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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 / 시 23:1 /

by 【고동엽】 2021. 12. 5.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
시 23:1 -6.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완벽한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세상의 모습을 하나님이 다시 만드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계 21:1-4)

사망이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없는 세상,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예비한 것과 같이 아름다운 세상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드신 본래의 세상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 죽음과 고통과 아픔 그리고 슬픔이 들어오게 된 것은 우리 인간들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범죄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 세상과 인생의 비극이었습니다. 모든 세상과 인생의 비극은 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28절에서 31절 사이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는 바대로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자신의 주인을 삼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 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고 욕심을 채우면 잘 살고 행복해 지는 줄로 대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오히려 세상과 자신을 파괴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면 이룰수록, 자신의 욕심을 채우면 채울수록 점점 더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삶은 오히려 피폐해져 가고 황폐해져 가게 됩니다.

행복은 우리의 뜻을 이루고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선하신 욕심을 채워 드리는데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살기 시작하면 세상은 점점 아름다워지게 되고, 세상은 점점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23편의 말씀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주인으로,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다윗을 증인으로 세워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그가 살아가는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아진 세상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으로 자신의 목자를 삼은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두려움이 없는, 불안함이 없는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로 자기 목자를 삼은 사람은, 하나님을 삼은 사람은, 주인으로 삼고 사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33편 12절에도 보면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시고, 이 말씀에 여러분의 귀한 인생을 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말씀대로, 약속대로 여러분의 삶 속에 넘치는 축복이 있을 줄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저의 모든 인생과 목회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부족함이 너무나도 많은 저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올 수 없는 자리에 오게 하시고, 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셔서 저도 다윗과 같이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고 늘 고백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사랑하는 자녀 손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얼마 안 되는 제 유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선악과를 따지 않고, 하나님으로 자신의 하나님을 삼고, 자신의 뜻과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선하신 욕심을 채워드리기 위하여 살아가려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꼭 가르쳐주고 심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목사로서 교인인 여러분들에게 꼭 그것을 가르쳐 드리고 심어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구체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사는 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십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한다고 할 때 그것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일까요? 저는 그것을 ‘돈’(물질)과 ‘자리’(명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을 세웠다고 내 것이라 하지 않는다. 내 것이라 하지 않음으로 구태여 머물려 하지 않는다.> 부족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 말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야기할 때 다른 교회는 몰라도 동안교회는 제 공이 조금은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이야기할 때 거기 머물러 그 공의 열매를 좀 따 먹어도 좋을 것입니다. 먹기에 좋은, 누리기에 좋은 자리 일 수 있었지만, 구태여 거기 머물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입성에 누구보다도 공이 많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도 동안교회에 작은 공이라도 있는 저를 그곳에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열매를 따 먹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제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그곳을 떠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저에게 좋은 동안교회보다 더 좋은 높은 뜻 숭의교회를 주셨습니다. 좋은 자리를 버렸더니, 더 좋은 자리를 주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버렸더니 더 높은 자리를 주셨습니다. 제가 이제껏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은 공이 있는(인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동안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에 맛 들인 제가 지금 욕심내어 벼루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동안교회 만큼의 공이 있을 수 있는 높은 뜻 숭의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의 주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의 느보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꿈꿉니다. 그렇게 되면 과연 하나님은 또 얼마나 높여 주실까? 부족한 사람을 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실까? 꿈만 꾸고 있어도 얼마나 행복해 지는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배들 중에 공을 세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그 자리의 주인이 되어 그 자리의 열매를 탐하는 선배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불쌍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발 그와 같은 노망을 하지 않는 목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사는 삶에 있어서 ‘자리’(명예)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돈“(물질)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 한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더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 번 결단과 결심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과 실천을 통해서만 점진적으로, 아주 점진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과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참 많이 가난했지만, 그래서 물질에 대한 여유가 정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보 훈련을 참 잘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저는 종이돈으로 용돈을 받아 본 적도 없고 동전으로 연보 돈을 받아 본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무의식적인 훈련을 통하여 크게 힘들지 않게 하나님을 위하여 부족하지만 조금은 큰 돈을 쓸 줄 알고 낼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작년부터 우리 자신을 위하여 쓰는 것보다 하나님의 몫으로 떼어 쓰는 돈이 많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하나님의 몫을 가장 많이 떼도록 가족들과 의논하고 결정해 놓았습니다.

정직한 십일조를 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만은, 교인들이 사과 한 알을 주어도 십일조를 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은행 통장에 이자가 붙어도 꼭 십일조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주신 집이 있어서 두 번 정도 팔았다 샀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을 팔 때마다 샀을 때와 팔았을 때의 차익을 계산하여 십일조를 했었습니다. 작년부터 다시 그것을 팔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받게 될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상식대로 만일 받게 된다면 그 재산의 삼분의 이 정도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가족들과 의논하고 결정한 상태입니다.

이렇게만 대충 이야기해도 제가 정직한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라기 3장 10절 이하에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두세 번 정도 정말 엘리야의 기름병과 같이 하나님께 다 쏟아 부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헌금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개가 교회 건축 때문에 한 헌금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름병을 다 비울 때마다 가득 넘치게 그 자리에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저는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떠나면 더 높여 주시고, 쏟으면 더 채워주시는 신기한 하나님을 저는 지금까지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머물며 높아지려 할수록 더 낮아지고, 욕심 부려 더 움켜쥐면 쥘수록 더 가난해 지는 것을 저는 보아왔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합니다. 지난 주간 텔레비전에서 신 빈곤층에 대한 특집을 방송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저렇게 고생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돈의 주인이 되면 돈 때문에 사람들이 고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돈의 주인이 되셔야만 사람들이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됩니다.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돈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있기를 위하여, 그리하여 돈 때문에 비참하게 고생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없어지기 위하여,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돈을 먼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정직한 십일조 훈련부터 받아야 합니다. 쓰고 남은 돈으로는, 십일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떼고 남은 돈으로 사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살림을 하는 주부뿐만 아니라 사업을 하는 사업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십일조를 사업에 자본으로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려워서 십일조를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억지 같아 보이지만, 어려우니까 십일조를 해야만 합니다. 넉넉할 때의 십일조도 힘들지만 어려울 때의 십일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황충이 먹지 않고 포도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음으로 이방인들 까지도 너희를 복되다 할 것이라는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면 가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 세 아이들에게 최소한 정직한 십일조 훈련은 제대로 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은 부모의 큰 도리를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높은 뜻 숭의교회의 목사로서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에게 정직한 십일조 훈련을 시키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물질적인 넉넉함과 풍족함이 삶의 목적이 전혀 아니었던 목사인 제가 누리는 이 넉넉함과 풍족함을 여러분들도 누리실 수 있게 해드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물질과 자리의 주인이 나 자신일 때 삶은 참 빈곤해 지고 누추해 집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물질과 자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살 때 더 높여 주시고 더 풍족케 해 주십니다.


오늘은 대강절 셋째 주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과 귀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 자신이십니까?

그냥 교회 다니지 마시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으세요.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하나님의 선하신 욕심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로 삼으세요. 병기로 삼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세요. 땅에 살지만 땅에 얽매여 종처럼 살지 말고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땅도 천국처럼 사는 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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