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의 영성
글쓴이: 몸으로 드리는 기도 07.04.16 http://cafe.daum.net/CPI2002/Gtk/190
1. 존 오웬의 생애
신학자들 중의 왕자라 칭해지는 오웬은 1616년에 스태드햄의 옥스퍼드주 촌락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성과 가장 깊은 겸손의 필요성을 대규모적으로 묘사하고, 한편으로는 영원이라는 문제들과 대처하는 개인의 마음 속의 극적인 사건을 대규모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엄청난 지력을 소유한 신학자로서 그의 사상은 그 구조의 고른 단순성에 의해 마음에 장엄한 감동을 남긴다. 오웬의 거룩성은 이중적 근원을 갖고 있는데 첫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른 사고에 대해 얘기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거룩과 능력과 위엄과 권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고, 자신에 대한 바른 사고는 우리의 초라하고 비천하고 죄악된 상태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오웬은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편기자와 같이 “내가 믿음으로 말했나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그 진리를 바른 지식이라고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오웬의 문체는 종종 성가시고 비비꼬였다는 비난을 받지만 사고하면서 읽는 지겨움이 정신을 풍성하게 함을 발견한다.
2. 그리스도인의 삶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존 오웬의 중점적인 가르침에 주의를 집중한다. 오웬이 신자에게 항상 상기시키는 자기 지식의 네 가지 항목이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성적 활동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 목적에 따라 이해력과 의지와 감정을 부여받는 것이다.
1. 정신 또는 이해력은 영혼의 선도적 기능이다. 이 기능은 직무를 인도하고 지시하고 선택하고 안내하는 것이다.
2. 의지는 행동의 능력이고 이성적 욕구이다. 선의 모양을 갖고 오직 이성적인 선에 따라 선택한다. 하나님은 의지의 당연하고 필연적인 대상이다. 어떤 대상을 바라는 이유는 그 대상이 가진 선의 속성 때문이라고 말하는 전통적 스콜라 철학의 교리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은 오직 하나님을 바랄 수밖에 없게 하며 바람은 사랑의 근원이고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3. 감정은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다양한 성향적 충동들이다. 인간은 마음으로 선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바라고 그 선의 매력을 느꼈을 때 그것에 집착하도록 창조되었다. 여기서의 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배워야 한다. 감정이 배의 키라면 하나님 말씀은 항해 지도인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인간이다. 죄의 열매는 영혼의 무질서와 인격의 분열이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이 없다(롬 8:71)). 죄는 시종일관 은혜의 모든 역사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죄의 존재와 능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기혐오와 자기 불신 위에 기초되어야 한다. 자기 신뢰와 자기만족은 자기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비천하고 상심한 그리스도인이다. 항상 죄를 바로 느끼고 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과 실례들을 갖고 있는 것이 영혼의 가장 좋은 자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구속을 받은 인간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인간, 곧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주입되었다. 이것이 예언된 “마음의 할례”이다. 이 할례로 방해요소들은 제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 얻는 믿음의 첫 번째 행동인 의식적인 ‘회심’은 이 할례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 행동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완전히 자유로운(즉 의식적인)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심령을 전투장으로 만들어 끊임없이 육체와 충돌하게 된다(갈 5:17; 롬 7:232)). 죄가 일시적으로 공격의 소강3)상태를 보이는 것은 죄가 죽었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의 전략은 기습의 전조로 거짓된 안전감을 주는 것이다.
3. 성화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이다.(살전 4:3; 벧전 1:15이하4)) 성화는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 본성을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 우리의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하게 쇄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 전체에서 점진해가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하신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하다. 성화에는 양면이 있다. 적극적인 면은 새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시키는 것이며, 소극적인 면은 옛 사람을 약화시키고 죽이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경계하고 마음을 감시하고 훈련된 묵상의 습관을 형성하지 않으면 진정한 성장의 온상인 신령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
억제(mortification)는 죄의 충동을 점차적으로 박멸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거하는 죄는 원칙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었지만 절대로 긴장이 풀려서는 안된다. 죄는 점차적이고 끊임없이 약화시키는 방법으로만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죄를 이기는 공략으로는 첫째로 지속적인 겸손(정신 구조는 죄의 독에 대한 해독이 될 수 없다.)과 둘째로는 은혜 안에서의 계속적인 성장이 있다. 완전한 거룩 가운데 성장하고 번성하고 진보하는 것은 죄를 억제하는 훌륭한 방법이라고 오웬은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직접적으로 죄를 억제할 수 있는 활동은 기도이다. 이 기도에는 비탄(complaint)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악행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함으로 영혼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탄원(petition)도 포함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증거하신 사건들을 회상함으로 그 약속의 성취됨에 대한 믿음을 지속하는 것이다(시편들이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주관적으로 기도의 효과는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로 은혜가 강화이고 둘째로 신자가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께 의뢰함으로 죄는 약화되고 위축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사랑의 최고 대상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모든 참된 사랑의 결과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랑의 결과들의 첫째 결과는 집착(adherence)이고 둘째는 동화(assimilation)이다. 성경의 사랑을 종종 집착이라는 결과로 표현하는데 즉 한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에 밀착되고 굳게 결합되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동화가 뒤이어 일어나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은 죄를 효과적으로 억제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과 닮게 변할 것이다.
이와 같이 오웬의 그리스도의 생활에 대한 가르침에서 십자가와 성령은 두 가지 집중점이다. 이러한 이분적 도식은 그의 독특한 생각이 아니다. 전통적인 청교도의 가르침이며 오웬은 청교도의 주류에 위치에 있다.
4. 하나님과의 교제
오웬에게 성화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다 포괄적인 실재 즉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cation with God)의 한 단면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과의 교제 사상은 청교도의 심장부로 인도한다. 청교도들은 인간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하나님과의 교제와 연결 지었다. 또한 은혜 언약에 대해서도 깊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은혜 언약은 청교도의 특징적 교리로 칭해졌으며 이것의 직접적 목적은 인간들을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은혜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재를 끊임없이 역설하였다. 이것이 교제의 실재인 것이다. 더욱이 청교도들은 영국의 공적 예배의 개혁을 추구함으로 드러났다. 모든 신학의 주제들을 예배와 연관시켰다. 이것이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진정한 천국의 시식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는 창조와 구속이 수단이 되는 결과였고 이것이 진실로 기독교 신앙의 정의인 것이다.
5. 다섯 가지 명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오웬의 분석은 다섯 가지 명제로 설명 될 수 있다.
1. 하나님과 인간 간의 상호교환관계이다. 이것은 코이노니아로 표현할 수 있는데 공동적 참여, 적극적인 나눔을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는 자연히 어떤 선행적 약정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다음은 오웬의 코이노니아 정의이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의사 전달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피에 의해 비준5)된 평화의 언약 가운데 동행하면서 가장 거룩하고 신령한 방식으로 주고받는 상호전달이다.”
2. 주도권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출발점은 오직 ‘우리 자신으로의 복귀를 요구하심’과 일치시킴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창조하시는 관계이다. 오직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응답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객관적 견지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3.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세 인격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관계이다. 오웬은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므로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세 분의 신격들께서 구원을 성취하실 때 그들의 섭리적 관계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생활 가운데 본질적이며, 영원한 그들의 관계를 반영하는 삼위일체적 구원이라는 것이었다. 제 일격이신 성부께서는 구원을 주도하시고 백성들을 택하시고 구원의 방법을 계획하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제 이격이신 성자께서는 성부의 생각을 자신에게 구현하시며 죄인들을 구속하기위해 죽으심으로 성부의 뜻을 행하신다. 제 삼격이신 성령님은 집행자로 성자께서 확보하신 구원을 전달하신다. 먼저 성부를 생각해보자. 성부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사는 부성애의 태도와 실행으로 묘사될 수 있다. 오웬은 신약성경에서 사랑이 성부의 우리와의 관계에서 특성으로 제시된다고 지적한다(요일 4:8; 고후 13:13 등6)). 성부의 사랑을 받는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는 성부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랑에 의해 응답해야 한다. 즉 “영혼의 사랑으로 충분하게 계시된 성부에 대한 특별한 기쁨과 순종에 의해”라고 오웬은 말한다. 다음은 성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성자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은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모든 영적 유익들이다. 모든 은혜는 성자에게서 발견되며 그 분을 영접할 때 받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비결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우리에게 대한 혼인의 애정과 충절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그에 대한 혼인의 순결을 지킴으로 해야 한다고 오웬은 말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매일의 의도적 복종이 필요한 것이다. 청교도들에 의하면 거룩은 믿음의 훈련 없이는 달성될 수 없고 죄와 싸우는 수고 없이는 완전해 질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에 대해 생각해보자. 성령은 위로자라고 칭해지는데 위로가 그분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사이다. 성령의 위로하시는 역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오웬에 따르면 묵상과 기도와 바르게 정돈된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삼위와 규칙적인 교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각각의 인격에게 개별적으로 사랑과 복종의 정당한 응답을 해야 한다. 구드윈은 삼위께 각각 구별되는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4. 하나님과 인간 간의 능동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우정관계이다. 이 생각은 존 오웬의 복잡한 분석의 전체를 조망하게 한다. 우리는 매일 드리는 예배라는 평범한 공물 외에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목적으로 그의 임재로 나아갈 기회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정은 방문에 의해 가장 훌륭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오웬은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때로는 교회 때로는 그리스도인인 그리스도의 영적 신부의 상호적 사랑의 비유로 해석하는 버나드와 그 밖의 중세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많은 청교도들에 동조한다. 아가서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감미롭고, 기쁨이 있으며 안전하며 후원과 위로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5. 주님의 식탁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향유된다. 성찬예배가 청교도들의 꾸밈없는 기념일 뿐이었다. 리차드 박스터는 성찬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부름 받는다고 말하면서 혼인언약이 공적으로 인증되고 희생제로 참여하며 하늘의 가장 큰 교제에 있다고 말했다. 독특한 방법으로 이 의식에 지정된 방법으로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교제의 경험을 갖는다고 오웬은 말한다. 또한 퍼거슨은 오웬의 전개를 요약한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고백과 선포를 포함하기에 그 안에서 자신의 언약을 확인하시고 신자들은 언약의 의무들을 새롭게 함으로 신령한 교제이며 연합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대표로, 공시로, 서명 날인으로 임재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하나님과 우리 상이의 불화가 없음을 말해준다.
6. 특별한 대조점
청교도들은 보다 더 하나님을 공경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보다 더 인간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과 우리들 간의 두 가지 특별한 대조점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큰 일었던 반면 오늘날에는 비교적 작은 일이라 결론 내린다. 청교도들은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했으며 사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을 터놓고 이야기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청교도의 경험적인 경건은 완전히 하나님 중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이었던 반면 우리의 경건은 주로 자신에 관심을 두어 종종 부자연스럽고 과장되었음을 발견한다. 청교도들은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과 하나님께로 자신께로 이끄시는 사람들과 관계하시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고 철저한 하나님 중심이었다.
세 번째로 청교도의 영적 고결성과 도덕적 정직성을 위한 열심, 위선에 대한 우려 그리고 겸손한 자기 불신이 현대의 복음주의적 풍조에 대응될 것이 없다고 사실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심령 속에 거하는 진리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진리들의 필요성과 탁월성의 계속적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복음의 위대한 교리의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신념 때문에 우리가 보다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은 현명한 자들을 위한 말씀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한 길을 걷게 될 것이며 은혜를 찾는데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1)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2)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3) 소강(小康): 소란스러운 상태가 얼마 동안 가라앉는 일.
4)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5) 비준(批准): 조약의 체결에 대하여, 국가가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동의함, 또는 그 절차.
6)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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