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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세 의 자 유 / 갈라디아서 5:13-16

by 【고동엽】 2021. 12. 15.

별 세 의 자 유

갈라디아서 5:13-16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유를 얻기까지는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이 자유인이 되기까지는 그 인격이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사람됨, 그것은 곧 그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살도록 만드셨고 우리들에게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에덴 동산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사는 그곳에 에덴이 있고, 행복이 있고, 삶의 풍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그 자유를 잃어버리고 죄의 종이 되었고 자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완전히 타락한 존재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자유의 회복이며, 이것은 바로 구원이고 인간의 행복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자유인으로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자유와 해방으로 설명합니다.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최고의 은총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복음인데 이 복음을 알면 너희가 자유인이 된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자유로운 존재로 살도록 하나님이 불러 주셨다.”(갈5:13)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택했다, 구원받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게 살아야 됩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은 건강입니다. 병들면 자유가 없습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우리 육체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결박을 당하면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결박당하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야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난해도 자유가 없습니다. 너무 배가 고프면 배고픈 것 때문에 자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어 과식하면 자기 몸에 자유가 없습니다. 배고파도 자유가 없고 너무 배부르게 과식을 해도 자기 몸에 고통을 주고 인체 전체를 결박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의 본성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술 마실 때는 자유지만 술을 마시고 나면 술로부터 자유를 잃어버려 술 정신으로 제 몸을 제 맘대로 못합니다. 마약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가 자유롭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정신적으로 자유를 누린다고 할 때 우리 마음속에 근심이 없어야 됩니다. 걱정이 없어야 되고 우리 마음속에 사상과 배움이 건전해야 됩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에 빠진다든지 잘못된 철학에 의심을 갖게 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결박되어서 부자유한 존재가 됩니다.

세 번째로 영적인 자유인데 이것은 양심의 자유입니다.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심지어 마지막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이 영적인 자유요 해방입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한다든지, 죄를 지으면 예배시간에도 양심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율법으로부터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이 참 행복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는 자기도 자유롭게 해야 하지만 남도 자유롭게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갈5:13) 라고 말씀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자유.

우리의 모든 자유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자유나 정신적인 자유도 사실은 냉정히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가 주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온전히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육체도 자유로워지고 마음도 자유로워집니다. 우리의 과거로부터의 모든 죄와 죄책과 양심의 가책에까지 자유로워집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에서 멸망할 사단의 종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우리는 자유해야 합니다. 결박에서, 율법에서 풀어주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가지고 자유를 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한 자유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피 값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그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죄인을 사랑하고 불의한 자를 사랑하며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대신 값을 지불한 그리스도의 소중한 은혜, 그 은혜를 알 때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수천년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민주화 투쟁, 독재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노예 해방, 모든 해방은 다 수 없는 피를 흘리고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려서 우리의 죄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자유를 얻고 있습니까? 옛날을 생각해 본다면 상상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고 산다는 것이 엄청난 축복입니다.

 

둘째, 자기와 싸워서 얻는 자유

지금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참 자유를 그리스도 안에서 얻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갈 5:13)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가지고 자유를 남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육체는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을 아니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육체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욕구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정욕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피 흘려 준 자유라도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고 나는 그 자유를 지키고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여러분은 자유하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저속한 본성의 방종으로 바꾸지 마십시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별세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신비한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별세해서 보혈의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그 자유를 내가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나도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주님의 자유는 별세한 만큼 얻게 됩니다.

인간의 자유란 육체의 정욕을 벗어나지 않는 한 어떤 자유도 또 다른 본능에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당하는 설움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살 수 없으며 여행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돈을 법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 놓고 또 메입니다. 돈은 벌었으나 돈 때문에 근심이 생기고 마음이 악해지고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 또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육체의 정욕을 채워야 되고 부자는 부자대로 자기를 별세시키지 못하는 한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소유에 있는 줄 알고 끝없는 소유욕에서 갈증을 느끼고 있으나 그 소유로 만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큰집을 가졌으나 그 집으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많은 지식과 학위를 얻었으나 인격적으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 그것의 문제는 자기 자신의 육체의 정욕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 땅에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망언을 해도 잡아가지 않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방정하고 예의도 없고 상식도 없습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너도나도 떠들어대며 이 나라가 온통 인신공격으로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인터넷이 나와서 무명으로 공격을 합니다. 자유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오히려 악용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라고 고백합니다. 이 별세의 신앙을 가진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참 자유는 자기 정욕으로부터 해방을 얻는 것입니다. 정과 욕심, 자기 육체의 정욕을 못박아야만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이것은 바로 속박입니다. 무거운 짐은 마음속에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겉은 자유한데 속을 누르고 있습니다. 근심이 누르고 걱정이 누르고 미움이 누르고 있습니다. 압박입니다. 이것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쉰다는 말은 자유롭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자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라.” 주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그 자유가 온다는 말입니다.

오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왔습니까?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자유에는 외적인 자유와 내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외적인 자유는 투쟁으로 얻습니다. 정치적인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빈곤으로부터 자유, 공포로부터 자유는 전부 싸워서 외적으로 얻는 것입니다. 노예 해방, 민주화, 경제적인 자유는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옛날에는 노동자들이 전부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자가 강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옛날에는 기업주의 폭력에 의해서 학대를 받았지만 지금은 노동자들이 일을 안 해 버리면 끝납니다. 파업이라는 것이 거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자유의 싸움에서 얻는 결과들입니다.

그런나 이런 싸움은 아무리 해도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로움 같으나 자유는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적인 자유인데 이것은 자기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남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싸워 이기는 자유.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인간의 내적인 자유는 자기 자신을 이긴 것이요 이것을 극복하는 데서 비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9:23)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따라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너 자신을 죽여라. 십자가에 죽여라.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철저하게 복종시킨 사람은 억압과 학대 속에서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똑같은 까다로운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큰며느리는 예수를 믿고 작은 며느리는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큰며느리는 항상 얼굴이 훤합니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는 항상 뒷전에 가서 입만 열면 불평을 합니다. 자기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며느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를 죽여서 그 까다로운 시어머니 밑에서 환한 얼굴로 살았습니다. 남들이 볼 때 그 시어머니 뜻을 받든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작은 며느리는 항상 불평하고 짜증내다가 위장병이 들어 부잣집 딸로 시집와서는 기미가 끼고 얼굴까지 변해버렸습니다.

딱 한 가지, 예수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유로우니까 시어머니 말씀 정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는데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 믿고 외적인 것으로 얻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나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왔을 때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부형이 데리고 와서 “이 아이를 할 수 있거든 낫게 해 주시옵소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면서 “내가 네게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명하니 귀신이 나갔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너무 신기해 하며 물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아무리 해도 안되던데 어떻게 주님 이렇게 됩니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다.”

여러분 기도한다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 가서 별세의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 죽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보통 기도는 용모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나면 인상만 쓰고 나갑니다. 하나님 앞에 달라고 기도했는데 줄까 말까 의심하니까 인상만 쓰고 나갑니다. 그런나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기도하고 나도 용모가 변화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라는 말속에는 나와 같이 자기를 죽이는 기도를 해야 이런 유가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기도해서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 믿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근심이 나가야 됩니다. 악한 것이 나가야 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나가야 됩니다. 병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의 어린 아이에게서 잘못된 사상이 나가야 합니다. 습관이 나가야 합니다. 남편의 술 귀신이 나가야 합니다. 나가야 살지 안 나가니까 붙어서 집안 망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하는 영이 임해서 우리 안에 있어서는 안될 악한 어두움의 세력들이 물러가기를 축원합니다.

남을 미워하고 용서 못하고 원망하면 자유가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밤에 떠올리면 그 미워하는 사람과 밤새 같이 자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미움이 들어오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나갑니다. 기도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고 남을 죽이고 억울하게 했다면 결코 내 안에 자유가 없습니다.

안중근 선생이 어렸을 때 자기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벼루를 깨뜨렸습니다. 집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 하인이 “도련님, 내가 깨뜨렸다고 하고 매를 맞을 테니 도련님은 가만히 계시지요.” “그래? 안 된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안중근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 제가 이것을 깨뜨렸습니다.” 라고 고백했고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았습니다.

밖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하인이 안중근 선생이 나왔을 때 “도련님,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했더니 “좀 아팠다. 아프긴 아픈데 내 마음은 편안하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자유입니다. 만약에 거짓말을 해서 하인이 맞았다고 한다면 그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평생 양심에 가책이 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평안 얻기를 축원합니다. 다 주님께서 용서하셨으니 평안을 얻으십시오.

참 자유, 이것은 곧 자기의 해방이며, 승리자의 고백입니다. 자유는 승리자가 누리는 영광입니다. 패배자는 속박이요 그는 노예입니다. 전쟁에 지면 노예입니다. 남과 싸워 이긴 자는 승리자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자기와 싸워 이긴 자에게 자유가 있습니다.

남을 때린 자는 결심해서 때렸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 같으나 밤에 발뻗지 못하고 잡니다. 마음에 속박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아닙니다. 맞았을지라도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벌써 마음의 승리자입니다. 그런데 맞고 미워하면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완전한 패배자입니다.

전쟁에 지면 포로가 되고 속박 당하는 노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자유하다면 나는 패배 당한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에 평안이 없고 근심이 있다면 문제에 결박당한 패배자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있다면 미음에 결박당한 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내 마음에 자유가 없다면 패배자라는 것입니다.

이긴 자는 자유가 있고 진 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긴 자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모두 다 이긴 자로서, 승리자로서 십자가에 자기를 이긴 승리자로서 자유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자유

그런데 이 자유를 포기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14)

이제는 자유를 포기합니다. 사랑으로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는데 그대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이제는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높은 차원의 선택의 자유입니다.

자유에는 본능적 자유가 있고 인격적 자유가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때로는 망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식들이 자유롭다고 해서 가출하면 그에게는 벌써 죄악의 소굴로 빠져가는 망하는 길이 있습니다. 자유부인이 되겠다고 남편 떠나고 가정 떠나는 그 부인은 망하는 여자가 됩니다. 우리가 자유할 수 있으나 그 자유를 사랑으로 멜 때 진정한 자유가 됩니다.

사랑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사랑에 메이는 자유, 사랑의 메이는 종이면서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자유는 자기를 한없이 행복하게 합니다.

얼마 전에 제주도 세미나를 가는데 비행기 안에 신혼 부부들이 많이 탔습니다. 너무 너무 행복하고 싱싱한 얼굴들이 아름답고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탄 한 커플은 인상이 조금 좋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궁금해서 얘기하는 소리를 들어 보니 왜 다른 여자를 곁눈질해서 쳐다보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속으로 “너는 죽었다. 벌써 인생 살기 힘들어졌구나.”

여기서 중요한 사랑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부부가 되었다면 그 순간부터 다른 여자나 다른 남자 너무 오래 쳐다보면 안됩니다. 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다 포기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때 결혼의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할 때는 “내 아내를 괴롭히면 내가 자유가 없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말로 상처를 입혔다든지 성질을 내면 자기 아내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에 자기도 괴로운 것입니다. 자유는 같은 한 경지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에게 메이는 것이 싫어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 못 다니겠다고 합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러 나와야 하고 다락방도 드려야 하고, 십일조도 바치라고 하니까 복잡해서 안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온갖 잡신을 다 믿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추석 때나 설 때 많은 음식을 차려 놓고 비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나가면 그런 것 하지 않아도 되는 데 온갖 잡신 다 섬기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예수님께 메이면 천만가지가 자유로워질 것인데 예수 안 믿으니까 천만가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35년 전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교인들이 저를 생각해서 닭을 길러서 주면 한꺼번에 먹지 못하니까 묶어 놓고 심방을 다닙니다. 닭들 중에 은혜로운 닭은 모이 먹고 물 마시고 “아멘”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못 받은 닭은 “나를 왜 묶었냐? 목사라는 사람이 나쁘다. 이렇게 나를 묶어” 하면서 끈을 쪼아댑니다. 심방 갔다와서 거의 다 끊어질 것 같으면 다시 묶어 놓습니다. 이 닭은 모이도 먹지 않고 인상만 쓰면서 눈을 흘겨서 아주 야위며 독이 오릅니다.

어느 날 심방 갔다 오니까 얼마나 억척스럽게 끈을 쪼아댔는지 줄이 끊어졌습니다. 줄을 끊어버리고 담을 넘어 주인도 사납고 개도 사나운 이웃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닭이 담을 넘어가니까 개가 입으로 물어서 날개도 찢고 발목을 부러뜨리고 목을 집어 뜯고 창자를 뺐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네가 그럴 때부터 알아봤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에게 메이면서 예수 멍에를 메고 교회와서 목사님 설교 들으면 모이 먹고 “아멘” 갈 때도 “아멘” 하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설교 들으면서 “나 때린다.” 불평한다든지 하는 사람은 자기 심령을 불행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자유가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 당시 노예 해방을 시켰습니다. 매일같이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으며 살던 노예가 병이 들어 주인으로부터 하라는 일을 다하지 못한 이유로 심한 채찍에 피흘리도록 맞았습니다. 지나가던 백인 교수는 그 흑인을 산값의 배가 넘는 돈을 주고 집으로 데려다가 돌보아 주어 살려주었습니다. 흑인 노예가 몸을 회복하자 교수는 “당신 몸값을 치루었으니 당신은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 되었오 이제 돌아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흑인 노예는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은 포악한 주인의 손에서 나를 구해주시고 자유인이 되라고 하셨으니 이제 나를 자유인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라고 사정하여 그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랑으로 주인을 섬겼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식물학자로 연구차 태평양 섬에 갔습니다. 종은 숲을 헤치고 앞서 가는데 뒤따르던 주인이 독사에 물려 쓰러졌습니다. 독이 온 몸에 퍼져 살 길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종은 자기 살을 칼로 베어 독사에 물린 상처에 붙여서 독을 빨아올리도록 거듭했고 출혈이 심한 종은 쓰러져 죽었습니다.

주인이 깨어나 곁에서 피 흘려 죽은 종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은 종을 껴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무덤을 만들고「주인을 살리고 죽은 충성스런 종의 무덤」이라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자유인이 되었으나 자유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주인의 종이 되어 목숨을 바친 충성스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 몸으로 종의 멍에를 메지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받은 은혜를 따라 주님에게 메이고 그에게 생명을 바치는 순교자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순교자는 핍박자에게 억지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고 사랑으로 죽는 것입니다. 순교는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유인으로 죽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 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메이면 메일수록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은혜이며 내가 죽은 만큼 정과 욕심을 못 박아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별세의 은혜를 받게 될 때 자유를 누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서 이 자유를 위해서 헌신할 때 그 자유는 높은 경지로 승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그 행복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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