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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의 정수 제 10장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와 신 율법주의

by 【고동엽】 2021. 12. 1.
개혁신학의 정수 제 10장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와 신 율법주의


반율법주의자(Antinomian)들은 칼빈주의 전통 신앙의 절정기에 퍼져 나갔지만 전혀 다른 형태의 신앙과 분위기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칼빈주의 신앙의 객관적인 요소와 외적인 요인들을 완전히 축소시키고 신앙생활에서 개개인의 주관에 따른 내적인 요소들과 성령의 사역과 같은 내적인 교감만을 강조하였다. 이와 정반대로 다른 극단에 속한 그룹은 ‘신율법주의’를 표방하였다. 우리는 반율법주의자도 신율법주의자로 치우쳐서는 안 되므로, 여기서 역사적, 신학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반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한 칭의와 믿음
‘반율법주의’라는 단어에 담겨 있는 본래 의미는 ‘율법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견해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은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실제적으로 적용된다면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을 허용하게 되어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이들의 견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잘못 해석함으로 발생한 것이다. 칼빈주의적인 반율법주의자들은 전통적이고 표준적으로 공적인 회의에서 결의한 개혁주의의 교리적 문서들을 반대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도덕적인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들이 기존의 생각을 극력하게 반대한 것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높이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그만큼 약화시킨 것이다.
토비아스 크리스프와 존이튼, 존 살트머쉬등은 반율법주의 운동을 전개한 대표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은 방탕하게 삶을 살지는 않았다. 이들이 강조한 핵심인 자유로운 은혜에만 극단적으로 집착하였을 뿐인 것이다.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자들은 모두 ‘타락 전 선택설’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구속 언약과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은혜언약을 동일하게 보았다. 그래서 복음이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언약의 복사판에 불과하므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앗다. 그리고 믿음은 언약의 조건이 아니라 언약의 축복 가운데 하나라고 보았다. 그들은 믿음을 갖기 이전에 영원한 칭의를 갖는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갖기 이전에 의롭게 하신다라고 본 것이다. 믿음이란 단지 하나님께 값없이 인정을 받은 자가 그런 상태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이들의 견해는 칭의와 믿음과의 관계성에 대한 규정들 즉 구원의 동시성, 즉각성, 영원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이루어 졌으나 ‘아직’ 완전하지 못한 긴장 속에서 살아야하는 현세 삶에 대하여 잘못된 인식에 매여 있는 것이다. 칭의와 믿음과 양자됨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와 영화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 이미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그 표현과 열매는 믿음의 진보에 의해 차차 나타나는 것이다.
반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율법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정통 신학에 동조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과도하게 균형을 잃고 있고, 특히 극단적인 용어를 남용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반율법주의자들이 항상 안전 장치로 내세우는 주장은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죄에서 성도들을 보호하신 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율법주의자들은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는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극히 작은 공간만을 인정한다. 그들은 율법의 기능을 오직 사람에게 죄를 알도록 하는 것에 국한 시켜 버린다. 거룩함을 증진 시켜 주는 것은 성도가 이미 죄를 용서 받았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영국 반율법주의 그룹들
영국이나 미국에서 당시에 태동한 여러 반율법적인 운동 중 대다수는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성경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배우지 못한 채 특정한 가르침만을 중시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이었다.
첫째로 ‘가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신비적 범신론을 가르쳤는데 초월적인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은 사람과 아주 밀접하게 하나로 결합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그룹은 정치적 무정부주의자와 유사한 그룹인 ‘다서 번째 왕국의 사람들’ 이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천년왕국이 매우 가까이에 임박했다고 믿으면서 재림만을 최고로 신앙하는 자들로 과격한 성격을 가진 그룹이었다.
셋째 그룹은 감정적으로 매우 큰 소리를 지르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고함치는 자들’이라고 불리었다. 이들은 율법 폐지를 표방하면서 사실상 대부분이 방탕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내적인 빛’을 받는다고 주장햇는데, 이들도 범신론의 한 유파라고 볼 수 있다.
넷재 그룹은 정치적인 사회주의자들로서 ‘반항하는 자들’, ‘로이를 따르는 자들’, ‘구도자’ 들이다.
퀘이커파 역시 이런 부류들이 성행할 때 시작하였다. 물론 퀘이커파는 반율법주의자들은 아니었지만, 신비적인 범신론자들과 신학적으로 매우 유사한 그룹이었다.


뉴잉글랜드 반율법주의자 안느 허친슨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발생한 첫 신학 논쟁은 바로 반율법주의자들과 칼빈주의자들의 논쟁이었다. 처음 이민을 온 거의 대부분의 개척자들은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지도하던 목사들도 거의 다 칼빈주의자들이엇다. 그러나 칼빈 주의 정통 신앙에 대한 이견이 제시되면서 긴장을 유발하는 이단 사상과 논쟁이 시작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 발생한 신학논쟁은 한 부인읜 성경공부에서 나오는 잘못된 가르침을 교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안느 허친슨은 목사도 아니었고 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집에서 여성들만의 성경 공부를 인도하였던 여성 지도자들 중 함 사람이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균형 잡힌 안목을 기르지 못한 채 자신의 영감과 순간적인 판단을 강조하였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허친슨 부인은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이 믿음 보다 앞서고, 진정한 주님과의 연합이 믿음보다 더 앞선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은 동시적이요, 다면체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부분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둘째로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성령의 내적 증거하심과 성화의 외적 증거가 있다는 데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부인하였다. 허친슨 부인은 구원의 확신은 오직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주어지는데 이 성령의 내적 증거를 모두 주관적으로 판단하도록 만들었다.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받는 수단이 되는 성경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신비주의적으로 참된 목사들과 거짓 종들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셨다고 믿었는데 이것은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오직 성령만이 필요할 뿐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면서 더 이상 율법이라는 구속력 있는 법조항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성령만 필요할 뿐 율법이나 성경은 필요 없다고 가르쳤다.


반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 존 코튼과 토마스 후커
뉴잉글랜드 반율법주의와의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신학자는 존 코튼이다. 존 코튼은 하나님의 은총에 성화나 회개를 첨가하여 의무 조항으로 만드는 것을 주장한 신율법주의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종교 개혁의 기초적인 신학을 그대로 주장하고 인간의 순종을 조건화하지 않았고 오직 성경에만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값없는 희생이 칭의의 증거라고 보았다. 그러나 코트도 역시 성화의 증거로서 온전한 순종을 옹호하였다. 평신도 였던 허친슨 부인이 율법의 이해에서 실패한 데는 뉴잉글랜드 총회가 조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를 지도했어야 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그녀의 견해를 지지하는 신학자나 목회자가 없었을 정도로 그녀의 주장이 급진적이었음도 보여준다. 그녀를 제명하는데 앞장섰던 두 명의 신학자들은 당시에 영향력이 매우 컸던 칼빈주의자로 토마스 후커와 토마스 쉐퍼드가 있다.
토마스 쉐퍼드는 ‘예비주의’라고 아려진 체험주의를 미국에서 실현한 인물이었다. 그는 칭의를 얻기 이전에 성화의 표시들을 통해서 증거를 확보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단순하게 구원 얻는 믿음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통회자복, 회개 등을 강조한다. 예비주의는 정통 개혁교회에서 강조한 것을 넘어서서 지나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허친슨 부인의 반율법주의에 대항하려는 반작용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신율법주의
신율법주의는 반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 것이므로 상호 작용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반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미 청교도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새뮤얼 러더포드는 칼빈주의적인 반율법주의자들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1690년에서 1700년까지 영국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진 칼빈주의적 신율법주의의 논쟁은 영국 칼빈주의 신학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17세기 말의 ‘신율법주의 논쟁’에서 대부 역할을 한 신학자는 리차드 벡스터 였다. 속죄의 범위에 대해서는 모와즈 아미로 보다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교리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에 대한 의심이 들 정도로 ‘낮은’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벡스터는 자신의 신학적 위치를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중간쯤에 놓았을 것으로 보인다.
벡스터의 후계자로 큰 활약을 한 다니엘 윌리엄스가 반율법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복음-진리’는 신율법주의자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러나 신율법주의를 반대한다고 해서 모두 반율법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아이작 차운시는 반율법주의읜 선봉에 섰고 로버트 트레일과 새뮤얼 크리스프가 가세했고 온건한 칼빈주의자로 헤르만 윗시우스와 존 호웨도 측면으로 가담하였다.
신율법주의자들의 핵심은 예비주의자들과 같다. 그들은 기분족으로 하나님게서 구원의 조건들을 변경할 수 있다고 본다. 행위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아담은 행위 언약을 어겨서 실패했고 모든 후손들도 역시 실패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로운 율법을 제정하셨고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신율법주의자들은 칭의에 조건을 붙이고 점진적인 것이라고 풀이하고 선행의 결과로 연계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믿음, 회개, 선행이 의롭다 함을 얻는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는 교리를 세운 것이다. 이것은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의 믿음으로 인한 즉각적이고 외부적인 칭의론과는 다른 것이아.


표준 복음
164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 논쟁은 상당한 세월이 지나서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이 ‘표준 복음’ 이라는 새로운 신학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은 윌리엄 헌팅톤으로 계승되었다. 윌리엄 갓스비는 헌팅톤의 견해에 자신의 하이퍼 칼빈주의 사상을 결합시켰다. 이들은 복음을 율법이 아니라고 하다. 단지 성도들의 규칙이며 표준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행위 언약과 규칙이 있으나 은혜 언약이 대체될 때까지만 사용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을 묶는 기능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 신학은 근본적으로 정통 개혁주의 신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믿는 자들이 지켜야할 행위 언약으로써 율법은 폐기되었지만 실제 행동의 규칙으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믿는다.
율법이 저주를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표준복음’ 운동가들은 율법의 ‘제3용법’만을 인정하던 종겨 개혁자들의 주장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신자의 규범적 원칙으로서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만 반대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교휸적인 법칙으로서의 율법과 행위 언약과의 구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그들의 신학적인 혼란에 기인한 것이다.
칼빈주의적 반율법주의자들은 훗날에 결국 실천적 반율법주의자들이 출현하도록 문호를 개방했고, 불건전한 내성주의와 신비주의에 기초한 감정들이 사실상 주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객관적인 성령의 가르침보다는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인도하심’에 더 무게를 둔 것이다. 이들은 실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무기력한 소극성에 빠졌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하이퍼 칼빈주의’로 발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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