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께서 자라게 하심으로써,
그 몸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자리까지 갈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충만한 자리까지 가는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또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유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가시면, 앞 시간에서 확인한 이러한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4: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것이라.’라고
구원이 가지는 복된 목표를 거기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13절은, 당연히 11~12절에 연결되어 있는 데요,
무슨 이야기 끝에 나오는가 봅시다.
엡4: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조직 교회 안에 직분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13절에 나타난 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지도록 하는 일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도록 고린도전서 12장으로 가보십시다.
이 고린도전서 12장의 장면은, 12장 또한 14장에 걸쳐서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은사에 대한 일을, 사도바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많은 교회였고, 은사로 인하여 또 문제가 생긴 교회였습니다.
은사가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이며 더 훌륭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때 사도바울이 은사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고전12:12~20절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제 사도바울이하는 이야기는
그 은사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몸의 지체가 기능이 다른 것과 같다.. 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합쳐서 한 몸이다.
손이 다리보고 쓸데없다 할 수 없고, 다리가 손보고 쓸데없다 할 수 없고
손이 손 기능을 한다고 해서, 혼자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몸의 지체’라는 것이죠.
몸의 지체라.
이것이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은사로 인한 저들의 오해를 풀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왜 교회에 이런 은사를 주셨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어디까지 가느냐하면 고전12:28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빛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성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직분(엡4:11)과 은사(고전12장)를 다 같이 여기 나열하고 있습니다.
직분을 맡는 것 말하자면 오늘날 목사가 된다. 장로가 된다. 집사가 된다하는 일이나
또는 어떤 은사들 방언을 한다. 병을 고친다. 예언을 한다하는 일을 이렇게 함께 모은 것은
다 은사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몸 된 교회의 완성을 위하여 모두의 충만을 위하여
직분과 은사를 주고 계시다. 라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직분이라는 것이 이 몸을 위한 하나의 하나님의 일종의 간섭이듯이
은사도 하나님의 그런 간섭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고전12:29~31절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고 13장사랑 장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이 13장 사랑장의 위치는, 앞의 12장도 은사, 뒤의 14장에도 은사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데, 이 사랑이 여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지금같이 교회 안에 있는 직분이나 은사가 왜 주어진 것이냐를 설명하는 중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요?
모든 직분과 은사과 교회의 전체를 위한 것이라. 모두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
해서 31절 12장 31절을 주의 깊게 보셔야 됩니다.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이 제일 좋은 길을 그 뒤에 이루어지는 13장으로 분명히 사랑입니다.
그럼 제일 큰 은사가 사랑이냐.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에 한 모든 나열된 은사들은 다 교회를 위한 것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또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면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인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은
교회 안에 보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돕는 일에 쓰임 받아라. 그것을 소원해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라는 뜻입니다.
남을 위하는 정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최고의 원리 최고의 내용은 사랑이기 때문에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해서 사랑으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봅시다. 13:1~3장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에 대한 설명은
사랑이 없으면 다 쓸모가 없다 헛되다하는 이야기인데
가장 대표적인 우리의 이해를 돕는 설명은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라는 표현입니다.
앞에 있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나
3절에 있는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나 다 평행법적으로 같은
‘쓸모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2절에 표현은 훨씬 뜻이 강조 되서 ‘사랑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것이라’ 이런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라는 이 번역은
영어로는 with a love I am nothing 나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사랑으로 충고하고 사랑으로 봉사하고..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까지도 아니고
사랑에서부터 사랑이 본체가 되어
봉사가, 충고가, 무슨 일이던지 나가야 된다는 것이죠.
사랑자체가 본체가 되라는 것이죠.
그래서 고전13:4~7절 이하에 사랑은 이제 정리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지 아니 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보고 견딥니다.
이 모든 내용의 공통점이 무엇이냐 하면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철저히 그렇죠. 사랑은 상대방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말 표현으로는 두드러지지 않아서
하나 대표되는 첫 번째 정의 사랑은 오래참고라는 표현은 love is long suffering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찢는 겁니다. 오래 참는 겁니다.
사랑은 불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했던가.’ 사랑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멋있게만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담하고 한심하게도 찢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 쳐다볼 것 없이 각자의 처지를 생각해보시면 이 뜻을 다 아실 겁니다.
거기에 이런 것이 있죠. ‘무례히 행치 않는다.’
중요한 신앙의 경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무례히 행치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얽힌 선배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그 사람이 회개할까봐 겁난답니다.
회개하면 미워할 수가 없잖아요.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척 보이기에 악한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가다가 차에 확 치여 죽어라 이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성도들이면 자기도 모르게 이 소원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회개할까봐 겁이 난다니까요.
그리고 희생과 그리고 인내가 이 사랑에 아주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7절에 있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딥니다.’
즉 잘 될 때까지 견딥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죠. 일곱 번 용서하면 되냐고.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랍니다.
이게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으로 가도록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준비한 신자들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감격하고 진심을 약속했다고 해서
카펫 깔린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뽑아내며, 흠 없고 티 없는 거룩으로 가기위하여
겪어야하는 길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일사분란하고, 그러니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고
모두가 어떤 경지에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고
이 모든 부족을 이제 고치고, 성격적으로나/ 습관/ 생각/ 버릇
이 모든 것들을 이제 하나님의 귀한 인도하심에 따라 한 교회에서
한 몸 이룬 자들 간에 이제 이 지지고 볶음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가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명령아래서
우리의 꼬락서니와 상대방의 꼬락서니를 참아나가고 극복해나가는 현장이 교회요,
신자들이 겪는 신앙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갑자기 이렇게 눈이 뒤집혀가지고 (감정적으로 충만되어)
그렇게 희열에 차서 오면 난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확인과 감동을 주시는 일은 물론 있습니다.
우리를 실패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좌절과 절망과 나태로부터 각성시키시며
하나님이 지금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셔야 할 필요가 있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격과 희열이 내용이 아니고 (감정적 충만이 목표 달성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충만의 인격과 내용과 경지에 가야되는 싸움이기 때문에
이 싸움은 이 싸움은 고달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구원을 받은 것이 맞나? 라는 식의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됩니다.
왜냐고요?
구원을 받으면 곧 다 완벽한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고
구원자체에 대한 이해가 틀려 있기 때문에
왜 구원에서 가졌던 감격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느냐를
성화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많은 성도들이 갈등을 겪고 의심을 하고
결국 체념을 하거나 아니면, 아니면 이중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현실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보다 더 철저히 이해를 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6:1절에 가시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로 인하여 교회 안에 집권과 또는 은사가 있다. 라는
아까 에베소서 4장의 가르침이나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3장에 이르는 말씀이나
동일한 원리 속에서 보다 현실적인 가르침이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짐을 서로 지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여기 말하는 1절에 있는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짐을 서로 나누어져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잡는다’는 것은, 큰 의미로는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만
조금 구별해서 쓰자면 ‘틀린 것을 고친다. 또는 고장 난 것을 고친다’는 개념보다는
조금 더 유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친 것을 치료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correction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restoration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치료한다. 요즘 한국 교회에 많이 쓰이는 ‘치유’라는 그 단어가 적당한 단어입니다.
여러분 팔이 부러지면 매우 아픕니다. 그래도 팔을 잘라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르면 대신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치료하죠.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서 부러진 팔을 제대로 접합을 하고
그 다음에 깁스를 해서 목에다가 겁니다. 훨씬 불편하죠.
팔이 없는 것보다 더 불편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목은 억울합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늘 이고 다닙니다.
상당히 무거운 것을 목이 이고 다니는데,
이 목에다 팔에 깁스를 해서 무겁게 해서 가져다 메는데, 어떤 사람도 이것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요? 팔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회복이 안 되면, 팔이 하나 없으면, 얼마나 큰 불편을 겪어야 되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우리는 불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누구도 불평 없이 목에 걸고 다닙니다.
그런데 목이 만일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부러진 것 아닌데, 내가 왜 그 짐을 지어야해?’
그러면 그게 가당하냐 하는 것이죠.
팔과 목이 싸우는 일은, 말이 안 되는 싸움인 것이죠. 왜요?
목과 팔은 독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 몸의 지체로 몸을 위한 존재인데
몸을 위하자면 각 지체에 결함을 서로 보완해줘야 할 마당에서
나는 못 한다 배를 째라. 어떻게 하시겠어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데는 남의 지체간의 잘못에 대한 용서와
그를 살려내는 그러기에 짐을 지는 것이 중요한 성화의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없는데서 크는 것이 아니고, 잘해서 크는 것이 아니고
가장 중요하게 남을 돕는데서 부터 큽니다.
돕는 것은 짐을 나눠지는 것으로 훨씬 부정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아무 일도 없으면, 사실은 꼭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어차피 짐이 있기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정도와 신앙의 차이는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어느 곳에 열심히 있는 반면에, 분별을 잃고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가 서로 짐을 나눠져야 됩니다. 짐을 지는 것으로 자랍니다.
교회의 유익일 뿐만 아니라 당사자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굉장히 큰 죄나
교회가 잘못된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늘 일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큽니다. 자라납니다.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실력들이, 머릿속에 있던 것이 몸으로 내려옵니다.
자기 실력으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지는 중요한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 속의 원칙 중의 하나는
이것이 함께 가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혼자 가는 싸움이 아닙니다.
함께 가야합니다. 꼭 같이 가셔야 합니다.
내가 앞서 나가서 상대방의 못난 것을 지적하는 것은, 신앙세계에는 사실 없습니다.
같이 가야합니다. 같이 죽을 줄 압니다.
모세도 이렇게 고백을 했죠. 이 백성을 죽일 것이면, 제 이름도 생명책에서 빼주십시오. 라던가
바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내가 저주를 받아도 좋다.
이것이 말하자면 예수께서 가지신 마음이요.
그의 형상대로 지은 그의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결백하고, 더 잘나고, 더 많이 쓸모 있고.. 라는 것들이
신앙의 중요한 목표요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쳐주는 가치들이고
신앙의 가치는 언제나 이런 것들이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되지.
팝콘튀기는 데에 들어가서 뻥튀기가 되면 안 된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 내용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갈6:3절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이 갈6장 1절에서 5절의 가르침 속에 두 가지 내용이 모순되어 보입니다.
2절에 짐을 서로 지라가 5절에 자기의 짐을 지라로 나오고
3절에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가
4절에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없다. 라는 식으로 모순되게 나오죠.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은 약한 자를 돌보고 함께 가야한다는 차원에서의 이야기이고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이야기한 것은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몸 전체를 위하여 최선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다른 지체나 몸 전체를 간섭하고 참견하고 거기를 내다보지 말고
자기지체 몫을 하는 것이 결국 그것이 최고의 자세요.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팔이 다쳤는데 목에 디스크 걸렸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어디다 붙들어 매겠어요.
다리에다 붙들어 매실래요? 그것을 어떻게 뭐 걸 수가 있습니까.
이 목이라도 성해야 각각 자기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튼튼히 지킴으로서 우리는 비로소 남의 짐을 나눠질 수 있는 겁니다.
목보고 부러진 팔을 대신하라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 전체가 이래서 되겠느냐. 우리나라 교회가 이래서 되겠느냐.
이런 주제넘은 소리만 하지 마시고
자신의 겸손함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받도록 기도하시고
그리고 나가서 입 다무시라 이겁니다. 아시겠죠?
자기 짐을 지라.
그것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다 하신다고요. 그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러니까 동일한 이야기죠. 팔이 부러지니까 목이 난 부러졌대요. 이따위 말을 하죠.
여러분 애들 키우면 큰 놈 욕할 때, 꼭 작은 놈이 쫓아와서 그 이야기를 하죠.
‘엄마 나는 숙제 했지. 엄마 나는 공부 잘하지.’
철이 없어서 그렇게 비교 우위를 확인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남이 잘못 되었을 때는 기꺼이 도우시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됩니까. 자기 역할을 든든히 한 것으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이루시는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부르시고 함께 충만하게 하시고
함께 승리하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쓰임 받으며
그 일에 봉사할 수 있다는 것으로 자랑을 하셔야 됩니다.
그 이외에 세상적인 경쟁과 비교는 신자들에게는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말하자면, 교회 안에서 또는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신앙적인 명령들이 혹은 그 일종의 규례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골로새서 3장입니다. 골로새서 3장 1~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해놓고 이것을 근거로 해서 이제 이 명령이 떨어집니다.
골3:5~10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육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이런 명령들은 다만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해.
예수 믿으니까 착하게 살아야 해. 신앙적으로 살아야 해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로마서 6장으로 다시 돌아가셔서 이런 것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1절에서 우리는 전에 한 번 설명하고 넘어갔습니다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런 질문은 왜 나왔다고 그랬죠? 구원이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공짜로 얻은 구원이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를 놓침으로써
부정적으로 무엇에서부터의 구원으로 밖에는 구원을 이해 못합니다.
공짜로 얻은 구원인데 내가 할 것이 무엇이냐 라는 이 질문을 낳게 된다. 그랬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구원은 무엇을 위한 구원이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뭐라고 해요? 2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은 가야할 곳 가야할 곳을 위하여 출발시킨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그치니까 무엇으로부터의 구원만 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공짜라며 그래서 우리 어리석은 생각에 이런 가상 공상을 하죠. 다시 들어가면 또 꺼내주겠네. 유치장 앞에 서서 들어갔다 나왔다만 하는 것이죠. 어디로 가려고 나온 것이라니까요. 출애굽사건을 비교했었죠.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 아니고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하냐하면 있는데서 부터 나와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출애굽이 생기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구원의 말하자면 시작이라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를 통하여 에베소서 1장 3절 이하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시작하셨고 완성하실 것이며 지금 우리는 그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부언 설명하죠. 혹시 이 중간에 들으시면 혼동합니다. 이 구원을 구원은 신분으로는 십자가로 그 운명이 이미 결정됩니다. 한번 얻은 구원은 취소되지도 않고 구원은 이미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를 믿는 순간 확정되어 있는 운명입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실패하게 하거나 변개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분의 구원만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수중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하며 그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귀한 은혜 속에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그의 은혜와 그의 능력과 작정 속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로마서 6장 1,2,3,4절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구원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신앙적 책임에서 이렇게 우리 세상에서 윤리 도덕을 지키는 마음으로 자신의 의지나 자신의 남다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 책임들을 신앙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한 것과 같이 지키면 내가 훌륭해 보이고 못 지키면 좌절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아니고 지금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옛날에 죄 아래에 있을 때 죄의 노예일 때 한 것들이었다. 얼마나 그 행하는 일들이 네 자신의 불명예이며 수치며 창피한 일이냐. 내가 거룩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부름을 받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났으니 내가 얻은 구원이 지향하는 구원의 아름다운 것 영광스러운 것 거룩한 것으로 너를 치장하며 너를 채워 너의 구원을 네게 얻어진 자유를 영광을 약속을 누리는 자되어라. 라고 여기 방법들을 나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적극적인 깨우침보다 부정적으로 거짓말하면 지옥가가 더 쉬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식으로 요구하는 정도 가지고는 성에 안차는 정도까지 높은 수준과 귀한 존재인 것이 뭐라고 해야 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너무 멋지게 만들어서 그런 어떤 규칙이나 강압 같은 것으로는 대부분 다 만족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이런 일들을 이와 같이 이렇게 하는 것은 죄고 이렇게 하는 것은 신앙이다. 라는 이분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목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자랑이니라. 라고 가르치는 것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이것이 구원이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를 조작하시거나 조종하지 않으시며 수준 낮은 짐승같이 먹을 것을 주어서 행복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부르고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우리의 소원으로 가지게 하는 정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 삼으셨구나. 라는 이 기쁨이 이 감격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사람이 먹을 것을 위해 싸우는 것과 명예를 위해 싸우는 것과 이상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제일 끝에 말하는 사람이 제일 강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위하여 싸울 때 우리는 가장 강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고귀한 가치 있고 또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인격과 정신과 영을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멘하고 소원으로 삼고 기꺼이 세상의 것들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4장에도 이렇게 아까 골로새서 3장에서 봤던 그런 대조가 에베소서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에베소서 4장 17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너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무엇을 대조하고 있죠? 예수 믿기 전의 생활과 예수 믿은 후의 존재의 다름을 비교하고 있는데 이 비교의 재미는 앞에 있었던 것은 다 헛되다 더럽다 그리고 이제 예수 믿고 나면 거룩하다 거룩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조는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것이 구원을 얻지 못하면 어떤 존재일 수밖에 없고 예수를 믿어 신앙가운데 산다는 것이 어떻게 고급한 것이냐를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이제 대조시키는 것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옛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똑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목표하고 지향하고 약속한 것들이요.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묶여있습니다. 연합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개인의 생각 속에 삶의 모든 정황 속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약속들과 가르침들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의 영혼에 발언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켜나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도 남은 강의에 의해서 다룰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고야말 것인 것과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많다는 것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사실은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일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나아가고 있다는 차원에서 이해를 못하고 실패로만 인식을 하면 절망밖에 남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절망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경험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 그런 경험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은 승리해서가 아니라 싸우는 것을 포기해서 그렇습니다. 가계부쓰기를 포기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을 나중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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