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칠 때에
사도행전 27:9~26
오늘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아슬아슬한 파선기를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뿐만 아니라 항해 역사상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그 동족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고 소위 신성모독죄와 소란죄라는 죄목으로 피소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총독에게 몇 번씩이나 재판을 받았지만 유대 땅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할 수가 없어서 직접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호송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을 다른 죄수들과 더불어 로마로 보내도록 결정을 내린 것은 물론 사람들이 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미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그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마음에는 확신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고, 따라서 담력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보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일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를 인도하시는 일에 우리 자신보다 관심이 더 크십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기르시는 양인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양보다 목자의 관심이 더 큰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을 위하여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어느 길로 가야 하나'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목자의 인도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렇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32편 8절에 보면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첫째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게 된 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약속하셨고 한 걸음씩 그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상황 속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떠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아드라뭇데노의 한 무역선을 탔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애굽에서 로마로 쌀을 싣고 가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배를 옮겨 타게 된 것입니다. 이 배는 상당히 큰 배로서 많은 화물과 함께 사람도 탈 수 있는, 말하자면 여객선을 겸한 화물선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죄수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여러 죄수들과 같이 이 배에 탔었고, 이 배 안에는 죄수를 인솔하는 책임을 진 율리오라는 백부장과 그밖에 여러 군인, 그리고 선원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보면, 이 알렉산드리아호에는 화물 말고도 276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별 것 아닙니다만, 2천년 전의 배라고 생각하면 대단히 큰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배는 유대인의 대제일인 속죄일 전에 미항이라는 항구까지 간신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아무리 큰 배라고 해도 돛을 이용하는 범선이었기 때문에 바람이 좋지 않으면 순조로운 항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미항에서 대제일을 보내고 다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계절적으로 대제일 후에는 대개 풍랑이 심하기 때문에 항해를 하지 아니하고 겨울이 지난 후 해동과 더불어 항해를 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타고 있는 큰 배 알렉산드리아호는 미항에서 겨울을 지날 것인가 아니면 좀더 가서 뵈닉스에서 과동할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선장의 의견대로 미항을 떠나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서 강경하게 반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되어 가고 있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대제일 후에 있을 풍랑을 생각해서 겨울에 항해하는 것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호의 실권자 율리오는 군인 장교였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향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일은 여기서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풍랑을 만나게 되고 배에 탔던 사람들은 선원이건, 죄수이건, 군인이건 할 것 없이 두 주간 동안이나 바다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늦게라도 바울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들은 14일 후에 구원을 얻어 전원이 '멜리데'라는 섬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교회가 말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교회의 주장이 대우받는 형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기술과 경험만을 앞세우고 집권자의 의욕으로 전진을 명령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위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나아가는 앞날에 우리의 기술과 경험, 불타는 의욕까지도 무너뜨리는 광풍이 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씨가 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형편만 안정되면 군에 복귀할 것이라고 선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물러나시면 안 된다고 해서 대통령이 되고 한 번하고 더 하고 싶어 소위 유신체제를 수립해서 장기집권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교회는 소리쳤습니다. 유신체제를 반대했습니다. 그 당시 총리로 계시던 분이 TV 방송에 나와서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에 교회가 시끄럽게 그러지 말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아직도 정치 일선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한국 정치가 꼴이 아닙니다.
이처럼 대우받는 입장에 놓여 있지는 못하지만, 개인이나 국가의 위기를 예고하고, 지도자가 잘못된 판단을 할 때는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 교회의 예언자적인 사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비록 그 소리가 미약해 보여도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향한 알렉산드리아호의 백부장이나 선장은 남풍이 순하게 불 때는 만족해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이 큰 배는 파도에 쫓기기 시작했습니다. 24시간 안에 배에 실었던 값진 물건들을 몽땅 바다에 던져버려야만 했습니다. 50시간도 못 되어 배 안의 모든 기구를 물 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낮 사흘 동안을 풍랑과 싸운 뱃사람들은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기술도, 경험도, 의욕도, 자신감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20절에 보니까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그 당시의 상황을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 항해를 너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목적지를 향해 인생 항해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인생이란 배는 때로는 순항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난항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광풍에 휩쓸려 이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어두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을 뻔한 것이나, 애굽에 가는 대상에게 종으로 팔려 간 것이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 한 것이나,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 한 것이나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둘째로,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이 큰 풍랑의 와중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리고 바다와 파도를 다스리시는 주님에게 시선을 향했습니다. 이 사나운 풍랑을 바라보면 무서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평안을 누리며 용기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3절을 보세요.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했습니다. 이 큰 풍랑 속에서도 바울이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생생한 교제였습니다. 이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바울에게는 더 이상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생명줄입니다. 기도가 없을 때 남아있는 것은 인간적인 두려움과 절망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내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 내게 닥쳐오는 어려움과 씨름할 때 자주 넘어지면서도 아주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고자 하는 이 연약한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한, 그래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과 실망을 아뢸 수 있는 한 나에게 더 이상 절망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어 방황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을 여러분께서 기억하시지요? 그는 젊은 나이에 마니교에서 생활하면서 육신을 따라 살았고 세상의 인기와 육신의 향락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에게는 마음의 안정도, 평안도 없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펴 읽으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앞에 있던 성경을 펴보니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은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바로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 지난날의 잘못된 생활을 그 자리에서 청산하고 온전히 돌아서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바람이 몰아치는 큰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불의 선지 엘리야도 아합 왕의 왕후 이세벨의 공갈에 두려워서 멀리 멀리 도망해서 로뎀나무 밑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죽기를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떡을 먹게 하고 물을 마시게 한 후 힘을 내서 그가 지시하는 곳에 이르게 한 후,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있으나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으시고 이 모든 것이 지난 후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거쳐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너 혼자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겨두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탈진 상태에 있던 엘리야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확신이 생기고 용기가 솟아났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이 희망이요, 생명이요, 구원이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계신 한, 내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삶을 향한 뚜렷한 하나님의 지시가 내게 들려오는 한, 큰 풍랑 일어나 비바람이 칠 때에도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강한 비바람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의 모험이며 도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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