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에의 초대
누가복음 14:16-24
지난 9월 20, 9월 15일이죠. 9월 15일부터 호주 시드니에서는 새 천년을 여는 세계 제27회 섬머 올림픽, 세계 올림픽 큰 잔치가 인류 역사 사상 가장 많은 나라인 200 국가가 참여한 가운데, 17일 간에 세계의 가장 큰 잔치가 열렸습니다. 선수단만 무려 1만6천6백명의 선수와 임원들이 참석하고, 역사 사상 가장 많은 Tourist, 관광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더욱이 남북한 갈라졌던 민족 선수들이 함께 손을 잡고 동시 입장하는 감동이 연출된 우리 민족이 기억될 잔치이기도 했습니다. 이 올림픽이 지속되고 있는 와중에 시드니의 한 모퉁이에서는 아마도 시드니의 130여개의 한인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많이 회집되고 있는 새순교회의 주최로 전도집회가 지난 9월 29일부터 시작해서 10월 1일까지 올림픽의 폐막식이 있는 그 날까지, 전도 잔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올림픽의 큰 잔치와 비교해서 교회가 올림픽의 기간 중에 전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이 집회는 작은 모임이었슴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매우 소중하고 의미있는 잔치이기도 했습니다.
그 잔치가 주일날 폐막식이 열리는 주일날 끝났는데요, 4시쯤 모든 순서가 끝났습니다. 저도 메시지를 다 전하고, 저녁 비행기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 가기 위해서 비행장으로 가다가 뭐, 집회 기간동안 이라 저는 전혀 올림픽 구경도 못했고, 가긴 갔지만 옆에 근처에 갔지만, 그래서 마지막 저녁 시간이 마라톤 들어오는 시간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 구경으로 이봉주 들어오는 구경이나 하자 하고선 열심히 지켜봤습니다. 상당히 많은 그런 우리 한인 교포들이 연두에 나와 있었고, 태극기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차가 왔고,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는데, 저는 계속 느낀 것이 무엇이냐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그 노래만 생각이 났는데, 태극기만 바람에 펄럭일 뿐 태극기의 주인공은 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6명까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비행장으로 와서 비행기를 탔습니다. 시드니에서 출발한 이 비행기가 호주 안의 브리스번이라는 곳에 잠시 정차를 해서 Transit 하는 그 지나가는 대기실에서 잠시 지체 하게 되었습니다. 한 30분 쉬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대기실에서 앉아서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어떤 40대초의 한 분이 아주 반가운 얼굴로 제 앞으로 뛰어오더니 이동원 목사님이시죠 그러더라구요. 그렇다고 그러니까 너무 너무 반가와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난 언제 많이 만났던 사람인가 그래서 그냥 쳐다보고 있었더니, 자기 소개를 시작 하시더라구요.
자기가 어저께 그 전도 집회의 잔치에 참석했었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예수 믿고 나서 늘 자기의 이웃들에게 빚진 것들을 느끼고 전도하길 원했는데, 자기가 가장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10년이상 기도해 왔고, 사실은 그 친구에게 효과적으로 전도하고 싶어서 그는 전도 폭발 훈련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새순교회 교인은 아니였고, 다른 교회의 출석하는 교인이었는데, 올림픽 기간 중에 그래서 자기 친구를 전도할 목적으로 초청했다고 합니다. 이분이 또 삼성전자 이런 대리점 계통에 일하시는 분이라 시간이 맞물려서 아주 또 삼성이 대대적인 캠페인을 이번 올림픽 기간 중에 하곤 해서 아주 시간이 잘 맞아 올림픽에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10년 이상 기도했던 친구의 초청에 의해 왔으니까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같이 올림픽 게임도 구경가고 그랬습니다만 드디어 목요일날 저녁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자기 집에 와서 이제 저녁 식사를 하고, 드디어 폭발을 시작했습니다. 자기와 복음의 메시지를 이 친구와 더불어 나누길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왜 죽으셨고, 왜 부활하셨는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하는 이유에 관해서 아주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뭐, 이해하는 것도 같았데요. 근데 마지막 결정하는 순간에 영접하라고 하니까, 아직은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연기하고, 보류하고, 결신을 안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얘기를 또 계속하고 계속 하면서 드디어 밤 12시를 넘겼습니다. 그날 친구는 끝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 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속에서 몸을 뒤척이면서 하나님 내가 10년 동안 기도하고, 초청한 친구인데 그대로 돌려 보내시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튿날 친구는 다시 올림픽 경기장으로 가고, 자기는 회사 가서 일하는데, 와이프가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보, 저 새순교회에서 이번에 전도 잔치가 있다고 그러는데, 당신 그 친구 데리고 한번 그 전도 집회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 때 이동원 목사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데리고 가서 친구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 그것 좋다고. 그런데 갈지 몰라. 그렇게 대답을 하고, 다시 오후에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주 좋은 이런 전도 잔치가 있는데, 같이 가자고, 그랬더니 순순히 가겠다고 따라 오더래요. 그리고 옆에 앉혀놓고, 드디어 설교가 시작되는데, 계속 자기는 기도했던 친구,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친구 눈치만 , 얼굴을 이렇게 봤다고 해요. 그런데 그 친구도 가끔 설교 듣다 말고, 자꾸 자기 얼굴을 보더래요. 에 자기는 어떻게 설교에 반응이 오나, 감동이 오나, 또 마음이 열리나, 이런 관심을 가지고 친구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친구는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래요. 자기 얼굴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설교 중간에 묻기를 큰소리로 묻더래요. 야, 저 목사하고 짰냐? 그러드래요. 왜 그랬냐하면 그 날 제가 강조했던 메시지가 자기가 그 전날밤에 전했던 메시지와 정확하게 똑 같은 메시지였기 때문에, 아마, 그 친구가 놀란 모양이예요. 저 목사하고 쨨냐? 그래서, 야, 나도 처음 보는 목사야. 자 ,이제 메시지가 끝나고 초청이 시작 돼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사람 정말 일어나 보시라고 하니 친구가 갑자기 총알처럼 벌떡 일어나더래요. 아 쏟아지는 눈물, 그런 감격 속에 그는 친구를 데리고 앞에 나와서 친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광경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잔치를 열고, 정말 친구가 주앞에 돌아온 것을 함께 기뻐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레 그 이튿날 또 다른 일이 생겨서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게 되었대요. 아, 친구보다 앞서서 오게 되었는데, 비행기안에서 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간증을 들으면서 야, 그 한 사람을 위해서도 이번 시드니행의 여정은 올만한 가치가 있었다. 생각했습니다.
자, 우리 교회도 금주 목요일저녁부터 이제 전도 잔치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누가복음 14장 15절 이하에 보면 거기에도 잔치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잔치 이야기예요. 이 잔치는 무슨 잔치일까요? 누구를 이 잔치에 초대할까요? 어떻게 초대할까요? 우리는 이런 잔치 이야기를 함께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무슨 잔치 일까요? 자,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5절부터 한번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5절을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5절 함께 읽어요. 시작. “ 함께 먹은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그러면서 그 다음 절에 이르시되 예수님이 비유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하면서 잔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자, 그러니까 이 잔치가 무슨 잔치죠? 하나님 나라 잔치예요.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미래적인 센스와 현재적인 센스 두 가지 의미로 동시에 쓰여집니다. 미래의 천국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될 때, 구원 받은 영혼들이 거하는 곳,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로써의 천국, 미래적인 천국. 성경은 분명히 그 천국을 증언하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는 이 천국의 존재를 믿습니다. 미래적인 천국.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셔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가 드러나는 그 곳에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과 통치가 우리 가정에 임할 때, 내가 개인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 앞에 순종할 때, 주께서 다스림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현지에서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센스로 쓰여졌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문맥의 흐름을 살펴보면, 특별히 본문 직전에 누가복음 14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 누가복음 14장 14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자, 예수님이 바로 그 직전에 의인들의 부활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부활되어서 영원히 거할 곳, 미래적 센스에서 주님은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짤막한 세상 다 살고 나면, 천국에 가야 할 텐데, 천국은 어떤 곳인가, 천국은 마치 잔칫집과 같다. 여러분 잔칫집. 이 잔치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전달합니까? 아주 신바람나는 즐거움. 흥분이 있는 곳. 감격과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곳. 풍성한 기쁨으로 가득찬 곳. 푸짐한 그 잔칫상과 그 음식들을 둘러싸고 친구들이 흥에 겨워 함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잔칫집. 천국은 마치 잔칫집과 같다.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천국이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물론 천국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아요. 죽어야 가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 후에 주께서 우릴 예비하신 그 곳은 정말 잔칫집과 같은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그건 기대가 되는데, 죽는 것이 문제예요. 죽는 게 어렵다 말이죠. 죽어야 가는 곳이니까. 어린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떤 부모가 아이가 하도 학교를 안 가려고 하니까, 야, 너 학교 가기가 그렇게 싫으니? 꼬마가 대답하기를 네가 언제 학교 간게 싫다고 그랬어요. 학교 가는 것도 좋구요, 오는 것도 좋아요. 학교 있는 게 싫어요. 그렇게 대답하더래요. 학교 가는 건 좋은데, 오는 것도 좋은데, 학교 있는 것이 싫어요. 천국은 정 반대예요. 가는 건 좀 어렵죠.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하니까. 아무도 죽음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enjoy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다리를 건너서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잔칫집 같은 천국. 그 천국이 우리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
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잔치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17절에 잔치를 열고, 드디어 잔치에 참석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띄웁니다. 초청의 메시지를 띄웁니다. 어떻게 띄웠어요? 자, 17절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7절 시작.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예, 오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어 친히 준비하신 잔치. 그것은 하나도 빠짐이 없는 소홀함이 없는 완벽하게 준비된 잔치.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십시오. 모든 것이 여기 다 있으니까요.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준비하는 잔치는 그렇지 않죠.지금 우리 교회 스텝들이 열심히 이웃초청 생명의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목자들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고 교회 식구들도 열심히 대상자들을 작정하고 있습니다만은, 허나 우리들이 준비하는 잔치에는 항상 그 소홀함이 있고, 뭔가 빠진 것이 있고, 뭔가 결격사항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아, 이런 잔치 얘기를 하면, 저는 늘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제가 신혼시절에 결혼하고 나서 은혜를 입은 선배 목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아, 그래서 저희, 집에 초청해서 작은 잔치를 열었습니다. 제 아내가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옛날에는 말이죠, 식사가 끝나면 상대방에 의사와 상관없이 묻지 않고 무조건 커피 주는 것이 대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죠. 네, 그래서 뭐, 어떻게 프림 얼마요, 설탕은요, 옛날에는 이런 것 물은 일이 없어요. 옛날에는 무조건 다 타갔고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옛날 방법이 아니였습니까. 그런데 커피 대접을 딱 했는데, 이 손님 되시는 저희 선배 목사님이 딱 커피를 맛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가요. 이상하게 가는 거예요. 설명할 수 없이 표정이 가 버려요. 그래서 제가 직감적으로 아, 뭐가 잘못 되었다 이런 느낌이 있어서 얼른 저도 커피 맛을 봤어요. 그러니까 마시자마자 토하고 싶더라구요. 너무너무 이상한 것예요. 그저 깜작 놀래갔구, 여보 이 커피 어떻게 된거야, 하니까 제 아내가 달려오더니 딱 커피 맛을 보더니 어머 미원 넣었네. 여러분 오늘 커피에다가 미원 넣고 한번 실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맛이 어떤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 그런 맛이에요. 얼마나 황당했는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뭐, 어떻게 좋을지 모르더라구요. 죄송하고, 미안하고 사람이 준비하는 잔치가 그렇죠. 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되어 준비하신 잔치 어떨까요. 자, 이번에 목요일부터 있을 우리들의 교회 잔치, 전도 잔치는 단순히 교회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초청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잔치 어떤 잔치라구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잔치,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오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목말라 하는 것 그들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 그들이 찾고 싶고, 만지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 이 하늘나라 잔칫상에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뭘까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라 생각하세요. 로마서 14장 17절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설명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기 바울 사도는 세 가지의 매우 중요한 개념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의와 평강과 희락”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아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예요. 불의한 세상이예요. 불공평한 세상이예요. 우리는 끊임없이 불의를 경험하고, 불공평함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에 목말라 합니다. 정의에 대해서 목말라 해요. 그런데 천국은 어떤 곳인가, 천국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곳,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 완벽한 공의의 나라 천국에는 이 의로움이 있습니다.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천국의 주인이신 우리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이예요. 그러나 이세상도 어떨까요? 이 세상은 불안한 세상 끊임없이 불안을 경험하는 세상 아침에는 좀 편안했다가 우리가 조그만한 사건 하나 경험하면, 또 내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불안한 세상. 그래서 불안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상. 그래서 심지어 우리의 인사까지도 “안녕하십니까?” 왜 우리가 이런 인사를 합니까? 안녕하지 못한 민족이니까 그렇죠. 우리의 인사법과 똑같은 인사법을 가진 나라가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예요. 샬롬. 그거죠 “샬롬”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샬롬” 그 뜻이 무엇입니까?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화가 당신에게” , 평화가. 평화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화가 없거든요. 자, 우리가 우리 교회가 얼마 전에 성지 순례를 갔다 왔는데, 갔다오자 마자, 바로 터졌어요. 지금 난리 아니예요. 하루를 내다볼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 그래서 샬롬, 평안을 날마다 확인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떤 곳이라구요. 완벽한 평화가 있는 곳 , 예수님은 평화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태어날 때, 천사들은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그 다음에는 뭐예요. 땅에서는 평화. 우리 크리스마스 카드에 땅에서는 평화.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예요. 예수님이 땅에서 평화 그랬다면 약속 안 지킨 것이예요. 왜 아직도 이 땅은 평화를 모르고 있는데, 그러나 주님이 본래 말씀하신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 예수님은 그 분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이 평화를 모르는 세상 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불안한 세상 불안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견고한 평화, 견고한 평화 이 평화를 약속하신 주님. 그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상처 받을 사건을 경험하여서 우리의 마음은 슬픔으로 찢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은 기쁨 하나님. 기쁨의 주님.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는 기쁨의 나라라. 여러분 천국에는 우리가 목 말라 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의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그렇게 목말라하며 그리워하는 그 모든 것 삶의 진정한 의미 목적. 그리고 완벽한 아름다움.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천국을 예비하시고,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로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 이것이 바로 잔치인 것입니다.
이 잔치에 누구를 초대해야 옳을 까요? 누구를. 자, 오늘 본문의 16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1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자, 본문의 주인으로 Host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우리 주님 그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 주님의 뜻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잔치에 와서 이 잔치의 향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더 많은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이 잔치에 참여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번 잔치에도 우리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야 겠죠. 오늘 우리 시대에 저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이 잘못을 많이 해서 우리 교회가 사회에서 많은 비탄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큰 교회가 비판을 많이 받고 있고, 양적 팽창을 위해서 지나치게 애를 쓴다. 뭐, 이런 비판이 많습니다. 이런 비판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정당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이 비판이 지나쳐서 큰 교회 무조건 나쁜 교회, 이 등식은 좀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교회란 뭘까요. 좋은 교회, 좋은 교회의 잣대는 뭐, 여러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볼 때 ,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냐? 큰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교회도 좋은 교회는 아니예요. 좋은 교회는 뭐냐? 좋은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예요. 전도하는 교회,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가장 간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잃어버린 영혼들에 있어요. 끊임없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가시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셨던 메시지. 그래서 전도하라는 메세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전도하라고. 그래서 전도 명령을 성경학자들은 지상의 명령이다. 소위 The Great Commission 가장 소중한 명령이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그 간절한 뜻을 따라 부지런히 잃어버린 영혼을 소중히 여겨 그들을 찾고 구원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죠.
여러분 저희 교회에 대해서 제가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 대해서 제일 두려워 하는 것. 이런 일이 일어 날까봐 두려워 하는 것. 그 두려움이 뭐냐하면 우리 교회는 비교적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저절로 모이니까 그저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오겠지라는 생각. 이 생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 그것이 제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애정이 상실된 교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교회. 이것은 존재할 가치와 이유를 상실한 교회. 한 사람이라도 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은 부지런히 구원하는 교회.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단순히 숫자를 늘리기 위한 양적 성장은 비판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한다면 구원하는 숫자를 어떻게 제한 하겠어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데 우리 질적 성장을 위해서 몇 사람만 구출하고, 다는 사람들은 그대로 놔두자. 이 논리가 통합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야죠. 더 영혼을 건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수년 전에 영화로 책으로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안겼던 스필버그를 통해서 영화로 되어서 세계인들의 가슴에 깨었던 쉰들러 리스트를 여러분들은 아마 아직도 기억 하실 줄 압니다. 그가 전쟁이 끝나자 마자 무슨 소리를 합니까. 전쟁이 극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 아,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말이야 시계라도 팔아서, 아니 내가 뭐라도 팔아서 한 사람이라도 유태인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구원했어야 마땅했을 터인데. 소위 브릿니치 수용소에서 1200여명의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출하고도 그는 전쟁이 끝난 마지막 순간 이렇게 외칩니다. 아니야 이것도 팔었어야돼. 그래서 내가 한 사람이라도 말이야, 한 영혼이라도, 한 목숨이라도. 유태인 한 사람이라도 한 여인이라도, 더 건졌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 부르짖음 소리가 지금도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에 가면 텔아비브에 이분이 이제 전쟁 끝나고 초청을 받아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그 박물관 유태인 학살 기념관 가는데서 식수도 하고요, 이분이 유태인들의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텔아비브 영웅의 공원에는 이 사람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귀의 마지막에는 이 오스카 쉰들러를 추억하면서 유태인들이 이런 말은 새겨 놓았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이 천국의 잔치로 초대해야 마땅할까요? 정답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한 사람이라도 더. 더 많은 사람들은 이 잔치로 초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초대해야 할까요? 그러면 어떻게 초대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말하기 앞서서 하나만 더 첨부한다면 초대할 사람 가운데 우리는 특별히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기왕에 우리가 효율적으로 초대해서 결신의 그 기쁨을 얻을려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어 있고 열려 있고, 준비된 사람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흥미로운 사건이 일단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대부분이 사양했죠. 자, 본문이 계속 되는 이야기를 읽어 보세요. 18절에 “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 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초청의 대상이 바뀌었어요. . 어떻게 바꿨습니까? 21절 한번 읽어 보세요. 21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하니라” 어떤 대상자들를 초청하라 그랬어요. 가난한 사람들, 그 다음에 병신들, 왜 하필이면 병신들이라고 번역했는지, 누가 병신같이 번역했습니다. 소경들과 무슨 뭐, 시각 장애인, 요즘 뭐 정서 장애인 좋은 말이 많은데,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이들은 다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장애를 그러면. 하나님이 장애인들은 무조건 천국에서 환영한다는 얘기일까요. 저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이들을 특별히 초청의 대상을 바꾸라고 하신 이유는 이들은 자신의 장애 때문에 쉽게 초청에 수락할 있는 겸손함이 있었던 사람들이예요. 즉, 자기들의 장애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던 사람들이예요. 우리가 전도해 보면 실지로 부자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잘 응답합니다. 왜 그래요. 부자는 자기 부를 신으로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여백과 그 여지가 없단 말이죠.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든 사람들이 훨씬 더 복음을 더 잘 받아 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의 건강을 아니까 자기를 신처럼 믿어요. 그러나 고통 중에 사람들이 주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통이나 상처는 전도의 효율적인 방편 일수가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변을 눈여겨 보시면서 아픈 사람, 고통하고 있는 사람. 상처 받은 사람들을 눈여겨 보세요. 그들을 초청해 보세요. 훨씬 더 마음을 쉽게 여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초대 할까요? 어떻게. 우선 잘 초대하려면 지속적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결실을 맺으려면 지속적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한번만 초대하고 마시면 안돼요.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잔치에로의 초대의 모습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우선 16절에 보시면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한번 청했어요. 그 다음에 17절에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십시오. 두번째 청합니다. 미리 초청을 해놓고, 그 다음에 잔치 시간이 거의 다 돼서 오늘 저녁이예요. 내일 저녁 7시 반이예요. 잊어 버리지 마세요. 한번 더 Remind 시켜주고 상기 시켜주고 또 초청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이 사양을 했어요. 그러나 사양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분의 초청은 거기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이 Host의 초청은 계속됩니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세번째 초청이예요. 종이 다시 돌아와 보고를 합니다. 명하신 대로 했는데 아직도 빈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 그 다음절을 보세요. “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 네번째 초청하고 또 하고, 또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여러분 이 지속되는 계속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 계속되는 초청을 보세요. 이 끈질긴 사랑. 이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죠. 자, 사람들이 어떻게 거절합니까, 사양합니까. 여기 세가지 유명한 변명, 사양이 나오지 않습니까? 첫째 사람 뭐라고 사양했습니까?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서 보아야 하겠으니, 하필이면 전도 잔치하는 목요일 저녁 자기 산 부동산 가서 보겠대요. 밤중에 뭐가 보이는지, 고 시간에 맞추어서 보겠대요. 또, 두번째 사람은 또한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종 그 성능을 가서 시험해 보아야 겠다고 소가 잘 활동을 하나, 농경문화의 산물이라 소 샀다 그러면 실감이 안나죠. 소샀다 그러지 말고 소나타 샀다. 소나타를 샀는데, 시운전을 좀 해봐야 겠다고 하필이면 전도 집회 하는 시간 맞춰서 그날 시험을 하겠다는 거예요. 또 한 사람은 뭐라고 변명을 합니까. 나는 장가를 들었습니다. 아, 이 변명이야 이해를 해줘야죠. 장가를 들었는데, 신혼 여행이야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사느냐, 죽느냐, 생명을 좌우하는 사건이 오늘 일어난다면 그래도 신혼 여행을 고집하겠습니까? 전도 한다는 것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이예요. 변명을 위한 변명이예요. 변명을 위한 변명이예요 그러나 지속되는 변명. 지속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이 Host의 초청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계속됩니다. 이 포기 할 수 없는 사랑이예요.
여러분 전도해 보면 쉽게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또 하고 또 해야 해요. 사람들이 계속 변명을 연구해서 만들어 내요. 안갈, 안 갈 변명을 만들어 낼 거예요. 마치 제 친구처럼 제가 한번 예수 믿고 나니까 제일 처음 식구들 생각나고, 그 다음에 제가 가까이 지내던 친구 한 사람이 생각이 나더라구료. 그래서 전도를 하니까, 이 친구는 예수 안 믿을 이유, 교회 안 갈 이유를 연구하는 학자 같예요. 쫙 리스트가 있어요. 제가 만날 때 예수님 애기하고 만날 때마다 교회 얘기하니까 나중에는 변명 거리가 떨어 지더라구요. 아, 그래서 꼼짝없이 나오겠구나. 그래서 야 더 이상 할 말없지. 다음주에 나와같이 교회에 나가자 그랬더니 갑자기 변명하나가 또 생각이 난 모양이예요. 야, 사실 내가 너한테 얘기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병이 하나 있대요. 무슨 병이냐 그러니까 나는 사람 많은데 가면 골치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못가겠다는 거예요. 정확하게 사흘 후에 제가 그 친구를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변명을 위한 변명을 사람들이 만들어 낼것예요. 그래도 포기하면 안돼요. 또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그러니 전도하려면 좀 지구력이 있어야 돼요. 인내력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인내심을 다 잃어 버린 것 같아요. 항상 너무 급하고, 갑자기 뜨거워졌다가 갑자기 식어 버리는 이 선교하는 것도 보면 제가 미국에서 보면 어떤 선교사 후원하겠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은 생각해 보고 신중하게 결단하고, 그렇게 많이 하지 않고 적절하게 하고, 한번 약속하면 평생을 통해서 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갑자기 감동을 받아서 크게 하고, 조금 있다가 금방 또 안해버려요. 너무 쉽게 감동이 되는데 지속 되지 않아요. 우리 전도도 열매를 맺으려면 지속성이 있어야 해요.또 전도하고, 또 전도하고, 또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 또 전화하고,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인내심을 상실했는지, 풍자하는 얘기가 몇 년전에 유행을 했잖아요. 한국 사람하고, 중국 사람하고, 뭐 일본 사람인가 이렇게 세사람이서, 세 사람을 돼지 우리속에 집어 넣어더니, 누가 제일 먼저 뛰쳐 나왔을 까요. 뻔한지죠. 뭐 한국사람이 제일 먼저 튀쳐 나왔죠 뭐. 한국사람이. 참을 수 없으니까. 두번째로 일본 사람이 나오고, 세번째는 돼지가 튀쳐 나왔어요. 중국 사람은 아직도 거기 있었어요. 만만디로. 이런 지구력이 필요해요. 인내심이 필요해요. 계속해서 전도하고, 또 전도하고, 그렇습니다.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또 필요하다면 강권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권적으로. 여기 23절에 보세요.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어쩐지 강권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 같아서 별로 좋게 들리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라는 말이 아니죠. 여기서 강제라는 말은 정말 있는 힘을 다해서. 모든 방법을 다해서 한번 설득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초대의 중요성 . 이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물러서지 말고 강권하여서라도, 이 잔치에 참여를 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강권얘기를 할 때마다 성경에서 늘 생각나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직전에 경험한 이야기. 하나님께서 천사 두사람을 소돔, 고모라의 심판 직전에 이 성에 보내잖아요. 천사 둘을. 룻의 집에 와죠. 룻의 집에. 아마도 저녁 늦게 도착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내일 아마도 여기 심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도성의 죄악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지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을 떠나셔야 합니다. 떠나셔서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잠자리에 들으려고 했다가 찾아왔던 이 불청객, 이 무례한 방문객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거냐고, 당신들. 쫓아내고 싶어겠죠. 그러나 천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강권합니다. 아니예요.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심판을 피하십시오. 생명을 보존하십시오. 구원을 받으십시요. 떠나가지 않고 계속 밤새도록 강권하는 것예요. 거기에 롯의 사위들이 있는데, 사위들은 하나님의 메신져, 이 하늘의 메신져들의 메시지를 뭐로 여겨다고요. 농담으로 여겼더라.그랬습니다. 농담으로 여겼더라. . 마침내 밝아오는 새벽녘 사람 모습으로 나타났을 이 두 천사는 아마도 한 천사는 롯과 그 아내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또 한 천사는 두 딸의 손을 잡고 강제로 잡아 끌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바깥으로 끌어 내려요. 그들이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은 유황의 불비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 때에도 롯의 가족들은 두 천사의 방문을 무례한 방문이라고 , 두 천사의 강권을 무례한 강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제가 한 10년 전에 일본의 목사님들이 모이는 목회자 conference에 강사로 초청 받아서 간 일이 있습니다. 일본 목사님들의 토론의 주제가 왜, 일본 교회는 한국 교회처럼 열심히 전도하지 않는가? 이게 주제예요. 또 결론이 뻔하더라구요. 결론이 뭐냐하면, 일본사람들은 하두 이웃들을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이웃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들의 사생활. Privacy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너무 폐 끼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까, 차마 전도를 못한다는 것예요. 일본 사람들이. 제가 마지막 폐회 예배 시간에 이런 도전을 했습니다. 그 뱃부라는 온천도시에서 그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 온천 도시에 가보니까 사방에서 막 용암천들이 막 부글부글 끓어 올라요. 그 용암천들의 이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다 지옥이라는 이름을 많이 붙쳐났어요. 애기 지옥, 어른 지옥, 해지옥, 산지옥. 다 지옥이라고 붙어 났어요. 제가 이런 말로 일본 목회자들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여기 젊은이 하나가 술에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면서 앞에 그 들끓고 있는 용암못이 있는지도 모르고 용암못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하십시다. 나는 그의 Privacy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대로 용암으로 들어가도록 버려 둬야 할까요. 아니면 좀 무례할지 모르지만,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가는 길, 앞길을 막아서고, 형제여, 그리로 가시면 안돼요. 돌아서야 해요. 그래야 당신이 삽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말해야 옳을까요.
이게 기독교의 메시지예요. 회개하십시오. 돌아서십시오. 인생의 방향을 Turn하고 바꾸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돌아 오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시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의 주님으로 받아 들이십시오. 그래야 용서받고 구원 받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fundamental Message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가족들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강권해서라도 이 잔치에 초청 시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초대할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일어나서 함께 기도할 때 여러분 이번 목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이 전도 잔치에 뭐 저녁에도 낮에도 모이니까 내가 꼭 친구들 , 이웃들 복음 들려주고, 시간 시간마다 초청이 있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가족들이 예수 믿기를 결단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이 감격,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존재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이 땅에 살려 두시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초정하고자 마음 작정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세요. 아직도 작정하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작정못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제가 누구를 초청할지 보여주세요. 만나게 해 주세요. 꼭 저도 이 잔치에 내 사랑하는 이웃들을 초청하는 심부름꾼으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시드니에서 만나던 한 사람처럼 10년 동안 기도하고 친구를 복음을 들려주기 위해서 올림픽 잔치까지 초청했던 어떤 아름다운 한 그리스도인처럼 하나님 그렇게 내 사랑하는 이웃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허나 이 말씀 듣고, 받아들이고, 구원 받고, 새로워져야할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준비시켜 주시옵소서. 그들이 주님 앞에 나와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말라했던 기쁨과 평화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세상은 바뀌고 있지만, 바뀔 수 없는 우리의 메시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여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목말라하고 있는 의와 평안과 사랑과 기쁨과 또 삶의 의미와 목적, 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잘 인도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14:16-24
지난 9월 20, 9월 15일이죠. 9월 15일부터 호주 시드니에서는 새 천년을 여는 세계 제27회 섬머 올림픽, 세계 올림픽 큰 잔치가 인류 역사 사상 가장 많은 나라인 200 국가가 참여한 가운데, 17일 간에 세계의 가장 큰 잔치가 열렸습니다. 선수단만 무려 1만6천6백명의 선수와 임원들이 참석하고, 역사 사상 가장 많은 Tourist, 관광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더욱이 남북한 갈라졌던 민족 선수들이 함께 손을 잡고 동시 입장하는 감동이 연출된 우리 민족이 기억될 잔치이기도 했습니다. 이 올림픽이 지속되고 있는 와중에 시드니의 한 모퉁이에서는 아마도 시드니의 130여개의 한인 교회들 가운데 가장 많이 회집되고 있는 새순교회의 주최로 전도집회가 지난 9월 29일부터 시작해서 10월 1일까지 올림픽의 폐막식이 있는 그 날까지, 전도 잔치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올림픽의 큰 잔치와 비교해서 교회가 올림픽의 기간 중에 전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이 집회는 작은 모임이었슴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매우 소중하고 의미있는 잔치이기도 했습니다.
그 잔치가 주일날 폐막식이 열리는 주일날 끝났는데요, 4시쯤 모든 순서가 끝났습니다. 저도 메시지를 다 전하고, 저녁 비행기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 가기 위해서 비행장으로 가다가 뭐, 집회 기간동안 이라 저는 전혀 올림픽 구경도 못했고, 가긴 갔지만 옆에 근처에 갔지만, 그래서 마지막 저녁 시간이 마라톤 들어오는 시간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 구경으로 이봉주 들어오는 구경이나 하자 하고선 열심히 지켜봤습니다. 상당히 많은 그런 우리 한인 교포들이 연두에 나와 있었고, 태극기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차가 왔고,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는데, 저는 계속 느낀 것이 무엇이냐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그 노래만 생각이 났는데, 태극기만 바람에 펄럭일 뿐 태극기의 주인공은 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6명까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비행장으로 와서 비행기를 탔습니다. 시드니에서 출발한 이 비행기가 호주 안의 브리스번이라는 곳에 잠시 정차를 해서 Transit 하는 그 지나가는 대기실에서 잠시 지체 하게 되었습니다. 한 30분 쉬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대기실에서 앉아서 다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어떤 40대초의 한 분이 아주 반가운 얼굴로 제 앞으로 뛰어오더니 이동원 목사님이시죠 그러더라구요. 그렇다고 그러니까 너무 너무 반가와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난 언제 많이 만났던 사람인가 그래서 그냥 쳐다보고 있었더니, 자기 소개를 시작 하시더라구요.
자기가 어저께 그 전도 집회의 잔치에 참석했었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예수 믿고 나서 늘 자기의 이웃들에게 빚진 것들을 느끼고 전도하길 원했는데, 자기가 가장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10년이상 기도해 왔고, 사실은 그 친구에게 효과적으로 전도하고 싶어서 그는 전도 폭발 훈련까지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새순교회 교인은 아니였고, 다른 교회의 출석하는 교인이었는데, 올림픽 기간 중에 그래서 자기 친구를 전도할 목적으로 초청했다고 합니다. 이분이 또 삼성전자 이런 대리점 계통에 일하시는 분이라 시간이 맞물려서 아주 또 삼성이 대대적인 캠페인을 이번 올림픽 기간 중에 하곤 해서 아주 시간이 잘 맞아 올림픽에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10년 이상 기도했던 친구의 초청에 의해 왔으니까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같이 올림픽 게임도 구경가고 그랬습니다만 드디어 목요일날 저녁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자기 집에 와서 이제 저녁 식사를 하고, 드디어 폭발을 시작했습니다. 자기와 복음의 메시지를 이 친구와 더불어 나누길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왜 죽으셨고, 왜 부활하셨는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마음에 영접하는 이유에 관해서 아주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뭐, 이해하는 것도 같았데요. 근데 마지막 결정하는 순간에 영접하라고 하니까, 아직은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연기하고, 보류하고, 결신을 안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얘기를 또 계속하고 계속 하면서 드디어 밤 12시를 넘겼습니다. 그날 친구는 끝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 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속에서 몸을 뒤척이면서 하나님 내가 10년 동안 기도하고, 초청한 친구인데 그대로 돌려 보내시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튿날 친구는 다시 올림픽 경기장으로 가고, 자기는 회사 가서 일하는데, 와이프가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보, 저 새순교회에서 이번에 전도 잔치가 있다고 그러는데, 당신 그 친구 데리고 한번 그 전도 집회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 때 이동원 목사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데리고 가서 친구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 그것 좋다고. 그런데 갈지 몰라. 그렇게 대답을 하고, 다시 오후에 만나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주 좋은 이런 전도 잔치가 있는데, 같이 가자고, 그랬더니 순순히 가겠다고 따라 오더래요. 그리고 옆에 앉혀놓고, 드디어 설교가 시작되는데, 계속 자기는 기도했던 친구, 어쩌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친구 눈치만 , 얼굴을 이렇게 봤다고 해요. 그런데 그 친구도 가끔 설교 듣다 말고, 자꾸 자기 얼굴을 보더래요. 에 자기는 어떻게 설교에 반응이 오나, 감동이 오나, 또 마음이 열리나, 이런 관심을 가지고 친구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친구는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래요. 자기 얼굴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설교 중간에 묻기를 큰소리로 묻더래요. 야, 저 목사하고 짰냐? 그러드래요. 왜 그랬냐하면 그 날 제가 강조했던 메시지가 자기가 그 전날밤에 전했던 메시지와 정확하게 똑 같은 메시지였기 때문에, 아마, 그 친구가 놀란 모양이예요. 저 목사하고 쨨냐? 그래서, 야, 나도 처음 보는 목사야. 자 ,이제 메시지가 끝나고 초청이 시작 돼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사람 정말 일어나 보시라고 하니 친구가 갑자기 총알처럼 벌떡 일어나더래요. 아 쏟아지는 눈물, 그런 감격 속에 그는 친구를 데리고 앞에 나와서 친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광경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잔치를 열고, 정말 친구가 주앞에 돌아온 것을 함께 기뻐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레 그 이튿날 또 다른 일이 생겨서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게 되었대요. 아, 친구보다 앞서서 오게 되었는데, 비행기안에서 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간증을 들으면서 야, 그 한 사람을 위해서도 이번 시드니행의 여정은 올만한 가치가 있었다. 생각했습니다.
자, 우리 교회도 금주 목요일저녁부터 이제 전도 잔치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누가복음 14장 15절 이하에 보면 거기에도 잔치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잔치 이야기예요. 이 잔치는 무슨 잔치일까요? 누구를 이 잔치에 초대할까요? 어떻게 초대할까요? 우리는 이런 잔치 이야기를 함께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무슨 잔치 일까요? 자,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5절부터 한번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5절을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5절 함께 읽어요. 시작. “ 함께 먹은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그러면서 그 다음 절에 이르시되 예수님이 비유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하면서 잔치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자, 그러니까 이 잔치가 무슨 잔치죠? 하나님 나라 잔치예요.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미래적인 센스와 현재적인 센스 두 가지 의미로 동시에 쓰여집니다. 미래의 천국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될 때, 구원 받은 영혼들이 거하는 곳,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로써의 천국, 미래적인 천국. 성경은 분명히 그 천국을 증언하고 가르치고 있고, 우리는 이 천국의 존재를 믿습니다. 미래적인 천국.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셔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가 드러나는 그 곳에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식구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때,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과 통치가 우리 가정에 임할 때, 내가 개인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 앞에 순종할 때, 주께서 다스림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현지에서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센스로 쓰여졌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문맥의 흐름을 살펴보면, 특별히 본문 직전에 누가복음 14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 누가복음 14장 14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자, 예수님이 바로 그 직전에 의인들의 부활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부활되어서 영원히 거할 곳, 미래적 센스에서 주님은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짤막한 세상 다 살고 나면, 천국에 가야 할 텐데, 천국은 어떤 곳인가, 천국은 마치 잔칫집과 같다. 여러분 잔칫집. 이 잔치가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전달합니까? 아주 신바람나는 즐거움. 흥분이 있는 곳. 감격과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곳. 풍성한 기쁨으로 가득찬 곳. 푸짐한 그 잔칫상과 그 음식들을 둘러싸고 친구들이 흥에 겨워 함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잔칫집. 천국은 마치 잔칫집과 같다.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천국이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물론 천국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아요. 죽어야 가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 후에 주께서 우릴 예비하신 그 곳은 정말 잔칫집과 같은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그건 기대가 되는데, 죽는 것이 문제예요. 죽는 게 어렵다 말이죠. 죽어야 가는 곳이니까. 어린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떤 부모가 아이가 하도 학교를 안 가려고 하니까, 야, 너 학교 가기가 그렇게 싫으니? 꼬마가 대답하기를 네가 언제 학교 간게 싫다고 그랬어요. 학교 가는 것도 좋구요, 오는 것도 좋아요. 학교 있는 게 싫어요. 그렇게 대답하더래요. 학교 가는 건 좋은데, 오는 것도 좋은데, 학교 있는 것이 싫어요. 천국은 정 반대예요. 가는 건 좀 어렵죠.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다리를 건너가야 하니까. 아무도 죽음을 기뻐하거나, 죽음을 enjoy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다리를 건너서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잔칫집 같은 천국. 그 천국이 우리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
자,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 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잔치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17절에 잔치를 열고, 드디어 잔치에 참석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띄웁니다. 초청의 메시지를 띄웁니다. 어떻게 띄웠어요? 자, 17절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7절 시작.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예, 오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어 친히 준비하신 잔치. 그것은 하나도 빠짐이 없는 소홀함이 없는 완벽하게 준비된 잔치.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십시오. 모든 것이 여기 다 있으니까요.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준비하는 잔치는 그렇지 않죠.지금 우리 교회 스텝들이 열심히 이웃초청 생명의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목자들도 열심히 전도하고 있고 교회 식구들도 열심히 대상자들을 작정하고 있습니다만은, 허나 우리들이 준비하는 잔치에는 항상 그 소홀함이 있고, 뭔가 빠진 것이 있고, 뭔가 결격사항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아, 이런 잔치 얘기를 하면, 저는 늘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제가 신혼시절에 결혼하고 나서 은혜를 입은 선배 목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아, 그래서 저희, 집에 초청해서 작은 잔치를 열었습니다. 제 아내가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옛날에는 말이죠, 식사가 끝나면 상대방에 의사와 상관없이 묻지 않고 무조건 커피 주는 것이 대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죠. 네, 그래서 뭐, 어떻게 프림 얼마요, 설탕은요, 옛날에는 이런 것 물은 일이 없어요. 옛날에는 무조건 다 타갔고 주면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옛날 방법이 아니였습니까. 그런데 커피 대접을 딱 했는데, 이 손님 되시는 저희 선배 목사님이 딱 커피를 맛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가요. 이상하게 가는 거예요. 설명할 수 없이 표정이 가 버려요. 그래서 제가 직감적으로 아, 뭐가 잘못 되었다 이런 느낌이 있어서 얼른 저도 커피 맛을 봤어요. 그러니까 마시자마자 토하고 싶더라구요. 너무너무 이상한 것예요. 그저 깜작 놀래갔구, 여보 이 커피 어떻게 된거야, 하니까 제 아내가 달려오더니 딱 커피 맛을 보더니 어머 미원 넣었네. 여러분 오늘 커피에다가 미원 넣고 한번 실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맛이 어떤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 그런 맛이에요. 얼마나 황당했는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뭐, 어떻게 좋을지 모르더라구요. 죄송하고, 미안하고 사람이 준비하는 잔치가 그렇죠. 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되어 준비하신 잔치 어떨까요. 자, 이번에 목요일부터 있을 우리들의 교회 잔치, 전도 잔치는 단순히 교회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로 초청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잔치 어떤 잔치라구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잔치,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오십시오. 모든 것이 준비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목말라 하는 것 그들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 그들이 찾고 싶고, 만지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 이 하늘나라 잔칫상에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뭘까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라 생각하세요. 로마서 14장 17절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설명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기 바울 사도는 세 가지의 매우 중요한 개념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의와 평강과 희락”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 아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예요. 불의한 세상이예요. 불공평한 세상이예요. 우리는 끊임없이 불의를 경험하고, 불공평함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에 목말라 합니다. 정의에 대해서 목말라 해요. 그런데 천국은 어떤 곳인가, 천국은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곳,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 완벽한 공의의 나라 천국에는 이 의로움이 있습니다.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천국의 주인이신 우리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이예요. 그러나 이세상도 어떨까요? 이 세상은 불안한 세상 끊임없이 불안을 경험하는 세상 아침에는 좀 편안했다가 우리가 조그만한 사건 하나 경험하면, 또 내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불안한 세상. 그래서 불안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상. 그래서 심지어 우리의 인사까지도 “안녕하십니까?” 왜 우리가 이런 인사를 합니까? 안녕하지 못한 민족이니까 그렇죠. 우리의 인사법과 똑같은 인사법을 가진 나라가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예요. 샬롬. 그거죠 “샬롬”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샬롬” 그 뜻이 무엇입니까?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화가 당신에게” , 평화가. 평화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화가 없거든요. 자, 우리가 우리 교회가 얼마 전에 성지 순례를 갔다 왔는데, 갔다오자 마자, 바로 터졌어요. 지금 난리 아니예요. 하루를 내다볼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 그래서 샬롬, 평안을 날마다 확인하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떤 곳이라구요. 완벽한 평화가 있는 곳 , 예수님은 평화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태어날 때, 천사들은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그 다음에는 뭐예요. 땅에서는 평화. 우리 크리스마스 카드에 땅에서는 평화. 그런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예요. 예수님이 땅에서 평화 그랬다면 약속 안 지킨 것이예요. 왜 아직도 이 땅은 평화를 모르고 있는데, 그러나 주님이 본래 말씀하신 내용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 예수님은 그 분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이 평화를 모르는 세상 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안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순종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불안한 세상 불안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견고한 평화, 견고한 평화 이 평화를 약속하신 주님. 그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상처 받을 사건을 경험하여서 우리의 마음은 슬픔으로 찢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은 기쁨 하나님. 기쁨의 주님.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는 기쁨의 나라라. 여러분 천국에는 우리가 목 말라 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의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그렇게 목말라하며 그리워하는 그 모든 것 삶의 진정한 의미 목적. 그리고 완벽한 아름다움.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천국을 예비하시고,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로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 이것이 바로 잔치인 것입니다.
이 잔치에 누구를 초대해야 옳을 까요? 누구를. 자, 오늘 본문의 16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16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자, 본문의 주인으로 Host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우리 주님 그 주님은 어떤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 주님의 뜻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잔치에 와서 이 잔치의 향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보시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더 많은 사람, 아니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이 잔치에 참여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번 잔치에도 우리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야 겠죠. 오늘 우리 시대에 저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이 잘못을 많이 해서 우리 교회가 사회에서 많은 비탄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큰 교회가 비판을 많이 받고 있고, 양적 팽창을 위해서 지나치게 애를 쓴다. 뭐, 이런 비판이 많습니다. 이런 비판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정당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이 비판이 지나쳐서 큰 교회 무조건 나쁜 교회, 이 등식은 좀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교회란 뭘까요. 좋은 교회, 좋은 교회의 잣대는 뭐, 여러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볼 때 ,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냐? 큰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교회도 좋은 교회는 아니예요. 좋은 교회는 뭐냐? 좋은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예요. 전도하는 교회,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가장 간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잃어버린 영혼들에 있어요. 끊임없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 예수께서 이 땅을 떠나가시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셨던 메시지. 그래서 전도하라는 메세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전도하라고. 그래서 전도 명령을 성경학자들은 지상의 명령이다. 소위 The Great Commission 가장 소중한 명령이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그 간절한 뜻을 따라 부지런히 잃어버린 영혼을 소중히 여겨 그들을 찾고 구원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죠.
여러분 저희 교회에 대해서 제가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 대해서 제일 두려워 하는 것. 이런 일이 일어 날까봐 두려워 하는 것. 그 두려움이 뭐냐하면 우리 교회는 비교적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저절로 모이니까 그저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저절로 오겠지라는 생각. 이 생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 그것이 제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애정이 상실된 교회.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교회. 이것은 존재할 가치와 이유를 상실한 교회. 한 사람이라도 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은 부지런히 구원하는 교회.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단순히 숫자를 늘리기 위한 양적 성장은 비판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한다면 구원하는 숫자를 어떻게 제한 하겠어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데 우리 질적 성장을 위해서 몇 사람만 구출하고, 다는 사람들은 그대로 놔두자. 이 논리가 통합니까, 여러분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야죠. 더 영혼을 건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수년 전에 영화로 책으로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안겼던 스필버그를 통해서 영화로 되어서 세계인들의 가슴에 깨었던 쉰들러 리스트를 여러분들은 아마 아직도 기억 하실 줄 압니다. 그가 전쟁이 끝나자 마자 무슨 소리를 합니까. 전쟁이 극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 아, 이럴 줄 알았다면 내가 말이야 시계라도 팔아서, 아니 내가 뭐라도 팔아서 한 사람이라도 유태인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구원했어야 마땅했을 터인데. 소위 브릿니치 수용소에서 1200여명의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출하고도 그는 전쟁이 끝난 마지막 순간 이렇게 외칩니다. 아니야 이것도 팔었어야돼. 그래서 내가 한 사람이라도 말이야, 한 영혼이라도, 한 목숨이라도. 유태인 한 사람이라도 한 여인이라도, 더 건졌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 부르짖음 소리가 지금도 들리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에 가면 텔아비브에 이분이 이제 전쟁 끝나고 초청을 받아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영을 받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그 박물관 유태인 학살 기념관 가는데서 식수도 하고요, 이분이 유태인들의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텔아비브 영웅의 공원에는 이 사람을 기리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귀의 마지막에는 이 오스카 쉰들러를 추억하면서 유태인들이 이런 말은 새겨 놓았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이 천국의 잔치로 초대해야 마땅할까요? 정답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한 사람이라도 더. 더 많은 사람들은 이 잔치로 초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어떻게 초대해야 할까요? 그러면 어떻게 초대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말하기 앞서서 하나만 더 첨부한다면 초대할 사람 가운데 우리는 특별히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기왕에 우리가 효율적으로 초대해서 결신의 그 기쁨을 얻을려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어 있고 열려 있고, 준비된 사람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흥미로운 사건이 일단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대부분이 사양했죠. 자, 본문이 계속 되는 이야기를 읽어 보세요. 18절에 “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 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초청의 대상이 바뀌었어요. . 어떻게 바꿨습니까? 21절 한번 읽어 보세요. 21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하니라” 어떤 대상자들를 초청하라 그랬어요. 가난한 사람들, 그 다음에 병신들, 왜 하필이면 병신들이라고 번역했는지, 누가 병신같이 번역했습니다. 소경들과 무슨 뭐, 시각 장애인, 요즘 뭐 정서 장애인 좋은 말이 많은데,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이들은 다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장애를 그러면. 하나님이 장애인들은 무조건 천국에서 환영한다는 얘기일까요. 저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들이 이들을 특별히 초청의 대상을 바꾸라고 하신 이유는 이들은 자신의 장애 때문에 쉽게 초청에 수락할 있는 겸손함이 있었던 사람들이예요. 즉, 자기들의 장애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있던 사람들이예요. 우리가 전도해 보면 실지로 부자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잘 응답합니다. 왜 그래요. 부자는 자기 부를 신으로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여백과 그 여지가 없단 말이죠.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든 사람들이 훨씬 더 복음을 더 잘 받아 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건강한 사람들은 자기의 건강을 아니까 자기를 신처럼 믿어요. 그러나 고통 중에 사람들이 주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통이나 상처는 전도의 효율적인 방편 일수가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주변을 눈여겨 보시면서 아픈 사람, 고통하고 있는 사람. 상처 받은 사람들을 눈여겨 보세요. 그들을 초청해 보세요. 훨씬 더 마음을 쉽게 여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초대 할까요? 어떻게. 우선 잘 초대하려면 지속적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결실을 맺으려면 지속적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한번만 초대하고 마시면 안돼요.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잔치에로의 초대의 모습들을 눈여겨 보십시오. 우선 16절에 보시면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한번 청했어요. 그 다음에 17절에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십시오. 두번째 청합니다. 미리 초청을 해놓고, 그 다음에 잔치 시간이 거의 다 돼서 오늘 저녁이예요. 내일 저녁 7시 반이예요. 잊어 버리지 마세요. 한번 더 Remind 시켜주고 상기 시켜주고 또 초청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이 사양을 했어요. 그러나 사양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분의 초청은 거기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이 Host의 초청은 계속됩니다.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세번째 초청이예요. 종이 다시 돌아와 보고를 합니다. 명하신 대로 했는데 아직도 빈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 그 다음절을 보세요. “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 네번째 초청하고 또 하고, 또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여러분 이 지속되는 계속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 계속되는 초청을 보세요. 이 끈질긴 사랑. 이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죠. 자, 사람들이 어떻게 거절합니까, 사양합니까. 여기 세가지 유명한 변명, 사양이 나오지 않습니까? 첫째 사람 뭐라고 사양했습니까?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서 보아야 하겠으니, 하필이면 전도 잔치하는 목요일 저녁 자기 산 부동산 가서 보겠대요. 밤중에 뭐가 보이는지, 고 시간에 맞추어서 보겠대요. 또, 두번째 사람은 또한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종 그 성능을 가서 시험해 보아야 겠다고 소가 잘 활동을 하나, 농경문화의 산물이라 소 샀다 그러면 실감이 안나죠. 소샀다 그러지 말고 소나타 샀다. 소나타를 샀는데, 시운전을 좀 해봐야 겠다고 하필이면 전도 집회 하는 시간 맞춰서 그날 시험을 하겠다는 거예요. 또 한 사람은 뭐라고 변명을 합니까. 나는 장가를 들었습니다. 아, 이 변명이야 이해를 해줘야죠. 장가를 들었는데, 신혼 여행이야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사느냐, 죽느냐, 생명을 좌우하는 사건이 오늘 일어난다면 그래도 신혼 여행을 고집하겠습니까? 전도 한다는 것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이예요. 변명을 위한 변명이예요. 변명을 위한 변명이예요 그러나 지속되는 변명. 지속되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이 Host의 초청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계속됩니다. 이 포기 할 수 없는 사랑이예요.
여러분 전도해 보면 쉽게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또 하고 또 해야 해요. 사람들이 계속 변명을 연구해서 만들어 내요. 안갈, 안 갈 변명을 만들어 낼 거예요. 마치 제 친구처럼 제가 한번 예수 믿고 나니까 제일 처음 식구들 생각나고, 그 다음에 제가 가까이 지내던 친구 한 사람이 생각이 나더라구료. 그래서 전도를 하니까, 이 친구는 예수 안 믿을 이유, 교회 안 갈 이유를 연구하는 학자 같예요. 쫙 리스트가 있어요. 제가 만날 때 예수님 애기하고 만날 때마다 교회 얘기하니까 나중에는 변명 거리가 떨어 지더라구요. 아, 그래서 꼼짝없이 나오겠구나. 그래서 야 더 이상 할 말없지. 다음주에 나와같이 교회에 나가자 그랬더니 갑자기 변명하나가 또 생각이 난 모양이예요. 야, 사실 내가 너한테 얘기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병이 하나 있대요. 무슨 병이냐 그러니까 나는 사람 많은데 가면 골치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못가겠다는 거예요. 정확하게 사흘 후에 제가 그 친구를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변명을 위한 변명을 사람들이 만들어 낼것예요. 그래도 포기하면 안돼요. 또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그러니 전도하려면 좀 지구력이 있어야 돼요. 인내력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인내심을 다 잃어 버린 것 같아요. 항상 너무 급하고, 갑자기 뜨거워졌다가 갑자기 식어 버리는 이 선교하는 것도 보면 제가 미국에서 보면 어떤 선교사 후원하겠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은 생각해 보고 신중하게 결단하고, 그렇게 많이 하지 않고 적절하게 하고, 한번 약속하면 평생을 통해서 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갑자기 감동을 받아서 크게 하고, 조금 있다가 금방 또 안해버려요. 너무 쉽게 감동이 되는데 지속 되지 않아요. 우리 전도도 열매를 맺으려면 지속성이 있어야 해요.또 전도하고, 또 전도하고, 또 찾아가고, 또 찾아가고 , 또 전화하고,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인내심을 상실했는지, 풍자하는 얘기가 몇 년전에 유행을 했잖아요. 한국 사람하고, 중국 사람하고, 뭐 일본 사람인가 이렇게 세사람이서, 세 사람을 돼지 우리속에 집어 넣어더니, 누가 제일 먼저 뛰쳐 나왔을 까요. 뻔한지죠. 뭐 한국사람이 제일 먼저 튀쳐 나왔죠 뭐. 한국사람이. 참을 수 없으니까. 두번째로 일본 사람이 나오고, 세번째는 돼지가 튀쳐 나왔어요. 중국 사람은 아직도 거기 있었어요. 만만디로. 이런 지구력이 필요해요. 인내심이 필요해요. 계속해서 전도하고, 또 전도하고, 그렇습니다.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또 필요하다면 강권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권적으로. 여기 23절에 보세요.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어쩐지 강권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을 강제하는 것 같아서 별로 좋게 들리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라는 말이 아니죠. 여기서 강제라는 말은 정말 있는 힘을 다해서. 모든 방법을 다해서 한번 설득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초대의 중요성 . 이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물러서지 말고 강권하여서라도, 이 잔치에 참여를 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강권얘기를 할 때마다 성경에서 늘 생각나는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 직전에 경험한 이야기. 하나님께서 천사 두사람을 소돔, 고모라의 심판 직전에 이 성에 보내잖아요. 천사 둘을. 룻의 집에 와죠. 룻의 집에. 아마도 저녁 늦게 도착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내일 아마도 여기 심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도성의 죄악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지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을 떠나셔야 합니다. 떠나셔서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잠자리에 들으려고 했다가 찾아왔던 이 불청객, 이 무례한 방문객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거냐고, 당신들. 쫓아내고 싶어겠죠. 그러나 천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강권합니다. 아니예요.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심판을 피하십시오. 생명을 보존하십시오. 구원을 받으십시요. 떠나가지 않고 계속 밤새도록 강권하는 것예요. 거기에 롯의 사위들이 있는데, 사위들은 하나님의 메신져, 이 하늘의 메신져들의 메시지를 뭐로 여겨다고요. 농담으로 여겼더라.그랬습니다. 농담으로 여겼더라. . 마침내 밝아오는 새벽녘 사람 모습으로 나타났을 이 두 천사는 아마도 한 천사는 롯과 그 아내의 손을 잡았을 것이고, 또 한 천사는 두 딸의 손을 잡고 강제로 잡아 끌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바깥으로 끌어 내려요. 그들이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은 유황의 불비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그 때에도 롯의 가족들은 두 천사의 방문을 무례한 방문이라고 , 두 천사의 강권을 무례한 강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제가 한 10년 전에 일본의 목사님들이 모이는 목회자 conference에 강사로 초청 받아서 간 일이 있습니다. 일본 목사님들의 토론의 주제가 왜, 일본 교회는 한국 교회처럼 열심히 전도하지 않는가? 이게 주제예요. 또 결론이 뻔하더라구요. 결론이 뭐냐하면, 일본사람들은 하두 이웃들을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이웃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들의 사생활. Privacy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너무 폐 끼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까, 차마 전도를 못한다는 것예요. 일본 사람들이. 제가 마지막 폐회 예배 시간에 이런 도전을 했습니다. 그 뱃부라는 온천도시에서 그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그 온천 도시에 가보니까 사방에서 막 용암천들이 막 부글부글 끓어 올라요. 그 용암천들의 이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다 지옥이라는 이름을 많이 붙쳐났어요. 애기 지옥, 어른 지옥, 해지옥, 산지옥. 다 지옥이라고 붙어 났어요. 제가 이런 말로 일본 목회자들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여기 젊은이 하나가 술에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면서 앞에 그 들끓고 있는 용암못이 있는지도 모르고 용암못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하십시다. 나는 그의 Privacy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대로 용암으로 들어가도록 버려 둬야 할까요. 아니면 좀 무례할지 모르지만,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가는 길, 앞길을 막아서고, 형제여, 그리로 가시면 안돼요. 돌아서야 해요. 그래야 당신이 삽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말해야 옳을까요.
이게 기독교의 메시지예요. 회개하십시오. 돌아서십시오. 인생의 방향을 Turn하고 바꾸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돌아 오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시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의 주님으로 받아 들이십시오. 그래야 용서받고 구원 받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fundamental Message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가족들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들을 강권해서라도 이 잔치에 초청 시켜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초대할 준비가 되어 계십니까?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일어나서 함께 기도할 때 여러분 이번 목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이 전도 잔치에 뭐 저녁에도 낮에도 모이니까 내가 꼭 친구들 , 이웃들 복음 들려주고, 시간 시간마다 초청이 있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 가족들이 예수 믿기를 결단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이 감격,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존재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아직도 우리를 이 땅에 살려 두시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초정하고자 마음 작정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세요. 아직도 작정하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작정못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제가 누구를 초청할지 보여주세요. 만나게 해 주세요. 꼭 저도 이 잔치에 내 사랑하는 이웃들을 초청하는 심부름꾼으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제가 시드니에서 만나던 한 사람처럼 10년 동안 기도하고 친구를 복음을 들려주기 위해서 올림픽 잔치까지 초청했던 어떤 아름다운 한 그리스도인처럼 하나님 그렇게 내 사랑하는 이웃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운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허나 이 말씀 듣고, 받아들이고, 구원 받고, 새로워져야할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준비시켜 주시옵소서. 그들이 주님 앞에 나와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말라했던 기쁨과 평화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세상은 바뀌고 있지만, 바뀔 수 없는 우리의 메시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여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목말라하고 있는 의와 평안과 사랑과 기쁨과 또 삶의 의미와 목적, 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잘 인도하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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