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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목회자의 길 요21:15~18

by 【고동엽】 2021. 12. 1.

▲도입

오늘 아침 조반을 먹은 우리에게 (목회자 세미나 아침 시간)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3년 동안 제자양육을 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베드로와 야고보와 12제자를 택하시고

예수님께서 자연을 교과서 삼으시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약의 말씀을 교과서로 삼으셔서

3년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3년 교육을 받는 것이, 아마 그런 과정쯤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1등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이 베드로이고,

퇴학 맞은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의 신학교3년 기간 동안에, 특별하게 졸업했고, 특별하게 쓰임 받은 사람이 베드로인데

오늘 이 아침에, 베드로에 대해서 몇 가지를 배움으로써

목회에 도움을 얻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3번 질문을 하십니다.

1) ‘네가 나를 따르라’

마4:18절에 보면, 갈릴리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도록 고기를 잡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나를 따르라’하실 때,

그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2)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어느 날, 가이사랴 빌리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누구로 믿느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그가 땅에 살아계시는 동안 질문이었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조반을 먹이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전에 있는 질문과는 또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목회를 위임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또는 ‘네가 나를 누구로 믿느냐?’

이 질문은, 제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를 목회자로 위임하시면서 던지신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물으시는 질문은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네가 나를 누구로 믿느냐?’ 이런 질문은 별로 큰 관련이 없습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주님이 오늘 던지시는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목회자에게 던지시는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습니다. 목회자 세미나에 모이신 여러분,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권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교회당을 지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설교하는 것,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열심히 목회하면서 교회를 크게 하는 것,

이것은 자기 사업이지, 주님의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시간에도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자신있게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주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주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주님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좋아하는 것’과 ‘주님을 좋아하는 것’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좋아하면서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오해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좋아하는 것은, 인격적인 것이고

‘주님의 일’을 좋아하는 것은, 비인격적인 자기 사업일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주님의 일’을 좋아할지언정

‘주님’ 자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성경에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 종종 가셨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부엌에서 ‘주님의 일’을 좋아하고, 분주하게 왔다갔다 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의 일’에 분주하다가, 열을 내고 분을 내었습니다.

왜냐면 일을 더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동생이 어디 있나 찾아보니, 예수님과 마주 앉아서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과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을 보고서, 열 받았습니다.

 

‘예수님, 내 동생에게 명하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나, 한 가지만으로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다.’

 

여기서 신앙의 중대한 원리가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본처 신자’가 있고, ‘첩 신자’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가정할 때

본처는 마리아이고, 첩은 마르다입니다.

 

첩은, ‘주님의 일’을 좋아합니다. 그 ‘일’ 때문에 미치고,

주님으로부터 뭔가 얻어먹으려고만 하고, 주님에게서 뭔가 얻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도 거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부, 본처’는 예수님 자체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교제의 행복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마리아는, 역사에 길이 남는, 주님을 사랑했던 위대한 한 여종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내가 과연 예수님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라고 매일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 미친 사람들은, 항상 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제직회, 당회에서 분내는 사람들을 봅니다.

 

교회에서 왜 분을 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의 일만 가지고 열을 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좋아하면 되지, 일 때문에 열까지 낼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교인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에

제직회나 당회에서 열 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별세의 신앙’을 집중 가르쳤으므로, 다 ‘죽은 자’가 되어서

교회가 조용해져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그 중에 본처가 있고, 첩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본처가 아니라 첩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네가 내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었다마는,

나는 너를 모른다. 왜냐면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는 나를 모르고 일만 한 사람이다.’

 

오늘날 일에 미친 사람들은, 정신 차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의 관점에서 보자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무슨 ‘일’을 우리에게 더 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창조하실 때, 만약

‘일꾼’으로 만드셨다면, 얼마나 비인격적인 얘기입니까?

 

여러분이 결혼하실 때, 만약에 아내를 일 시켜서 덕을 보려고 결혼한다면

얼마나 비인격적인 노예 같은 사람을 얻는 것이 되지요.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것이고, 행복해지려고 결혼하는 것이지,

배우자 한 사람 데려와서, 일을 시켜서

거기서 뭔가 이득을 보려고 하는 결혼이라면.. 참으로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완전히 ‘삯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 ‘너는 내 일이나 죽도록 해라’

그러면 나는 예수님을 안 믿을 겁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도록 부르시고

‘종아, 너는 나 때문에 행복하게 살아라’ .. 이게 정상입니다.

 

‘나를 위해 일 한다고 열 받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이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주님이 좋고, 그런 절대적인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이 행복하고

그런 주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보람되고 행복한 순간을 느낍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주님만 사랑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주님 사랑해요♪

 

▲이런 주님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요. 저는 주님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왜요?

주님이 저를, 천하보다도 더 소중하게 사랑해주시고

저를 일꾼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주시는 주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회 자체가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나의 일을 하겠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귀한 것은, 교인들을 좋아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교인들이 좋아집니다.

오늘 아침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치라’

 

우리 각자 양심의 소리를 들어보십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주님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삯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녕 목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행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행복한 예수가, 귀합니다.

 

복음은 ‘복된 소식’입니다.

복된 소식은 다른 게 아니라, 행복을 주는 소식이란 뜻입니다.

행복한 예수를 믿으라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 세미나 마치면, 필리핀으로 떠납니다.

현지인 교역자들을 모아놓고, 한 주간동안 세미나를 인도할 예정입니다.

 

제가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입만 열면 이 좋은 복된 소식을 전하니

그것도 비행기까지 타고 다니면서

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요, 내게 행복인가’

 

이 자리에 모이신 목사님들, 사모님들

예수님으로 인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뭐 일하라고 일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행복하라고, 구원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목회가 됩니다.

 

▲목회가 다른 게 아닙니다.

교인들 행복하게 살라고,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닙니까.

 

구원이란 게 다른 게 아닙니다.

구원 받아서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아직 구원 못 받은 사람입니다.

천국도 행복한 곳입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거기는 천국이 아닙니다.

 

왜 예배드립니까?

행복하라고 예배드리는 것이지, 그냥 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만큼 목회자는 교인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한 시간 예배드리고 나서, 교인들이 행복하게 되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행복할 수 없다면, 뭣 때문에 예배드리겠어요?

무엇 때문에 설교하겠습니까?

 

목회는 교인들을 복음으로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을 믿는 사람은, 환경에 관계 없이 주님으로 인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인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은

사랑하는 자에게만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로 행복을 얻고

‘예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예수에게서 괴로움을 얻어서, 분을 냅니다.

일 때문에, 예수를 괴롭게 믿습니다.

 

행복하진 사람은, 그 행복 때문에 최상의 일을 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나중에 안 나옵니다.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나 마리아는 옥합을 깨트려, 복음이 전파되는 곳 마다 기념할만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 때문에 미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생명이요, 나의 행복이요, 나의 전부’

 

이들은 사랑으로 미치고 뛰어 달리다가 주께서 부르시는 날

‘나는 주께로 돌아가리다’

 

그런 목회자의 고백 속에서 살면,

한 없이 목회가 즐겁고, 행복하게 됩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스스로 3가지를 물어보면 됩니다.

 

-목회가 쉬운가?

-목회가 귀한가?

-목회가 행복한가?

 

이 세 가지 질문에 ‘아멘’하고 대답이 나오면,

소명 받은 자가 확실합니다.

 

소명이 하늘로부터 온 소명이 있고, 자기가 생산한 소명이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체 생산한 소명입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하리라’

그것 갖고는 안 됩니다.

 

진짜 소명을 받은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소명을 받은 자입니다.

나머지는 일은 열심히 하지만, 진짜 소명이 아니라

일 때문에, 자기가 만든(생산한) 소명입니다.

 

▲1. 사랑하면, 목회가 쉽습니다.

주님은 ‘일 때문에’ 우리를 부르지(소명) 않았습니다.

‘네가 나 때문에 행복하라. 사랑으로 행복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그 일 자체가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일 자체가 쉽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가 쉽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목회가 힘듭니까?’

그렇다면 그는 아직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목회는 쉽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녀 양육이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부부는, 같이 살기가 쉽습니다. 편합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자는, 힘듭니다.

목회도, 가정도, 자녀양육도.. 너무 힘듭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목회는, 무겁고 괴로운 길입니다.

 

▲2. 사랑하기 때문에, 목회는 귀합니다. 즉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주님도 귀합니다. 목회도 세상에 가장 가치 있는 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것이 목회이고, 한 영혼 살리는 일로 여겨집니다.

돈을 많이/작게 버는 일에 관계없이, 스스로 자기 일을 아주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1년 쯤 지나서

신학교 채플에 와서 설교하라고 불렀습니다.

후배들에게, 제가 시골교회 전도사의 경험을 간증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시골교회 전도사로서의 흥분을 간증하고서

신학교 전체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을 느꼈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꽃 한 송이를 붙들고 입을 맞추면서

'꽃아, 간밤에 편히 피었구나.'

이제 땅에 엎드려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너무너무 그 땅이 사랑스럽고 좋아서요.

 

그래서 신학교에 가서, 제가 신학생 후배들에게

세 마디를 했습니다.

-목회는 쉽습니다.

-목회는 귀한 일입니다.

-목회는 행복합니다.

 

‘아, 이런 사람 처음 봤습니다.

수없는 선배들이 다 왔다 갔지만,

이런 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보통 선배 목회자들이 와서 하는 말은

‘목회는 사례비 오천원이다.

목회는 힘든 것이다.’

채플시간에 이런 말만 해 주고 갔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역이 행복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목회가 쉽고

그리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온통 감격 속에서

감격, 눈물뿐입니다.

 

길을 걸어가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묻히는 것처럼

발걸음마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복음화, 이 땅의 복음화’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조그마한 시골을 온통 돌면서 ‘복음화, 복음화’ 외치고 다녔습니다.

일부러 그렇게는 못하지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그 땅을 밟고 다녀도, 다닌 것 자체가 온통 행복이었습니다.

가난해도 좋았습니다.

멸시를 받아도 문제 없었습니다.

왜냐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요.

 

사랑은,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제 아내에게서 모든 아름다움을 다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것을 얻어야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목회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가서 전도하라. 가서 교회 부흥시켜라’

그 말씀하시기 전에, 한 마디를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죽으심으로써 자기 양을 먹이셨어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 피와 살로써

자기 양을 먹이신 것이지요.

 

죽지 않고 먹일 수는 없습니다.

설교로 먹이는 게 아닙니다. 죽어서 피와 살로, 저들 속에 들어갔어요.

 

성경에 양은 신비한 비밀을 가진 동물입니다.

양은 자기 몸에 무기가 없습니다.

잡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을 죽이지 못합니다.

물어 뜯길지언정, 물지 못합니다.

쫓길지언정, 그는 쫓지 못합니다.

밟힐지언정, 남을 밟지 못합니다.

양은 들어가는 곳마다, 죽어라고 만들어진 양입니다.

 

여러분은, 이 비밀을 아셔야 합니다.

양은 살아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죽으라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떻게요?

죽어서 저들 속에 들어가서, 자기 살을 양식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네 몸둥이로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양은 잡혀 죽어라. 이리 떼에게 잡혀 죽어라.

그리고 죽어서 네 양의 체질로, 이리 떼를 바꾸어라.’

 

이것이 바로 순교자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친히 찢기고 상해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양식과 음료가 되셨고,

그래서 우리의 체질을 바꾸어서, 우리도 그렇게 살게(십자가에서 죽게)하셨습니다.

 

목회자는, 살아서 설교하는 게 아니라

‘너는 죽으러 들어가라. 네 교인속으로 죽으러 들어가라.

그리고 그 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라.’

 

저는 강단에 섰을 때마다, 교인들을 보면서

‘내가 죽어 저들 속으로 들어가야지.

그래서 저들에게 내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지’

 

‘이것이 바로 하늘이 나를 세운 목적이니

이대로 살아야지..’

 

어느 지역사회에 들어가면,

그 지역사회에서 내가 죽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이 지역사회에 들어가야지..

그래서 내가 밟은 땅이, 내가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영성이 살아남아야

이게 바로 순교자의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회는, 살아서는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죽어서까지 목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목회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등은 죽어서까지 계속 목회하고 있습니다.

다른 부흥사들은, 자기 살아서 설교한 그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죽어서도 목회가 계속되는 사람,

지역사회에서 죽어서도 목회가 계속되는 사람은

순교자로 산 사람인데

자기를 죽여서, 양을 먹인 사람입니다.

 

설교는, 교인들에게 말로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를 죽여서, 제물 삼아서, 교인을 먹이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해서 7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밤마다 무릎 꿇고,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7년 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길러 가는데, 어느 날 나에게 오더니 ‘아빠!’

 

이 어린아이가 기어서 오더니 나에게 ‘아빠’라 불렀습니다.

‘오냐, 내가 네 아비다’

 

나는 너무너무 행복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너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부둥켜안고, 너무 좋아서 기뻐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종아, 이 아이가 너를 아빠라 부르니, 그렇게 좋니?’

‘예, 미치도록 좋습니다.’

 

‘하늘에 계신 나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를 때,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니’

 

그래서 가슴이 설레는 음성으로

‘하나님 아버지’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저는 아내를 껴안고 너무너무 좋아서

젊은 날에 기뻐할 때, 성령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네 아내가 그렇게 좋으니?’

‘네, 미치도록 좋습니다.’

‘내가 너희를 신부삼고, 지금 껴안고 있노라.

큰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껴안고 있는데, 네가 그 행복을 맛보고 있니?’

 

‘네,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랑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 삶의 현장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끼며 행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자기 양을 못 먹이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미친 목사가 많습니다.

바둑에 미친 목사, 사우나에 미친 목사, 부동산에 미친 목사.

 

어떤 목사는, 닭 기르다가 망한 사람도 있습니다.

닭만 기르다가, 눈 감으면 계란만 보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먹이는데, 어머니는 먹이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시킵니다.

어머니의 젖은, 그냥 나오는게 아닙니다.

어머니의 먹는 것 전체가 젖으로 나옵니다.

 

목회자는, 자기 속에 들어가는 것이, 교인들에게 젖으로 나옵니다.

자기 속에 복음으로만 먹고 있어야, 교인들에게 복된 젖으로 나오지

자기가 평소에 쓸데없는 것을 먹으면, 먹은 게 그대로 젖으로 다 나옵니다.

그래서 질 안 좋은 젖을 먹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먹는 것, 생각하는 것, 전체가 다

교인들에게 신령한 젖이 되게 하기 위해서

생각도 깨끗해야 합니다.

 

TV도 함부로 봐서는 안 됩니다.

뉴스도, 좀 보다가, 살인극이 나오면 눈을 감아야 합니다.

왜 그것을 깊이 보면, 나중에 그게 젖에 섞여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음란한 연속극 같은 것은, 의식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그걸 눈으로 보게 되면, 며칠 동안 신령한 것이 방해 받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젖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부터 목회자는 조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되새김질 하는 것과

그리고 하늘을 나르는 것과

물속의 고기까지도 구별해서, 먹을 것과 먹지 말 것의 규례를 정해 주셨습니다.

 

그 구분은 ‘상향성’에 있었습니다.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 있는 고기는 물에 뜨는 것이고,

뱀장어나 조개는 땅 속으로 내려가는 하향성입니다.

 

새도 공중에 나는 새가 있고, 땅에 기어다니는 새가 있습니다.

기어다니는 새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팔딱팔딱 뛰는 것, 상향성인 메뚜기는 먹어도 되고,

 

되새김질 하는 것은, 구별해서 먹는 것입니다.

발에 굽이 있다는 것도,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굽이 없는 것은, 구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특별히 목회자는 신령한 젖을 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상향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속한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길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제가 처음에 결혼해서, 부부간에 잠도 잘 자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가서 늘 철야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아내는, 4번이나 짐을 싸서 집을 나갔습니다.

 

뭐 시골교회에서 먹을 게 있으면, 사과 가져오면

‘이것은 목회자가 먹을 게 아니고, 가난한 자, 병든 자가 먹어야지’

하면서 놔두었다가 나눠주었습니다.

 

이불 한 채가 생기면

‘이것은 우리가 덮고 자기에는 너무 양심에 꺼림칙해.

주위에 추위에 떠는 사람이 덮어야지’ 하고 갖다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밤에는 잠도 안 자고, 또 이제 따로 가서 성경읽고 기도하고..

그러니 아내는, 4번이나 짐을 싸서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가서 아내를 데리고 왔습니다.

교인들이 데리고 오면서 ‘사모님, 사모님. 나라도 목사님이니까 존경하지,

남편이라면 같이 안 살겠네요!’ 이렇게 위로하면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저를 감동을 주셨습니다.

‘종아, 네가 신령하기를 원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신령한 것은, 아내를 사랑하는데 있느니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네 아내를 사랑하라.

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교인을 사랑하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네 갈비뼈에서 나온 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교인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진짜 네 아내를 사랑하라.’

 

그래서 제가 목회의 원리를 알았습니다.

목회자는 사모를 사랑함으로써 목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목회자는, 목회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주님은 우리 신랑이시고, 우리는 신부인데

그 원리가 바로, 목사와 사모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 관계가 바로 될 때,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바로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할 게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만이, 순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전국 목회자 세미나 귀한 시간, 베드로에게 주신 최고로 사랑의 선물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순교자를 만드십니다.

순교자를 만드시는 사람은, 지극히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십니다.

그런데 순교자는 영원한 목회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목회하시는 것처럼

위대한 목회자, 위대한 목회는.. 순교자의 목회입니다.

이것은 감옥과 죽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오늘 귀한 시간에 은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귀한 종들을 여기로 부르시고, 이토록 큰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도우셨사오니,

주님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부어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주의 종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내리시고,

신령한 능력을 주시고, 신령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의 놀라우신 평화, 주의 놀라우신 영광, 주의 놀라우신 하늘의 신비로

채워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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