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첨부파일에는 각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3강 개화기의 조선과 미국의 선교사들
교재: 류대영, [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 본 발제에 있는 각주들은 류대영이 쓴 것이 아니라 발제자(공헌배)가 덧붙인 것이다.
제1부 미국의 한반도 진출과 미국 선교사
이 책은 개항기와 한말에 걸쳐(19-20세기 초)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생각과 활동을 한반도를 둘러싼 당시의 국제적 질서, 조선의 상황, 그리고 선교사와 조선인들과의 상호관계를 조명하는 데 있다.
이 책이 밝히는 관점은 첫째, 미국이 동아시아와 한반도로 진출하게 된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둘째, 기독교를 금지했던 조선에 어떻게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영향력과 활동영역을 확대해 갔는지를 다룬다. 셋째, 미국 선교사들과 조선정치인들과의 관계를 다루었다.
1. 미국의 북태평양과 동아시아 진출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조지아부터 메인(당시에는 매사추세츠의 일부)까지 길게 연결된 대서양의 연안 국가이었다. 그 당시 미국이 택한 정책은 남쪽과 서쪽으로 국토를 넓히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이 가졌던 가장 큰 힘은 엄청난 속도의 인구증가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팽창주의는 건국 때부터 천명된 것이었다. 미국이 마침내 태평양 연안에 진출하게 된 것은 1818년이었다. 미국이 대서양부터 태평양까지의 대륙 영토를 완전히 차지하고 난 뒤에도 팽창정책은 계속되었다.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미국의 최종 목적지는 청(China)나라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청(淸)과의 교역을 시작한 이후 미국의 상인들은 정부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장사를 했다. 이런 사정은 무역상들과 아울러 지나(支那)에 가장 많이 진출한 사람들이었던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이었다.
2. 조선의 개항과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입장
그 무렵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청(淸)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진출이라는 더 큰 이해관계의 테두리 속에서 결정되어 갔다. 이 과정 가운데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공화당 정권기에 동아시아에 대한 상업적 진출이라는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다. 조선과의 교역 가능성이 미국 정부에 처음 보고된 것은 1834년의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과 청의 교역로에서 조난당하는 미국 상선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난당한 미국 선원들에 대한 인도적 조치와 재산 보호를 조선 정부로부터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흐름 가운데 미국 정부로 하여금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도록 하는 데 빌미를 준 것은 1866(丙寅)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이었다.
한편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하여 일본은 조선과 수교를 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 모양새는 일본이 조선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고, 외교적으로 독립국임을 선포하는 효과가 있었다.
신미양요 이후에 조선에 대하여 어떤 접근도 하지 않던 미국은 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지향적인 정부가 등장하자, 조선과 수교하기 위한 노력을 다시 하게 된다. 조선 개항 문제가 미국 의회에 안건으로 상정된 것은 1878년 4월이었다.
한편 청나라는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운명은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뿐 아니라 청제국 전체의 안보와 직결된다고 여기던 청은 일본의 진출이 본격화되던 1870년대 중반부터 조선을 서구 열강과 수교하게 하여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 당시 텐진의 북양대신이었던 리홍장은 청이 조선의 종주국이며, 조선은 청의 속방임을 조약에 명문화 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 사람 슈펠트는 이를 거절했다. 슈펠트는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의 명성을 탐내어 조선 개항에 적극 뛰어들었지마는 “조선은 (지극히) 가난하며, 그 자체로서는 상업적 중요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미국의 자본가나 정책 입안자들은 조선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거의 아는 바도 없었다. 그리피스의 [은둔의 나라, 조선]이 1882년에 처음으로 출간될 당시 미국의 조선관에 대한 인식은 일본의 메이지 야심가들에 영향을 받아 조선을 경멸하는 자세로 보고 있었다. 즉 조선은 독립심이나 애국심은 없고, 지나(明)에 맹종하는 낙후된 나라였다가 개항이후에는 청, 일본, 러시아의 각축장이 된 희망 없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피스는 조선이 성공하지 못한 까닭에 대해 ‘일본처럼 교육받고, 깨어 있으며, 지적인 지도자들을 갖지 못한데 있다’고 봤다.
조선의 조정은 청, 일본, 러시아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충돌하는 위기 상황 앞에서 자신을 도와 줄 상대로 미국을 지목하고, 부국강병을 지도할 고문을 파견해 달라고 여러 차례 미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 열강의 이해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미국정부는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미국이 추구한 것은 그저 조선과의 무역에서 생기는 상업적인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보잘 것 없었다. 1894년부터 1904년 사이인 10 여 년 동안 조선과의 교역량은 미국 전체 무역의 백분의 일 퍼센트 에도 미치지 못했다.
고종과 친미적인 관료들은 미국이 조선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노른자위 이권을 미국에 수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금광이었다. 그 당시 평안북도의 운산금광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개발권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의 상업적 가치와 미국이 가질 수 있는 기회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밝히는 보고를 계속하였던 사람은 선교사였다가 미국의 외교관이 된 알렌이 이 점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이러한 미국에 대한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그 당시 미국의 입장은 제국주의의 경쟁이 치열한 한반도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었다.
북경주재 미국공사 존 영은 미국이 조선 및 일본과 수교를 맺은 것은 미국의 “문명”이 주는 혜택을 전해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아시아에 대해 공격적인 목표나 계획, 즉 제국주의적인 욕심을 갖고 접근하는 유럽과는 달리 (동아시아에 대해서만큼은) 미국은 어떠한 정치적 음모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를 원했던 고종은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닌 완전한 독립국이라는 점을 미국과의 조약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1876년 일본과 수교한 이래로 적어도 미국이 가졌던 입장은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이라는 사실이었다. 조선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적어도 미국은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땅을 탈취하는 경향”은 보이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미국이 한반도에서 공평무사하고, 정의로운 태도를 보였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이 극동에 진출한 나라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다른 열강들처럼 무력시위를 하지 않고도 한반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많은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3. 미국 선교사와 미국 정부
이런 상황 가운데, 미국의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은 선교 사업은 근본적으로 사(私)적인 일이므로 선교사들이 알아서 진행하게 내버려 두되, 선교사들로부터 요청이 있을 경우 필요에 따라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미국 공사들은 선교 사업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선교사들에게 조선 정치에 개입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한번은 고종의 요청을 받은 미국공사 실이 주선하여 선교사 몇 명이 돌아가면서 고종의 침소 근처에 가서 권총을 품고, 야간경비를 서려했다. 이런 차에 고종을 성밖으로 구출하려는 시도(이른 바 “춘생문 사건” 11월 28일)를 하였지만 실패했다. 춘생문 사건에 미국 선교사들이 가담했다는 소문이 났고, 이에 대해 일본 신문들은 미국 선교사에 대해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절대 다수의 선교사들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서 선교지를 개설하고 확장하는데 전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예외적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을 반대했던 사람은 감리교 선교의 개척자인 헨리 아펜젤러이었다. 호머 B. 헐버트도 이런 예외에 꼽힌다. 헐버트와 언더우드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의 정치적 운명에 대해 동정적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극히 예외적인 선교사들이었다. 조선과 처음으로 수교하고 진출한 미국 정부를 따라 온 선교사들은 미국 정부가 조선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홀로 내버려진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내버려짐으로 인하여 선교사들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과는 상당히 분리 될 수 있었으며, (기독교 혹은 선교사)스스로가 지닌 매력과 한계를 가지고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성공했다. 그러나 그 매력의 배경에는 그 선교사들의 뒤에 자리 잡고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발휘한 실제적 혹은 가상의 힘이 선교사들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평 가 이 책에서 류대영은 미국 선교사들에 대해 객관적 평가를 시도했음과 동시에 긍정적 평가를 한 셈이다. 그 당시의 조선은 서유럽의 계몽적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이었으며, 이에 따라 열강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는 지푸라기하도 잡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실각이후 보다 더 많이 드러난 친미, 친일, 친러파들은 각자들의 견해를 따라 국운을 놓고 왈가왈부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저자는 미국 선교사와 약 100 년 전 한미관계사를 연구하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으려 했던 민비의 정책은 상대적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물론 이 책이 추구한 것 자체가 미국 정부와 선교사들과의 관계에 따른 것이므로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도 지적했듯이 그 당시의 한반도 상황의 가장 결정적 변수는 일본과 러시아이었지, 미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 따라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낼 수 없었음은 지당하다. 류대영 역시 이 부분을 지적했다. 서유럽의 식민지들이 침략과 약탈을 당하였고 그로 인한 서유럽의 상인들과 선교회들의 진출이 괄목할 만 했다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선교회들의 활동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조선인들은 미국을 적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일본을 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제적 역학관계로 볼 때 이는 미국이 도덕적인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상대적 무관심이 그들을 선하게 보이게끔 만든 것이라고 류대영은 평가를 했다. 그의 평가대로 하면 미국이 조선에 대해 야욕을 가진 것이 아니라 조선이 미국을 짝사랑 한 것이었다. 과거 이성계가 역모를 통해 세운 정권이 명(明)나라를 지나치게 짝사랑 하는 바람에 조선은 일본과 후금으로부터 그럴 수 없는 고통과 수모를 당하였다. 그런데 구한말 고종은 그 짝사랑의 대상을 미국으로 옮기려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류대영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 당시의 상황이 오늘날 한반도 주변의 정세와는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선은 난이 일어나든 구테타가 일어나든 간에 항상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도 그랬다. 그것이 그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연장 선상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미국을 짝사랑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이 미국을 사랑하는 만큼 미국도 한국을 사랑하고 있을까?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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