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안에서 화평
로마서 14:13-20
논 지 :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사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화평을 이룹니다.
가. 하나님 나라는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13-16)
옛날에는 우리 교회당이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지금과 같이 의자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원로목사님 한 분이 목회자들이 보는 잡지에 그 당시 일을 회고담으로 적어 놓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 교회도 역시 마룻바닥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옛날 마루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신발이 많이 바뀌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바뀌면서 의자를 들이는 교회들이 많아지자 그 교회에서도 의자를 놓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불튀는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예배를 드려야지 경건치 못하게 어떻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않아서 무슨 예배를 드리냐고 했고, 또 한 쪽에서는 마루에서 예배 드리자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쪽에서는 경건치 못한 사람,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해가며 치열하게 당회에서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한 두 해가 아니라 몇 년을 그런 논쟁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배당 앞쪽은 마루로 놔두고 뒤에 반만 의자를 놓기로 결론을 내렸고 그 다음 차차 전부 의자를 놓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여러분, 의자를 놓고 예배 드리는 것이 무슨 성경상의 문제입니까, 신앙이나 교리에 관한 문제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면 다 바뀔 수 밖에 없는 것 임에도 불구하고 그것 가지고 치열한 논쟁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고기와 술을 먹는 것이 그 당시 큰 논쟁거리였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유대법에는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먹지 못할 고기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된 유대인 아닌 이방인도 이 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공의회(행15)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유대법을 강제로 적용하지 않기로 정했지만 그러나 이 문제는 계속해서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다가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고기를 사다 먹으면, 그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먹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유대법(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고, 교회를 잘못 이끌어 가고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또, 고기를 먹는 사람들도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음식 먹는 것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자는 자유하기 때문에 유대법이나 음식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멸시했습니다(3절).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상당히 단순한 문제인데, 이 단순하고 지엽적인 문제를 놓고 교회가 양쪽으로 갈라져서 논쟁을 하고 분쟁과 분열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쓸데없는 소모적인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것으로 인해서 큰 손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교회 전체 역사나, 개교회 역사를 봐도 이런 유사한 논쟁거리로 인한 분쟁과 분열이 많이 있었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1054년에 분열이 되었는데, 교회가 이렇게 크게 두 조각 난 이유가 교회 안에 조각이나 성화 같은 성상을 놓는 것에 관한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신앙생활 양식의 작은 차이 때문에 큰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교 안에서는 술, 담배가 금지된 것이 오랜 전통입니다만 청년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늘 논쟁을 합니다. 혹은 보신탕이나 선지해장국이 논쟁거리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습니다만, 커피를 마시다가 몇 번 봉변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가 기호식품을 탐하면 되겠느냐’는 공격도 받았고, ‘우리 나라에서는 커피 한 톨 안 나는데 외국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느냐’고 공격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가 청해서는 커피를 안 마시고 누가 주면 굳이 사양하지는 않지만 즐겨 마시지는 않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논쟁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드럼이나 전자악기를 사용해서 찬양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박수 치며 찬송하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 혹은 주여 삼창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들을 가지고 논쟁을 많이 해 왔습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는 [고독]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런 여러 가지 논쟁과 비판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비판의 근거는 훌륭하지만, 사탄은 우리를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 비판을 이용한다” 각각 다 옳은 근거를 가지고 서로 비판도 하고 논쟁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국 사탄의 이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사탄을 이롭게 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논쟁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에서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비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논쟁하고 분쟁하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문제, 지엽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다투고 분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결코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나.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의 나라이다(17).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그 성령의 지배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규범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성령에서 떠나버리면 그것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서의 삶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강림하시고, 우리가 성령과 만나게 되었을 때 뜨겁고 열정적인 감정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자아를 성령께 완전히 몰입하여 그때부터 성령 안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죽어버리고 나 자신을 완전히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 안에 융화되고 동화되어 성령과 함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Harvey Cox교수는 그의 책 [Fire from Heaven(하늘로부터 오는 불길)] 에서 성령에 관해 글을 썼습니다. 그는 교회가 성령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은혜로 인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부흥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체험을 통해서 원초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초적 신앙이란 기도하면 병이 낫고,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죽음과 병을 이길 수 있다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은 이렇게 자기 지식, 감정, 의지 등을 모두 성령께 내 드리고 의지하는 단순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강한 확신과 담대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 안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보혜사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심으로 인해서 평안과 안정과 균형을 이루게 되는 삶을 말합니다(요 14:16).
배에는 자이로스코프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파도가 심할 때 배가 평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장치입니다. 그것이 배 밑바닥에 있어서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 속에서 배가 기울어 졌다가도 다시 안정되고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장치입니다. 마찬가지로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있으면, 우리 삶에 거대한 폭풍우가 닥쳐와도, 악한 사탄의 공격이 강하게 몰아 닥쳐도, 균형과 안정을 지킬 수 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또한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진리의 성령(요14:17)의 지배를 받아, 그 분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고 그 분의 지시에 순종하고 그 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판단과 결정, 내 경험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성령께만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감정이 솟구쳐 올라와도, 내 지식에 의한 어떤 판단이 있어도, 어떤 비판할 생각이 들어도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버리고 성령의 지배에 순종해서 진리를 따라 사랑과 온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가 청계천 6가에 있고, 사택은 청계천 8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청계천을 걸어 다니며 출퇴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기도를 다녀와서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교회로 출근하는 중에 하늘에서 뭐가 뚝 떨어져 안경에 탁 묻었습니다. 안경을 꺼내서 보니까 사람의 목 깊숙한 데서 부터 올라온 침이었습니다. 말갛고 묽은 부분은 떨어졌고, 누렇고 끈적한 부분만 남았어요. 청계천 옆에 아파트가 있는데, 아랫 층엔 상가가 있고 2층엔 봉제공장도 있는 곳인데, 아마도 누군가 일을 하다가 탁 뱉은 것이 저한테 떨어졌나 봅니다. 그 순간 속에서부터 열이 확 올라왔는데,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아침에 묵상한 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쪽을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성령 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의 감정과 분노를 버리고 성령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성령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지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욕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지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이라든지 비판이나 비방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속에서 나와도 거기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지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 닥쳐왔을 때 그것을 따라가지 않고 성령을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령 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평화를 이룬다(17,18-20).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렇게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살아갈 때에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만들어가게 됩니다(17b). 여러분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a). 성령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은 이런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을 따라가는 사람이 비판과 비방과 다툼과 분쟁과 분열에 가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17절의 말씀같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의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고 ‘평강’은 사람들과의 조화로운 관계이며, ‘희락’은 평강함으로 오는 개인적인 기쁨입니다. 평강에는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될 때 그 가운데 평화가 이루어 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사람들 간의 장벽이 사라지게 됩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교리와 전통의 장벽이 사라집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인종과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사라집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의 장벽이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 있으면, 자기를 죽이고 포기하고 성령의 지배에 순종하기 때문에 장벽이 다 무너져 버리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성령 안에 있어서 교회가 화평하게 될 때에 18절 말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됩니다.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같은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비난하고 업신여기고 분쟁과 분열이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논쟁하는 사람들 자신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거기에 자기 신앙적인 자존심을 모두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볼 때 매우 하찮은 일입니다. 어떤 이유라도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논쟁하고 분열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쟁거리는 이해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화평한 것입니다.
미국의 한 한인교회가 아주 오랫동안 분쟁과 분열이 없이 화목한 교회로 지내왔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민 교회들이 많이 싸우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아주 화목한 교회로 알려졌는데, 그 교회에서 주보에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게재해 놓던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주 안의 형제 자매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요일 3:15).
둘째, 나도 허물과 죄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마 18:23-35).
셋째, 그 사람도 주 안에서 잘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롬 10:1-3).
넷째, 이러한 나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나와 내 자손에게 복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살전 2:4). " (윤영준, 신발 한 켤레의 사랑, 요단출판사,2001)
여러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와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화평”입니다. 여러가지 사업도 할 수 있고, 행사도 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우선적으로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화평”입니다.
또 이렇게 사소한 음식 문제로 논쟁하고 분열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0a). 사소하고 지엽적인 일, 비 본질적인 문제로 하나님의 사업이 망쳐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 하면, 여러 가지 차이와 다른 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성령 안에 거하고 평화를 이루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칭찬해서 그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교회성장학자이자 남침례 신학교의 Thom S. Rainer 박사는 그의 책 [교회성장학] 에서,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사람들이 칭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예수님 믿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고, 교회가 부흥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사도행전 2장 47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가장 지름길은 “화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삶을 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 성령의 지배에 순종하는 사람은 화평을 이룹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화평한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가는 곳 마다 여러분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여러분의 직장에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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