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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사명감으로(고전 9:16)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3.

불타는 사명감으로

고린도전서 9장 16절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겸손과 눈물로 일했습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시험도 당했지만 참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내게 증거하여 말하기를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 후부터는, 문자 그대로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60억이 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사명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을 만나서 인생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 한 번 물어 보세요.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확신을 가지고 분명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살기는 살지마는, 일을 하기는 하지마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왜 일하는지 모르고 그저 어물어물 살아가고, 그저 일하니까 일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실존철학의 시조인 키에르케고르는 스물두 살 대학 시절에 그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온 세계가 다 무너지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진리,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진리를 나는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진리요, 나의 주체적 자리요, 실존적 진리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진리를 찾는 것,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인생의 높은 목표나 이념이나 가치를 우리는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명이 무엇입니까? 글자 뜻대로 하면 '심부름 받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바로 깨달을 때 눈동자가 달라지고, 생을 살아가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저마다 자기의 '위(爲)해서'가 있습니다. '때문에'와 '위해서'의 목표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분명하면 우리는 삶이 결코 무의미하다거나 허무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생의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문에'와 '위해서'가 분명히 서지 않을 때 우리의 생은 회의에 빠져 비틀거리거나, 허무에 빠져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위해서'란 말처럼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현대인의 불행과 비극이 어디에 있습니까? '위해서'의 목표를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또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것이다'라는 확고한 대답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고민이 있고, 방황이 있고, 생의 허탈감과 공허감이 있습니다. 그 결과 인생의 사명감을 못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명감이 우리를 성실하게 만들고, 용감하게 만들고, 부지런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듭니다. 사명은 인간의 위대한 힘의 원천입니다. 위대한 삶을 원합니까?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위대한 죽음을 원하십니까?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인간은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여기에 삶의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고, 충실미가 있고, 장엄미가 있습니다.

 

베토벤은 음악을 위해 살고 음악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문학을 위해서 살고 문학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대 작가가 되었습니다. 로댕은 조각을 위해서 살고 조각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대 조각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살고 복음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복음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사명을 'calling'(부름)이나 'mission'(보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심부름에는 심부름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있고, 보낸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부름의 목적과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21세기에 한국이란 땅에 심부름하러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이 한국 땅에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라고 보내신 것을 믿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의 사명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스위스의 사상가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는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날이 언제입니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날입니까?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날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날입니까? 고시에 합격한 날입니까? 최고의 날은 사명을 자각한 날입니다.

 

아프리카에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리빙스턴은 "사명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은 거기에 집념이 있고 열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다는 요지부동한 목적 의식이 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의 생애를 보세요. 세상에서 큰 봉사를 한 사람들의 일생을 보세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큰 일을 하게 했습니까? 그들이 큰 업적을 남긴 비결이 무엇입니까?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사람과 사명감 없이 하는 사람의 일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벽돌을 한참 쌓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의 목사님이 공사 현장을 돌보기 위해서 나갔다가 벽돌을 쌓고 있는 기술자에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랬더니 벽돌 쌓는 기사가 하는 말이 "배운 기술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할 수 있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볼멘 대답을 했습니다. 한참 가다가 저 모퉁이에서 똑같이 벽돌 쌓는 일을 하는 기사에게 "더운 날씨에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인사했더니 조용한 말로 대답했습니다. "벽돌 쌓는 기술 배웠다가 이렇게 내 손으로 예배당 짓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똑같이 벽돌 쌓는 일을 하지만, 한 사람은 사명감에서 일하고 다른 사람은 사명감 없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벽돌 쌓는 기사뿐만이 아닙니다.

 

가령 공장에서 일하는 기사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기사는 '나는 한국의 산업을 건설하는 사명이 있다. 내가 만든 상품이 세계 시장으로 나가게 되는데 세계에서 제일 가는 상품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입니다. 사명감으로 일하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기사는 일은 같은 일을 하지만, 할 수 없이 일하고 월급날만 기다리고 퇴근 시간만 기다립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보람도 없습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도 그렇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나는 대한민국을 옳게 봉사하겠다. 내 나라가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질서 있고, 명랑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공무원은 삯을 위해서 일합니다. 민원 서류가 들어와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돈 얼마라도 주어야 결재 서류를 돌리는, 이런 공무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되게 하려 하지 않고, 무엇 무엇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니라 일을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쉽습니다. 그러나 안 하려는 공무원이 많으면 그 나라 살림은 말이 아닙니다.

 

공무원뿐이겠습니까?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가정주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관리를 내게 맡겨주셨는데, 가족의 건강을 내가 책임지는데, 어떻게 해야 영양에 좋은 음식을 맛있게 해서 잘 먹게 하지?' 하고 늘 생각하고, 빨래를 해도 '우리 식구가 어디 가도 빠지지 않게 깨끗하게 입혀야지' 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하고, 다림질도 성의를 다합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마음에 대견할 수가 없습니다. 식구들이 밖에 나갔을 때 집안 정돈 다 해놓고 기다리다가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맞아들일 때 얼마나 흐뭇합니까?

 

그런데 사명감이 없는 주부는 일을 하기는 하면서도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없습니다. 집에서 밥하는 게 귀찮습니다. 그래서 정성 없이 불평, 불만 속에 하다보니까 밥 태우기가 일쑤고 밥 한다는 게 죽을 쑤기 쉽습니다. 딴 생각 하며 일하다 보니까 찬을 만들면서 칼로 손가락 베기가 쉽습니다. 밥하기가 귀찮다고 밖에 나가 사먹자 하고, 집에서 짜장면 배달해 먹자고 합니다. 세탁기가 있어도 빨래하는 거 싫다고 세탁소에 맡깁니다. 그러니까 이런 주부는 내가 손질한 옷을 식구들이 입을 때 오는 흐뭇한 마음을 알지도 못합니다. 방 청소는 하지 않아 밖에서 돌아오는 식구들이 짜증을 냅니다. 그리고 시간만 있으면 과외활동 한다고 늘 밖에 나가 있어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며 엄마를 찾아도 없으니까 허전해서 밖으로 나갑니다. 집안이 말이 아닙니다. 사명감이 없이 가정생활 하면 가정에 행복이 없습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정치인이 사명감을 가지고 정치하면 국민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 사명감이 없으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국민은 도탄 가운데 빠집니다.

 

얼마 전에 미국 뉴욕주 라과디아시 재판소에서 재판이 있었습니다. 어떤 노인이 빵가게에서 빵을 훔쳐먹다가 걸려 잡히게 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은 정말 빵을 사먹을 만한 돈은 없고 배는 고픈데 나도 모르게 그만 빵그릇에 손이 가서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판사는 이 노인의 눈물의 호소를 듣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남의 빵가게에서 빵을 훔친 것이 분명하므로 벌금 20불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판사는 자기 호주머니에서 20불을 내 놓으면서 "저 노인의 벌금은 내가 대신 내 드리겠습니다. 우리 라과디아시에 빵을 훔쳐먹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판사로서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내 책임감을 양심이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신 방청객이 계시다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하며 모자를 돌렸는데 네 명 앉아 있던 방청객 가운데서 72불이 모아져 그 노인이 받아 가지고 재판소를 떠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사명 따라 사는 사람은 책임을 느낍니다. 누가 책임을 느낍니까? 주인이 책임의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며 삽니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나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맙시다. 이것은 주인의식이 아니라 노예의식에서 사는 삶의 자세입니다. 노예는 책임이 없습니다.

 

내 가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직장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내 나라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여당은 야당에게, 야당은 여당에게 책임 추궁하는 것으로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책임지며 삽시다. 그럴 때 내가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고, 직장이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서고, 이 민족이 바로 서게 될 줄 믿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하는 사람으로서 가질 태도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 재능에 따라서 할 일을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이 먼 나라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맡긴 것은 주인의 마음이지 종들의 생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심부름을 맡기셨는데, 이런 심부름 저런 심부름을 맡기셨습니다. 큰 심부름, 작은 심부름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을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옳게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사회에 유익하고, 교회에 덕이 되고, 자신에게 행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무슨 일이나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불타는 사명감으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옳게 일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 법조인 중에 국민에게 존경받는 분이 계십니다. 한승헌 전 대법원장이십니다. 이 분의 간증을 들어보면, 뭐 특별하게 사신 게 아니고,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보려고 한 것뿐이라고 하셔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맡은 책임을 바로 감당하려고 힘씁니다. 그러니 부지런해야 하고 옳게 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작은 일에나 큰 일이나, 교회 일에나 사회 일이나, 개인 일이나 단체 일이나 하나님과 동역해야 그 일이 성공합니다. 시편 12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는 데도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고, 설계하고, 시작하고 사업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역해야 그 사업이 성공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책임은 인간이 해야 합니다. 농사로 말하면 밭갈 때 밭갈고, 씨뿌릴 때 씨 뿌리고, 김맬 때 김매고, 거름 줄 때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대로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바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하는 일이 헛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어디서나 일하는 사람인데, 나는 어떤 일꾼인가 스스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일꾼입니까? 아니면 삯꾼에 불과합니까? 우리는 불타는 사명으로 일해야 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명감이 있기는 한데 희미한 사람입니다.

 

다른 하는 사명감이 불타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며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렇게 바울은 불타는 사명으로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의 골수에는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불타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심령 속에 불타는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어떻게 움직이고, 비행기가 어떻게 공중으로 날아갑니까? 우주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 속에 불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타는 사명감이 있어야 무슨 일이나 성공합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는 각 방면에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불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는데 "성령은 곧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심령 위에는 옛날 갈멜산 위의 엘리야의 제단과 같이 불이 붙어야 합니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내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불타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일을 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일을 합니다. 일하지 말라고 해도 일을 합니다. 부지런하게 일합니다. 양심적으로 일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일합니다. 자기 것을 희생하면서 일합니다. 그러면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도중 하차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하기는 하지만, 그저 마지못해서 합니다. 그러니까 하는 일이 힘이 듭니다. 고역입니다. 빨리 피곤해집니다. 일의 능률이 나지 않습니다. 잘못됩니다. 사고가 납니다. 집에 갈 생각에 시계만 봅니다. 불평합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그의 크신 경륜에 따라 각각 일터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가 어디든 그것이 무슨 일이든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모범적인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창의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협동해서 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사명을 주신 것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에게 천국 건설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최후 명령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려면 우리 하나 하나가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데서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바쳐서 교회를 봉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직분 맡으신 분들은 불타는 사명감으로 감당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불이 뜨겁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를 세우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한민국을 자유와 정의와 번영의 나라로 세워나가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명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으로, 내가 처한 위치에서, 힘써 국가를 봉사해야 갰습니다. 무슨 특별한 것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국민을 마음에 두고 국민의 신뢰를 받게 일해야 합니다. 기업가는 사리사욕을 떠나 국민을 위한 기업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군인은 국토방위에 최선을 다해서 국민들이 마음놓고 살게 해야 합니다. 공무원은 문자 그대로 국민의 공복으로 봉사해야지 관료로 군림하면 안됩니다. 노동자는 받는 만큼 성실하게 일해서 우리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게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국민을 깨우쳐 교회가 사회의 양심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이 불타는 사명감으로 살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사명을 바로 감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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