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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누가복음 15:11-24

by 【고동엽】 2021. 12. 5.

탕자의 귀향

 

누가복음 15:11-24

우리가.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안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을 무신론이라고 하죠?
하나님은 계신다, 살아계시다! 유신론이라고 합니다. 에~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 사이에 가장 첨예한 논쟁의 초점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느냐? 신이 인간을 만들었느냐? 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지만, 무신론자들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신을 만든 것이다. 무신론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중요한 이유는 아~ 심리적인 것을 지적합니다. 아~ 그것을 영어로는 그 위시플 싱킹이라고 말을 하는데요. 아~신이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소원하는 생각. 소위 위시플 싱킹, 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 신이 있으면 우리가 기댈 수가 있고, 의지할 수가 있고, 또 도움을 받을 수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신을 만든 것이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데 만든 것이다. 이것이 무신론자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위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 들에게 똑같은 논리, 똑같은 지적을 할 수가 있어요. 왜 그들이 신이 없다고 주장을 하느냐? 그것도 신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냐?
아~ 도스도예프스키가 그의 작중 인물의 고백을 통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합니다. 범죄의 현장에서 사람이 죄를 범할려고 할 때, 우리 마음 속에 다가오는 가장 껄끄러운 생각은 신이 있다. 아, 나의 지금 죄짓는 행동을 신이 알고 있고, 나를 보고 있고, 나를 이렇게 지켜 보고있다. 이게 가장 괴로운 생각, 가장 부담스러운 생각이라는 거죠? 아~그렇지 않다면 마음대로 죄를 범해도 괜찮은데 나를 보시고, 나를 아는 분이 계시다. 이것이 너무나 부담스럽고 너무나 마음 속에 걸리는 그런 생각이기 때문에, 에~ 또 그분이 있어서 나를 결국 심판한다. 너무나 힘든 생각이기 때문에 신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무신론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우리가 꺼꾸로 우리가 지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신론이 탄생한 가장 정직한 이유라고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무신론자들은 신의 부재를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신 의식을,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추방해 버리고만 것입니다.
불행한 천재 철학자였던 프레드 니체는 그래서 신이 죽었다고 선언 했습니다. 그러나 신 의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든 이 철학자는 그의 말년에 그, 미치지 않습니까? 그가 발광 직전에 휘갈겨 쓴 낙서 같은 메모 속에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오! 신이여, 당신의 의식은 유령처럼 내 영혼을 약탈하고 있나이다’ 유령처럼 당신의 의식은 내 영혼을 지금도 약탈하고있다 라고 그는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기독교 철학자는 아~, 니체의 이런 의식의 세계를 가리켜서 그것은 유치한 틴에이져의 반항심리 같은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유치한 틴에이져들의 반항심리와 같은 것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위 탕자, 어떤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하고 담판을 하고, 데모를 하고, 떼를 써가지고 그 재산을 받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출해 버렸던, 이 둘째 아들의 가출심리도 동일했다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더불어 같이 있다. 이것이 자기의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그는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먼 나라로 떠나가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잔소리가 없는,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 독선적인 목사의 설교소리가 들리지 않는 먼 나라, 예, 또 예수쟁이들의 따라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귀찮케 굴지 않는 먼 나라, 내 신경 쓰게 만드는 찬양소리도 기도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먼 나라, 자유의 먼 나라 그 먼 나라를 향해서 떠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탕자의 화려한 외출이였고 당당한 독립선언이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읽어보시면, 누가복음 15장11절 이하의 말씀을 가만이 읽어보시면 이 본문의 초점은 이 둘째 아들의 떠나간 것, 떠남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돌아 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떠나갔든 이 둘째아들이 이상하게 다시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드라마, 이 탕자의 드라마는 결코 가출의 드라마도 아니고 반항의 드라마도 아니에요.이것은 귀향의 드라마 그리고 회심의 드라마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성경에 나타난 이 둘째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본문에서 물어야할 매우 중요한, 이것은 여러분의 일생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물음입니다. 세가지 물음을 던지고자 합니다.

첫째 물음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는가?’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는가?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돌아왔어야 했는가?’ 어떻게 그가 돌아 와야 했는가?
그 다음에 세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그는 영접 되었는가?’ 돌아온 그는 어떻게 영접 되었는가? 이 세가지 중요한 질문을 함께 던져 보고자 합니다.

첫째질문,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을까요? 이렇게 떠나갔든 둘째아들을 무엇이 돌아오게 했을까요? 그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본문을 읽어보시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흉년이고, 하나는 생각입니다. 흉년과 생각, 그것 때문에 돌아옵니다.
자, 오늘 본문에 14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4절 시작, “다 없이 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자, 이 둘째 아들은, 탕자는 풍요를 꿈꾸면서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었든 것은 막상 풍요함이 아니라 흉년이였습니다. 그것도 적당한 흉년이 아니라 큰 흉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가지고 재산을 투자하고 그래서 증식할 풍요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를 꿈꾸며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도 간섭도 없는 자유의 그 나라, 자유를 위해서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돼지 쥐엄요리를 먹고 돼지를 치고 있는 노예의 자리로 전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랑을 꿈꾸며 떠났습니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펼쳐지는 사랑, 그런 사랑을 꿈꾸며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뼈져리는 추위와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스도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도스도예프스키가 참, 성경적 가치관은, 또 사람들의 성경적 사고와 생각들을 가장 잘 묘사한 작가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도스도예프스키가 이런 작중 인물의 말을 통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신을 버릴 때, 혹은 신을 떠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우리는 신만 떠난다, 하나님만 떠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들이 신을 버리는 순간 하나님을 떠나는순간, 그들은 사실, 모든 것을 버린다’ 모든 것을 버린다. 그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는 자유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는 양심도 떠나는 것입니다. 그는 가치도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순간 그는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자가 됩니다. 그것이 흉년이에요. 인생의 흉년, 크다란 흉년, 지금 이 탕자는 먼 나라로 떠났던 탕자는, 그래서 큰 흉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흉년을 경험하고 있는 분은 안 계세요? 그런데 이 흉년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어요. 흉년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 이 흉년과 더불어 이 흉년 속에서 둘째 아들은 생각을 합니다. 자, 무엇이 탕자를 돌아오게 했다고요? 두 가지, 하나는? 흉년, 또 하나는 생각입니다. 생각, 둘째는 생각입니다. 이 흉년 속에서 비로소 생각을 합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아무래도 아버지 떠난 것이 잘못인 것 같애, 그래 생각을 해요. 아주 중요한 생각이죠? 자 17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의 17절 입니다. 다같이 읽습니다.시작,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 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자기의 처지,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생각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양식이 많은가, 거긴 종들까지도 풍족하게 먹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이건 독백인데 물론 이런 구절은 독백인데 이 독백 속에서, 모노로그 속에서 쏟아내고 있는 이 둘째 아들의 생각, 중요한 생각입니다.
자, 그는 깊이 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를 아마 회고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있으므로 누릴 수 있었던 그 풍요함이 생각났고 또 아버지와 함께 더불어 있을 때 그가 누릴 수 있었던 그 마음 따뜻한 안식을 생각해 냈었을 것이고 또 아버지와 더불어 함께 있을 때 그가 누렸든 그 조용하지마는 자기의 마음을 감싸고 있었든 평화를 그는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아버지와 더불어 같이 있을 때가 사실은 자유였어, 사실은 자유였어. 그 진정한 자유를 비로소 이 둘째 아들은 아마 생각해 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7절에 이런 말로 시작이 되는데, 이에 스스로 돌이켜, 그랬죠? 이에 스스로 돌이켜.그런데 이 부분을 영어성경에서 읽어보시면 그 표현이 더 재미있습니다.이런 말로 표현되어있어요. ‘He came to himself’,. He came to himself 자기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이 말입니다. 스스로 돌이켜란 말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먼 나라로 떠나가서 마음대로 살 때 그는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였어요.근데 실로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자아발견의 경험이라고 그럴까요? 자아를 성찰하며 잃었든 자아를 다시 찾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이런 결론 앞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나는 살아갈 수 없는 자야, 아버지를 떠나서 나는 살아갈 수가 없어, 이 중요한 생각, 여러분 얼마나 중요한 생각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흉년, 탕자에게 찾아왔든 둘째 아들에게 찾아왔든 흉년은 오히려 축복이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흉년, 궁핍, 우리가 인생의 장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고통, 때로 그 고통들은 변장된 축복일수가 있습니다. 이 흉년 때문에 아버지 생각하고 돌아올 생각을 했으니까 그 흉년이 오히려 축복이죠.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금세기에 평신도로서 전세계 가장 크다란 영향력을 끼친 분이 있다면 영국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가르치면서 주옥같이 많은 소설, 책들을 썼든, 씨에스 루이스 라는 교수일 것입니다. 씨에스 루이스교수가 한번은 옥스포드 채플에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젊은이가 그를 붙들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계시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세상에 형언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질문하고 있는 젊은이를 조용히 내려다 보면서 씨에스 루이스교수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젊은이, 형제여 이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않아도 오만한데,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그러지않아도 교만한 인간, 그리고 오만한 인간.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그리고 이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고통은 말이야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지, 하나님의 메가폰이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요.고통 속에서, 역경 속에서 사람들은 무릎을 꿇어요.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흉년은 필요한 것입니다. 궁핍도 때로는 인생의 장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흉년이 오거든, 아니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장에 흉년이 왔다고 생각하거든 생각을 하세요.흉년이 왔으면 좀 생각 좀 하세요 이 흉년 속에서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내려야할 결단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 해보시기 바랍니다.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흉년이 오기 전에 미리 생각하는 사람은 더 복된 사람이죠.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좀 쉽게 노골적으로 얘기할까요? 그러니까 흉년 속에서 비로소 주앞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또 흉년이 오기 전에 미리 생각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그걸 더 쉽게 얘기 할까요? 매맞고 돌아오시겠습니까? 그냥 오시겠습니까? 그런 얘기에요. 자,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습니까 이 두가지, 흉년과 생각, 내 인생에서 내가 경험하는 어떤 흉년,그리고 내 진지한 생각, 그것이 그를 돌아오게 했던 것 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그는 돌아와야 했는가? 어떻게 그는 돌아와야 했는가? 그것도 두가지 입니다. 떠나야 하고 돌아와요. 떠남과 돌아옴.이두가지를 통해서 돌아올 수가 있었어요, 떠남과 돌아옴. 떠나야 돌아오죠? 우선 떠남입니다. 20절, 같이 읽겠습니다. 자, 본문의 20절을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자, 이에 일어나서 그랬습니다. 왜 일어났습니까? 그 먼 나라에서 떠날려고, 먼 나라를 떠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 갈려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떠나는 출발이였습니다. 떠남의 출발이였습니다. 일어났습니다. 행동이죠.그것은 떠나기 위한 행동입니다.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생각만이 아니였습니다. 우리가 정말 일어나서, 떠나서 돌아올려면 행동을 해야합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행동이에요. 액션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시면 18절과 19절은 생각이에요. 자, 18절 19절 보실까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오니라’ 그러니까 18절 19절은 뭡니까? 생각이에요.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죄를 얻었어요. 실제로 지금 아버지 앞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미리 그렇게 리허설을 하는 거예요.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녜? ‘내가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해야지 생각하고, 그런데 생각만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이에 일어나서 돌아왔다. 드디어 액션을 시작했습니다. 행동을 시작 했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생각만 하시겠습니까? 생각은 참 귀해요. 중요한것입니다. 생각이 전환점입니다. 그런데 생각만 또 해선 않돼요. 언제까지 생각 하시겠습니까? 저가 너무 제 친한 친구가운데 제가 늘 전도하는 친구가 있습니다.그래 전도하면 대답이 항상 꼭 같에요.생각해 보지, 생각해보지 십년이 넘었는데 계속 생각해보지 그러드라구요.그래서 할수없이, 이런 얘기하면 실례인줄 알면서도 그것도 사실이니까 제가 하루는 좀 쇼크 요법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너는 지옥가서도 생각하겠다, 하~ 계속 생각만, 생각만 하면 뭘해요? 이제는 행동을 해야죠. 액션을 해야죠. 결단을 내야죠. 이에 일어났다! 이건 떠나기위한 출발이에요.결단입니다.떠나야합니다. 불신앙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살아왔든, 그 불순종의 자리를 박차고, 내가 비록 노골적으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왔든 삶,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든 삶의자리, 그런 반역의자리, 이 반역의 자리를 박차고 말이야! 돌아와야 합니다. 박차고 돌아와야 합니다. 일어나는것, 이것은 결단입니다. 이것은 액션입니다. 결단입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언약의 땅을 준비하셨을 때, 그는 먼저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든 갈대아 우르를 어떻게? 떠났어요.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어디로? 약속의 땅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떠나갔습니다.그에게 약속의 땅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그는 먼저 떠나야만 했었습니다. 어디를? 갈대아 우르로요. 그런데 갈대아 우르 란 말의 뜻이 재미있어요. 갈대아 우르란 말이 본래 파괴의 잿더미, 파괴의 잿더미.여러분이 지금 서있는 그 자리가 파괴의 잿더미일지 몰라요. 내 인생이 상실되고 찢어지고 부서져 나가는 파괴의 잿더미. 삶의 분명한 의미도 가치도 목적도 없는, 그 파괴의 잿더미 같은 자리. 언제까지 거기 계시겠어요? 일어나세요!! 떠나세요 이제는, 그리고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십시요. 떠나는 거에요. 떠나야돼요.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에서는 성경에서는,그것을 회개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 회개는 생각만이 아니에요. 액션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자, 떠나서 돌아와야 합니다. 이에 일어나, 오늘 본문에 보시면 20절에 ‘아버지께로 돌아오니라’ 누구한테 돌아왔어요? 응?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단순히 종교에 귀의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지금 종교에 귀의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단순히 교회로만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 귀의했는데 교회당에 앉아있는데 마음은 떠나가 있어요.아버지께로 오셔야 돼요. 하나님 아버지, 내 삶의 뿌리, 나의 창조자, 그리고 나의 심판자, 그리고 나의 구원자. 그 분에게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아버지께로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가 뭐냐? 이제는 아버지를 믿고 돌아오셔야 합니다.이제는 아버지를 믿으세요. 믿음으로 오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시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가 계신 것과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뭐요?상을 주시는 이 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돌아오시면, 돌아오면 아버지는 나를 받아 주실꺼야, 이거 믿으세요. 아버지는 나를 결코 나를 쫓아내지 않아, 성경에도 약속 했습니다. 예수님도 ‘무릇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않는다고’ 안심하세요. 돌아오면 나를 받아주실 아버지. 아니 나를 상급주실 아버지, 그 아버지를 믿고 돌아오세요. 이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그 아버지의 약속의 신실하신 그의 품성을 믿고, 안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십시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믿음으로,하나님 앞에 돌아오시는 겁니다.어떻게 돌아 와야 합니까? 회개하십시요. 회개란 액션입니다. 이 불순종의 자리, 불신앙의 자리 더 이상 그기 있지 말란 말이에요. 일어나셔야 돼요!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고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자, 그가 돌아올 때 마지막 세번째 질문입니다. 어떻게 그는 영접 되었을까요? 어떻게 영접 되었을까요? 그것도 오늘 본문을 들여다 보면 두 가지 대답이 나와요. 어떻게 영접 되었는가? 두 가지 입니다. 기다리심과 완벽한 회복입니다. 기다리심으로, 그리고 완벽한 회복으로 그는 아버지에 의해서 영접 되었습니다. 첫째로 기다리심으로, 자, 본문의 20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실까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 다음에 ‘아직도 상거가 먼데’ 자, 이 둘째 아들이 지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거리가 있었다. ‘상거가 먼데’ 거리가 먼데, 저는 이 거리가 단순히 문자적인 거리일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이 둘째 아들이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을 심리적인 거리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심리적인 거리, 아이, 글쎄 아버지가 정말 나를 받아주실까?내가 얼마나 개판치고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정말 하나님을 비웃고 살았는데 내 마음속에 내가 느끼고 있었든 어떤 무거움, 스스로 만든 자격지심에 마음에 거리, 심리적인 그 공간의 거리, 상거가 먼데, 그 거리를 느끼고 있었을 거에요.그런데 계속 읽어보세요.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누가 누구를 보았습니까? 아버지가 저를 보고, 누가 먼저 발견을 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뭐에요 아버지가 저를 보고, 보고!보고, 이 단어를 여러분 보세요.
‘보고’ 아들이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측은히 여겨 달려가~그랬습니다. 달려가, 누가 누구에게로 달려갔어요? 녜?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고 있었든 지난간 시대의 불세출의 저 유명한 설교가 였든 스폴츠는 본문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맞다! 이 둘째 아들이 간신히 간신히 가까스로 한걸음 한걸음을 무겁게 내 디디고 있었을 때, 이 아들이 둘째 아들이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 아버지는 열 걸음으로 달려왔다! 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이것은 아들이 돌아오는 스토리 일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스토리 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렇게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심으로 맞아주시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영접되었다고요? 기다리시고, 그 다음에는 완벽한 회복을 해주었습니다. 완벽한 회복, 자, 여기 20절 다시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그 다음에 목을 끌어 안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입을 맞추었다’ 그랬습니다.그런데 입을 맞추었다는 말이 본래 원문에 보면, 그냥 쪽!한번 맞추었다는 말이 아니에요.많이 맞추었다. 많이 맞추었다,.그냥 정신없이 왔구나, 왔구나 왔구나 왔구나, 계속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에요.이것은 넉넉한 사랑. 이 아버지의 넉넉한 사랑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그런 표현이 아닙니까? 자,계속해서 22절을 보세요.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야,제일 좋은 옷 가져오라!그리고 좋은 옷을 입혀요. 자, 누더기를 벗기고 새 옷을 입혀주었어요.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수를 믿었을 때 성경에 보니까.우리 죄를 용서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은 우리 보고 너는 이제 의롭다! 의에 새 옷을 입혀주시는 하나님, 그 다음에 또 어떻게 했습니까?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가락지를, 가락지는 뭐에요? 새로운 언약의 표시야, 너하고 나는 다시 시작하는 거야,. 새로운 언약의 반지, 그리고 우리는 떨어져서는 안돼, 떨어져서도 안 될 사이야, 새로운 언약의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발에는 뭐에요? 신발을 신겨주었다고, 새 신이겠죠? 새 신,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부터 새 출발하는 거야 거지? 새 출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동네잔치, 여러분,이 잔치가 벌어졌을 때 제일 싫어한 건 누구였을까요? 아마 송아지 였을 꺼요 송아지.하하~그렇지 않아요? 잔치할려면 이 송아지 잡아야 되니까,송아지들이 아마 제일 싫어했을 꺼에요. 송아지를 잡고 잔치 잔치 벌였습니다.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잔치를 배설하고,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든 아버지, 그리고 이 완벽한 기다리심으로 또한 그를 회복시켜 주시든 아버지, 뿐만 아니라,잔치만 벌였든 것이 아니라 사실 이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기다리심으로 그 아들이 돌아올 길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한 죄인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그 돌아오는 길에는 큰 장애물 하나가 있습니다. 그 장애물이 뭔지 아세요? 죄의식이었을 거예요. 죄의식, 정죄 의식, 죄책감. 내가 이 지경으로 인생을 살아놓고 이제 와서 무슨 얼굴로 무슨 면목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자기 마음속에서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정죄감, 죄책의식. 이것이 가장 심각한 장애물이였을 꺼에요. 그러나 이 본문의 사건을 가만히 보시면 이 아버지는 미리 다 용서해놓고, 미리 다 용서해놓고 기다리셨어요. 용서는 이미 해놓고 기다리셨어요. 죄책감이 없도록,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200년 전에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 하나님이 왜 예수님 보내주셨는 줄 아세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를 그분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저주, 우리가 받아야할 채찍 대신 맞으시고, 다 형벌을 받으시고, 네, 죄 문제는 다 해결되었어, 돌아오기만 해, 길을 닦아 놓으셨어요. 이제는 돌아가 보기만 하라! 그렇습니다. 여기 성경에 나타난, 이 사건에 나타난 우리 아버지 하나님, 그는 이미 용서해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굉장히 차이가 있어요. 너 돌아오면 용서해, 이게 아녜요. 용서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용서해 놓으시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저는 옛날 우리 부흥 목사님이 한 얘기인데, 우리 한국에 옛날 얘기겠죠.그러나 가슴 촉촉한 감동이 오랜 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아마 조선시대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어떤 아들 하나가 아버지한테, 오늘 본문에 나간 얘기 비슷하게, 나 아버지 하고 살기 싫다고 나가겠다고, 그래서 떠나 가버렸어요.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떠나갈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애비는 너를 기다리겠다. 너가 외롭거든 말이야, 춥거든 그리고 집 생각이 나거든 너 마음에 아무 걱정 말고 돌아와. 아버지는 기다릴 꺼야. 그때가 가을 이였는데 집 앞에는 단풍나무가 있었습니다. 너 말이야 가을이 되면 이 단풍이 붉게 물들면 그때마다 나를 생각하길 바란다. 이 애비가 기다리고 있다고, 저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처럼 아빠는 변화없는 사랑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이 단풍잎은 말이야 너를 기다리는 애비의 마음이야. 그런데 뭐 떠나가는 아들이, 떠나가는 아들이 그런 아버지 말이 들어왔겠어요? 귀에, 귓전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가서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자, 다 재산 낭비해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떨어진 다음에, 달리는 살 방법이 없었을 때 아버지 말이 자꾸 생각나는 거죠. 그때서야, 아버지가 약속했는데, 가을이면 기다리겠다고, 단풍이 무르익으면 기다리겠다고, 그래서 가을철 단풍이 무르익으니까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애. 아버지는 나를 받아주실꺼야, 맞아, 그분이 하신 말씀도 있으니까, 동일한 시간에 아버지는 아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식이 이제는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데 그 해 따라서 그 가을철 단풍잎이 너무 쉽게 떨어져 버렸어요. 자기 집 앞에 단풍나무의 단풍잎이 너무 쉽게 떨어진거에요. 혹시 이 자식이 돌아오다가 단풍이 떨어진거 보면은 애비의 마음이 변한 줄 알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집안 식구에게 이상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홑이불 가지고 오라고, 다 집에서 홑이불 꺼내 가지고, 거기다 단풍잎 색깔로 홑이불 마다 물들였습니다. 그리고 일찍 떨어진 단풍나무에 그 홑이불을 걸어 놓았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아버지는 아예 지붕을 이 단풍잎 홑이불로 지붕을 다 덮어버렸습니다. 그 해 가을, 돌아오든 이 아들, 멀리서 자기집이 보이기 시작 합니다. 그는 단풍나무를 먼저 찾았습니다. 그런데 단풍나무에 빨간 단풍 색갈든 홑이불이 걸려 있는 거에요. 지붕 위에도,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울먹이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는 집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저도요 자식을 낳아 키워가면서 그 아비가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더라구요. 저 큰아들이, 황이라는 저의 아들이 만 16살이 되었을 때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만 16세가 되면은 운전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벌써 16살이 딱 되면은 운전 할려고 몸살을 해요. 그런데 저의 애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운전면허 따기 전에 그 전 단계가 있습니다. 소위 드라이빙 풀미씽이라고 해서 허가증을 먼저 받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정식 면허증을 받아요. 그런데 허가증은 아~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옆에 태우고 나서 비로소 자기가 운전할 수가 있는 거에요. 제가 제 아이들, 큰아이 데리고 운전 연습도 시켜주고 학원도 다녔습니다 마는 제가 옆에서 코치도 해주고 연습도 시켰어요. 그래서 풀미씽, 일단 허가증도 받아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 여름에 제가 한국에 집회하러 나올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오기 전에 저의 큰 아이보고 이런 부탁을 했었습니다. ‘야, 너 아직은 말이야 운전하면 안돼, 그러니까 괜히 연습한다고 그래서 사고 내지 말고 차 건드리지 않는 거야’ 그러니까 ‘예’ 이러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근데 사고가 생겼습니다. 이놈이 가만히 보니까 운전 조금 할 줄 알겠다 집 앞에 차가 놀고 있겠다, 그래서 어느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차를 끌고 나간 거에요. 그래서 앞에 길을 건너가서 저의 집에서 길하나 건너 가면 우리 아이가 다니든 학교가 있었어요. 학교 마당에 가서 신나게 연습한다고 돌아다니다가 옆에 있는 차 두 대를 박아 버렸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얘가 그냥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그래 미국은 신고 문화가 발달된 나라 아녜요? 즉시로 누군가가 신고한 모양이에요. 정확하게 한 시간 후에 경찰이, 포리스가 집 앞에 온 거예요. 취조를 받기 시작했어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한테 취조 받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너무 놀래가지고 저한테 한국 나오는 우리 교인 편에 편지를 썼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들의 편지, 저는 일찍이 그렇게 진지하게 쓴 아들의 긴 편지를 받아 본적이 없습니다. 하하~ 녜, 대충 이런 내용이에요. 아빠 제가 사고를 쳤어요. 저는 물론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사회봉사 명령이 내리면, 제가 어떤 명령이라도 기꺼히 봉사하면서 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또 보상이 필요하다면 이어지면서 지워진 부분 벌은 돈으로 그 차들에 대한 보상을 제가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정말 염려하고 있는 것은 제가 아버지 하고 약속을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주었고, 또 항상 나와 더불어 신뢰해 주셨든 아버지를 향한 믿음을 깨뜨리고, 제가 사고를 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제가 이렇게한 이 마당 속에서도 아버지는 한번 더 저를 용서해주시고, 그리고 한번 더 저를 믿어주시고, 그리고 언제나 그랬든 것 처럼 제가 잘못했을 때도 나를 축복했든 아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축복할 수가 있는가를 위해서 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편지를 보니까 참 눈물 나더라구요. 아, 그래서 제가 스케쥴을 다 짤랐어요. 짜르고 그냥 빨리 미국으로 다시 돌아 갔습니다. 딱, 미국 와싱톤에 공항에 딱 도착하니까 제 아들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그것도 역사 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였습니다. 하하~ 그래서 차 타고 집에까지 한 3~40분 가는데, 저는 가만히 있었어요. 뭐 특별한 의도가 아니라 가만히 있었더니 자꾸만 제 얼굴을 쳐다보는 거죠. 아빠의 얼굴을 보는 거죠. 집에 딱 들어가서 앉자 마자 제 앞에 무릎을 꿇더니 제 아들의 제 일성이 뭐냐하면 아빠! 때려주세요, 때려주세요. 제가 뭐랬을까요? ‘황이야 아빠가 때려주러 온게 아니야 너 그동안 마음이 얼마나 아팠니? 너 편지를 보니까 나보다도 니가 마음이 더 아팠던 것 같에, 그리고 편지를 보니까 너는 이미 이 미스테이크를 통해서 실수를 통해서 좋은 교훈을 많이 깨달았어, 그런데 니가 힘든 시간 보낸 거, 그리고 니가 결심한 것, 그것으로 너는 네 행동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값을 다 치룬 거야. 아빠가 온 것은 때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아빠는 너에게 아빠는 벌써 너를 용서했다는 것을 마음을 전해줄려고 그리고 너를 축복할려고 온거야. 황이야 우리 같이 기도하자’ 그리고 저는 제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하나님 내 아들을 용서해주십시요.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받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황이가 이 사건을 통해서 정직이 얼마나 중요한지,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런 여러가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성숙한 아들로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세요.그랬더니 갑자기 기도하다 말고 나를 막 끌어 안더니 훌쩍 거리면서 막 울더라구요. 물론 저도 제 아들을 끌어안고 같이 울었습니다. 기도가 딱 끝나고 나니까, 제 마음에 느낌이 뭐냐하면, 지금까지 아들을 길른 가운데 저하고 제 아들이 가장 가까워진 느낌이였습니다. 그 순간이 가장 가까워진 느낌, 그날 밤 뭐했을까요? 저의 온 식구들과 함께 저의 집 근처에 제일 근사한 식당에 가서 우리는 파티를 했습니다. 잔치를 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을 생각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였을꺼라고, 하나님의 마음이였을꺼라고, 그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한가지만 요구하셔요. 한가지만, 용서는 다 해놓았는데 빨리 돌아와서 용서해 주십시요 라는 네 입술로 한마디만 말하면 이미 용서한 그 사랑을 확인해 주고 싶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한마디 들어실려고, 이미 용서는 해 놓았지만 우리가 그분 앞에서 무릎 꿇고,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저 용서해 주십시요. 저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잔치가 시작 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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