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각을 바꾸라
마 16:21-24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
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을 일을 생각하
는도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을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의 생각과 베드로의 생각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베드로를 보면서 그게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 베드로의 생각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죽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그동안 간직하고 있던 일급비밀을 말씀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제사장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 그렇게 죽으면 3일 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심각한 말씀입니까. 그때 예수님과 베드로간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제 1대화는 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만류합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안 됩니다, 결코 죽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만류했다는 말입니다. 제자로서 당연한 말입니다. 여기 베드로는 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죽도록 내버려 둡니까. 그리고 제자로서 예수님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할일입니다. 그래서 “결코 죽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만류했던 것입니다.
사명의 길을 가다보면 때로 이렇게 만류당할 때가 있습니다. 대학갈 때 아들이 갑자기 신학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온 집안이 한바탕 난리를 일으키게 됩니다. 모두 “결코 가지 못한다”하고 만류를 합니다. 그러면 결심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고기 잡는 어부들에게 가서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때 성경을 보면 베드로를 비롯해서 어부들이 그냥 그 자리에서 따라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사이에 있었을 과정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표현 그대로 그냥 따라 나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일 제자들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의논하고 상의했더라면 그들은 분명히 붙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가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밭을 갈던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서 음식을 만들어 동네사람들 모아놓고 잔치하고 따라나섭니다. 이것이 사명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사명자는 “이것이 길이다”하고 생각되었으면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을 합니다. 부활해서 제자들 앞에 탁 나타났습니다. 그때 제자들과 따르던 여인들 그리고 예수님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모두 우르르 몰려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주 매몰차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물러서십니다. 얼마나 냉정한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죽고 나서 제자들이 얼마나 낙심하고 허전해 했습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니까 물러나시면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은 냉정해서가 아니고 이 제자들이 이제는 떨어지지 않고 붙잡고 늘어질까 봐서 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이 갑자가 죽으신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보니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을 놔 주겠습니까. 그래서 붙잡고 늘어질 까봐 “나를 만지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40일 후에 다시 승천해야 합니다. 제자들과 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믿음으로 독립해서 스스로 서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단호하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신앙인의 길에는 때로 이렇게 단호하게 결단해야 하는 때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어야 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하고 만류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같았어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류가 때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로막고 할 일을 방해하는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 대화는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의기양양해 있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는 듯이 의기양양해 있습니다. 그것은 수제자인 나 자신이나 할 말이지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라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갑자기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셨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때로 의기양양할 때가 있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때로 “내가 사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을 조금 하고 나서, 헌금을 조금 하고 나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나서 아주 의기양양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행동은 큰 오해입니다. 더구나 지금 베드로가 의기양양해 있는 것도 참 우스운 행동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이렇게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조금 하고서 나타내려고 하고 의기양양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착각입니다. 교회에서 일을 많이 하려고 하는 것은 때로 자기만족일 수 있고 나타냄일 수도 있습니다. 일을 왜 혼자서 많이 하려고 합니까. 그렇게 일을 많이 하려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이 의기양양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우스키라는 분이 베토벤의 서곡을 연주하는데 지휘를 했습니다. 곡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트럼펫 연주자를 관중석에 앉혔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솔로로 연주하게 했습니다. 이 지휘자가 신나게 지휘봉을 휘두르다가 하이라이트인 트럼펫 연주 부분에서 관중석을 향해 돌아서서 지휘봉을 휘둘렀는데 소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 휘둘렀는데도 소리가 없습니다. 그때 모든 관중들이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니 무슨 꼴입니까. 그 순간 트럼펫 연주자는 수위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관중석에서 트럼펫을 들고 연주하려고 일어나는데 그 사람이 방해꾼인줄 알고 수위가 그 사람의 두 팔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 뒤로 젖히고 큰일이나 해낸 것처럼 의기양양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야 말로 이 연주회를 망친 장본인인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때로 대단한 일을 하는 줄 알고 이렇게 의기양양할 때가 있습니다. 참 우스운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안 됩니다, 결코 죽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의기양양해서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다” 하는 자세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 우리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생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씀을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갑자기 베드로가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렇게 사탄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탄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거치는 일을 하면 사탄이 됩니다. 사탄은 어느 무서운 형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방해자가 되고 훼방을 하면 그가 사탄입니다. 때로 우리들이 사탄의 역할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베드로도 지금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큰일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베드로는 지금 사탄이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말처럼 예수님이 결코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때로 사탄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대화입니다.
세 번째 대화는 23절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사실 우리들이 높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깊고 높고 넓어서 우리들의 지혜로 다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내가 사탄의 역할을 할 때도 있고 방해자나 훼방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여기 베드로가 예수님이 이제 죽어야 하겠다고 말씀했을 때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지 못하게 붙들고 늘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사탄 아닙니까. 그 깊은 뜻을 우둔한 베드로가 어떻게 깨닫고 알겠습니까. 우리들이 그것을 모르니까 답답한 것이고 때로 불평도 하고 탓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사탄의 역할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면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지가 죄라고 했습니다.
아프리카 우간다에 선교사 한분이 파송 받아 갔습니다. 그분은 심한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통 받고 있는데 마침 그때 선교비가 오질 않았습니다. 선교지에 가 있는 선교사에게는 하나님 다음이 본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입니다. 선교지에서 선교비는 전쟁터의 군인이 가지고 있어야 할 실탄과 같은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선교비가 없으면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몸은 아픈데 한 달 동안 약도 먹지 못하고 음식도 먹을 수 없어서 굶다시피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원망을 했겠습니까. 사람은 무슨 불리한 일이 생기면 원망부터 합니다. 사람은 이것이 체질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도 생활비가 오지 않으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한 달 동안 어렵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경험하고 몸이 좋지 않아 결국 귀국을 했습니다. 귀국해서 병원에 입원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의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고 굶어서 혹시 더 악화된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진지하게 진찰하던 의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병은 굶을수록 좋은 병입니다. 한 달 동안 굶었다니 당신의 병은 그렇게 굶었기 때문에 이 병이 자연 치료된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신비한 하나님의 섭리를 누가 알겠습니까.
베드로가 그 신비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깨달아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안 됩니다 결코 죽어서는 안 됩니다“하고 만류했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베드로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네 번째 대화는 24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 신앙의 길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주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크고 작은 유형의 십자가가 참 많습니다. 그 십자가가 주어지면 기쁨으로 질 수 있어야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그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시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고 때로 금식도 했고 직접 시험을 받기도 했고 울기도 했고 피땀 흘리며 부르짖어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지되 기쁨으로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던 그 무지막지한 십자가 일 수도 있고 또 예수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는 일 그것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또 오늘을 살면서 예수 때문에 때로 고민해야 하고 주저해야 하고 침묵해야 하는 때 침묵할 수 있고 고민할 수 있음 그것도 오늘 현대인들이 지는 십자가 일 수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 고민해야 할 때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아주 좋은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일본의 엔도우 슈사꾸라는 분이 지은 “침묵”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 크리스토퍼 페레라라는 신부가 등장합니다. 이 신부가 옛날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에 잠입해서 선교를 하다가 잡혀서 고문을 받다가 그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해서 배교했다는 소식이 포루트칼 교회에 전해집니다. 그 신부는 포루트칼 국민이 모두 존경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항복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모두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일본 군국주의가 고문을 심하게 해도 이 페레라 신부는 죽으면 죽었지 배교할 사람 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격분한 세 명의 제자가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잠입합니다. 그중 한명의 이름이 제바스티안 로드리고입니다. 이 사람이 또 체포되어 그 악명 높은 고문대 앞에 끌려 나갔습니다. 그 고문대는 “후미에”라는 것인데 나무판 위에 예수상이 새겨진 동판을 붙여놓고 그것을 밟고 지나가게 만든 고문 판입니다. 신앙인들도 체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아주 교묘하게 신자들의 체면도 살려주고 배교도 하게 해서 항복받아 살려주기 위해서 고안된 것입니다. 신자들을 검사관 앞으로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발밑에 예수상이 있는 고문 기를 놓고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발로 밟는 것은 검사관만 알고 아무도 모릅니다. 그 예수 상을 밟으면 예수를 배교한 것으로 알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밟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제자 로드리고가 그 앞에 섰습니다. 보니까 바닥의 예수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도 밟혀서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 앞에 서서 이 사람이 고민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배교해야 하나 아니면 그 끔찍한 고문을 받아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서 있습니다. 그 망설임의 시간, 그 시간이 얼마나 조용하고 엄숙하고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겠습니까. 이 사람이 그 앞에 서서 한참동안 조용히 침묵하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침묵입니다. 이 사람이 한참 고민하며 침묵하고 있을 때 그때 어디선가 조용하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망설이지 말고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느니라, 나를 밟으면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하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 제자의 고민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고민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살려면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이런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입니다. 여기 십자가라는 말은 육중한 나무가 아니고 예수 때문에 해야 하는 고민과 번민과 불화와 망설임 등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나서서 의기양양하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주님은 절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하고 만류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생각이 없고 철없는 생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만의 생각인가 하면 아닙니다.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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