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3대 정의
사무엘하 23장 13-17절 - 주일설교(100131)
<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 >
요새 누가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하면 나이에 따라 미혼 여성들의 반응이 다르다고 합니다. 20대 초반에는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해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와 줍니다. 20대 후반에는 아직도 환상에 빠져 외모와 키를 따지다가 못 이기는 척 나옵니다. 30대 전반에는 현실에 눈을 떠서 직장과 집안과 사람됨을 묻지만 결론은 항상 “예스!”입니다. 그러다가 30대 후반이 되면 너무 반가워서 울면서 메모지를 들고 만날 장소를 받아 적는다고 합니다.
드디어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반응도 다릅니다. 20대 초반에는 애프터를 신청해주기만 기다립니다. 20대 후반에는 은근슬쩍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고 애교를 떱니다. 30대 초반에는 강제로 집에 데려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시킵니다. 그러다가 30대 후반에는 그 동안 시집가려고 모아둔 통장을 꺼내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 유머를 보면 “세월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가져도 세월은 사람을 금방 가난하게 만듭니다. 외모, 재산, 그리고 힘도 세월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은 힘이 있으면 과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본능을 억제하고 더욱 겸손하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무슨 수단을 쓰시더라도 그 마음을 꺾으십니다.
본문 다음 장인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인구조사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구조사에 “내가 이런 나라를 이뤘다!”는 다윗의 과시욕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일로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돌고 백성 7만 명이 죽습니다. 그때 다윗은 철저히 회개합니다. “주님! 백성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대신 저와 저의 가문을 치소서!”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가서 “회개의 제단을 쌓으려고 하니 네 타작마당을 팔라!”고 말합니다. 그때 아라우나가 기쁘게 타작마당을 내어놓습니다. 그곳에서 회개의 제단을 쌓자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고, 훗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집니다.
아라우나는 나라에 화를 끼친 다윗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은 세상을 바꾸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썼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타작마당을 기쁘게 내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그처럼 원망과 비판은 최대한 줄이고 회개와 헌신은 최대한 늘리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축복합니까? 겸손한 사람, 적게 가지나 많이 가지나 신앙이 변치 않는 한결같은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이 이뤄지도록 자신을 드릴 줄 아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아무리 이름 없는 들풀과 같은 존재도 아라우나처럼 소중한 일에 자기 것을 내어드릴 줄 아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세상은 변화되고 교회는 든든히 세워집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본문에는 아라우나처럼 헌신한 세 용사가 나옵니다. 다윗 왕정에서 최고서열의 군대장관은 요압과 아마사였고, 일반장군 중에 최고의 첫째 3인은 본문 앞 8-12절에 나오는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그리고 삼마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30인의 군장들이 있었는데 그 군장들 중에 대표가 둘째 3인인데, 그들은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군장입니다(18-23절). 본문에는 그 둘째 3인이 다윗을 위해 헌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의 헌신과 충성을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1. 깊이 잘 듣는 것
본문 14-15절을 보면 다윗이 참 철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군대가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 성에 있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는데 그때 말합니다. “아!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 누가 나로 저 물을 마시게 할까?” 베들레헴의 우물물은 다윗이 어렸을 때 자주 마시던 깨끗한 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어렸을 때의 향수에 젖어서 리더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런 말은 부하들의 가십거리가 될만한 말이었지만 세 용사들은 “요새 주군이 이상해졌어!”라고 가십거리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을 마음속 깊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말을 깊이 잘 듣는 것이 사랑의 기초입니다. 가끔 예배 후에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잘 들어준 그분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말씀을 잘 전하는 것만큼 말씀을 잘 듣는 것도 훌륭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일 부탁하기도 편합니다. “집사님! 이것 좀 해주실래요?” 그러면 항상 “네!” 하고 무조건 대답부터 하고 봅니다. 천사표 교인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인격과 신앙이 성숙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를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깊이 잘 듣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말씀에 대한 존경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자신이 높은 줄 알면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침묵하던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고,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그때부터 축복의 역사는 놀랍게 시작됩니다.
또한 말을 깊이 잘 들으면 이해력이 커집니다. 이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고 오해는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가정이 왜 힘들어집니까? 대개 오해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가사 돌보는 일이 쉽다고 오해해서 “나는 밖에서 이 고생을 하는데 집에서 낮잠만 자면서 웬 불평이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사처럼 매일 반복되면서 별로 생색나지 않는 일은 생색나는 일보다 몇 배 힘듭니다.
남편은 기본적으로 아내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속으로 “여보! 이렇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로 아내도 남편에 대해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하면서 너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 자세히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신이 아닌 사람이 어떻게 마음까지 알아줍니까?
이제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면 사단이 슬쩍 찾아와 그 생각을 증폭시키고 은혜와 축복을 짓밟습니다. 물론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속상합니다. 그래도 그때 열심히 기도해서 그런 생각을 물리치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차라리 내가 그 마음을 조금 더 알아주자!” 그 순간, 사단은 숨이 막혀 도망치고 성령님이 주시는 지극한 위로와 평강이 넘치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떤 일을 부탁받을 때 “No!"라는 말보다는 “Yes!”라는 말을 할 구실을 많이 찾습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Yes!”라는 말을 잘할 줄 아는 훈련을 하십시오. 무조건 “예스!”만 하는 ‘예스맨’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예스!”라는 말을 하면서 남을 격려하고 분위기를 띄워주는 ‘예수맨’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남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양보하면서 보다 큰 것을 얻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십시오.
2. 조용히 행동하는 것
그때 세 용사는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먹고 싶다는 다윗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고 조용히 물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있던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왕복 100리 길을 오직 물을 구하려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처럼 그들은 다윗을 어리석을 정도로 사랑했고 논리를 초월해 충성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조용히 헌신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어느 날, 이사야가 존경했던 웃시야 왕이 죽자 상심한 마음으로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때 어두운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그때 이사야가 고백했습니다. “하나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그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겠습니까? 가끔 보면 어떤 분은 어려운 일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그것을 맡겠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너무 기쁘고 마음에 흥분과 감동이 생깁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헌신합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사역에 필요한 것과 기도제목에 반응해 조용히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그분들을 축복하소서!” 그러면 어느새 그분들의 환한 얼굴이 기도 중에 영상으로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온갖 목회의 시름과 스트레스가 다 사라집니다. 그처럼 조용한 헌신은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최대 청량제입니다.
왜 그때 세 용사가 다윗에게 “물을 구하러 다녀오겠습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다윗이 그 우물물을 먹고 싶어도 갖다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조용히 행동한 것입니다. 그처럼 조용히 행동할 때 더욱 감격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못하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만 세 용사처럼 말을 안 해도 리더의 마음을 읽고 어느새 리더가 원하는 일을 해버리면 감동이 배가됩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칭찬하는 말과 분위기를 밝게 하는 말을 많이 해주고, 꿈과 비전을 격려하고 믿음을 선포하는 말도 많이 해주십시오. 그러나 때로는 말없이 음지에서 봉사하는 시간도 많이 가지십시오. 특히 중요한 전략과 꿈과 비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들은 너무 쉽게 발설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단이 끼어들어 그 말과 정보를 왜곡해서 비전을 방해합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을 얼마나 많이 겪습니까? 그래서 인사 문제는 발표 전까지 그 내용을 극비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합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하나님의 때에 앞서서 말이 먼저 나가게 하지 마십시오. 물론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말은 많이 해주십시오. 그러나 고급정보와 전략은 비전동역자 외에는 함부로 말해주지 마십시오. 그처럼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서 동시에 말없이 은밀하게 교회를 섬길 때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가 교회와 각 가정에 넘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인생에는 2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여자의 길이고, 또 하나는 방관자의 길입니다. 참여해야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들러리 인생은 되지 마십시오. ‘주님의 신부’가 ‘신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교회를 위해 조용히 행동하는 성도는 되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 주인공은 되지 못해도 중심인물이 되기를 힘쓰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에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자 나머지 10제자가 분개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좌우편은 섬기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축복을 원하면 ‘자리’에 신경 쓰지 말고 ‘섬김’에 신경 쓰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막 10:45). 결국 ‘주님 닮은 모습’은 교회를 잘 섬길 때 나타납니다. 그처럼 교회를 위한 정성스런 봉사는 이 땅의 축복과 천국의 상급을 저축하는 가장 복된 행위입니다.
3.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
결국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 와서 다윗에게 드렸습니다. 그때 그 우물물은 물이 아니라 피였습니다. 그들은 가장 소중한 자신들의 피를 드린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이 없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관계는 드림과 나눔을 통해 형성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소중한 일에 몸과 마음을 드리면 이상하게도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도 살아나고, 공동체의 사기도 살아납니다.
거목이 쓰러지면 그 쓰러진 거목이 거름이 되어 작은 나무들이 더 많이 생기듯이 교회도 부흥하려면 자신을 거름처럼 드려야 합니다. 취하려는 삶은 영혼의 갈증 나게 만들지만 바치려는 삶은 영혼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취하려는 삶은 눈물이 나오게 하지만 바치려는 삶은 노래가 나오게 합니다. 가장 복된 삶은 ‘취하려는 마음’보다 ‘바치려는 마음’이 큰 삶입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행복도 찾아옵니다.
지난주에 온라인 새벽기도 회원 한분이 이런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그 동안 새벽기도 말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 저도 헌신하고 싶었지만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는 상황에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그러나 이번에 결단하고 생활비의 십일조를 보내요. 작은 금액이지만 선교에 써주세요. 왜 저에게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이번 결단으로 생활이 더욱 어려워질지 몰라요. 그래도 너무 행복해요. 이 행복을 무엇과 비길까요?”
얻음은 행복이지만 드림은 더욱 큰 행복입니다. 이번에 저의 친구 목사님 가정이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에서 지극정성으로 섬겨드리자 제가 너무 행복했습니다. 결국 드리는 삶이 받는 삶입니다. 시성 타고르는 노래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배 안의 등불이 꺼지니 뱃전에 달빛이 차더라!” 세상 욕심을 버리고 더 많이 나누고 드리면 하나님은 더욱 크고 소중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어떤 분은 “드리고는 싶은데 여건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드릴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 거룩한 대박 인생 >
세 명이 용사가 가져다 준 우물물을 받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엄청난 헌신을 보고 다윗은 이기적인 감성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육신적인 욕망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소중한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물은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사람들의 피입니다. 저는 도저히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얼마나 감동이 되겠습니까? 부하들은 목숨을 각오한 은밀한 헌신으로 다윗을 감동시켰고, 다윗은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을 과감히 버림으로서 부하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때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더욱 비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결국 나라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헌신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덕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과 세 용사는 모두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하였더라.” 그들이 위대한 일을 했다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위대한 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제 모두가 예수 믿고 인물이 되기를 힘쓰고, 마지막 때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현재 가진 것이 작으면 큰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고, 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계속 기도하며 나가면 적절한 때에 ‘설움’은 ‘설렘’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그처럼 설움을 설렘으로 변화시키려면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을 기꺼이 지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비전에 필요한 것을 상세히 얘기하지 않아도 그 필요를 기도 중에 깨닫고, 알아차리고, 그 필요를 채우려고 하십시오.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되고 갑자기 어떤 큰 재화가 생기면 “대박이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것을 먼저 채우려는 사람이 진짜 대박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찬란한 내일이 약속됩니다.
이제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대박 인생을 위해 일어서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에 심취되십시오. 또한 다윗의 세 용사처럼 교회와 리더의 필요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위대한 이해력을 구하고, 소리 없이 헌신하십시오. 바로 그때 신앙은 한 차원 높아지고, 잃었던 활력은 다시 찾게 되고, 영혼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과 헌신을 통해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루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 설교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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