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20절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신약 성경에서 이 기도를 드린 사람 두 사람 골라보세요. 31편 5절에 주여 내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스데반과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만 기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결국 무엇을 외우고 있던 겁니까? 시편을 외우고 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것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 전체 시편 기도문을 외웠는데 그것을 끝까지 못 외우고 돌아가신 거죠. 시편 22편을 외우신 거죠. 외우시다가 제일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 하신 말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 다음에 내 영혼을 주님의 손에 부탁드립니다. 이 기도는 절대적인 의탁입니다. 이 말은 현재 나의 대적이 나보다 훨씬 수가 많을 때, 지금 현재 내가 이 지상의 싸움에서는 원수 대적에게 내 목숨을 잃고 있을 때, 그 때 주여 내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께서 우리 주님이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 주님을 동정적으로 이해하려면 지금 현재 이 복음서는 십자가로 가는 그 길목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예수님 감정, 표정 같은 것은 많이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읽을 때 행간을 읽지 않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는 그 비통한 예루살렘 걸음이 얼마나 우리 보통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아내는지 모릅니다. 갈릴리에서 올아 온 여인들은 예수님이 당하는 곤경 앞에서 예수님을 향해서 눈물을 뿌리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요한복음 12장에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그 비장한 죽음의 여정 앞에 그냥 나드향 300근을 주님과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가장 귀한 것을 깨서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시편 기도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한 순간, 한 순간 이동할 때 이런 속 깊은 기도를 드리면서 이동했다고 이해해야합니다. 그래야만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울며 따라 온 여인들을 이해할 수 있는데 지금 현재의 복음서를 깊이 읽지 못하면 아무리 읽어도 보통 신자들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그 비장한 걸음 앞에 눈물 나게 읽을 수 없습니다. 왜? 너무 많은 생략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읽어야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걸어가는 걸음이 우리의 눈물을 자아내는가? 이런 예수님의 속 깊은 기도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읽어야합니다. 오늘은 전형적인 예수님의 기도이면서 또한 이런 처지에 빠져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중보기도입니다.
오늘도 본문에 이것은 다윗의 시라고 하였는데 다윗이 쓴 시라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돌린 노래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제가 이걸 번역을 이렇게 했습니다. 오 야훼 하나님 나는 당신께 피난처를 찾습니다 나로 굴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시고 나를 구출함으로, 이렇게 번역 했습니다. 지금 현재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왜냐면 이 시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9절에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이 상태입니다. 이 상태의 기도가 다급한 기도입니다. 주님 내 몸이 이렇게 내 생명이 점점 쇠하여가고 있고 지금 내 시력도 점점 나의 영적 통찰력도 나의 고난이 너무 심한 까닭에 점점 내 영적 시야도 흐려가고 있습니다. 지금 점점 내 몸이 쇠약해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도를 여러분들 잘 기억해보십시오. 점점 내 기력이 쇠해지면서 주님이 초점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이제 내가 내 몸이 붕괴되어가면서 점점 잃어버린 자, 사망당한 자의 땅으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 내게 귀를 기울이시고 내게 다급한 즉각적인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께서 즉각적인 구원이 필요한 경우에 이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 즉각적인 구원은 당신께서 생명력이 점점 소멸되어가고 점점 소멸되어가는 내 생명을 방치하지 마시고 혼란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점점 쇠약해 가는 내 영혼을 극적으로 구출하심으로 원수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아니며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허락한 고난을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이유 때문에 이 고난을 당했구나 그렇게 좀 복수 좀 해달라고 그렇게 만 천하 앞에 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만열 교수님이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지금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셨습니다. 이분이 원래는 신채호를 전공한 분인데 이분이 1980년에 전두환에 의해 퇴직 교수가 되셨습니다. 고신파 보수신앙의 그 샌님 같은 조용한 선비였던 이만열 교수를 해직의 고통으로 하나님이 몰아넣으셨을 때 그의 고향 함안 사람들이 이만열 교수님이 해직된 이야기를 듣고 고향 사람들이 이만열 교수가 개인적으로 비리에 연루되어서 교수직을 박탈당하는구나 이런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만열 교수의 혜택을 그렇게 많이 입던 사람들이 해직 교수가 되니까 짜장면 한 그릇 사지 않고 캠퍼스 내에서도 만나면 피하고 학회에서도 만나면 피하는 이런 처참한 꼴을 당했다고 합니다. 순식간에 출근할 데가 없어져서 늙은 노모에게 돌아가실 때까지 해직된 것을 이야기 못했다고 합니다. 늙은 노모가 있는데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 효심이 지극하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근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학교라는 말을 빼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머니는 해직 사실을 모르고 돌아가셨는데 하루 종일 탑골 공원 같은 곳에 앉았다가 그 찬란한 지식인이었던 이만열 교수가 그러기를 4년 동안 자기는 한번도 시험에도 떨어져 보지 않았고 경남 함안의 엘리트였는데 해직자가 되면서 갑자기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이 땅에 버려진 사람들 운명에 대해서 동심원적인 연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만열 교수가 우리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부입니다. 구로동에 있는 희년 선교회 대표인데 그 분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그렇게 많이 돌봅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어느 날, 그 대학교수 엘리트가 갑자기 해직교수가 되면서 출근할 직장을 잃고 나서 그때 사람들이 그에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수없이 들으면서 그 4년을 견뎠는데 이때 자기는 처음으로 서원을 했는데 하나님 제가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서원을 했는데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쳤는데 합동신학교에 있는 박윤선 목사님이 이만열 교수를 학생으로 받아들여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기는 자료를 방대하게 수집하는데 미국에 두 차례 가서 해직 교수가 되지 않았으면 구할 수 없었던 기가 막힌 자료들을 미국 일대를 다니면서 우리 한국에 왔던 미국 선교사 모든 일대기를 전부다 뒤지고 편지까지 뒤져서 지금 한국 기독교 역사연구소에 금자탑을 세우는 학문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이만열 교수님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속되었는데 이만열 교수님 혼자만이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이 16명인데 이만열 교수님만이 친일 행적을 기록하는 역사 사전을 만들었는데 나머지 열명 정도의 우리나라 유명한 사람들 서울대학 신용하 교수 겉으로 볼때는 민족주의자고 항일 민족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신용하 교수 같은 사람마저도 이만열 교수가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을 보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쫓겨날라고 그랬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만열 교수를 위원장으로 지명했습니다. 대단한 사건입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이만열 교수가 국사편찬위원장이 된 것은 기독교인들로서도 큰 영광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찬밥신세를 겪으면서 계속 밀려서 푸대접 받던 바른 진리를 세워보려고 애쓰던 가여운 선비를 하나님께서 들어 쓰셨습니다. 지금은 국사편찬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이 가끔은 느리긴 하지만 가끔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극적인 반전도 주시는구나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특별한 죄를 짓지 않더라도 기력이 쇠하여지는 약함을 견뎌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특별한 죄를 짓지 않고도 기력이 약해지고 때때로 슬픔과 환란과 연단 속에 세월을 보내야 될 때가 있는 겁니다. 내가 옛날에 한 때는 큰 상감청자를 이루었던 멋있는 문양이 있는 그런 그릇이었는데 지금은 상감청자 쪼개진 한 사금발이 정도로 내가 참 별 볼일 없구나 이런 무력감을 느끼게 하십니다. 왜 느끼게 하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와 상관없이 느끼게 하시고 우리 죄와 상관없이 내 대적들, 원수들 앞에 이런 굴욕을 당할 때를 허락하십니다. 여러분께서 아마 인생을 오래사신 분들은 충분히 이 말을 이해할 겁니다. 왜 그러냐면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가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굴욕을 당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받아보고 애매하게 친구들로부터 기피당할 때 이거 보십시오. 친구들이 길에서 나를 만나자마자 슬슬 피하였다 이만열 교수가 이 부분을 인용합니다. 친구들이 만나자마자 나를 슬슬 피하고 내가 전화하면 뭐가 모자랍니까 헌금 좀 달라는 뜻입니까, 이런식으로 되면 참 곤란합니다. 우리는 기피 대상이 될 만큼 너무 심한 굴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우리가 지금 그래도 잘 나가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들끓지 형편없이 쳐지면 우리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나 비참하다고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는 욥과 같이 전락해버리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피합니다. 벼락 맞은 사람 옆에 있으면 또 벼락 맞을까 싶어서 피합니다. 이게 바로 욥과 같은 겁니다. 모든 방향에서 환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다 놀라 도망가더라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굴욕 속에서 지금 이 시인은 소리칩니다. 여러분 이 굴욕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당하지만 사람들이 이 굴욕을 당하면서 이 기도를 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굴욕의 경험,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하냐면 주여 주의 의로움으로 나를 건져주시길 바랍니다. 내 도덕성으로 말고 내 공로 말고 주의 의로 주의 이름 때문에 3절 보시길 바랍니다.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려면 평소에 어떻게 되어야 하냐면 누구누구 아무개는 하나님 이름과 같이 간다 이렇게 무언가 판박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공인된 신자가 되어야만이 공인된 신자가 안되면 상장되지 않은 기업과 똑같습니다. 공인된 신자라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이렇게 친구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이게 공인된 신자입니다. 공인된 신자 아닌 사람은 내가 공인된 신자라고 안 밝히는 사람은 아무 행동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인된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가 공표하고 내 인생 배후에 하나님 이름이 걸려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공인된 신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 때때로 위험을 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투자한 바가 크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이름 때문에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 의의 길의 일부는 뭡니까? 비록 내가 그 의의 길이 주님이 나를 인도하는 그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추락하는 길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내가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뭡니까? 주의 의로 인하여 나를 건져주시고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나를 재기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참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럼 이런 시편은 우리에게 언제 도움이 되냐면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 때 이런 시편과 더불어 극복해야 될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 시편이 시한폭탄처럼 여러분들을 기억나게 만들겁니다. 이런 시편을 암송해 놓을 때만 비로소 이 시편이 여러분을 도와줍니다. 여러분이 시한폭탄, 좋은 의미의 시한폭탄입니다. 이런 곤고함과 굴욕감에 둘러 빠질 때 그때 내가 암송하고 묵상했던 시한폭탄 시편이 쫭 하면서 내 영혼을 태우면서 이 시편이 외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하오니 눈과 몸이 쇠하였나니. 참 가만히 보니까 고난이 오래되니까 사람이 분별력이 없어지더라고요. 고난이 너무 오래되면 판단력이 제정신이 아닙니다. 욥기 3장하고 12장하고 점점 욥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닙니다. 욥이 3장에서는 뭐라고 그래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한 자도 여호와니 여호와가 찬송을 받으실지라 그랬죠. 제일 마지막에 가면 자기 태어난 날을 저주하죠? 하나님 붙어 봅시다 이렇게 하죠? 입이 점점 거칠어 가죠. 고난이 깊어 갈수록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고난 깊어지면 판단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난을 받은 사람들의 판단력을 믿지 마시길 바랍니다. 한 14년째 척추 결핵으로 누워있는 사람이 고난이 너무 극심해서 집사님 내게 청산가리 좀 사다 주십시오 이렇게 한다고 막 사주면 안 됩니다. 오래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위험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근심으로 인하여 눈과 몸과 혼이 쇠하여졌으니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주님이 지금 나를 구해주지 않으면 내 몸은 기계가 아닙니다 나는 기력이 쇠하여지고 내 몸은 진토처럼 됩니다. 주님께 나를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근데 오늘 참 위로가 되는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9절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여러분께서 새벽기도 하는 것은 뭐죠? 백화점에서 포인트 쌓는 것과 거의 같다고 했죠? 만약 우리가 기도하는 그런 것이 쌓여지는 것이 아니라면 이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죠. 그래서 순교자는 예수 오래 믿은 집에서 납니다. 모든 순교자를 보면 75%의 순교자가 믿은지 3대째 되는 좋은 양질의 계보에서 나옵니다. 이 믿음이 어설픈 사람들은 순교자가 될 자격도 없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매우 좋은 집안에서 그런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그 사람들 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쌓아 둔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땔감 나무로 이 세상의 모든 연료를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땔감이 썩어서 뭐가 되게 만들었습니까? 저 중생대 시대의 숲이 썩어서 석탄이 되었습니다. 석탄처럼 까맣게 탄 가슴도 연료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쌓아 두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쌓아 두신 은혜를 오늘도 누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아침 저녁으로 쌓는 제단에서 여러분 하나님의 은헤를 쌓는 제단, 여러분 직장에서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 앞에 오늘 하루 순종의 날을 더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건 바로 은혜를 쌓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을 급격하게 도우실 은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침내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가 이거 경험해야 되는 이유가 뭐죠? 23절에 우리가 만일에 이런 큰 곤욕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면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개인에게 베푸신 것은 반드시 누구에게 결과가 갑니까? 성도들 모두에게 혜택 갑니다.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신다고 이런 진리 하나를 우리의 굴곡 많은 인생을 통해서 확장하는 겁니다. 그 다음 24절요.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오늘 하루도 여러분께서 24절 진리를 구현하고 맛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바라는 이 일에서 강하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성질이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고 하나님만 앙망하는 이 일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겁니다.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대담해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기력이 쇠약해지고 끝을 알 수 없는 추락 속으로 점점 떨어져 가는 성도의 영혼을, 주님 이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을 주님께 바칩니다 절체절명의 마지막 기도를 했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의 영혼을 들어올리셔서 원수 대적 보는 앞에서 다시 한 번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시편의 간구를 통해서 우리의 낙심천만한 현실 속에 조금도 어깨 처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일에 담대하고 대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시고 강한 일관성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새벽마다 밤마다 아침마다 직장과 가정과 교회에서 제단을 쌓는 우리 교우들 그들이 은총의 저장고가 되게 하시옵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쌓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쌓으며 마침내 그들이 고난당할 때 급격하게 그들을 돕는 은총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이제 주말로 접어갑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한 사람도 머리털 까지 다 세신바 되게 보호하여 주시옵시고 직장에서 보호하시고 가정에서 보호하시고 우리 교우들의 자녀들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아버지 막힌 기도제목, 끝없이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제목, 우리를 낙심시키기 충분한 그 무거운 기도제목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다 쓸 수 없는 하나님 사랑, 그들이 벌써 간증하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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