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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시편 38편)

by 【고동엽】 2021. 12. 5.

시편 38편은 시편 13편 51편과 더불어서 가장 절절하고 간절한 개인 탄식시입니다. 개인적인 참회의 시편입니다. 38편은 불특정한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내용이고 39편은 죄와 관련된 질병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39편 13절요.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39편은 몸이 아팠을 때 자기 죄가 자기 병을 가져왔다고 믿었을 때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 38편은 여호와의 진노를 매일 경험하는 사람, 오늘 이것은 이제 사람들이 차마 이런 해석은 잘 안합니다. 왜냐면 현대인의 정신이 이미 허약할 대로 허약해져 있기 때문에 이미 충분히 상처받아 있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쳤다는 이런 해석을 하면 이것은 무지막지한 해석이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우리보다 근성과 맷집이 좋아서 하나님이 쳤다고 자주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존심이 매우 높아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하나님께 매를 맞아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렇게 일단 해석하는 순간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의 기회로 삼는다기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팔자, 숙명, 아이고 나는 어쩌다 이렇게 매를 맞게 되었는고 자존심이 점점 내려가서 점점 어두운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 나오는 시편 시인들이 살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매를 쳐서 내가 아파 죽겠다는 이런 고백들을 심심찮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 맷집이 좋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은 이 시편 38편을 이해할 때도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 이 절절한 이 엄청난 심리학적인 그런 갈등입니다. 전부다 그 영혼에 있는 그 모양은 잘 모릅니다. 그 영혼에 있는 죄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는 짐입니다. 죄는 무거운 짐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나면 다른 아무것도 못합니다. 왜? 죄 자체가 이미 무거운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한 번 슬쩍 지어볼까 하는데 짓는 그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나면 끝나는 그 순간에 내가 죄 한 번 지었던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바위 같은 죄짐이 생기기 때문에 죄를 짓고 나면 그 죄짐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생을 다 탕진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죄 짓자마자 곧 용서한다 그것은 잘못된 도식입니다. 죄 짓고 나면 용서 받기 전에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그게 보통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꾸 십자가의 강도 생각을 합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그 순간에 죄를 용서받지 않았냐? 여러분 그런데 십자가 강도 그게 할 일 입니까? 그것도 쉽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대못이 박혀서 회개했으니까 그것도 십자가의 강도도 절대로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회개의 모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강도는 그렇게 쉽게 구원받는데 라고 하는데 그게 쉬운 구원이 아닙니다. 곧 숨넘어가기 직전에 구원 받았으니까 쉽게 받은 구원이 아닙니다. 쉽게 한 회개의 고백도 아닙니다. 우리 대부분이 십자가에 못이 박힌 강도만큼은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 나면 쉽게 용서가 온다는 생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죄를 짓고 나면 무진장 무거운 짐이 생겨서 객관적으로 죄의 짐 때문에 나머지 인생을 고스란히 탕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죄를 짓고 나면 이 괴로운 상태가 있습니다. 이 괴로움도 안 느끼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죄를 짓고도 이 괴로움을 안 느끼는 사람이 라멕 같은 상태입니다. 라멕의 노래 칼의 노래라고 합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일진대 라멕에게 손가락만 대어도 벌이 77배일 줄 알아라 이렇게 협박하면서 돌아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인만 하여도 뭐라고 하였습니까? 내 죄 벌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그랬죠? 가인 그게 정상적인 건강한 인간의 심리상태입니다. 그런데 라멕은 죄악이 주는 그 무거움을 전부다 무시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되도록 죄를 짓지 말고 의도적으로도 짓지 말아야 되고 우리가 죄 짓지 않는 상태가 좋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노로 나를 책하지 마시고 분노로 나를 징계치 마십시오 주님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님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고 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것 절대로 즐길 만한 순간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터져 나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상처 입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나는 내 죄 때문에 내 뼈에 평안함이 없습니다. 내 뼈라는 것은 우리 몸 안에 영양분을 비축하는 최후의 창고입니다. 금식기도 할 때 영양분이 뼈 속에서 납니다. 비상 저장 식량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정선에서 탄광이 무너졌는데 양창석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17일 동안 물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때도 뼈가 이 양반을 도와준 겁니다. 뼈가 평안함이 없다는 말은 뼈 안에 풍요로움이 없었다 뼈 안에 나를 지탱할만한 영양분들이 다 빠져나갔다는 말입니다. 완벽한 기력의 상실입니다. 뼈 안의 영양분이 빠져나갔다는 말은 완전한 기력의 상실입니다. 그래서 어른들께서 뼈를 다치면 빨리 뼈가 안 붙고 오래 가는 이유 쉽게 뼈를 다치는 이유는 뼈 속에 영양분이 다 빠져나가서 그렇습니다. 내 뼈까지도 평안함이 없습니다 왜? 내 죄 때문에.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시키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전부다 우리 신체하고 관련되어 있죠? 내 죄악이 내 뼈를 갉아먹고 이번에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하나님께 매를 맞아서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입니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닙니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여기까지가 죄 지은 사람의 심리입니다. 이 상태를 견디는 사람에게는 무슨 진리가 있냐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가 나옵니다. 이것을 안 견디는 사람은 이 상태를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해서 아픔도 없는 사람 있죠? 그런 사람에게는 이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의 메시지가 생각보다는 별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죄책감 자체가 현대인이 없기 때문에.

 

왜 그러면 오늘날 현대인들은 시편 시인처럼 죄책감이 없어졌을까요? 왜 고대 성경 시대의 사람에 비해서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점점 줄어들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모든 개인이 하나님께 똑같은 거리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사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자기가 죄를 짓고 신용불량자가 되고 돈도 많이 써놓고 뭐라고 하냐면 이 세상이 나에게 돈 쓰게 만들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회를 향해서 분노합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기가 죄책고백을 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죄와 병은 차이가 납니다. 죄는 병을 가져오지만 병 자체는 죄는 아니고 죄는 병이 아닙니다. 죄가 만일 병이라면 동정의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살인범도 미국 같은 경우도 항상 변호사가 이 사람의 무죄 석방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렸을 때 이 사람은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옛날 이 사람 환경이 이 사람 인격에 너무 파괴를 끼쳐서 지금 이 사람도 사실 성한 사람이 아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그 사람도 변호인들이 처음에 이 사람은 아주 순한 사람인데 무슨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죄악된 행동마저도 정신 병리학적인 이상 때문에 일어났다고 함으로써 두 가지가 큽니다. 내가 저지른 죄는 이 사회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 사회 공동체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과 내가 저지른 죄악된 행동은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을 지라도 나도 알고 보면 피해 입은 사람이다. 왜?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고 어머니에게 버림 받았다 그러므로 사실상 나는 고아처럼 자랐기 때문에 칼부림을 했다 그렇게 합니다. 이제 그 변호사들이 전형적으로 정신과 의사와 둘이 짜서 돈 왕창 받아서 이렇게 해줍니다. 이것 때문에 이런 참회를 할 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뇌물 먹고 심지어 감옥 가는 중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물 먹여 놓고 괴롭게 만든 사람도 가면서 하나님은 나의 모든 진실을 안다 이렇게 말합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자기가 분명히 불륜을 저질러서 재판까지 가서 합의금까지 주고받은 사실이 있는데도 자기를 수사하면 내가 이 정권에 대해서 쓴 소리 몇 마디 할 것이니 나를 박해할 거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기억해보시길 바랍니다. 기독교인 중에서 법망에 걸린 사람 중에서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내 책임입니다 이 모든 죄는 내가 뒤집어 써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런 사람 없죠? 왜 그러냐면 이런 회개와 참회의 영성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잘못했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성한 곳이 없고 내 머리가 상하고 내 뼈가 썩어 들어가고 내 살 중에서 사람들을 기피하게 만드는 악취가 나는 이런 자기 존재의 이 참상을 심각하게 몸서리치게 깨닫는 영성이 너무 모자랍니다. 이 세상 바깥에 탓을 돌리고 어린 시절 자기에게 잘못한 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자기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죄악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탓을 돌립니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우리가 시편 38편처럼 하는 것이 낫습니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며 내가 우매한 연고입니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나는 슬픈 중에 다닙니다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합니다 주여 나의 소원이 주 앞에 있습니다 나의 탄식이 주 안에 감추이지 않습니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습니다. 여러분 전부다 신체 언어가 많이 쓰였죠? 이 말은 죄를 지으면 우리 신체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짓고 나면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습니다 내 몸이 완전히 망가집니다 인간관계가 망가집니다.

 

11절에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그래서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은 첫째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단호함, 죄를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단호함이 있는 것이 일단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혹시 죄를 짓더라도 시편 38편 같은 개인적인 참회시를 반복해서 읽음으로 여러분 회개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런 시편은 우리 죄의 회개를 도와줍니다. 우리가 비록 넘어지게 되었지만 내 근심이 항상 주 앞에 있지만 내가 항상 내 죄 때문에 슬픈 중에 다니지만 그러나 내 원수가 내 앞에서 활발하게 행하는 것을 나는 못 견디겠습니다 내 원수를 좀 자제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21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그래서 이것을 전제하고 뭐가 나갑니까? 바울의 복음이 나갑니다. 이 상태를 전제하지 않고는 바울 복음이 안 나갑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이 상태를 전제합니다.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죄라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을 실패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실패하는 인간의 의를 보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진리는 이런 참회의 죄에 대한 깊은 탄식으로 목이 메인 사람 사무친 사람에게 들어간 즉시 떨어지는 복음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여러분을 가득 안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속이 상하고 망가져버린 한 시편 시인의 고백의 기도를 들으면서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저희들이 죄의 무게를 견뎌보아서 압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경험이 바로 죄를 짓는 경험이고 주님 우리가 타들어갔으며 엄청난 바위 밑에 질식하는 것과 같은 아버지 하나님 무서운 분열을 겪었고 외로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자기 죄탓이라고 고백하지 않으려는 현대인 속에서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 무거운 죄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회개 기도하고 참회기도 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용서의 복음을 영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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