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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응하게 / 요한복음 18:28-32

by 【고동엽】 2021.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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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응하게

말씀: 요한복음 18:28-32

 

네팔의 숲속에 살고 있는 코뿔소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른 동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트레비아 나무의 열매입니다. 숲속을 거닐던 코뿔소는 트레비아 나무열매를 발견하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 만큼 포식을 한 뒤 그 자리를 떠납니다. 트레비아 나무 열매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열매가 열매로 영 글어져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과 노력이 기울여 졌겠습니까? 단 하루, 단 한시간도 어설프게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을 대로 익어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지막지한 코뿔소의 밥이 되어버린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열매로서는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는 정작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코뿔소의 배속에 들어간 트레비아 나무 열매는 다 소화되어 버리지만,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씨앗은 그대로 남아있다가 다음날 코뿔소의 배설물에 섞여 다시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코뿔소의 배설물을 거름 삼아 트레비아 씨앗은 싹을 틔우면서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방법 이외에는 트레비아 나무가 생존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 익어 숲속 음지에 떨어진 트레비아 나무 열매는 음지에서는 절대로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반드시 양지로 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는데 스스로는 움직일 수가 없기에 자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어떤 짐승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그 열매를 유독 코뿔소만 좋아하여 자기 몸으로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 주는 것입니다. 만약 네팔에서 코뿔소가 멸종되어 버린다면 그 날은 곧 트레비아 나무의 장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일은 아프리카의 아카시아와 코끼리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아카시아 나무 열매들은 거대한 코끼리가 자기를 먹어치우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코끼리와 비교한다면 미물에 불과한 조그마한 나방이의 유충입니다. 그 유충은 아카시아나 무의 열매를 먹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씨앗까지 갉아먹을 수 있어서, 아프리카 아카시아를 멸종 시킬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코끼리는 아카시아 열매와 거기에 붙어 있는 유충을 한꺼번에 먹어버리는 반면, 아카시아 열매 씨앗을 소화시킬 수 있는 효소는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씨앗 역시 배설물과 함께 나와 배설물을 거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열매에게 있어서 코끼리는 단순히 씨앗을 퍼트려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유충을 제거해주는 살충제의 역할까지도 감당해주는 은인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 아프리카의 프로테아 나무는 씨앗이 가득 들어있는 열매를 고스란히 품고서 몇 년이건 하늘을 보며 기다리고있습니다.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산불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나무는 산불의 열기에 의해서만 열매가 터지면서 씨앗을 퍼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포프라나무의 씨앗이나 작은 꽃씨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생존을 계속합니다. 새들은 검은 딸기나 노랑 무화과 나무의 열매를 먹고서는 먼 곳으로 날아가 그 씨를 배설해내므로 그 나무들을 생존케 합니다. 열대지방의 강가에서 서식하는 해변등나무 씨앗은 강을 타고 대해로 나가 수천 Km 떨어져있는 다른 대륙에 정착하여 새 삶을 시작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강물이 흘러갑니다. 창공에는 새가 날고 아프리카의 벌판에서는 코끼리가, 네팔의 숲속에는 코뿔소가 누비고 다닙니다. 때로는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건조한 산에서 산불이 일어납니다. 그 모든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오묘하게, 신묘막측하게, 신비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식하든 의식치 못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가고 계십니다. 자연 속에서도 자연을 위해 이렇듯 신비스러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 시라면, 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인간사 속에서 인간을 위해 당신의 역사를 행치 않고 계시겠습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아니해도, 우리가 의식치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당신의 역사를 전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니,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네팔의 트레비아 나무 열매와 코뿔소 사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는 자는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는 자에게는 분명하게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역사를 확연하게 펼치시고 계십니다. 참된 믿음의 근저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절망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소망과 사고의 성숙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 바에게서 관 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28a)

 

여기에서 관 정이란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 의 공관을 의미합니다. 대 제사장 안나스와 가야 바의 심문을 차례로 받았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지시에 의해 이번에는 빌라도 총독에게로 끌려갔는데, 그때의 시각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당일 즉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본문 28절 하반 절로 29절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 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 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마침 그날 저녁부터는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 의 공관까지 끌고 온 유대인들은, 그러나 빌라도 의 공관으로 들어가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의 거처는 다 부정하여, 부정한 이방인의 거처로 들어가면 곧 부정을 타 그 부정이 일주일간 계속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그날 밤부터 시작되는 유월절에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참여할 수가 없으므로, 그들은 빌라도 의 공관에 당도하였음에도 누구 한 명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빌라도 총독이 공관으로 쓰는 건물은 궁전의 일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거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고 깨끗한 곳입니다. 목욕도 유대인들보다 빌라도 총독이 훨씬 더 자주 했을 것입니다. 입고 있는 옷이나 사용하는 화장품도 빌라도 의 것이 월등 나았을 것입니다. 빌라도 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불결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빌라도 가, 그가 살고 있던 공관이 부정해서, 더러워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포박하고 능욕하는 그들 자신들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오히려 가장 정결한 자로 스스로 착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관입니까?

 

빌라도 총독은 역시 노련한 정치가 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과 자신의 거처를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여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두말없이 공관 밖으로 나가 무리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끌고 온 예수님을 보고서는 무리를 향해, 대체 무슨 일로 꼭두새벽부터 저 사람을 고소하려는 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의 답변은 우리로 하여금 더 더욱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합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 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 이다"(30)

 

자신들이 이른 새벽부터 소동을 피우고있는 이유를 자신들이 끌어온 예수님이 행 악자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서 `행 악자'란 단어 Kakopoyos는, 법률 위반 여부를 떠나 심성과 인격 자체가 사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얼핏 보면 그들은 사악한 행 악자를 만나기만 하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소치 않고는 못 베기는 정의의 선봉장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행 악자로 무고하게 모함하는 행 악자들 중의 행 악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혀 자각치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본문이 계속 이렇게 증언하고있습니다.

 

"빌라도 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31)

 

무리들이 예수님을 끌고 온 이유가 그들의 종교적인 문제인 것을 알아차린 빌라도 총독은 그들의 종교법대로 예수님을 재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 문제에 개입되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자기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며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과연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이 하던 짓이란, 대제사장의 허락 하에 예수 믿는 자들을 돌로 쳐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종교법에 따라 사람을 돌로 쳐죽일 수 있는 권한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빌라도 총독 앞에서 강변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권한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로마법에 의해서만 가능했고, 로마법은 로마 총독에 의해서만 집행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법으로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면 그만이지, 왜 구태여 십자가 위에서 사형시키려고 했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대제사장 집단은 유대인들을 뒤에서 사주하여 예수님을 국사범으로 몰면서까지, 십자가 처형을 위해 왜 그토록 치밀하게 공작을 했습니까?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 이니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인위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단지 하나― 예수님의 출현이 그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뒤흔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죽여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 위에 매어 달아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아 죽은 자임을 만천하에 공포하여, 예수님 사후에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자와는 결코 상종치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사악한 안나스와 가야 바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으십니다. 행 악자가 되어 빌라도 의 재판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받은 자로 십자가에 매어 달리기 직전입니다. 인류 역사상 진리가 불의에 의해 이보다 더 농락 당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이처럼 진리가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되는 시기라면 이 시기야 말로 절망과 암흑의 시기입니다. 이 속에 무슨 소망이 있으며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어라"(32)

 

진리가 유린당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악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영원히 저주받은 자로 만들기 위해 기를 쓰고 십자가 위에 매어 달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가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만방에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인류 역사 위에 지금 생명의 십자가를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행 악자로 몬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죽음과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란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인간들에 의해 행 악자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히는 능욕을 받으시면서 까지도, 끝까지 그리스도의 길을 벗어남이 없이 오히려 당신을 못박는 자들을 용서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그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을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아셨고, 보셨고, 믿으셨디 때문이었습니다.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역사는 매순간 결코 중단됨이 없이 언제나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 그 사람만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방법을 추구할 수 있고, 어떤 조건하에서도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작년 3월 1일, 유관 순 기념 교회인 매봉감리교회에서 3.1절 77주년 기념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날 설교자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 순교하신 주 기 철 목사님의 아드님 되는 주 광 조 장로님이었는데, 그날 설교 중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선친 주 기 철 목사님은, 예수님을 위하여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외친 그대로 당신도 죽음으로 충성하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 했을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섬기던 교회와 당신의 조국인 조선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위의 세 형들에게 붙여주었던 돌린 자를 마다하고 `조선아 빛나라'는 의미로 `광조'라는 이름을 지어줄만큼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7년간 일본과 투쟁하면서, 단 한번도 공개 석상에서 `조선 독립' `조선 광복'이란 구호를 사용한 적이 없었고, 일본 천황을 비난한 적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말로서 일본과 투쟁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행했고, 죽음까지 이르는 믿음의 실천으로 당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참여했던 33인 중에 과반수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일본 동경 YMCA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분들도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조선의 독립과 조국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결사적으로 일본과 싸워 나라의 광복을 되찾자고 목이 터져라 외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환호와 존경을 받았지만, 얼마되지 않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변절하여 민족의 반역자로 일본에 아부하면서 자신의 영달만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조선의 독립'이란 구호 한번 외치지 않았던 아버지를 일곱번이나 가두어 갖은 고문을 다했고, 끝내는 감옥에서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말로 `나라 사랑'을 외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행동으로 나라 사랑을 실행했기에, 아버지의 그 말없는 실천, 행동이 일본 경찰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말없이 죽음에 이르는 삶을 통하여 아버지는 우리에게, 믿음은 죽기까지 실천하는 것이란 가장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즉,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행동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능욕 받고 유린당하던 그 절망의 시대에 그분이 결코 조국광 복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방법을 추구하면서, 허황된 구호를 외치기보다는 한 알의 밀알처럼 진리를 위해 말없이 죽어 가는 순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역사가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는 한 겨울, 한 밤중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반드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철처럼 굳게 믿었던 까닭입니다.

 

만약 그 믿음이 없었던들 그 분 역시 중간에서 변절했거나, 아니면 무력을 더 신봉하여 폭력도 불사하는 투사가 되었을런지 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쉬임없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감옥에서 무력하게 그의 생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 교회의 정통성과 정결성은 그 분을 통해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주목사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온전히 살지 못했음을 회개합시다.

 

지금 이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참으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여건은 다 절망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절망치 않고 오히려 소망을 지님은, 무력하게 유린 당하는 것 같이 보이는 진리의 길을 추구함은, 요란한 구호보다는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 떨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원함은,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당신의 역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친히 펼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강물이 흘러갑니다. 코뿔소는 트레비아 열매를 먹고 코끼리는 아카시아 열매를 삼킵니다. 새들은 창공을 날고 때로는 산불이 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한 순간도 쉬임없이 오묘하게, 신묘막측하게, 신비스럽기 그지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역사를 친히 전개하시면서 말입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진리이신 주님께서 불의한 자들에게 농락 당하시던 그 절망적인 순간, 실은 하나님께서는 치밀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펼치시고 계셨음을 일깨워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진정으로 감사 드립니다. 군대도 없이 그저 맨손으로 독립만 세를 불렀을 뿐인데 광복을 주셨던 것을 감사 드립니다. 공산당의 남침으로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전국토가 유린 당하였음에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해 주셨음을 감사 드립니다. 오천년 동안의 가난과 빈곤으로부터 출애굽 시켜 주셨던 것을 감사 드립니다.

 

대통령도 권력을 남용하면 죄수가 되는 시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도 권력을 사유화 하면 백성 앞에 머리숙여 백배 사죄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시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의의 결과는 무엇이며 진리의 결국은 또 어떠한지를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셔서 불의와 죄악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과거를 망각한 채 사치와 방종과 죄악 속에 빠진 우리를 날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깨우쳐주시고 바로 설 수밖에 없도록 역사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라 할지라도 실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신실하게 이루어가고 계심을 분명하게 믿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늘 충만한 소망 속에서 하나님의 법과 방법을 추구하게 하시고,내게 주어진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요란한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진리 안에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옵소서. 한 개인의 역사이든, 한 가정의 역사이든, 한 나라의 역사이든, 절망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소망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새로워 짐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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