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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너는 다르게 살라(딤후 3:1-5)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3.

너는 다르게 살라
딤후 3:1-5



우리는 흔히 '말세다'라는 말을 씁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여기도 말세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세는 고통하는 때라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Chalepos라는 말은 '어렵다' '힘들다'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힘들고 어려운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마지막날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마지막 때가 오는 것을 알아서 그 때를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날의 현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입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합니다. 경제적으로 혼란합니다. 문화적으로 혼란합니다. 도덕적으로 혼란합니다. 종교적으로 혼란합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일에 일정한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고 도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따르는 것을 합리(合理)라고 하고 이것을 따르지 않는 것을 불합리(不合理)라고 합니다. 합리적인 사회는 행복한 사회요, 불합리한 사회는 불행한 사회요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 합리적인 사회에 사는데도 사는 보람이 있고, 기쁨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합리한 사회에 사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있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불행입니다.


서구사회 선진국은 합리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선진국 사회에서 오래 사시던 분은 우리 나라에 와서 얼른 적용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우리 나라가 서구선진국에 비해서 아직도 모든 방면에 불합리적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랑과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합리를 알고, 합리적으로 사는데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흥하고 행복하며, 악한 사람이 망하고 설 자리가 없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입니다. 의롭고 참된 사람이 대접과 존경을 받고, 악하고 부정한 사람은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인도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폭력은 짐승의 법칙이요. 비폭력은 인간의 법칙이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폭력의 법칙이 아니고 비폭력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사회에 부조리가 얼마나 팽배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는 불행의 요인이요, 불만의 시요, 민족의 번영을 가로막는 암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한마디로 오염된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공기의 오염만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 방식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기풍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양심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자들의 정신자세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이 같은 데서 돌아서라' '너는 다르게 살라'고 명령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권력 만능의 세상입니다.


권력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고, 권력만 있으면 부유해지고, 권력만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민의 의식수준이 낮을수록 이런 현상이 더 합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권력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권력 의지를 충족시킬 때 사람에게 통쾌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이란 것은 막강한 힘과 기능을 갖습니다.


그런데 꼭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권력이란 것이 만능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그 수명에도 한도가 있고, 그 기능과 역할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미국의 평민출신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힘은 모두를 정복합니다. 그러나 그 수명은 짧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행은 권력일변도입니다. 군정시대만 그런 것 아니고 문민정부가 되었는데도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는 다원 사회입니다. 여러 가지 힘이 다원적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균형과 조화 속에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의 대원칙입니다.


저마다 제 자리가 있고, 제 구실이 있고, 제 책임이 있습니다. 질서와 직분의 원리를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철학자 푸라톤이 말했습니다. 현대를 소위 다원적 기능사회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문적인 분업사회입니다.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 교육은 교육, 예술은 예술, 학문은 학문, 종교는 종교 각 부분의 사회가 제 기능과 제 직분을 다 할 때 전체 사회가 바르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정치 일원화사회가 되고 권력 만능의 사회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크게 불행한 것입니다. 국민들의 성공의 기준, 출세의 척도를 권력을 잡는데 두고, 저 마다 권력의 주변에 모여들고, 권력획득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은 매우 불행하고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소위 정치부재의 문제가 왜 생깁니까? 수 십년 동안 야당이 권력획득만을 위해 싸워왔지 정치에 대한 비전, 철학이 없기 때문에 정부가 말 바꾸는 것을 너무 쉽게하므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사회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서려면 이 권력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이런 의식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 사회와 국민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은 인간의 한 가치요 기능입니다. 그러나 권력이 인간의 목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엄연한 두 주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와 정의입니다.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권력이 있는 것입니다. 손과 입이 내 생명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내 생명이 손과 입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금력 만능의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돈이면 다 라는 세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돈을 가지면 우리는 여러 가지 욕구충족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금력이 권력 못지 않은 막강한 힘과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금력 만능의 부조리가 생기고 배금사상의 병든 풍조가 휩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권력과 결탁합니다. 소위 정경유착이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양심을 팔고, 지조를 버리고 신의를 배반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나라 파는 행위도 서슴치않고 밀수와 탈세를 감행합니다. 돈 만 벌 수 있으면 부정식품도 만들고 부정 약품도 만듭니다. 권력의 자리를 남용해서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합니다.


한 사회가 배금주의 사회가 될 때, 돈의 노예가 되고, 그 사회는 병들고, 민족의 기강은 땅에 떨어지고 국민의 도덕은 기둥이 무너져 해이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나라가 병들고, 썩고, 멍들고, 기울어집니다. 권력과 금력이 결탁할 때 그 해악은 극도에 달합니다.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수단입니다. 돈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돈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절대로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되어서도 안됩니다. 돈이 결코 인생과 사회의 만능 약은 아닙니다.


인간이 목적이요, 돈은 인생의 수단입니다. 그리고 돈은 섬겨야 할 두 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정이라는 주인이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돈을 벌되 옳은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공정한 경쟁으로 이윤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업의 도의요, 상업윤리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번 돈을 정재라 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을 부정재 라고 합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오늘 우리 나라의 소위 대 기업가중에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이유는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해서 그렇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이 존경과 신망을 받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은 처벌과 멸시를 받는 사회풍토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돈과 기업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요 민족과 사회의 복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위해서 옳게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돈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옳게 써야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공정과 책임이 따르지 아니하는 부정축재는 사회를 망치고, 나라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불신 풍조의 사회입니다.


현대사회를 계약사회라고 하는데 서로 속이고 약속을 지키지 아니할 때 계약사회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본은 속이지 않고 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국민은 정부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은 학생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용자와 고용인, 의사와 환자, 상인과 손님,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두터운 믿음이 있고 확고한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신의가 있을 때 단결이 되고, 단결이 있으면 힘이 생기고 힘이 있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불신이 있으면 분열이 생기고, 분열이 있으면 약해지고, 약해지면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불행하게도 불신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믿지 못합니다. 서로가 믿지 못하니까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신의의 나무에 화목의 꽃이 피고, 단합의 향기가 풍기고, 행복의 열매가 맺힙니다. 반면에 불신의 나무에는 불화의 벌레가 벌고, 파장의 병이들고, 불행의 낙엽이 집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최대의 형벌이 무엇입니까? 옳은 말을 해도 다른 사람이 믿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인간 부도 수표라고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사회에 설 땅이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친구도 안생깁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정치풍토가 왜 이렇게 희망을 가지기 어려울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공약을 했으면 그대로 지켜야 하고, 지키려고 힘쓰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나서곤 하니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말만 민주주의요 헌법과 제도, 조직만 그럴듯하지 민주주의가 아직 정착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로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거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 지구상에서 가짜 물건을 가장 많이 만들어 파는 나라가 우리 나라 아닙니까?


국가의 지도층은 국민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상인은 고객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나 약속했으면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약속한 것을 어기면 불신감 내지 배신감이 생깁니다. 우리 사회가 밝아지고 혼란을 없애려면 서로 믿고 믿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허망한 생각으로 가득한 사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가만히 보면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요행과 운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내가 힘써 해야 할 일은 하지 아니하고 기도만 하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줄로 아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바른 생각,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면 장사가 잘되는 줄 믿으면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부지런하고 더 연구하고, 개발하고, 성실하게 해야 성공합니다. 성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고 나는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의 결과입니다.


우연이나 요행을 믿는 사고 방식은 망국의 사고요, 약자의 망상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허망한 생각입니다. 이런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 사주를 보고, 관상을 보고, 토정비결을 보고, 운명론을 신봉합니다.


여러분,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을 하룻밤에 쌓을 수가 없습니다. 요행을 기대하는데서 절대로 위대한 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노력은 하지 아니하고 요행만 바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요,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날치기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에게는 분수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제 분수를 알고, 제 분수를 지키고, 제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탄탄대로를 자신 있게 활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와 도전과 시련의 어려운 시기를 조심스럽게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난국의 시대에는 어려운 때를 이겨내기 위한 지혜와 신념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나라는 말할 것 없고 지금 세계 경제가 하양일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나라처럼 국토가 좁고,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가 과잉한 나라에서는 무엇보다도 근검과 절약의 분수의 철학이 요구됩니다.


쌀 알 하나, 종이 한 장, 쇠붙이 하나도 아껴써야 합니다. 하아바드 대학의 제아뱅크 교수는 "소비가 미덕인 시대는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에게 빚을 준 채권국가가 아닙니다. 외국의 빚을 많이 짊어지고 있는 채무국가입니다. 수입 안에서 지출하고, 버는 범위 안에서 쓰고, 생활력의 정도에 맞는 생활 수준과 소비수준을 가져야 합니다. 사치는 망국 병입니다.


우리 국민의 생활에는 외화내허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빈 것이 외화내허입니다. 현실을 잊어버린 허례허식이 있습니다. 실천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공리공론의 폐중이 적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형식주의와 체면 사상 심합니다.


내가 내 발로 서서 내 힘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수원이 깊은 샘터는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실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허망한 생각에서 떠나 착실하게 살아야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유명무실이 많습니다. 이름만 있고 알맹이가 없습니다. 힘이 어디에서 생깁니까? 알맹이에서 생깁니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분수가 있습니다. 민족에게는 민족의 분수가 있습니다. 분수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실력이요, 자기의 정도요, 자기에게 맞는 실정입니다. 자기분수를 모르고 자기분수에 지나치는 행동이나 생활을 하면 개인이건 단체건 민족이건 반드시 파멸한다는 것은 동서 고금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서양의 선철(先哲)의 말은 너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기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 난국을 극복하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 온 국민이 저마다 제 분수를 알고 제 분수에 맞게 살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에서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말씀해 내려가다가 "너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너는 다르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데 생존만으로는 의미와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되 보람있게 살아야합니다. 100년을 살아도 아무런 보람이 없이 산다면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보람있게 살아야합니다. 일하면 일하는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고생하면 고생하는 보람이 있고, 노력하면 노력하는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보람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의미의 연속이요, 무가치의 되풀이입니다.


사람의 생존 그 자체는 형이하학에 속하는 욕구이고, 보람은 형이상학의 욕구입니다. 행복이란 형이상학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핵심은 보람입니다. 행복한 생활이란 보람을 느끼는 생활입니다.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보람이 무엇입니까? 어떤 의미 있는 일, 어떤 가치가 있는 일, 어떤 좋은 일을 했을 때 마음속에 느껴지는 흐뭇한 정신적 만족감입니다. 보람은 하늘에서 비처럼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샘물처럼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보람은 우리가 스스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피와 눈물과 땀으로 지혜와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는 보람을 창조해야 합니다. 보람은 노력의 나무에 피는 향기로운 꽃입니다. 보람은 정성과 땀으로 쌓아 올리는 인생의 공든 탑입니다. 보람은 지혜와 끈기로 가꾸는 생활의 흐뭇한 열매입니다. 부와 권력을 아무리 쌓아도 보람을 못 느끼면 그 인생은 허망한 것입니다. 명예와 지위를 아무리 가져도 보람을 못 느끼면 그 생은 무의미한 생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보람있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습니까?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덕이요, 가장 신비로운 향기요, 가장 찬란한 빛이요, 가장 창조적인 힘입니다. 20세기의 사랑의 천재를 들라면 철학자요, 목사요, 음악가요, 신학자였던 알버트 슈바이처를 들 수가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유복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없이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같은 학교의 같은 반의 친구들이 가난 속에서 불행하게 사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왜 나만 행복해야하고 저 얘들은 불행해야하나? 나의 행복과 그들의 불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릴 권리가 나에게 있는가? 슈바이처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행복한 나는 불행한 저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무살난 젊은 학생시절에 일대 결심을 했습니다.


"서른 살까지는 나의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자. 그리고 서른 살 이후부터는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자"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의 생애를 살려는 결심이 슈바이처를 20세기의 성자로 만들었고 사랑의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봉사해야 합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헌신해야 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도와야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인가 주어야 합니다.


봉사는 스스로 원해서 남을 위해 시간을 바치고, 정성을 쏟고, 돈을 내고,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권력이 전부가 아닙니다. 돈이면 다가 아닙니다. 서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허망한 생각은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라 보람있게 살아야합니다.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살려하지 말고 남을 봉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말세에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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