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러러 보았지만, 정작 주님은 초라한 길을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게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지난 밤에 별세하고) 우리가 다시 살아서 뵙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밤에 잠 잘 때, 죽는 연습을 하고
아침에 일어날 때, 부활의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일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나는 가운데
죽음과 부활의 연습을 하다보면
어느 날 주님께서 나를 깊이 잠들게 하실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끝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깨우실 때, 우리는 일어나서
주님과 더불어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볼 때, 그 생애를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3년 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는
그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에 가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신적인 권능으로, 모든 기적을 보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위대한 권능을 행하심으로, 수 천 수 만의 군중이 주님의 뒤를 따르고 환호하고
‘오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 뒤를 따르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을 꿈꾸고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을 것을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따르게 했습니다.
▲2. 그러나 주님은, 결국 그렇게 그의 생애를 살지 않으시고
말없이, 그는 묵묵히 가는 길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따랐으나, 언제나 주님께서는 그 군중들이 원하는 길로 가지 않으시고,
자기 길로 가셨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신적인 공로로 수 천 수만의 군중이 따르던
그러한 위대한 기사와 이적으로, 영웅으로 살지 않으시고
마지막은 초라하고, 비참하고, 그는 참으로 실패자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으며
마지막에 그는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고 죽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에게
저들을 다 사로잡아 지중해 바다 속으로 몰아넣든지
순식간에 벼락을 쳐서, 그들을 다 죽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소낙비를 내리셔서, 저들을 다 홍수처럼 쓸어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인 권능을 행하지 않으시고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면서 주님은 비참한 모습으로, 하늘도 땅도 그의 얼굴을 보기 어려워서
빛을 가리우시고,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서 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으로, 주님은 그 생애를 끝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기적과 권능을 행하시던 주님보다
주님의 십자가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능을 행하시고, 이제 땅에서 수천 수만의 군중이 따르는
그런 능력의 주님이 아니라,
십자가 상에서, 피 흘리시면서 ‘다 이루었다’ 하시는 주님, 그 주님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가버나움으로, 벳세다 언덕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 거기서 떡을 얻어 먹었습니다.
저 가버나움에 가서, 병든 자를 고치실 때
병든 자를 고치시는 기적을, 저들은 보면서
함께 병든 자를 고치는 기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공간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유대 땅을 거닐었습니다.
시간적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주님과 함께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가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이마에서 땅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리면서
‘아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나이다.’
주님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면서
이미 그 순간이 '십자가의 피 흘림'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나이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때는 따로 있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육신이 연약해서 졸았지만
주님의 그 깊은 기도에, 이미 마음으로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길과 제자들의 길은 거기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지만,
주님은 주님의 길로 가셨고, 제자들은 제자들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주님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으나, 네가 나를 왜 부인했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길과, 제자들의 길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만찬을 나누시고
친히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들이 흩어지리라’
그러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버리지 않고, 따르겠나이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버려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나를 3번 부인하리라’
주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십자가에 가서 죽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십자가의 죽음은 나의 갈 길이고
너희가 죽는 날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
그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 특별히 ‘내가 진실로 네가 이르노니..’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진실로’ 라는 말을 쓸 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할 때, 무엇이 대단해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3번 부인하리라’ 하셨을까요? 마26:34
‘오늘 밤에는 나를 부인하고 살아라. 오늘 밤에는 네가 죽을 날이 아니다.
네가 죽을 때와 기한은 따로 있다’
이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님은 ‘진실로’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골고다에 가서 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죽는 것은 개죽음이니, 거기에 따라오지 말고, 네가 죽을 날이 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
네게 성령이 임한 후에 죽어라. 너는 지금 죽을 때가 아니다.
네 속에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너는 내 증인이 된 다음에.. 그제야 죽을 것이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말과 자기 삶으로 증인이 되는 길이 있고
-순교로 증인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성령 받으면 순교자 됩니다
‘너는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은 마르투스 인데, 다른 말로 순교자란 뜻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나의 순교자가 되리라!’
주님은 베드로가, 여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네가 닭 울기 전에 3번 부인하리라’
‘너는 지금 죽을 때가 아니다. 네가 죽을 때는 성령이 임하시고,
그 후에 너는 순교자가 되라..’ 이런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우리 역시도,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사모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큰 은혜인데요,
이 목회자 수련회에서, 어제 밤에 우리 모두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모두다 체험적 사건으로 우리 모두는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아침에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십자가의 길로) 오너라’
저는 교인들에게 은혜를 많이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교인들은 아멘 하며 은혜 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조금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받으라고 제가 사정합니다.
왜냐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십자가에서 죽기 때문입니다.
순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너희에게 충만히 임하시면 .. 증인이 되는 길인데..
그건 결국 순교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것이 최대의 은혜인데,
교인들에게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 받아서 순교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아멘’이 줄어듭니다.
여러분, 은혜가 공짜라고, 거저 받는 것이라고 무조건 좋아하지만 마십시오.
그거 쎄게 받으면.. 하나님이 증인의 길로, 순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함부로 그 은혜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즉 받고 싶어도 못 받습니다.
▲본훼퍼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원수이다.
하나님은 비싼 값을 지불하시고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 모두는 값싸게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가 은혜를 값싸게 받으려고 할 때,
그 시대의 기독교는 타락해 갔습니다.
오늘날 많은 군중들이 값싼 은혜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원래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건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신 것이어서,
우리도 그 은혜를 아주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땅에 구름떼처럼 몰려온 기독교인들이
모두 다 군중입니다. 그 가운데 제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하실 때,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따라나설 사람이 몇이니 있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도 수많은 군중이 모여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따라 (십자가의 길로) 오너라’ 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 성령을 받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참된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들에게 원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성령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행1:8
3년 동안 훈련 시키셨으나, 그것으로 주님은 되지 않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내가 이제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가 올 것이요.
보혜사가 오시면, 내가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이제 성령이 오실 터인데, 그러면 너희는 증인이 될 것이다.’
저는 그래서 교인들에게 은혜를 조금만 받으라고 사정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은혜의) 빚진 자가 됩니다.
주시는 분은 공짜로 주셨으나, 나는 빚으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빚진 자’가 됩니다.
보통 사람은, 은혜를 공짜로 받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인들에게 ‘은혜를 공짜로 받는 수준까지만 받으세요.'
세상 사는 데는, 그게 편합니다.
더 깊이 받으면 ‘빚진 자’가 되어서, 사도바울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라고 권면합니다.
빚진 자는.. 물질이 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다 하나님의 것으로 여깁니다.
빚진 자는.. 생명이 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도 주님의 것으로 여깁니다.
주님께 내어놓습니다.
이 정도까지 은혜를, 성령을 받으시렵니까?
정말로요?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여.
-그저 은혜를 공짜로 받으시렵니까?
-아니면 ‘빚진 자’로 받으시렵니까?
‘빚진 자’로 받으면.. 그때부터 ‘내 것’은 없습니다.
◑저는 20살 때,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목구멍으로 피가 넘어와서 쓰러졌습니다.
각혈이 되어서 쓰러져서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폐에 구명이 보였습니다.
거기서 피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백방으로 약을 써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이제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약을 사서, 밤에 죽어야 되겠다 생각하고
도저히 뭐 병은 낫지 않고, 더욱 악화되어 갈 때
‘이렇게 살아서 되겠나?’
해서 죽으려고, 약을 사서는, 밤에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슬펐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하나..’
그렇게 슬퍼 울고 있는데, 갑자기 지옥의 환상이 제 눈앞에 보였습니다.
제가 그때, 예수 믿기 전이었는데,
중3때 제 친구가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갖다주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그 가운데 성경구절이 나오고, 예수님 얘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너무 감동되어서, 신약성경을 한 권 구해서 읽었는데
눅16장을 제가 읽으면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사람이 죽으면, 지옥이란 데가 있구나. 지옥으로 가면 안 되지..’
그 내용이 제 마음에 늘 충격이 되었는데, 막상 죽으려고 생각하니까 지옥의 환상이 나타나는데,
해골 떼들이 지옥에서 아우성치는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으면 지옥 간다’ 생각하니, 쉽게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종소리가 들려서,
그 종소리에 이끌려서 간 곳이 교회였습니다. 제가 20살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부흥회를 참석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쉼을 얻으리니..’
‘주여, 이 불쌍한 자, 병든 자가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울고 또 울면서 ‘이 병든 몸을 고쳐주시옵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왔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을 지고 왔습니다.’
울며 기도하면서 그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는 서원이란 말도 모를 때였죠.
‘제 생명을 살려주시면, 제 생명을 하나님을 위해 내놓겠습니다.’
그때 저는 ‘바친다’는 말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그날 밤에, 제가 목사님으로부터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부터, 열심히 6개월 동안, 연약한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를 다녔더니,
폐병이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저는 늘 이 찬송을 부릅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
이 사망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살려주신 것이니
나에게 재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이 있어서 재능을 주신 것이니
나를 불러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불러 세우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주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이 몸은 살았다 하는 것 자체가, 빚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빚으로 갚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목사는 모두 다 가장 큰 빚을 진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은, 빚을 많이졌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많이 얻은 것이 아니라, 많이 받았다는 말은, 많이 빚진자라는 말입니다.
빚을 많이 졌다는 말은, 그때부터 빚을 갚기 위해서 나를 내 놔야 됩니다.
안 내어 놓으면 도둑이 됩니다.
여기(빚진 자)까지 은혜를 받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여러분도, '빚진 자(순교자)'로 사십시오.
우리가 자녀를 낳아서 기를 때, 부모된 마음은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모를 지라도
부모 덕택에 자녀들이 잘 사는 것을 기뻐합니다.
‘네가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 하더라도,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노라’
그게 부모된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그저 예수님 덕택으로 잘 사는 것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소수의 자녀들, 그 가운데서 부모의 은혜를 알고 사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역사 속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빚진 자’로 만드셔서
그들의 가진 것을, 그들의 재능을, 그들의 생명을 빼앗기게 하십니다.
빚을 갚게 하십니다.
그들의 생명을 약탈해서, 그 소수의 사람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게 바로 순교자의 길입니다.
이 반열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이 수련회에 와서 이번에 ‘이런 자리에 내가 서리라’ 결단할 때,
그래서 주님이 그런 은혜를, 성령을 내려주셨을 때,
앞으로 여러분은 눈동자가 달라질 것이며,
삶의 목적과 방향과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 후로 자기는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자기는 그 길을 모를 수 있으나,
이미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그분의 크신 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이 길이 바로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이 가신 길입니다.
2천년 교회사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많은 주의 종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지만
예수님의 3년 동안 수많은 군중들이 환호하고 따랐지만
그러나 더 존귀한 길은, 그런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은, 분명히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우리 마음가운데, 내가 가야할 길을 택하십시오.
이것은 아무나 가지 못해요.
성령이 임하시면, 성령이 충만히 임한 자만 가는 길입니다.
보통 성령이 임한 사람은, 표적으로 일합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권능을 행하신 그 길로 행합니다.
그러나 진짜 성령충만한 사람은, 십자가의 길로 나아갑니다.
그 사람은, 가장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아무나 못 갑니다.
힘으로 못 가요, 노력으로 안 되요. 하나님이 택하셔야 됩니다.
‘너는 그렇게 가서, 내가 너를 약탈해서 빼앗아서, 그 길로 몰아가노니
너는 가라!’
해서 가야 되는데,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되고
사람의 재주로 안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 길을 가리켜서, 순교자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최대 영광은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행위가 순교입니다.
자기 몸을 깨트려서, ‘예수님 예수님’하고 끝내는 것이 순교입니다.
만약에 죽을 때 ‘예수님’을 부르지 못하고
‘저 놈들을 원수 갚아 주소서’하고 이제 죽었다면, 그건 순교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오늘날 순교자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왜요? 예수 믿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원수룰
속으로는 ‘저 원수를 갚아주소서’하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건 순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십니다.
죽을 때 ‘예수님!’
‘나는 주님을 위해 죽는 것 자체가 행복이옵니다. 이제 주께로 가오니..’ 이게 순교입니다.
순교자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생명입니다.
목회자의 최대 인격은, 순교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는 길입니다.
목회자로 불러 세우신 것은, 순교자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길을 가시겠습니까? (회중들) “아멘!”
그래도 이 길을 가시겠다고 하시면 아멘 하십시오. (더 큰소리로) “아멘!”
여러분은, 이 길로 불러주신 사람들입니다.
저는 가끔 후배들이, 저를 부러워합니다.
왜요? 큰 교회를 목회한다고요.
우리 기장(기독교 장로회) 교단에서는 가장 큰 교회이니까요.
큰 교회 건물, 교인 숫자, 교회의 대우.. 이것을 바라보고 저를 부러워합니다.
그런 후배들은, 제가 안 만납니다.
얼굴보고 악수는 하지만, 더 이상은 깊이 교제 안 합니다.
왜냐면 영성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까요. 가는 길이 다르니까요.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교계에 큰 인물이 되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박사학위 없다고 초라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순교자는, 되실 수 있습니다.
이 길만 택했다면, 하늘과 땅이 진동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가 너와 같이 일하겠다’ 하십니다.
교인들이 많이 모였다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도,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되지 않다고 한다면,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역사 속에 수많은 군중들이 힘을 잃은 것은,
떡 얻어먹는 예수님 당시의 군중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 스데반의 길로 가는 소수의 사람들을, 역사는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그들을 붙잡고, 역사를 지금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눈이 열린 자만, 그걸 봅니다.
계시의 영을 보내사, 마음을 밝혀주신 자는, 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마음 속에 무엇을 흠모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순교자의 길을 택한 사람은, 순교자의 영광을 흠모하고 갑니다.
▲순교자..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행위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인데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이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노라..
그래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노라..
이게 바로 순교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을 위해서 나는 죽노라.
이제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의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치는 신앙고백
이것이 바로 순교자의 길입니다.
물질을 드려도, 이것은 차원이 다르지요.
그래서 가장 고귀한 것은, 여러분, 이런 것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가장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호주머니를 탁 털어서 드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집안의 것을 다 털어서 드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왜 이것을 목사가 체험해야 합니까?
주님이 소중한 주님으로 모시고 싶을 때,
값싼 것을 드린다고 할 때는,
자기 인생이 비참해집니다.
내가 주님을, 이렇게 값싸게 모시고서야,
내 인생이 어디서 고귀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까.
그래서 자기의 소중한 것(돈)을 다 드릴 때에
주님은 자기에게 고귀한 분으로 임재하십니다.
목회자는 이것을 체험해 봐야 합니다.
언제나 작은 것, 시시한 것으로 드리는 사람은
‘네가 나를 시시하게 알았기에, 나도 너를 시시하게 아노라’
주님을 소중하게 아는 사람은
‘네가 나를 소중하게 알았기에, 나도 너를 소중하게 아노라’
주님을 가장 소중하게 아는 고백이, 순교자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순교자는 역사에서 길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는 이 길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이 순교자의 길에서, 4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1) 믿음의 순교자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죽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기독교를 핍박하던 이방 집권자들과 권세자들 앞에서
‘예수는 나의 구주요,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로마의 황제 앞에서,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사람들
그들이 당시의 순교자들이었습니다.
625때 공산주의자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노라’고백하고 총탄에 맞아죽은 순교자들.
이런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순교자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어떤 환란이 오나, 핍박이 오나, 어떤 죽음인들
내가 예수를 부인하랴.. 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사는 그런 삶!
이게 바로 순교자의 길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순교자가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동을 따르다가, 죽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은 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노라’ 하며 죽은 게 아닙니다.
그는 헤롯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목 베어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순교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과 그 진리의 고난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역사에 있었습니다.
독일의 본훼퍼도 바로 이 부류의 순교자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정의와 공의를 역사속에 실현하기 위해서
히틀러를 암살하는 단체에 동참했다가, 사형을 받았습니다.
역사속에서 순교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3) 민중을 위한 순교자
남미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 같은 순교자입니다.
민중과 가난한 자, 헐벗은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해 살며
남미의 군사독재에 항거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던 순교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민중가운데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는 교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랐습니다.
4) 성자적 순교자.
그들은 총탄에 죽지도 않고, 교수형도 아니고, 감옥에 가지도 않았지만
성자적 삶을 살고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성프랜시스 같은 분은, 순교자라고 불립니다.
그는 자기 모든 재물을 다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고,
평생 주님의 형상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약간의 구제를, 형식적으로 대내외 홍보용으로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성프랜시스를 바라보면, 스스로를 성찰해야 합니다.
후략. *처음부터 ~ 32분까지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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