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은 혜 의 축 제 / 신명기 16:9-17

by 【고동엽】 2021. 12. 15.

은 혜 의 축 제

신명기 16:9-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예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신 것처럼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로부터 요한계시록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섭리하시고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비밀들을 보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아라’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이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시키는 절기를 크게 셋으로 주셨습니다. 그 절기가 바로 유월절, 초실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오는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될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그 집안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호를 받고 피가 없는 애굽 사람들은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이 항복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 피가 있으므로 재앙이 건너갔다 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가장 중요하게 지킵니다.

초실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후에 50일이 되던 때에 광야에서 십계명을 받는데 그래서 광야교회가 탄생됩니다. 그런데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월절이 지난 지 50일 되던 때 첫 열매를 거둡니다. 그래서 처음 열매를 거둔다고 해서 초실절, 칠칠절로 표현합니다.

또 가을이 오면 농사를 지어서 모든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고 장막에서 7주동안 하나님께 감사하는 수장절, 장막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 먹던 때를 기억하고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하나님 앞에 즐거운 축제를 갖는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 20살 이상 되는 남자는 반드시 1년에 3차례씩 이 절기에 참여토록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근동 80리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너희는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이 절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 절기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 절기는 아무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못지켰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만 지켰습니다. 똑같이 출애굽을 했지만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를 못지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절기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은혜받지 못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절기의 축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 잔치, 공동체의 기쁨을 말하는데 광야에서 죽은 사람은 탄식하며 괴로워하다가 죽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만이 이 절기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절기의 축제의 깊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그냥 탄식하다가 인생을 끝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종류로 구별합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가나안 땅에 있는 이스라엘, 똑같은 이스라엘 백성인데 애굽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 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왔을 때는 광야라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마음속의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광야에서 배회하다가 다 죽고 여호수아, 갈렙과, 제2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와, 절기를 지키는 행복을 얻게 됩니다.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첫째 애굽 신자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는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택함을 입었지만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세상과 짝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광야 신자입니다. 광야 신자는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와서 광야에 있듯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여전히 은혜를 받지 못한채 괴롭게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 사람도 아니고 교인도 아니고 어정쩡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가나안 신자입니다. 이 세상을 완전히 별세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신령한 신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절기를 이 속에 감격하며 지내는 신자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이끌어내어 교회로, 교회에 온 광야 신자들을 이끌어내어 천국의 맛을 볼 수 있는 신령한 신자로 변화시킵니다.

자기 자신이 광야 신자인가 가나안 신자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 신자는 교회에 오기는 왔는데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입니다. 가나안 신자는 광야를 빨리 청산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젖과 하나님의 신령한 꿀로 채우면서 내 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는 은혜받은 자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자기를 별세시킨 자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고, 자기에 대하여 죽고, 과거에 대하여 죽고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살게 만든 자를 구약적인 용어로 말하면 가나안 신자, 신약적인 용어로 말하면 신령한 신자, 별세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러한 절기를 지킬 때 절기를 지키는 자의 세 가지 은총을 여기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15절)

은혜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은혜받고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애굽의 세계, 세상의 세계를 못잊어서 거기에 매여있는가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을 사나’ 이렇게 묻는다면 행복하게 살려고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어디에 즐거움이 있나 어디에서 즐거움을 얻나 인간은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즐거움은 하나님 앞에서 얻기까지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나는 안식이 없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기까지 이 세상의 즐거움은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있고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있는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했고 솔로몬은 세상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누렸던 다윗은 그의 즐거움이 영원한 것이요, 하늘의 즐거움이요, 환난이나 곤고나 어떤 역경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낙으로 즐거움을 누렸던 솔로몬은 일시적인 것이요, 공허한 것이요, 결국 후회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모든 낙을 누리려고 했지만 모든 것이 다 헛되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진짜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서 얻는 즐거움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처럼 살아가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인생의 어떤 낙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즐거움은 없습니다. 기왕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을 얻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빨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광야에서 배회한 만큼 자기 생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에 보면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라고 했습니다.

포도주와 젖이 뭡니까? 포도주는 즐거움이고 젖은 만족입니다. 사람들은 목마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만족을 얻을까, 즐거움을 얻을까’ 해서 참 양식도 아닌 것에 돈을 쓰고 만족할 수 없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전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인생을 즐겁게 살 수가 없습니다. 모든 즐거움을 여기에서 얻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 돈을 갖다 뿌리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돈을 쓰지만 그것으로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돈 벌지 않고도 얼마든지 만족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헤매고 있느냐”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즐거움을 얻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함을 얻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은혜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즐겁게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결코 즐거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 즐거움을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았기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둘째, 나눔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14절)

여기 ‘연락하되’라는 말은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이 즐거움은 사랑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 이웃과 나눔으로 맛보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즐거움은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대상이 셋입니다. 첫째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 둘째는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셋째는 객과 고아와 과부입니다.

자녀와 노비는 한 집에 살고 있는 권속들입니다. 집안 식구들끼리 즐겁게 살라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일하는 주의 종들입니다. 교회에 와서 목사님을 볼 때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이웃과 서로 나눔으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독점해서는 안됩니다. 하늘은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누어야 합니다. 나의 감사가 다른 사람에게 원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즐거움이 다른 사람의 슬픔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즐거움이 모두의 즐거움이 되도록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의 은혜가 됩니다. 천국은 공동체의 즐거움을 나누는 세계입니다. 너와 내가 함께 즐거워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을 공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절기는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의 즐거움이요, 축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절기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16-17절)

이것은 소망의 즐거움인데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입니다.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 이 구절 때문에 시험드는 사람이 있고 은혜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빈손으로 여호와께 오지 말라? 야 복받을 기회다.’ 하고 하나님 앞에 올 때마다 빈손이 아니고 그 손에 무엇인가 들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저희 어머니와 외가에 갔는데 우리집이 너무 너무 가난하니까 가지고 갈 것이 없는데 어쩌다가 저희 어머님이 이웃집에서 닭을 빌려가지고 잡아서 몰래 싸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것을 잡수시면서 담화를 나누시는데 그때 하신 말씀 중에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네가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도 고마운데 뭘 이런 걸 가지고 왔니 네가 가난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것을 잡수시는 것입니다. 그때 어린 제 마음속에 ‘저것이 바로 부모를 감동시키는 효심이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린 소년이 누워서 그 음성을 들으면서 할아버지 눈에서 나는 눈물이 내 눈에도 어립니다.

‘그냥 와도 되는데 뭘 가지고 왔느냐’ 하시면서 흘리시던 눈물은 하늘의 눈물이요, 부모의 눈물이요, 자녀됨에 대한 사랑의 눈물인데 그 눈물을 흘리게 만든 자녀는 적은 것으로 아버지 마음을 감동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는 부흥회를 갈 때마다 두 가지 은혜가 저에게 있습니다. 하나는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면 ‘평생에 이런 말씀 처음 듣습니다. 너무 너무 행복합니다.’ 하면서 은혜받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또 하나는 무엇인가 손에 쥐어주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즐거움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입니다. 부모에게 드리는 자녀의 즐거움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초실절, 수장절에 바치는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심령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즐거움을 얻으시고 내 가정에서 가족의 즐거움을 얻으시고, 내 이웃들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즐거움으로 우리의 생애가 온통 즐거움으로, 축제로, 잔치하는 삶으로 이어지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