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파고 들어오지 못하고 이 말 씀이, 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사단의 역사가 개제될 가 능성이 충분히 있지 않겠어요? 그 래서 도무지 말씀이 내 마음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씀을 빼앗긴채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고 견고하고 굳어 진 마음 그 상태로 오늘도 돌아가 야 하는 사람들. 길가가 아니겠어 요? 길가와 같은 마음 밭.
두 번째는 무슨 밭입니까? 돌짝 밭입니다. 돌짝밭.
저는 길가가 명목상의 기독교인 을 대표한다면 돌짝 밭은 피상적 기독교인입니다. 피상적 기독교인. 깊이가 없는 피상적 기독교인.진정 으로 이 사람도 뿌리를 내리지 못 한 기독교인을 대표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 이 피상적 기독교 인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설명을 하셨느냐? 16절 17절 한번 보세요. 16절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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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 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난 때 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옛날 청교도인들은 기독교인들에 게 3가지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3가지 적. 첫째는 사탄 마귀. 둘째 는 크리스챤의 적은 육신. 우리 안 에 있는 부패한 이기심.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 이것이 신 앙생활의 적이 예요. 또 하나 적이 있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 상. 이 잘못된 가치체계를 갖고 있 는 이 세상. 이 3가지가 바로 크리 스챤의 3대적이다라는 말을 했습니 다. 자. 길가와 같은 마음밭을 공격 하고 있는 사탄마귀라면 돌짝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육신입니다. 육신.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 부패 한 이기심. 쉬운 것.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 그래서 이것이 더 이 상 나에게 편리하지 않다면 쉽게 신앙을 포기할 수가 있는 사람들. 이것이 돌짝밭 같은 마음밭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성지 순례를 해보면 이스라엘에 가면 돌 짝밭이 아주 많습니다. 라임스톤이 이스라엘에는 석회석으로 많아요. 그러니까 실제 돌짝밭이 많고 돌짝 밭은 깊이가 없어요. 깊이가 없으 니까 이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 런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얘깁니까? 자. 처음엔 어떤 신앙생활에 대한 반응 을 보였어요. 정적 반응을 보였습 니다. 자. 다시 한번 보시면 여기 돌짝 밭. 16절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떻 게 받았다고 그랬어요? 기쁨으로 받았다. 정적 반응이 있었어요. 아. 맞아..말씀에서 동의도 되고 또 같 이 웃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은 혜를 받아서 울기도 하고 그리고 나를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간증도 할 수 있습 니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이 돌짝 밭은 교인의 이런 스타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서 은혜를 받 는 것 같아요. 간증도 하고 사람들 의 관심을 모읍니다. 그는 화려하 게 등장합니다. 바람을 몰고 등장 해요. 근데 어느날 보면 없어졌어 요. 바람과 함께 나타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게 돌짝 밭과 같 은 교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근데 왜 사라졌느냐? 나중에 알 고 보면 아주 치사하고 사소한 이 유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와서 누구 하고 싸웠다. 아. 나 그인간 보기 싫어 안 믿어. 정 보기 싫으면 다 른 교회로 가요.그렇다고 신앙을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근데 아예 신앙을 저 버린 사람들이 있 어요. 실제로 이런 사람도 있더라 구요. 어떤 분이 안 나와서 왜 교 회 안나오냐고 물으니까 그 부인이 아주 계면쩍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나중에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구 요. 에어컨이 시원하지 않아서 안 나온데요. 참..아. 근데 그런 것들이 실제로 신앙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일 수 있어 요. 어떤 분은 또 4층이라 못 오겠 데요. 엘리베이터가 충청도산이라 너무 느려 못 오겠다는 사람도 있 고. 우리 옛날 선배들은 어떻게 믿 었을까? 옛날 선배들.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그 신앙을 견디고 그 신앙을 지켰던 우리의 선배들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역경이나 환란이라는 것 은 그 신앙이 진짜냐 가짜냐를 테 스트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합 니다. 참된 신앙은 역경 속에서 견 딥니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역 경 속에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 다. 가짜는 역경이 오면 떠나갑니 다. 떠나가요. 더 이상 이것이 나에 게 유익하지 못하다. 편리하지 못 하다. 이기심 때문에 이 신앙을 포 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돌 짝밭같은 마음이예요.
중국에 모테똥을 통한 문화혁명 이 시작될 때 선교사들이 추방 명 령을 받습니다. 다 떠나갑니다. 마 지막으로 떠나가던 선교사 한 분이 자기가 전도했던 사람. 자기가 제 자 훈련을 시켰던 사람. 이제는 중 국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어 요. 그 목사님을 앞에 앉혀놓고 차 를 나누면서 이런 질문을 했대요. 이 선교사님이 걱정이 되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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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견딜 수 있겠소? 환란의 비바 람이 많은 핍박이 올텐데 견딜 수 있겠소? 신앙 지키겠소?"
물어봤어 요. 그랬더니 이 중국 목사님이 가 만히 있더니
"선교사님..차가 뜨겁 죠? 그러더니 티백을 빼더니
"이 티백이 이 물이 뜨겁다고 해서 들 어갔을 때 차가 맛을 잃어버리나 요? 아마 이 뜨거운 물에서 차는 진짜 맛을 낼 겁니다. 저는 이 신 앙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 환란 속 에서 주님 앞에 입증해 보이겠습니 다. 참된 신앙은 역경을 이깁니다. 믿으십니까? 역경을 견딜 수가 있 습니다. 그러나 돌짝 밭같은 마음. 혹시 내 신앙 생활의 행태가 바로 이 피상적 기독교인 돌짝 밭의 상 태와 방불한 것은 아닌지요.
세 번째로 세 번째는 뭐예요? 가시떨기 밭. 이 길가가 맹목상의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면 돌짝밭은 피상적인 기독교인이예 요. 그렇다면 가시떨기 밭은 세속 적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모습이라 고 생각합니다. 자. 이 가시떨기 마 음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저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 이 세상의 유혹입니 다. 이 세상의 유혹을 결국 이기지 못한 사람.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 합니다. 자. 가시 기운이 막아서 열 매를 맺지 못했다. 자. 주님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실까요? 18절. 19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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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 위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말씀을 막아서 결실치 못했다. 그 기운이 어떤 기운이예요? 가시 기운이예요. 그 기운을 무엇에 비 교했습니까? 세상의 염려, 재리, 유 혹, 기타 욕심. 세상의 가치 체계가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그 욕심. 그 욕망이 말씀에 대한 사모함보다 더 컸어요. 이사람 말씀에 대한 열정 이 없는 거 아니예요. 관심도 있습 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도 있어 요. 그러나 이것은 재물에 대한 욕 심. 세상에 대한 욕심이 더 컸어요. 결국 그래서 말씀에 대한 그의 사 모함이 그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 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비극. 성 경에 그런 비극을 경험했던 한 청 년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습니까?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이 예수님 앞 에 나왔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관원이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이죠. 그리고 그는 진 지한 구도자의 질문을 갖고 있었어 요.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좋 은 질문. 이 구도자의 목마름을 가지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 람은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 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했어요? 예수님이 사람 만날 때마다 전도하는 방법이 다 달라 요. 이 사람이 만약 재물을 잘 관 리할 수 있는 사람. 재물이 주인이 아니고 재물을 종으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면 재물 얘기 꺼낼 필요도 없어요. 그러나 이 사람은 재물의 욕망을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에 대 한 관심보다 훨씬 커다란 관심이었 어요. 이것이 신앙의 길을 가로막 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은 알았습니 다. 그래서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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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쫓을 수가 있겠 느냐?"
성경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심히 근심하며 떠나갔다. 결국 재물에 대한 욕심 을 그 사람은 이길 수가 없었어요. 재물이 그의 신이었습니다. 여러 분 재물을 가지는 것이 잘못이 아 니예요. 재물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 람은 재물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 까?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래서 재물을 만몬이라고도 말합 니다. 매모니즘이라고 하죠. 본래 만몬이라는 단어는
"나는 믿는다"
라는 단어에서 나왔어요.
"I believe"
나는 믿는다. 재물을 소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재물을 믿기 시작하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재물이 신앙이예요. 재물이 나의 신앙이예요. 재물이 나의 안정을 보장하고 재물이 나의 구원을 보장 하고 재물이 내 일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새 재물은 그 사람의 신이 되어 있 는 거예요. 두 신을 섬길 수가 없 잖아요.선택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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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이 가시 떨기 밭은 없을까요?
주님은 그래서 마지막으로 어떤 밭을 얘기하십니까? 좋은 땅 삼십 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었던 좋은 땅 이 좋은 땅의 정체는 무 엇입니까? 자, 본문의 20절 한번 읽어보십시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 씀을 듣고 받아 삼십배와 육십배와 백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자, 말씀을 들었어요. 그 다음에 중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받아"말씀을 받았다. 듣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받았다. 그런데 이 받았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이게 중요해요.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어떻게 받았 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자 비교해 보세요. 누가복음 8장 15절입니다. 같은 씨 뿌리는 비유를 누가는 어 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좋은 땅 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 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자, 여기서 말씀 을 듣고 그 다음에 받았다는 단어 대신에 어떤 단어를 쓰고 있습니 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어' 왜 듣습니 까? 설교를 왜 들어요? 그냥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지키어'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내 생활에 옮 기겠는가? 내가 들은 바 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는가? 지키겠는가? 이 순종이 중요해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열매는 없습니다. '지키어' 이것이 중요해요. 어떤 사람은 예 배를 많이 드린다. 그것이 자랑인 사람이 있어요.
"나는 이번 주간에 도 예배를 다섯번이나 드렸다."
"
오늘 하루 나는 성경을 다섯 시간 읽었다."
물론 나쁜 것은 아니예요. 다섯 시간 읽은 것은 좋은 것이예 요.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있으니 까 다섯 시간이나 읽었겠지요. 그 러나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두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서
"야! 나는 오늘 다섯 시간이나 먹 었다. 음식을 다섯 시간이나 먹었 다. 자랑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이렇게 물어 볼 거예요. 왜 다섯 시간이나 먹었냐? 먹기 위해 서 먹어요? 왜 식사하셨습니까? 먹기 위해서 먹습니까? 얻어진 에 너지 가지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는거지, 먹기 위해 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살 자고, 삶을 살자고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 들으세요? 듣 기 위해서 듣습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 붙들고 살려고, 어디에서 삽 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의 장에서 이 말씀 붙들고 제대로, 하 나님의 백성답게 살자고... 그래서 말씀을 받는거예요. 듣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 러분! 예배나 성경공부나 기도나 교회생활이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도피행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 상 살기가 하도 힘드니까 교회와서 성경공부하면 참 좋아요. 찬양하면 예배드리면 좋거든요? 그래서 나는 계속 교회에 나와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 이것은 잘못이예요. 도피 가 되면 안돼요. 그것은 무서운 도 피일 수가 있어요. 세상이 힘드니 까 교회속으로 도피하는 것이예요. 11세기에 유럽의 헨리 3세라는 유 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왕노릇하기가 너무나 피곤 했어요. 왕이 싫어졌어요. 아마 양 녕대군 비슷했던 모양이예요.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누가 제일 부러웠냐 하면 수도승이 제일 부러 워요. 수도사들. 저 수도원에서 하 루 종일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 들이 부러워졌습니다. 나도 수도사 나 되면 좋겠다. 여러분 그런 생각 해 보셨습니까? 제가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어떤 교인이 제게 와서
"목사님은 좋겠어요."
"왜요?"
"목사님은 하루 종일 성경읽고 기 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꼭 그 런것도 아니예요. 목사되도 힘든 것은 힘들어요. 그런데 이 왕이 같 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수도 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그 당시 유 명한 수도원, 그 원장이 리챠드라 는 원장이었는데 그 원장을 찾아 왔습니다.
"나를 수도사로 받아 주 십시요."
그러자 가만히 수도원장 이 보더니
"글쎄요, 수도사가 되려 면 중요한 규칙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실 수가 있을런지요?"
"뭔데 요."
"수도원의 생명은 순종입니다. 철저하게 순종하시겠습니까?"
왕의 자리에 있던 이 헨리3세가 예수 그 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손을 들고 맹세합니다.
"제가 철저히 순종하 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첫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지키셔야 합 니다. 그 첫번째 명령은 지금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요. 그리고 하 늘이 당신에게 맡긴 백성들을 제대 로 섬기십시요."
저는 주님이 같은 얘기를 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참 좋 지요, 이것 필요한 것이예요. 말씀 을 듣고 찬양하고 그래서 나는 교 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예요. 돌아가셔야 해요. 말씀을 들으셨습 니까? 말씀을 붙들고 사셔야 합니 다. 삶을 사는 장소는 어디에요? 가정입니다. 고통이 있어도 그 가 정의 한 복판에 서셔야 합니다. 직 장입니다. 흔들리고 있는 직장, 서 셔야 합니다. 흔들리고 있는 사업 의 장, 서셔야 합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셔야 합니다. 넘어졌다고요? 다시 말씀붙들고 일어서셔야 합니 다. 재기하셔야 합니다.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를 보내시는 삶의 장 한 복판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 기위하여 이 말씀을 듣고 계십니 까? 내가 좋은 땅과 같은 이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붙들고 내 삶의 장에서 하 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그 삶의 장의 한복판에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 을 필요로 하십니다. 오늘 나는 이 말씀을 붙들고 그렇게 주 앞에 영 광을 돌리기 위하여 이제 나를 보 내시는 그 곳으로 가겠습니까? 이 것이 바로 좋은 땅이예요. 어떤 목 사님이 어떤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첫날 설교를 너무 잘 했어요. 교인 들이 기대가 있었어요. 두 번째 설 교도 비슷한 설교를 하셨어요. 세 번째 주에도. 교인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새로 오신 목사님이 아마도 살매증에 걸린 모양이다. ' 살매'는 살짝 치매증세를 말합니 다. 똑같은 설교를 세번이나 했단 말이예요. 네번째도 똑같은 설교를 했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흥분을 했습니다. 정신있습니까? 목사님 똑같은 설교를 네번이나 했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고 합니다. 제가 오히려 질문을 드 리고 싶습니다. 언제 제가 여러분 과 나누었던 말씀을 순종하시겠습 니까? 똑같은 설교룰 했지만 이 말 씀을 순종한 흔적이 우리 가운데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이 말씀 에 순종했을 때 우리가 또 지켜야 할 새로운 말씀을 그 때 시작하겠 습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땅처럼 말씀앞 에 반응하고 있을까요?
기도하십시다.
세상이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그 러나 주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 씀듣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이 제 들으셨다면 이 말씀을 붙들고 사셔야 합니다. 가서 가정에서, 직 장에서 어려워도 우리는 삶의 한 복판에 서서 다시 우리의 사업을 일으키고, 다시 우리의 직장을 재 건하고, 다시 우리의 가정을 세우 는 삶을 이 말씀 붙들고 시작해야 합니다. 거룩의 말씀, 진리의 말씀, 능력의 말씀, 구원의 말씀 이 말씀 을 들었사오니 이 말씀 붙들고 살 겠습니다. 힘들어도 이 말씀 가지 고 살겠사오니 말씀의 주인되신 나 의 하나님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 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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