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는 짧고 은혜는 길다! (시 30:1-12)
“주님, 주님께서 나를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 내 원수가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해주셨으니, 내가 주님을 우러러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시편 30편은 다윗의 시이면서도 성전 낙성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은 성전 짓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서 낙성식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원래 성전 낙성과는 상관없는 시이지만, 후대 사람들이 성전 낙성식 때 노래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이 시편은 은혜로운 시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가장 큰 아픔과 가장 큰 기쁨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사건으로 사무엘하 24장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주위의 모든 나라를 다 평정한 후에 자신의 군사들의 수를 세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순간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그 일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무서운 전염병으로 이스라엘을 치시는데, 하루에 7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너무했다고 여기셔서 사흘을 치시려고 하신 것을 하루 만에 중단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얼마나 놀랐는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 죄는 제가 지었습니다. 나와 내 애비의 집에 벌주시고 죄없는 백성은 살려 주십시오.”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비싸게 사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의 재앙이 그친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죄가 무서운 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분명한 태도로 믿지 못하는 경우는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게 되는 결과를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십자가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옥에 가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 정도로 심각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자신이 지옥에 갈 정도로 큰 죄인이라고 실감하지 못합니다. 머리로만 인정하지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죄인이지만 그렇게 큰 죄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은밀한 죄 무서운 줄 모르고, 은혜의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도 죄 무서운 줄 모르고 세상에 눈이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윗의 왕국이 평안해졌을 때입니다. 이젠 무서울 것도 긴장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주위에서 자기가 최고였습니다. 그 순간에 교만이 다윗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6절 내가 편히 지낼 때에는 "이제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겠지" 하였지만,
말을 해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안 좋은 징조인 것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겠다던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질투 보다 블레셋의 공격 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에 일어나는 이런 교만입니다. “내가 했다. 내 힘이 대단하잖아. 내 왕국은 얼마나 클까?’ 이것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은혜를 거두시고, 다윗을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자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7절 아, 태산보다 더 든든하게 은총으로 나를 지켜 주시던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시자마자 나는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아마 다윗은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치신 병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2절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울부짖었더니,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셨습니다.
9절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순간에야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절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는 순간 지옥이 무엇인지 실제로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정도야 얼마든지 이해해 주실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징계가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무디 목사님에게 어떤 여자가 찾아와서 "제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던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그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부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저는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제가 지옥에 갈 죄임임을 체험하기 전까지 온전히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없었습니다.
그 때는 겉으로만 예수님을 믿었고 진정한 거듭난 자의 기쁨과 간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야외예배를 갔는데,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았어요. 저녁 무렵에 전도사님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마무리를 하면서 한 아이에게 대표기도를 시켰습니다. 그 아이가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예수님,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감사해요. 그런데 하나님도 예수님도 여기에 함께 계셨더라면 참 좋았을 뻔 했어요."
귀엽고 솔직한 고백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우리 믿음의 실상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빼놓고 우리끼리 즐거운 시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심지어 하나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제켜놓고 우리끼리 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정말 무서운 것인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가난, 실패, 질병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은밀히 죄짓고, 세상을 사랑하고, 실제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가 사실 영적으로는 더 위험한 때입니다.
이번 주간 출애굽기 큐티를 하고 있는데, 마준철 목사님께서 이스라엘이 바로 왕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핍박을 당하는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의 풍요함 때문에 애굽을 떠나야 할 때를 놓쳤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애급은 우리가 살 땅이 아니니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자신의 유골도 함께 가져가 달라는 유언도 했습니다. 요셉은 애급 땅이 하나님의 백성이 살 곳이 못되는 곳임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후손들에게는 애급은 아주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가장 선진국이었고 풍요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루 빨리 애급을 떠나야 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세워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의 풍요한 삶을 스스로 버리기 어려웠던 것 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 살이 해야 하는 고통을 당하고, 아들이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서야 울부짖는 기도가 일어나고 비로서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풍요의 유혹을 정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환란 보다 풍요의 유혹이 더 심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간증입니다. 길고 긴 건축 시련, 교회 부도, 건축 중단, 담임목사 부재, 교인들의 분열, 절대절명의 위기감, 엄청난 부채, 이러한 절대절명의 위기가 우리에게 영적인 복이 되었습니다. 이 정신을 놓치면 안됩니다.
교인도 늘고 재정도 늘고 절대절명의 위기감은 사라지고 소문도 나고 자랑스러워하고 여유도 생기고 사람도 늘었고 경험도 쌓였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는 더 큰 위기입니다.
개인이나 나라나 다 풍요를 극복하지 못하여 망하는 길에 들어섰다. 어려운 형편에 주눅들거나 탄식하지 말고, 성공과 풍요에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경험하고 비로서 죄가 무서운 것을 알았습니다. 죄가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복이 돈과 명예와 성공이 아니라 의로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기만 한다면 소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알고 나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순교가 두렵다고 하지만 스데반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얼마나 당당했을까요? 매를 맞은 사도들은 영적으로 얼마나 당당하였을까요?
지난 목요일, 손양원목사님의 오페라를 보았습니다, 오페라 내내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순교를 찬양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사하고 현대 그리스도인들 조차 너무나 생소한 노래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들은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한 것은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와 자기 집에 벌을 내려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다윗의 소원은 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8-10절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었고, 주님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내가 죽은들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주님,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 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 되어 주십시오.
다윗에게서 이 회개가 나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임했습니다.
11-12절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기에 내 영혼이 잠잠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영원토록 주님께 감사를 드리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좋은가를 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때, 하나님의 징계는 순간이고 은혜는 영원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5절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
징계를 당할 때는 그것을 끝인 것 같았고, 그 고난의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회복되고 나니, 징계는 잠간이었고, 은혜는 영원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납하실 수 없기에 징계하십니다. 징계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를 대시면서 기뻐하시는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분을 참지 못하고 우리에게 쏟아 부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로 인한 고난 하지만 죄 값 아닙니다. 죄 값은 죽음입니다. 지옥입니다. 고난은 내가 지은 죄의 만분의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 무시, 하나님 불 순종, 하나님 배신, 하나님 반역, 하나님의 영광 가로챔, 이 죄를 어떻게 감당합니까?
하나님은 살짝, 정말 살짝,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신 것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 회개하면 즉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은혜가 회복될 때,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4절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길어보이고 고통스러워 보여도 잠간입니다. 은혜는 영원합니다.
아이들, 징계는 잠간이고 은혜는 영원하다.
간증이 있을 텐데? 한숨, 징계가 잠깐이었던 적이 언제 있었느냐?
2시간은 되었다.
2 시간,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은? 몇시간인가?
평생의 은총입니다.
일생 고난의 삶을 살았어도 길다 할 수 있겠는가? 영생을 바라보면 판단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절망하지 마십시다.
저녁에는 울음으로 잠든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졌다 할지라도 끌어올리셔서 높이 세워주실 것입니다.
슬픔의 베옷은 벗겨 주시고 기쁨의 옷을 입혀서 춤추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세계십자가 선교회, 안일권목사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중독자들을 섬기고 치유하는 공동체를 섬기는 사역을 하십니다. 그 공동체에 계신 주목자들 30여 명도 같이 오셨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제일 먼저 십자가를 통과하는 체험을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나는 함께 죽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 그리고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과 그 합병증으로 인해 세 번이나 임종예배를 드렸던 사람. 대학시절 가난한 시절에 밥처럼 먹던 술이 알코올 중독까지 빠지게 된 사람, 술 잘 마시는 것을 영웅처럼 여기고 자랑하다가 직장도 잃게 되었고 집도 없는 거지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한 사람, 여름에 술을 마시기 시작 했는데 깨어나 보면 겨울이고 깼는가 싶으면 또 마시고 ... 술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공원묘지에 말통을 들고 가서 무덤가에 놓여있는 술들을 모아 마시면서 하늘을 지붕 삼아 이무 데고 뒹굴며 그렇게 아까운 청년 시절을 다 허비한 사람, 교도소에서 젊은 시절 다 보내고 이제 42세 되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들이 지금은 예수님을 만나 영생을 얻었고 신학교를 나와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대학 선후배들올 만나는 일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들은 제 앞에서 술을 홍청망청 마셔대며 이 세상 더러운 이야기들로 자신들의 영혼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만 평가받는 세상에서 길들여져서인지. 외제 승용차, 연봉, 이사 간 집의 평수 등을 자랑하는 그들의 대화를 잠잠히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혼을 했나, 모아놓은 재산이 있나, 남들이 인정하는 사회적인 위치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하면 난감해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저에게는 달라진 삶이 있습니다. 예전의 죄 된 삶의 습관들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중독자 치유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분명한 삶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조차 감사합시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것을 기뻐합시다. 기뻐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다음에야 깨닫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은혜의 때는 은혜의 가치를 모릅니다. 은혜가 사라져야 비로서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함께 하실 때, 은혜 귀한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러분은 하나님 팬 클럽 회원입니까? (시 33:1-22) (0) | 2021.12.11 |
---|---|
어떻게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을까? (시 31:1-23) (0) | 2021.12.11 |
두려워하지 말고 찬양하라! (시 29:1-11) (0) | 2021.12.11 |
악한 자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시 28:1-9) (0) | 2021.12.11 |
너희 믿음을 샘하라! (고후 13:5) (0) | 2021.1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