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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정수 13장 18세기 칼빈주의적 성공회와 독립교회들

by 【고동엽】 2021. 12. 1.
개혁신학의 정수 13장 18세기 칼빈주의적 성공회와 독립교회들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종교 개혁 이후로 칼빈주의는 영국에서 널리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며 절대군주와의 대립보다는 타협하여 성공회에 머물러 있으면서 칼빈주의 사상에 입각한 설교와 성례를 시행하던 지도자와 제도를 완전히 거부하는 개별적인 독립파 칼빈주의자들이 있었다.


타협파 : 로버트 레이톤
17세기 후반에 스코틀랜드에서 온건한 개혁주의자로 명성을 떨쳤던 사람은 로버트 레이톤이다,. 그는 영국인들의 교회에서 설교자로 안수를 받았으나 얼마 후 청교도의 개혁주의 예배관이 옳다고 판단하여 영국 성굥회 담임목사직을 사퇴하고 영국으로 돌아가서 오직 설교와 목회에만 전념하였다.
1660년 왕정이 복고되자, 온건파에 속했던 레이톤은 영국 성공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교회 정치 제도에 관하여, 각 교회는 지역 노회와 총회에 속하되 대표자로서 사회를 맡고 행정을 치리하는 대표적인 주교가 한 명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교회법에 입각하여 재판을 할 때는 주교 혼자서가 아니라 모든 노회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다수가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절충 형태의 교회 정치 제도를 주장한 것이다.
1670년 글래스고우 대학교 대주교가 된 레이톤은 그 학교의 신학 교수로 부임한 길버트 버넷의 도움으로 장로교회와 성공회 지도자들의 타협을 주도하였다.


독립 교회파 : 왓츠와 도드리지
청교도 시대이후 (1570-1700), 주로 장로교회 내에 퍼져 있던 칼빈주의는 다른 사상의 유입으로 타격을 입고 급격히 쇠퇴한다.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영국 칼빈주의는 침레교회와 독립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모두 개혁신학의 신학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을 이어갔다. 당시에 큰 영향을 미친 독립교외 목사로는 아이작 왓츠를 손꼽게 된다.
왓츠가 편집하고 출판한 시편 찬송집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한국 찬송가에는 무려 14편이 담겨있다. 그러나 왓츠는 ‘낮은 칼빈주의자’라고 해야 한다. 그는 어떤 교리적인 내용의 의미를 확장하거나 설명을 추가했는데, 이는 칼빈주의자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를 들면,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삼위일체를 믿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정통신학과 기독교 교리의 근본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으로 당시의 아리우스 주의와 소시니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선존재주의’라는 다소 생소한 교리를 주장하였다. 성육신하기 이전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본성과 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육신하기 전부터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매우 비성경적인 기독론이다.
18세기에 칼빈주즤적인 독립교회의 또 다른 지도자 필립 도드리지는 여러 가지로 왓츠와 같은 면이 있다. 도드리지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찬송시를 남겼도 몸이 아파서 고생을 하였다. 도드리지는 영국 캐슬 힐에 있는 독립교회인 노스햄튼에서 1730년부터 1751년까지 21년간 목회를 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책을 저술하여 당대에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였고, 설교집도 펴냈다. 특히 자신의 자전적인 기록이 있는 ‘영혼에서 종교의 기원과 발전’은 1745년 처음 발표된 매우 중요한 저술로서 지금은 고전이 되었다.
도드리지는 노스햄튼의 신학교 학장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다. 교회간의 조화와 화목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의 약점이 되었다. 교리적 신학들을 강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학생들은 자유로운 해석으로 기울게 되었고 입학할 때 복음적인 칼빈주의자였으나, 수업을 하고 졸업을 하게 될 무렵에는 아리우스주의자나 이신론자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토플레디
유럽 전역에서 18세기 칼빈주의자들의 활약상은 현저하게 축소되었지만, 극히 예외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있다. 토플레디는 원래 알미니안이었으나, 나중에 열렬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토플레디는 알미니안주의에 기운 성공회를 떠나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철저히 강조하는 신학을 갖게 되었다. 왓츠나 도드리지처럼 많은 찬송시를 작사하여 감동을 주었다. 토틀레디는 존 길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철저하게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는 ‘하이퍼 칼빈주의자’의 길을 선택하였다. 예정, 섭리, 인간의 전적 타락, 성도의 견인 등 ‘돌트 신경’ 작성자들이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맞서서 주장하던 주제들을 확신하였고, 그의 이런 신학적 견해가 여러 저술에 담겨있다. 그는 알미니안주의자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을 펠라기안들이나, 로마 가톨릭이나, 소시니언들이나, 다른 이단들과 같이 취급하지 않았다.
토플레디는 영국 칼빈주의 부활을 염원하였다. 그는 영국 종교 개혁자들이 칼빈주의자였고, 어거스틴의 신학이 이와 같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신학이므로 이런 쵝 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뉴톤
뉴톤은 영국 성공회에 있던 칼빈주의자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회심을 체험하였다. 그리도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읽고 크게 뉘우쳤다. 그의 찬송시는 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불가항력적 은총을 담고있다.


조지 휫필드와 복음적인 각성 운동
18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꼽히는 인물이 조지 휫필드이다. 찰스 스펄전이 ‘대중 설교의 왕’이라고 추앙한 휫필드는 성공회 소속이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 휫필드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는 동안 찰스 웨슬레와 요한 웨슬레를 만났다. 이 세사람은 ‘성신클럽’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방법론자’혹은 ‘감리교회’라는 새로운 현태의 모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들 세 사람이 완전히 회심을 체험한 것은 아니었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이들은 각기 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칼빈주의자가 되었고, 웨슬레 형제들은 알미니안주의자가 되었는데, 특히 요한 웨슬레는 알미니우스 이수로 가장 탁월한 알미니안주의자가 되었다.
휫필드는 주로 전도자로서 여러 지역을 순회하였다. 영국에서 ‘복음적인 각성’이라고 알려진 전도 집회는, 미국에서는 ‘위대한 각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칼빈주의자였다. 1739년에서 1742년 사이가 영국 복음 운동의 정점에 해당하는데, 이시시에 휫필드는 웨슬레와 가깝게 동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휫필드는 당대 칼빈주의 설교자들인 호웰 해리스, 다니엘 로우랜드, 윌리엄 월리엄즈 등과 친분을 맺고 함께 ‘칼빈주의적 감리교회’를 결성하였다.
참된 칼빈주의자들은 복음 전도를 반대하지 않는다. 휫필드나 에드워드는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스펄전 목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다양한 방법론과 비교할 때, 이들이 전개한 운동이야말로 참된 복음 전도였다. 그리고 영국에서 복음 운동이 화발하게 일어나던 시대는 하이퍼 칼빈주의가 절정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에드워즈와 휫필드가 복음 전도를 강조함으로써, 후대의 칼빈주의가 하이퍼 칼빈주의가 남긴 죽어 버린 영향력을 다시 한번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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