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스와 임마누엘 왕하16:1~20 09.12.27.인터넷설교 녹취, 정리
※요즘 ‘적용’을 강조하는 설교가 유행이지만, 아래 설교는 ‘원리’를 강조합니다.
좀 딱딱하지만, 성경/하나님의 뜻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 설명
열왕기하16장과, 역대하28장은 아하스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 설명은 많이 생략했지만, 두 성경을 직접 대조해서 자세히 참조하세요.)
▲남유다의 아하스 왕은, 다른 남유다 왕들이 비교적 하나님께 순종한데 비해, 악을 행했다.
왕하16:2~4절을 아래 각주에서 읽어보시라. 註1)
▲범죄한 결과,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군을 조직해서, 남유다로 침공해 왔다.
그래서 남유다는 크게 곤욕을 치르다가, 결국 앗수르에 원군을 청하게 된다.
그래서 앗수르에 의해서 위기는 모면하게 되지만,
앗수르에,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성전의 기명과 은금까지 다 내어주게 된다.
혹 떼려다가 오히려 혹 더 붙이는 식으로,
오히려 앗수르에 의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대하28:20~21 註2)
남유다에 이런 국가적 재앙이 불어 닥친 것은,
특별히 아하스 왕을 위시해서,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였다. 대하28:19
▲그런데 아하스 왕은, 범죄하여 곤고를 당하면서도, 회개는커녕 더욱 범죄했다.
대하28:22,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그리하여 다메섹의 이방 신전을 본 떠서,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 그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우상 신전에.. 백성들이 분향하고 절하도록 했다. 왕하16:11~16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뜻밖에도, 임마누엘 메시아 예언이, 아하스에게 주어졌다.
①이사야 7장에,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해서 치러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사7:2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을 만나, 예언을 전해준다.
‘걱정하지 마시라. 아람과 이스라엘이 연합해서 치러오지만,
그들은 타다 만 나뭇가지 같을 것이다(힘이 없다)’ 사7:4~9
②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너는 한 징조(아람과 이스라엘이 물러나는)를 구하라’고 했다. 사7:11
그때 아하스는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사7:12
이 말은, 얼핏 보기에는, 기특한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는 하나님께는 어떤 기대도 걸지 않겠습니다!’는 불신앙적인 말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라는 뜻이다.
③그러자 하나님은 친히 징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 註3) *각주 3번을 꼭 읽어보세요!
위 구절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메시야가 동정녀에게 탄생될 것을 명확하게 예언하고 있고,
그래서 마태1:23절에, 이 구절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다.
이 ‘임마누엘 메시야 탄생’의 놀라운 약속이, 하필이면 <아하스 왕 때> 주어졌다.
가장 하나님을 크게 배반하고, 갖은 악행을 저지른 왕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다메섹 우상의 신전을 세웠던 패역한 왕인데,
왜 그 아름다운 약속이.. ‘하필이면 패역한 아하스에게 주어졌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른 선한 왕들도 다 놔두고서... ←문제 재기
◑해석 및 적용
▲하나님은 인과법칙(=신명기적 사관史觀)에 의해서 다스리시지만, 그 법칙에서 자유로우시다.
성경에 많은 용례를 통해서, 많은 구절을 통해서 볼 때
인과법칙/권선징악 원리가 적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기본적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그 인과법칙에 절대 얽매이지 않으신다.
위 아하스 왕이 놀라운 ‘임마누엘 메시야 예언’을 받은 것을 볼 때.. 그렇다.
다윗, 히스기야, 여호사밧, 아사 등 선한 왕을 다 제쳐놓고.. 하필이면 아하스라니..
그런데 성경 전체에 보면, 사실 그런 (인과법칙을 벗어난) 예가 많이 나온다...
▲롬9장, 야곱과 에서를 부르신 장면 (롬9:10~18)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부르실 때 보면,
일례로 야곱과 에서를 부르실 때 보면,
그들의 행위를 보고 부르시지 않으셨다. 태어나기도 전에 부르셨으니까!
만약 인과법칙으로 부르신다면, 야곱과 에서를 일단 태어나게 하시고,
그들의 삶을 보신 후에, 잘한 사람/못한 사람을 가려서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들이 무슨 잘/잘못을 하기도 전에, 모태에서부터 부르셨다/선택하셨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순종하고, 우리가 온전히 행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다.(인과법칙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된 것은
나의 행위, 공로 이전에.. 하나님의 작정/부르심/선택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註4)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 되지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도입하면
하나님은 마치 ‘엿장수 마음대로’ 하시는 것 같다.
롬9:14~16절은, ‘그게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라고 따지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라고 대답한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행위자(신도)가 주체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도의 행위의 잘/잘못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보다 근본적으로 고려할 점은 ‘하나님의 주권/예정/선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주체가 엄연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인과법칙/권선징악을 적용하신다. 절대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가 잘하면 상주시고, 잘못하면 벌주신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권/예정/선택/은혜’의 법이다.
하나님이 벌하시는 목적은,
‘잘못을 벌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소위 인과법칙)
‘잘못을 고치시기 위하여’ 벌주신다.
이것은 인과법칙을 초월하는/넘어지는 법칙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잘/잘못에 따라 적절히 보상하시지만
그 인과법칙에 절대 얽매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인과법칙을 무시하지 않으시지만,
그 법칙을 초월하시며, 그 법칙에 자유로우시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을 벌주시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고,
그 인과법칙을 초월하여, 그 사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드시기 원하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예정/선택/은혜 (모두 서로 비슷한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인과법칙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적용되는데,
그 목적은.. 타락한 인간을 고쳐서 새롭게 만드시기 위함이다.
▲일례로 <기도>를 들 수 있다.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인과법칙’에 의지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다 ‘은혜법칙’에 의거해서 기도드린다.
다시 말해서, ‘내 행한 대로 갚아주소서’ 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록 내가 잘못은 많이 범했더라도, (하나님이 다 용서/덮어주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이것, 저것을 응답해 달라고 구한다.
그것은 다 ‘은혜법칙’에 의거한 간구들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렇지만 복 내려 주십시오!’ 기도한다.
이게 얼마나 억지인가 하면,
‘몇 억 빚지고 못 갚은 사람이, 채주에게 가서, 저를 용서해 주시고
미안하지만 몇 억 더 빌려주세요.’ 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이것이 안 통하지만, 하나님께는 이것이 통한다는 얘기다.
또한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 이런 몰상식적인 ‘은혜법칙’으로 응답하심도.. 우리가 체험한다.
하나님은 ‘인과법칙’에 의해서 응답하시지만, 더 넘어서 ‘은혜법칙’으로도 응답하신다.
이렇듯 우리 인간들도, (기도할 때) ‘인과법칙’만 적용하지 않고, ‘은혜법칙’도 사용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또한 하나님의 통치방식에
‘인과법칙’만 적용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은혜법칙’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실패와 성공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예정/선택의 법칙이 있다.
이 말씀을 잘못 오용wrong way하면 ‘될 대로 대라, 나는 모르겠다’가 되지만,
이 말씀을 잘 사용right way하면 ‘인간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예정/은혜/선택법칙을 잘못 적용하면,
자신의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려버릴 부작용도 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성공하셨는가?
잘 하신 것이다. 더욱 더 성공하시라. (그러나 이런 사람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여러분, 신앙생활에 실패하셨는가?
자포자기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구하시기 바란다.
성공하든지/실패하든지 명심하실 것은
성공과 실패는.. 다분히 인과법칙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성경과 하나님은,
인과법칙을 초월/넘어서는 어떤 (은혜)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 법칙을 항상 염두에 두고서,
성공한 사람은.. 스스로 더욱 겸손해 지며
실패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을 구하면 된다.
어쨌든 이 설교는, ‘성공한 사람이 취해야할 겸손’보다는
‘실패한 사람이 붙들어야 할 은혜’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하스 같이 실패한 자에게도, 하나님은 놀라운 ‘임마누엘 예언’을 주시는
생각지도 못할 은혜를 내려주시더라는 것이다.
이런 은혜법칙 아래서, 성도에게는, 아무리 실패해도.. 절대로 ‘절망이란 없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예정/선택법칙은..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되지 않는다.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누가 하나님께 ‘조건’을 제시해서, ‘결과’를 강요하겠는가? .. 라는 뜻이다.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 인과법칙에 좌지우지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헌금을 ‘먼저’ 드려서, 주님으로부터 ‘갚으심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 기독교 사상
註1)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20세라 예루살렘에서 십륙 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註2)
병행구절 대하28:16~19절에 보면
북이스라엘과 아람만 쳐들어 온 것이 아니라,
아하스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돔, 블레셋 등 주변 작은 나라들도 침입해 왔다.
註3)
이 구절을 7백년 후에,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는 구절로 보지만, 그와 동시에,
당시에 ‘북왕국과 아람 연합군이 패퇴하는 징조’로 (일각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단지 이 해석은 ‘처녀(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으므로,
‘젊은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으로 완곡하게 해석한다.
젊은 여인이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로 할 때, 적군이 물러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이를 ‘히스기야’로 본다. (그러나 히스기야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니다.)
이중two-fold 예언으로 보인다.
-하나는, 당시 아하스 시대에 적용되어지는 예언이요, (사7장의 문맥상으로는 이게 맞다)
-또 하나는, 7백년 후에,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다.
註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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