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창세기 12:1-3
최근 일반 독서계에 선풍을 일으킨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로리베스 존스가 쓴「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입니다. 2000년이라는 장고한 세월이 가고 왔으나 오늘날도 예수님은 인류의 중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또 두 번째의 책을 썼습니다.「기적의 사명 선언문」이라는 책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는 사명 선언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성서의 인물들은 거의가 다 이런 비전의 선언문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비전 선언문을 통하여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기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대한 축복 선언문, 비전 선언문, 기적의 조상으로서의 성공적 삶에 대한 선언문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첫째, 너를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위대한 비전, 위대한 사명, 위대한 축복에 대한 선언문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은 이런 선언문을 받았고 그 선언문을 간직한 채 일생을 그 선언문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를 일관되게 움직였던 선언문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고 우리의 생을 움직여가는 동기 부여를 주는 말씀이 우리 속에 능력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말하면 ‘너는 복된 조상이 되라’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이 허물도 많고 인간됨에 약점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위대한 축복의 메시아가 태어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는 복은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메시아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한 세대를 살다 가면 역사의 조상이 되어갑니다. 어떻게 살았든 한 세대에 역사의 참여자요, 그 시대 역사를 만들어 간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경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 자신을 위대하게 창조하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조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대하신 바 그 큰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상 모든 위대함이란 결국 예수님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는 조상됨의 축복이나 그 이름을 창대케 하는 축복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우리는 복을 사모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복 주실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부모가 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무명의 사람입니다. 그는 문벌, 학력, 능력 어느 것 하나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데라는 열두 가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아브라함에게 우상 가게를 맡기고 멀리 출타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70이 된 노인이 우상을 사러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노인과 실갱이를 벌였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나이가 70이나 되었는데 왜 하루만에 만든 우상에게 절하려고 그럽니까?” 또 50이 된 노인이 오면 “당신 나이가 50인데 하루만에 만든 우상에게 절하려고 사러 왔습니까?” 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우상에게 절하려고 떡을 가지고 옵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하루만에 만든 우상에게 복 달라고 떡을 갖다 바칩니까?”
하루는 그가 아버지가 출타한 사이에 망치로 우상을 다 부셔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아브라함아, 왜 우상을 다 부셨느냐?” 할 때 아브라함이 “아버지, 누가 이웃집에서 떡을 가져다가 놓으니까 서로 먹으려고 싸우다가 부서졌나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상이 말도 못하는데 무슨 싸움을 해” “아버지는 말도 못하고 싸움도 못하는 우상을 뭐하려고 팔고 다니십니까?” 그때 아버지는 아브라함이 어리지만 놀라운 아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일대 가문에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아버지의 대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위대한 조상으로 그 이름을 아브람(큰 아버지)에서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으로 바꾸어주셨던 것입니다.
한 때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는 책이 우리 교계를 휩쓸었습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의 신앙을 잘못 가르쳐서 믿는 사람에게도 가계에 저주가 흐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과거의 저주가 다 끊겼습니다. 다만 우리가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개성이나 치유받아야 할 성격이나, 질병은 있겠지만 저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쳐가야 할 문제지 이것을 가지고 저주받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축복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해 과거의 저주받은 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모르던 조상적 관계를 다 끊어버리는 새로운 관계를 아브라함에게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복받는 일에는 양보하지 마십시오. 형제에게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으면서 조상적부터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창세기 12장 1절을 읽으면서 너무 너무 감동을 받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세미나에 가면 이런 강사의 얘기가 들립니다. “저는 4대째 가문에서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은 목사입니다.” 그러면 저는 부러운 마음이 들고 복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이 어떤 때는 기가 죽습니다.
며칠 전 목사님들이 모여 신학생 집회를 하는데 한 목사님이 강의하면서 자기는 몇 대째 신앙의 후손 소리만 들으면 기가 죽는다고 그래요. 자손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하나님을 믿는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서 부자가 되었다든지, 사업체 사장이 되었다든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그에게 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큰 민족을 이룬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유대 민족은 큰 민족이 아닙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1600만 유대인의 조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룬다는 말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네 후손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복을 물려주는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은 복의 조상이 되라는 말입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우리 마음 속에 다 소원을 가지고 있는데 소원 중에 가장 큰 소원은 자손들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은 소원입니다.
우리가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 가운데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차적으로 물려주고 싶어하는 것이 재산입니다.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누구든지 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좋은 것이 물질인 줄 알고 물질을 물려줍니다. 그런데 그 물질을 유산으로 받아서 자녀들이 잘 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물질을 재산으로 주면 형제간에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재산을 많이 두고 죽는 사람 치고 자식들이 우애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부모가 죽을 때 자녀들이 부모에 대한 존경심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위대한 사상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질보다 정신을, 위대한 가훈을, 도덕적인 양심을, 윤리적인 의식을 자손들에게 물려준 사람들은 재산을 물려준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유언하면서 “비록 내가 너희에게 줄 문전옥답은 없지만 진실과, 정직과, 양심으로 살아온 이것 한가지만은 이어가야 한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부모도 위대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부모는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에 가면 메사추세스 주에 뉴 샴푸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약 35000명이 사는 작은 도시인데 거기는 특산물이나 관광물은 없지만 조그만 오두막 집 하나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 집앞의 간판에는 “이 집은 비록 조그만 하지만 이 집은 미국 역사를 새로 만들어 낸 위대한 집입니다.”라고 써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래에 그 집에서 나온 인물들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그 오두막에 집을 짓고 남편 죠나단과 그 아내 사라가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초라한 부부로 이름없는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12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후 4,5대에 걸쳐서 후손이 늘어가는 중에 부통령이 하나, 13명의 대학 총장, 3명의 주지사, 3명의 시장, 149명의 변호사, 48명의 판검사, 116명의 목사, 75명의 사업가, 25명의 발명가, 66명의 교수, 82명의 차관급 공무원, 68명의 의사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학자들이 그 가문을 연구한 논문의 결론은 죠나단과 사라는 12명의 자녀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축복의 말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자손들에게 금은 보화나, 큰 사업체나, 명예나 훈장을 물려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손들에게 신앙은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을 물려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야곱은 죽으면서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창 48:21)
요셉도 죽으면서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라고 말했습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나는 죽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내가 위대하지 못할지라도 자손들에게 신앙의 복을 물려주는 위대한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이 말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영적인 신앙을 축복하는 민족이나 국가는 흥할 것이고 그 신앙을 핍박하고 반대하는 민족이나 나라는 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독일 히틀러 망했습니다. 유대인들을 괴롭혔던 소련 망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미국은 다 복받아 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비밀은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 나올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잘되도록 도와주는 민족과 나라들은 흥할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핍박하고 저주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가는 곳마다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복음이 섬나라 영국으로 들어갔을 때 야만인 나라가 나라가 신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으로 역사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독일이 복음으로 강한 민족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를 믿어 성령이 충만한 나라가 될 때 세계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이 그렇게 독일을 강국으로 만들었으나 히틀러가 교회를 핍박할 때 히틀러와 함께 독일이 망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갔던 복음이 퓨리탄에 의해서 청교도 신앙으로 미국이 복음화 될 때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소련의 3대 기적이 있습니다. 나무는 많은데 종이가 없고, 원유는 많은데 휘발유가 없고, 땅은 넓은데 식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까 러시아나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아브라함 후손들을 저주하고, 핍박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주의 종들을 시베리아로 유배시킬 때 그 땅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그 땅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닫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나라는 모든 것이 없는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나라는 모든 것이 잘 되는 나라가 됩니다.
똑같은 한국 땅이지만 남한 땅은 풍요하고 기름지고 이북은 매년 흉년들고 황무한 땅이 되어 세계에 손을 내밀고 구걸해야 먹는 굶주린 백성이 되었습니다. 통일이 된다고 하더라도 50년동안 역사를 못바꾼다고 합니다. 분단 50년동안 저들은 못먹고 굶주려서 키가 우리와 20cm나 차이가 납니다. 남한 사람들과 만나도 완전히 다른 인종이 되어버렸습니다. 똑같은 나라, 똑같은 한피 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남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었고,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 국민의 의식이 깨었습니다.
교회가 잘 되어야 된다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민족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을 교회가 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되면 나라가 잘 됩니다. 교회가 흥하면 나라가 부강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역사의 문제는 정치, 경제 문제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덕 문제고, 양심 문제이며, 더 나아가서는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되지 않은 민족이 흥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손 하나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이 나라를 살려놓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셋째, 떠나서 지시할 땅으로 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무데나 간다고 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 지시할 땅이 어디일까요? 주석가 델리치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이라는 암시를 받고 그곳에 도착해서 자신의 기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은 아브라함이 복 받을만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땅도 좁고, 큰 민족도 아닙니다. 큰 민족과 큰 축복은 영적인 후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모리아 땅이다. 여기에서 네가 복을 받으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곳은 모리아 땅이요,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 한 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계시받는 땅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대하 3: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땅이 모리아 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땅은 성전 건축하는 땅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려고 지시한 땅은 성전을 세울 모리아 땅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한다면 성전으로 가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께로 가라는 말입니다.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전으로 오는 것이 복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창세기 22장 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반드시 자녀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와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길러가면서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여름에는 여행을 갑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추억을 남깁니다. 또 어린 아이가 아팠을 때는 병원에 갑니다. 또 그들에게 필요한 장난감이나 옷을 사 입히기 위해서 백화점에 갑니다. 또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데려다 주고 그들이 진학할 때 문전에서 시험을 잘 치라고 눈물뿌려 기도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한가지는 소홀히 합니다. 교회로 데리고 오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먼훗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그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데리고 오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 자식들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축복은 거기에서 끝나버리고 맙니다. 자녀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이 성전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자녀들이 이 성전으로 오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부모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되기를 원한다면 자녀들을 그렇게 방치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주일날 성전에 결박시키십시오. 하나님 말씀으로 결박시키십시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때때로 주의 종에게 와서 축복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의 손이 그 머리에 얹혀질 때 어린 아이 마음속에 “나는 우리 목사님으로부터 축복받은 사람이야”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렸을 때부터 목사와의 관계를 잘 맺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물려주십시오. 그래서 자손들에게 복을 물려주는 조상이 되십시오. ‘복의 근원이 되라’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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