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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후의 심판의 교훈

by 【고동엽】 2021. 12. 16.

예후의 심판의 교훈 왕하10;30~31 09.11.22.남포교회 설교녹취

 

 

본문은 북왕조 이스라엘 왕 요람 때 그의 군대장관 예후가,

엘리사(의 종)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게 되는데요...

 

 

◑1. ‘하나님의 폭력성’이 말이 되는가?

 

▲예후의 개혁조치에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그 혁명의 잔인함과 광범위함입니다.

왕하9~10장에 예후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7가지 심판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①북왕국 요람 왕 죽임 *아합의 아들

②남왕국 아하시야 왕 죽임

③아합의 부인 이세벨 왕비를 죽임

④아합의 아들 70명을 다 죽임

⑤아하시야의 친족들을 죽임

⑥사마리아에서 북왕국의 왕당파(아합 계열)들을 다 제거

⑦바알 숭배자들을 다 죽임 (성경구절은 왕하9~10장에서 각자 찾아보세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무후무한 굉장한 혁명을 예후가 이룹니다.

 

▲문제는, 이 폭력적 혁명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허락’하셨고, 어찌 보면 ‘명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셨다 할지라도

이런 잔인한 방법을 허락하실 수 있느냐?’ ..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폭력성의 진의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에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속에서 이미 보아왔듯이

모든 잘못된 수단들은, 그 숭고한 목적마저 오염시킨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후가 동원한 수단이, 그 목적의 신성함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후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보면서,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정말 ‘의로우시다/선하시다/자비하시다’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우리 마음에 의문이 생깁니다.

 

 

◑2. 하나님의 폭력성은 ‘구원’을 위한 것

 

▲계시록19장에,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전투적/폭력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9:11,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겠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의 폭력성의 최고조>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폭력성의 절정은, 제 생각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최후의 심판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이, 반대하는 이, 거스르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최후의 심판’보다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십자가의 폭력'보다

더한 폭력은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폭력’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

충분히 이해 가능합니다.

무슨 폭력이라 해도..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찢어죽이신 폭력보다는 덜하니까요!

 

▲그 폭력은, 우리와 화목하기 위한 폭력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와 화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5:18~20

 

하나님의 폭력성은, 다름 아니라,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서 내미신 화해의 손이었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심판하고, 처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폭력성은.. 뜻밖에도..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하나님을 외면한 모든 죄인들을 돌이켜서,

그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예후의 사건을 통해, 이런 답을 봅니다.

왕하10장에 예후의 혁명을 성경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하나님이 칭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왕하10:30

 

즉 예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폭력성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화해/화목하시기 위한 폭력성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시대의 죄악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후의 폭력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 구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예후를 보시고 '나 보기에 정작힌 일을 잘 행했다'고

오히려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예후의 폭력성을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안 됩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그 정신/그 사상이지.. 문자적으로 그대로 따라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3. 예후.. 그는 하나님의 종인가/ 아닌가? (여기서부터 이 설교의 본론)

 

▲그러나 예후는...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10:31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일

즉 아합 집안을 쓸어버리는 일에.. 예후가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하기를,

예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왕하10:30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화목하지는 못하였다고 설명함으로써 왕하10:31

결국 ‘그 인생은 실패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성경의 이름 있는 지도자들은 모두 폭력적(강인한/꿋꿋한.. 이란 뜻으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폭력성들을

사실 은연중에 하나의 기준으로 해서 성경의 인물들을 평가합니다.

 

모세..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바로를 친 자

엘리야.. 모든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합에게 대적한 자

다니엘.. 바벨론의 왕에게 굽히지 않고, 힘으로 버틴 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만 천하에 드러내었는데,

 

이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강인하고/폭력적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성’이란, 무조건 굽신거리지 않았다는 뜻, ‘강인했다’는 뜻)

 

이런 강인함, 꿋꿋함 (이란 의미의) 폭력성의 잣대로 본다면

위 3명과 나란히 ‘예후’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과 방불한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자’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일면)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왕하10:30

긍정적으로 예후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의 목을 벤 엘리야는 좋게 평가하고,

예후는 나쁘게 평가한다면.. 형평성에 어긋나잖아요?

모세도 어쨌거나 자기 때문에 수많은 장자들, 애굽의 군대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무엘도 아각을 칼로 찍어 쪼갠 일이 있습니다. 삼상15:33)

 

▲그러나 예후가 모세와 엘리야와 다른 점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가 되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동행한 자, 교제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예후가.. 모세/엘리야/다니엘과 다른 점입니다. 아래 구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10:31

 

◑4. 예후의 폭력성(강인함)을 동경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화목/교제/동행의 일상성을 동경하십시오. ←이 설교의 주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힘/폭력성/강인함에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 끌립니다.

우리는, 우리 현실 속에서 자기 신앙을 점검할 때마다

‘내 신앙은 이게 뭔가?’라며 모두 자기를 자책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예후 같은 폭력성,

모세 같은 용기,

다니엘 같은 꿋꿋함 같은,

그런 어떤 위인적인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게 뭔가?’ 하면서 스스로 자책합니다.

즉 ‘이 세상이 동경하는 더 큰 힘’을 내가 가지기를 소원하고,

‘세상의 관심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을 내가 갖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힘/폭력성/강인함에 매력을 느끼고 동경합니다.

거기에 영향을 받은 우리 각자도.. 그런 힘과 강인함(여기서는 폭력성)을.. 나도 갖고 싶어 합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우리는 자책하게 됩니다.

성경에 그런 인물이 안 나오면 몰라도,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큐티를 할 때 보면,

-바로 왕에 맞섰던 모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아합 왕에서 맞섰던 엘리야가 나오는데,

그 외 사무엘, 다윗, 에스더, 예레미야 등 숱하고 나오죠.

 

나 자신을 그 분들께 안 비춰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비교해 보면..

‘난 이게 뭔가?, 나는 지금 뭐하고 있나?’ 이렇게 자책하게 됩니다.

 

나는 너무 나약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 위인전/영웅전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러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슨 영웅이 되고, 자기 이름을 날리는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그냥 매일 일상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며, 화목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후를 보십시오.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강인하고/꿋꿋하고/폭력적이었습니다.

그 강인함으로 그는 아합의 집안에 예언된 심판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왕하10:30

 

그러나 성경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과 동행/교제/화목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10:31

 

▲여러분,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자꾸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식으로 설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양떼를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은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알렉산더’의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공한 재벌’의 모습으로도 오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돈을 많이 벌어서, 성도 1인당 얼마씩 나눠주거나

소득 몇 만불 시대를 약속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이 세상에 오신 모습, 그 분이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모델은

하나님과 교제/동행/화목하며 십자가를 지는 방식으로 영웅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호도하지 마시고, 호도당하지도 마십시오.

 

▲일상성..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새벽기도 드리고,

아침 먹고,

사무실 나가서 성경 읽고, 책 읽다가

점심 먹고,

교회 일 좀 보고, 또 설교 준비하고,

그러다가 눈이 침침하면 커피 한 잔 타서 마시고,

집에 와서 저녁 먹고

간단히 운동하고 (목 디스크 자가 치료)

TV뉴스도 보고

그러다가 잠을 잡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가끔씩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영웅적/강인함/꿋꿋함(폭력적)..’ 이런 것은 하나도 없고,

세상에 ‘보통사람’입니다.

이렇게 한 평생 살다가 가는 것이.. 세상을 정말 잘못 사는 것은 아닌가요?

 

아닙니다. 잘 사는 것입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일상성’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후는, 위대한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끄는 일을 이루었지만,

일상성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교제/화목/순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전생全生을.. 성경은.. ‘하나님의 종’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예후의 폭력성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후가 잘못된 것은,

일상성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교제/화목/순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고, 괄목한 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성/주님과 동행/교제/순종에서 실패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이 평범하게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일상성/주님과 동행/교제/순종에서 성공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참된 크리스천의 삶이란?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치열하게 살았고,

내 신앙의 신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하는 보상(축복, 번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제껏 배워왔습니다.

 

위인이 되는/추구하는 것은, 자랑스럽고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성경은, 위인이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주님과 화목/동행해서 매일을 사는 것이지

영웅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꼭 위대한 무슨 업적을 이루어야

신앙생활을 잘 한 증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종종 하나님과 나와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숨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일이요, 감추어진 사소한 일입니다.

그래서 누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참 신앙인인지.. 잘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비밀’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종 사람들이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드러난 신앙보다,

(세리와 창기의) 감춰진 신앙이 더욱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가?' .. 그런 평가를 하나님은 내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업에서 사원 평가하는 식으로.. 우리의 업적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로, doing이 아니라, being의 문제라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꿈과 야망'을 바치지 마시고,

여러분의 '매일의 일상'(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룸)을 주님께 산제사로 바치십시오. 롬12:1~2

 

'사도행전 29장을 우리가 쓰자' .. 저는 이런 구호를 들을 때.. 좀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그 순수한 뜻을 제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한 가지 조심스러운 것은, 이런 구호가)

뭔가 기독교 신앙을 '영웅성/위인성'으로 몰고가려는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 '일상성'에서 실패한다면.. 사도행전을 39장까지 더 쓰더라도.. 그것은 실패입니다.

 

세상은.. 신화 창출/실증적/실용적.. 한 마디로 '업적이 그가 누구인가 말해 준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에도 그런 것이 영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최우선/본질은 아닙니다.

 

저(설교자)의 위대한 점이 혹시 한 가지 있다면

'위대하지 않기로 결심한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늘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 존재와 내 생애는 지금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실증적인(성과로 증명되는) 어떤 업적이 아닙니다.

 

야망을 운운하면서, 여러분의 인생을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로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그 삶이 ..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미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거울을 한 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거창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겠는가? (농담)

 

그렇게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드라마를 연출하십시오,

당신이 주연배우이고, 당신이 관객이고, 당신이 연기하는 (모노)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런 드라마를 꾸며 가면서.. 늘 행복해하는 일상의 크리스천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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