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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9편에 나타난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1)

by 【고동엽】 2021. 11. 30.
시편 89편에 나타난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1)




김회권 교수(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I. 서론
성경에서 다윗이 차지하는 역사적 신학적 비중은 막중하다. 그는 가나안 땅에 진입하여 변두리에 살던 12지파 부족 연맹체를 가나안 도시문명에 창조적으로 접목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사사 시대의 지리멸렬한 지파들간의 분열과 대결을 해소하고 통일왕정 시대를열었다. 그는 또한 가나안 주변 사방 대적들을 정복하거나 제압하여 이스라엘 12지파에게 할당된 도상(圖上) 영토(수 18장)를 실제적인 국토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사사 시대와 사울 시대까지 지방 지파들의 토호세력들에 의해 자행된 불의와 불법을 일소하여 사회적 양극화와 고통당하는 하층 민중들의 정의에 대한 목마름에 응답하는 정치를 펼쳤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후대 세대들은 한결같이 다윗의 이스라엘 통치를 공(미쉬파트)과 의(체데크)의 구현 과정이라고 말한다(삼하 8:15; 23:3-5[사 1:1-28]; 비교. 시 76, 89, 132편; 사 9, 11, 32장; 창 18:18-19). 그가 개인적으로 범한 죄악들을 담대하게 비판하고 고발한 역사가들과 예언자들이 다윗 통치를 공평과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실제로 다윗의 공과 의에 입각한 통치의 세목들이 성경에 자세히 묘사되거나 체계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그것의 윤곽들만 그려진다. 구체적으로 보면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 시편, 이사야 등의 메시야 예언들 등에서 다윗의 정치에 대한 이상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런 책들에서 다윗은 고유명사에서 일반명사로 점차적으로 승화되어 간다. 그는 공평과 정의의 화신으로 이스라엘 후세대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래서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는 종말에 오실 메시야의 표상을 구축할 때 다윗의 역사적 기억층에서 발굴된 여러 조각들을 활용하고 있다(특히 11:1-9). 후대의 구약성서 여러 책들이 다윗의 역사적 치적을 이상화한다면 예언서 일부 구절들과 신약성경은 다윗의 신학적 자산가치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시 32, 51편; 마 1:1-21; 롬 4장). 그는 하나님께서 맹세로 확정하신 다윗 언약의 수혜자요,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도 다함없이 영원한 하나님의 헤세드(인애와 계약적 의리)를 증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된다. 바울에게 다윗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되는 진리를 체득하고 체현한 신앙인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할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전사적 표상들로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다윗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인물이다. 시편 89편은 다윗의 신학적 유산과 정치적인 역능을 잘 결합시킨 서사시다.
흔히 국가적 애가 시편으로 분류되는 시편 89편은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의 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은 다윗 및 다윗 왕조 선택과 시온 선택이라는 두 개의 선택 전승으로 구성되어 있다(시편 76, 78, 132). 이스라엘 12지파를 통일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제안하였다가 오히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시겠다는 역제안을 받는다. 이 역제안 안에 바로 나단 신탁 혹은 다윗 언약이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 들어있다(삼하 7:11-16). 다윗 언약의 핵심은 다윗에게 한 집(왕조)을 세워주시되 영원히 존속하는 집(왕조)을 세워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비록 다윗의 후손 왕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채찍들과 막대기에 의하여 견책을 당하고 환난을 당할지언정, 다윗의 후손들이 계속 다윗의 위(位)를 차지하게 함으로써 왕조의 법통은 끊어지지 않게(참조. 사 7:1-9) 보존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이 다윗 언약은 여러 가지 신학적 역사적 정황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간청하는 애가의 구속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하고, 존망지추의 위기에 처한 다윗 왕조의 힘겨운 잔존을 보증하는 신적 언질로 기능하기도 한다(왕하 19:34; 사 37:35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사하리라”; 비교. 사 7:1-9). 후대의 어느 단계에서 이 다윗 왕조의 선택 전승은 다윗의 통치본거지인 시온 선택 전승과 결합하여 다윗 왕조의 공식적 정치신학의 두 기둥을 형성하게 된다.2)


이 논문의 목적은 시편 89편에 나타난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의 얼개와 그것의 성서신학적 의미를천착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이 글은 첫째, 사무엘하 7장을 중심으로 다윗 언약의 형성에 기여한 역사적 신학적 정황들을 논구할 것이다. 둘째,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의 배경이 되는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적 배경을 주목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논문은 다윗왕조의 정치신학 형성에 고대 근동의 창조신학의 이스라엘적 변용이 상당히 기여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셋째, 다윗 언약에서 설정된 왕의 역할(창조주의 지상 대리자)에 주목함으로써 왕정의 성서신학적 의의와 다윗 언약의 현실정치적 함의를 살펴 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윗 언약과 시내산 전승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도 아울러 살펴볼 것이다. 다윗 언약에 나타난 정치신학은 시내산 계약에 비해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쉽게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 언약의 인간적 당사자(왕 혹은 왕조)에게 도덕적 방종을 허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다윗 언약은 다윗 계열의 왕에게 야웨 하나님의 “창조 전쟁”(원시 혼돈의 바닷물 억제 전쟁)에 참여하여야 할 거의 무제한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 9, 11, 32장의 메시야 예언시가 다윗 언약의 정치신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했다고 보는 학자들(게르하르트 폰라드나 지미 잭 로버츠)은 다윗 언약의 정치신학이야말로 공평과 정의의 지상 확장을 위한 결정적인 역사적 자산이었고 본다.


II. 다윗 언약의 역사적 맥락
다윗 언약의 정치신학적 차원을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사무엘하 7:11b-16에 드러난 다윗 언약의 역사적 유래를 검토해야 한다. 이 왕조 관련 언약은 이스라엘의 권세와 영향력이 확장되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유래했을 것이라는 데 학자들의 광범위한 합의가 있어 왔다.3) 부족연맹체로부터 왕정으로의 급격한 이행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적 삶이 여러 가지 면에서 해체와 변동을 겪던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왕의 권위를 어떤 모종의 신적 질서 위에 구축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4) 사무엘하 5-8장은 다윗 언약의 형성기에 전개된 이런 역사적 신학적 정황을 보여준다. 파란만장한 투쟁의 세월을 거친 후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권좌에 오른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셔들이는 데 착수함으로써 사사 시대에 존재했던 부족연맹체의 언약과 그의 왕권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바로 이런 맥락 안에서 우리는 사무엘하 7장에 나타나는 다윗 언약이 등장한다.5)
사무엘하 5-8장은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다윗의 통치권을 다양하게 정당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6) 5장은 이스라엘을 위협할 사방 대적들의 마지막 대적인 블레셋을 정복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안식”을 가져다주는 야웨 하나님과 그의 지상 대리자 다윗의 군사적 업적을 칭송한다. 6장은 20년 이상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들이는 다윗의 치적을 말한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 중심이요 하나님 통치거점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다윗의 열심은 그의 통치에 종교적 영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7장은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는 다윗의 순진하고도 야심만만한 기획과 하나님께서 친히 건축하시려는 “집,” 곧 “영원한 왕조” 건축 프로젝트를 다룬다.
사무엘하 7장의 “영원한 왕조” 약속이 법궤의 예루살렘 입성과 야웨의 거소(dwelling place)로서 확정될 예루살렘의 지위에 대한 암시 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7) 우리는 사무엘서 저자가 나단 신탁을 법궤 이야기에 바로 뒤따라 나오도록 배치한 것은 다윗의 영도 아래 이제 막 출범한 다윗 왕정을 그 동안 이스라엘 지파들의 삶을 규정해 온 시내산 계약 구조들의 틀 안에 접목시키려는 의도를 반영한다고 본다.8) 여기서 법궤가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방식은 독자들에게 그 도시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음을 확신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9) 법궤의 도착 정황에 대한 사무엘서 6장의 묘사는 순식간에 법궤를, 예루살렘을 거점삼아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부각시킨다. 확실히 하나님 주도적인 법궤 귀환 이야기의 전개과정은 이 점을 강조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모셔온 하나님의 법궤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오히려 다윗에게 “집”(영원한 왕조)을 지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집을 지어주는” 행위는 고대 가나안 바알신화나 에누마 엘리쉬에 따르면 승리한 신에게 복종을 맹약하는 하등 신들의 자발적 공경 행위였다. 승리한 신만이 집(궁궐)에 들어가 “안식”할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제국 건설과 연전연승의 전쟁 승리가 혼돈과 파괴의 세력들을 제압하시고 질서정연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승리의 지상 구현이라고 생각하고(시 89:1-14) 있었다.10) 자신은 야웨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이 야웨의 승리에 동참한 것이라고 간주했다(89:25). 그래서 다윗이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의 신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승리하신 신적인 대왕으로 선포하고 ‘안식처’인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역제안을 하신 것이다. 다윗의 승리를 신적으로 경축하고 승인하고 그의 통치권을 보증하는 왕조를 세워주시겠다는 것이다. 야웨는 오히려 다윗에게 “승리한 신”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야웨는 여기서 성전에 거주하지 않고 다윗을 위하여 지어주신 집, 즉 영원한 왕조 안에 거주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사무엘하 7장은 다윗 왕권의 성격을 표명하고 나서 곧장 다윗 왕조 법통의 영속성에 관한 문제를제기한다.11) 다윗 왕조의 영원한 왕권은 13절 하반절에서 절대적인 용어로 지칭된다. 비록 다윗 계열의 왕들이 엄중한 징계를 받을지언정(14절), 이 새로운 언약적 약속들은(15절의 계약함의적인 용어 헤세드의 사용 주목) 철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거룩한 하나님의 선언이 다윗 제국을 급격하게 해체시키는 솔로몬의 통치와 더불어 시작되었던 역사적 현실들과 생생하게 대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무엘하 7장의 나단 신탁에는 다윗 당시의 원시적 형식의 다윗 언약과 후대에 추가된 다윗 언약의 요소가 섞여 있다고 주장한다.
다윗 시대의 모든 진정성있는 자료들을 보다 후대의 유다 왕정의 공식 이데올로기가 윤색했을 가능성을 고려해보면, 다윗 언약의 발생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는 과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윗 시대의 역사적 자료는 솔로몬과 그의 성전 토목공사와 성전건축과 함께 수집되고 편찬되었고, 또한 다윗 왕조에 관한 모든 산문 본문들을 편집했던 신명기 역사가(“안식”)에 의하여 승인되었던 후대(BC 7세기 이후)의 유다의 왕정 이데올로기(왕조의 영속성과 다윗의 중보자 역능 강조)에 의해 윤색되었다고 보는 학계의 대체적 합의는 설득력이 있다.12) 사무엘하 7장 1-7절, 11b절, 그리고 16절은 가장 오래된 층으로서 여기서는 야웨의 약속이 오로지 “다윗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런데 후대에 첨가된 구절들에서는 모든 관심이 나단 신탁의 적용범위를 다윗의 모든 후손 왕들까지 포함시키려는 데 있다. 또 하나의 다른 사상이 그 위대한 약속을 왕관을 쓴 자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으로 확장하는 22-24절에서 발견된다(참조. 사 55:3-4).13)
또 다른 한편 크로스는 사무엘하 7장은 두 개의 전(前)신명기적 신탁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1-17절에 포함되어 있는 나단의 “옛” 신탁이다. 둘째 11-16절에 있는 “영원한 칙령”(the eternal decree) 관련 언급이다. 그는 비록 첫째 것은 몇 가지 신명기적 특질을 드러내보일지라도, 둘 다 신명기 역사가보다 오래된 자료라고 본다. 세 번째 단락으로 약간의 옛 자료를 반영하고 있는 8-11a절은, 본래 위의 두 신탁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1-7절과 11-16절을 연결시키는 신명기 역사가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고 본다. 크로스는 18-29절의 다윗 기도문은 철저히 신명기 역사가적인 작업의 결과라고 본다.14) 그래서 이 본문이 철저한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확신하는 크로스는, 나단 신탁의 정경적인 배치(삼하 6-7장)는 다윗 언약을 보다 더 오래된 시내산 언약전승들과의 연속성을 확보하려는 신명기 역사가의 편집의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나단에 의해 중개된 다윗 언약은 가장 초기의 왕정신학을, 신적 주도권에 의하여 하사되고 신에 의해 부과된 기본조항들을 지키는 것에 지속 여부가 달려있는 시내산 언약의 전통적 언어와 연결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삼하 7장; 시 132).15) 우리는 크로스의 세부적인 자료비평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결론은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 사이에 발견되는 몇 가지 접촉점과 차이점들을 주목한다.16) 첫째, 나단 신탁은 야웨의 대변인인 예언자 나단에 의하여 전달되었기에 그의 신탁은 신적 권위를 대표할 수 있다. 이런 점은 모세에 의해 중개된 시내산 언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보다 더 오래된 전승과의 공통점으로 이해되었다. 둘째, 나단 신탁은 다윗의 지위와 권위의 원천이 오로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어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임을 분명히 밝힌다는 점에서 시내산 언약 전승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왕을 선택하고 임명하고 백성들 위에 세워 다스리도록 하시는 분은 오로지 야웨시기 때문이다(삼하 7:8b-12). 셋째, 하지만 시내산 언약과는 달리 다윗 언약에서는 인간의 실패가 그 다윗언약을 끝장내지는 못한다. 야웨는 다윗과 그의 왕조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야웨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언약은 파기될 수 없는 영원한 계약이다(삼하 7:15-16; 시 89:3-4, 20-21, 28-29, 33-37[MT 4-5, 21-22, 29-30, 34-38]). 그것은 야웨의 약속과 신실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시 89:3[영어성경 2절]). 이 언약의 무조건성은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넷째, 이보다 더 근본적인 양자의 차이점은 사무엘하 7장과는 달리 시편 89편의 다윗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한층 더 큰 이격(離隔)을 드러낸다. 그것은 다윗 언약의 무조건성을 야웨에 의해 지탱되는 우주적 질서와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다섯째, 다윗 왕국이 강력한 제국으로의 질적 변화를 거치는 동안 왕권과 왕실의 종교적 제의들이 가나안 왕정 제도의 자극 아래 한층 더 진화하는 동안, 다윗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더 멀어졌다. 야웨와 다윗 왕조 사이에 있는 새롭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계약의 이 요소들은 야웨와 다윗 사이에 있는 부자관계의 비유에 잘 포착되어 있다.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나는 그로부터 나의 계약적 사랑(헤세드)을 거두지 아니하리라”(삼하 7:14-15). 하지만 여기에 고대근동의 왕정 이데올로기에 나타났던 아버지-아들 유비가 다윗 언약에 사용되고 있을지라도(14절; 시 89:27-28; 시 2:7-8과 비교) 왕은 어디까지나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보통 사람들 위에 높이 들려진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17) 하나님과 필멸적인 유한자인 인간 왕의 관계를 부자 관계로 규정하는 이런 시도는 다윗 언약에 추가된 확실히 새로운 요소였다. 이 새로운 요소는 보다 더 오래된 부족연맹체를 제국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다윗과 솔로몬이 창조해낸 이스라엘을 규정하는 새로운 신화의 일부로 성서적 신앙 세계에 도입되었다. 솔로몬의 치세 동안에 이 “신적 아들”의 언어가 규범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고, 왕국 분열 후 유다는 야웨께서 당신 앞에 영원히 지상 대리자(fief)를 두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 계열의 왕들에게 맡겨졌다. 이 다윗 언약의 부자 관계 유비는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다 왕국과 다윗 왕실에 남아있었다.18)


III. 시편 89편에 나타난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


우가릿 신화 토판들은 구속 역사에 기반을 둔 이스라엘 종교는 신화에 기반을 둔 고대 근동의 이웃 나라들과의 종교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 모든 구약학계의 시도들이 무리한 노력이었음을 드러내었다.19) 프랭크 무어 크로스(F. M. Cross)는 구약 문헌에서 식별될 수 있는 구원사 이해 도식과 그것에 입각한 정치신학이 실상은 고대 가나안 사람들의 우주기원론적인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다수의 문헌적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는 세 가지 요소가 적어도 이스라엘의 구원사 이해와 정치신학이 가나안의 신화적 정치학으로부터 유래했을 가능성을 증시(證示)한다고 말한다. 첫째, 한 신적인 왕이 혼돈의 신과 전쟁을 벌인다. 둘째, 그 신적인 용사가 승리한다. 셋째, 그 신적인 용사가 왕으로 추대되고 하등 신들로부터 왕궁(성전)을 상납받는다.20) 크로스에 따르면, 이 도식은 일부 구약성경 본문들에서는 아주 순수하고 신화적인 형태로 나타나고(시 29, 89, 93편), 다른 구약성서 본문에서는(시 74, 77, 104편 혹은 사 51:9-11) 신화적 전승과 역사적 전승의 혼합양태로 나타난다. 크로스는 이 신화적인 요소와 역사적 요소의 혼합이 이스라엘 종교의 특성이라고 본다. 그는 “이스라엘에서는 신화와 역사는 강력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신화는 주로 역사적인 경험에 우주적 초월적 차원을 제공하는 데 봉사하며 아주 드물게는 역사 자체를 용해시켜 버리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라고 주장한다.21)
이 단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종교의 특징은 신화적인 요소와 역사적인 요소의 단호하고도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라는 크로스의 주장22) 을 염두에 두면서 시편 89편에 나타난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을 연구할 것이다. 우리는 다윗 언약이 신화와 역사의 긴장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신화란 어떤 상징들을 “과거의 무시간적인 시기에”23) 일어났던 무제한적 범위와 중요성을 갖는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마음 자세를 가리킨다(a cast of mind). “신화적 상징들”은 역사의 영고부침과 변동보다 더 “현실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종교를 급진적으로 비신화화(demythologized)된 역사라고 해석하는 입장은 어떤 입장이라도(참조. 구속적-역사학파) 신화적 상징 속에 내포된 위대한 영적 보화들을 포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24) 가장 순수한 형식의 신화는 태고적 사건들(primordial events)에 관심을 갖고 역사적 영고성쇠나 흥망부침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정적인 의미 구조들을 탐색한다. 크로스처럼 우리는 신화가 달리는 표현될 수 없는 진리를 식별하고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다윗 언약을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하 7장의 저자나 시편 89편의 시편 기자는 다윗 왕실과 시온에 있는 성전과 같은 어떤 기구들이 우주적 질서의 모사체로서 영원하다고 믿으려는 경향을 노정하고 있다. 특히 시편 89편에는 다윗 언약을 규정하기 위하여 신화적인 요소와 역사적 요소를 적절하게 병립시키고 상호 교직시키고 있다. 시편 89편에서 제시된 다윗 언약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차원을 넘는 신화적 사건에 착근하고 있다. 그래서 다윗 언약의 신화적 배경에 대한 연구는 성서적 세계관, 신화적 세계관의 역사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글개역(개정)판 성경 시 89:1-37(영어성경 또한 1-37절; MT 89:2-38)을 그 안에 병치되어 있는 신화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의 역동적 긴장 관계를 중심으로 주석할 것이다. 특히 다윗 언약을 우주적 창조신학적 맥락 안에 접목시킨 시편 89편에 언표된 다윗 왕조의 “시원적(始原的, protological) 성격”25) 을 주목하고자 한다(특히 시 89:25-29).


1. 시편 89편의 얼개와 메시지
많은 학자들은 시편 89편이 세 개의 다른 시들이 엉성하게 결합되어 구성된 시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왕위 등극을 생각나게 하는 우주기원론적인 야웨 찬가(a cosmogonic hymn), 다윗 왕가를 세우고 그것의 계속성을 무조건적으로 보증하는 제왕 신탁(a royal oracle), 그리고 현역 다윗 계열의 왕을 굴욕케 하고 하나님의 호의의 신뢰성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국가적 패배에 대한 애가26) 가 바로 세 시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워드(James M. Ward)는 이런 엉성한 편집 가설에 설득력있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1-4절에서 “이 시편의 본론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될 하나님의 왕권의 두 가지 양상들, 즉 하나님의 계약적 사랑과 신실성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토대”가 서두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시편 89편의 언어에 대한 자세한 분석에서 워드는 “26개의 의미심장한 용어들이 야웨 찬가 부분과 신탁 부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그것들 중 많은 것들은 둘 중 어느 하나에서 한번 이상 나타난다”고 말한다.27) 주제적으로 보자면 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어휘군의 특수한 경우 중 하나가 계약적 사랑(헤세드)과 진실(에무나, 에메트)이다. 야웨의 보좌와 다윗 보좌 둘 다 “계약적 사랑”(steadfast love, ḥesed)과 “신실성”(faithfulness, ’emeth/’emûnā) 위에 터한다. 이 점이 바로 다윗 왕조의 정치신학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헤세드와 에메트(에무나)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께서 원시 혼돈의 바다 괴물을 무찌르시고 그 승리에 기반하여 우주를 창조하시고,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윗의 보좌가 헤세드와 에메트 위에 기초하고 있는 증거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의 요동치 않는 왕조를 지탱할 것이라는 맹세와 제국을 이루어 원시혼돈 세력을 대표하는 주변 대적들을 제압함으로써 하나님의 승리를 지상에 구현한 사건이다. 야웨가 우주창조를 위한 전투에서 정복한 적들을 억제할 사명을 다윗에게 위탁하신 것이다(시 89:25). 특히 5-18절 단락은 이 진리를 고대근동의 창조신학에 호소하여 논리적으로 보다 더 자세하게 확증하고 있다.


시편 89편은 찬양을 선포함으로써 시작된다(1-2절). 화자는 기꺼운 마음으로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야웨를 노래하고 찬양할 것임을 선포한다. 곧 뒤이어 야웨 자신이 친히 다윗과 언약을 맺었음을 선언하시는 신탁을 인용하는 3-4절이 뒤따라 나온다. 5-18절은 성격상 야웨 찬가로서 야웨를 찬양해야 할 이유들을 제시하고 “이스라엘의 방패요 왕은 야웨께 속했다”라는 확증적 선언(18절)으로 끝난다. 19-37절에는 긴 신탁-비전(oracle-vision)이 나오는데 그것은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긴 약속 목록들을 회고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이 단락 바로 뒤에,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의 엄혹한 대조를 구구절절이 부각시키는 38-45절의 애가와 탄식어린 불평이 뒤따라 나온다. 이 불평 뒤에는 하나님을 타이르고 책망하는 듯한 대담한 항의어린 요구와 탄원이 따라나온다(46-51절). 52절은 시편 제 3권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시편 89편을 종료하는 축도 구문이다.28)
다윗 언약은 1-4절, 5-18절, 19-37절 세 단락 모두에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들을 결속시키는 주제적인 끈이다.29) 그 중에서도 다윗 언약이 가장 명료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시편기자의 가장 큰 신뢰 속에서 표현되는 곳은 중간 단락이다(5-18절). 여기서 시적 화자는 야웨께서 다윗과 그의 왕조에게 확실한 약속을 베풀어주셨던 그 계기가 되었던 예언자적인 계시를 회고하여 다시 요약적으로 진술한다. 5-18절(MT 6-19절)30) 은 자신의 왕권을 명확하게 선포하기 위하여 창조 전쟁으로부터 오는 신적 용사를 다룬다.31) 19-37절은 환상 중에 하사된 다윗 언약과 그것의 현실정치적 함의를 다룬다.




2. 시편 89:1-37(MT 2-38)의 사역(私譯)과 주석(註釋)
1(MT 2) 내가 야웨의 인애(헤세드)를 영원히 노래하리라.
세대와 세대를 넘어 나의 입술은 당신의 진실(에무나터카)을 알리리라.
2. 나는 말하리라. “당신의 인애(헤세드)는 영원히 구축되었습니다(bānā).
하늘에 당신은 당신의 진실(에무나)을 세웠습니다(kûn).”
3. “나는 나의 택한 자 다윗과 언약을 맺었다.
나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다.
4. ‘나는 네 후손을 영원히 세우리라(kûn).
나는 네 보좌를 모든 세대들을 위하여 굳게 세우리라(bānā)’.”




5 야웨여, 하늘들로 하여금 당신의 경이로운 일들(펠레)을 고백하게 하소서.
거룩한 자들의 회에서 당신의 진실(에무나)을.
6 진실로 궁창에서는 누가 야웨와 비기겠으며,
누가 신들 중에서 야웨와 같다할 수 있으리까?
7 거룩한 자들의 회에서 두려움을 안겨주는 그 신,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고 두려운 (신),
8 만군의 야웨여, 누가 당신과 같으리까?
당신의 힘32) 과 진실(에무나)이 당신을 두릅니다.


9 당신은 바다의 등을 다스리십니다.
그의 파도들이 솟구쳐 올라올 때, 당신은 그것들을 진정시키십니다.
10 당신은 라합을 부서뜨려 시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당신의 힘센 팔로 당신은 당신의 적을 흩어버렸습니다.
11 실로 하늘들도 당신의 것이요, 땅도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온 세계도.
12 북쪽(Zaphon)도 남쪽(Amanus)도 당신이 만드셨습니다.
다볼과 헤르몬이 당신의 이름을 즐겨 부르짖습니다.
13 당신은 강한 팔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의 손은 강력하고 당신의 오른 손은 높이 쳐 들려 있습니다.
14 의(체데크)와 공평(미쉬파트)이 당신 보좌의 연단입니다.
인애(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이 당신 앞에 행합니다.


15 복되도다. 당신의 나팔소리를 아는 백성들이여.
야웨여 당신의 얼굴 빛 안에서 행진하는 백성들이여.
16 하루 종일 그들은 당신의 이름을 즐거워하며
당신의 의로움 안에서 그들이 존귀케 됩니다.
17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힘,
당신의 은총 안에서 우리의 뿔이 높아집니다.
18(MT 19절) 실로 우리의 방패는 야웨께 속하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합니다.


19(MT 20) 그 때에 당신은 환상 중에 당신의 인애를 덧입은 자에게33) 말했습니다.
당신은 말했습니다. “내가 한 용사에게 도움을 베풀었고
한 택함 받은 자를 백성들 가운데서 존귀케 했다.
20 나는 내 종 다윗을 발견했다.
나는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다.
21 그래서34) 나의 손이 그에게 견고하게 세워질 것이며(kûn)
나의 팔이 그를 강하게 하리라.
22 어떤 원수도 그를 억압하지 못할 것이며
어떤 비열한 자도 그를 괴롭게 하지 못하리라.
23 나는 그의 대적들을 그 앞에서 부서뜨릴 것이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치리라.


24 나의 진실(에무나)과 나의 인애(헤세드)가 그와 함께 할 것이며
내 이름을 통하여 그의 뿔이 높이 쳐들려지리라.
25 나는 그의 손을 바다를 향하여 쳐들게 하며
강들을 향하여 그의 오른 손을 (쳐들게 하리라).
26 실로 그는 나에게 말하리라.35)
‘당신은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내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27 정녕 나는 그를 맏아들로 삼으리라
지상 왕들 중 최고(엘리욘)의 왕으로.
28 영원히 나는 그를 인하여 인애(헤세드)를 지키며
나의 언약은 그와 함께 영원히 존속하리라.36)
29 영원히 그의 후손을 세울 것이며
그의 보좌는 하늘의 날들처럼 장구하리라.
30 비록 그의 후손들이 나의 계명을 버릴지라도
나의 심판이 그들을 동행하지 않으리라.
31 비록 그들이 나의 법도를 위반할지라도
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지라도
32 나는 막대기로 그들의 죄악을 징계할 것이며
그들의 불의를 역병으로 칠지언정
33 나는 그들로부터 나의 인애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진실(에무나)을 변개하지 않으리라.
34 나는 나의 언약을 위반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발설한 것을 변역치 않으리라.
35 나는 나의 거룩함으로 일단 맹세하였다.
나는 다윗에게 거짓말 하지 않으리라.
36 그의 후손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며
그의 보좌는 태양처럼 내 앞에 있으리라.
37 달처럼 그것은 영원히 세워질 것이며(kûn)
궁창에서 한 증인은 굳건히 세워지리라.”37)




시편 기자의 야웨 찬가와 그 이유-다윗 언약을 베푸신 야웨 하나님(1-4절)
1-4절은 이 시편의 중심 주제를 도입한다. 이 단락의 지배적 사상은 “영원히,” “확정하다(kûn),” “세우다(bānā),” “인애”와 “진실” 등의 어휘에 의해 대표된다. 하늘을 증인으로 간접적으로 불러들인 후 시적 화자는 야웨의 인애(헤세드)와 그의 진실을 노래한다. 하늘에까지 알려진 야웨의 인애와 진실의 결정체는 그가 다윗과 세운 야웨의 언약이다(3-4절). 다윗의 보좌가 다윗의 후손에 게 존속될 것이라는 야웨의 맹세어린 약속이 그의 우주적 인애와 진실의 본질이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지겠지만(38-51절) 이 인애와 진실은 지금 어떤 이유에서건 현실에서 효력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38-51절이 개탄하듯이, 다윗의 후손은 젊은 날 원수와의 전쟁에서 패배당하고 굴욕을 당했다.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유린과 비방에 무한정 노출되었고 다윗 언약은 이제 폐기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지배하고 있다. 시편 89편은 다른 애가의 경우처럼 국가적 환난, 전쟁에서의 패배, 왕의 때이른 죽음을 자기비판의 계기로 삼기보다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심하고 도전하는 계기로 삼는다. 신명기 역사서 신학의 근저에 깔려있는 모세 언약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자기비판의 논거가 된 반면에 다윗언약은 국가적인 위기와 재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향한 항의적 애가적인 문제제기의 논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편 89편 같은 애가 시편은 역사적 재난과 위기를 신명기 역사가들과는 다른 궤적으로 돌파했던 것이다. 1-37절에 강조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다윗 언약에 대한 회고와 언급은 순전히 하나님께 국가적 재난의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수사학적인 복선 역할을 하고 있다.




거룩한 신들의 회(會)가 야웨를 찬양하는 이유-혼돈의 바다와 라합을 분쇄하시고 우주를 창조하신 야웨의 승리(5-18절)
5-8절의 야웨 찬가는 왜 거룩한 신들의 회(會)가 비길 수 없고 두려워할만한 전사이신 야웨를 찬양하는지를 말한다(5-8절[MT 6-9절]과 시편 29:1-2을 비교). 하늘의 신적 존재들이 야웨를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신들의 회가 보기에도 경이로운 일(펠레)과 진실(에무나)을 야웨께서 과시하셨기 때문이다. 경이로운 일과 진실의 실체는 9-14절에서 밝혀진다. 창조질서를 확정하기 위한 혼돈세력과의 격렬한 전투에서의 승리와 그 결과 탄생한 아름다운 세계질서 창조다. 6절은 비길 수 없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수위권을 찬양한다. 7절에 따르면 신들의 회중은 야웨의 비길 수 없는 힘과 용력 권능을 놀라며 찬양하고 있다. 8절은 6-7절을 요약하며 힘과 진실이 야웨가 주창하는 가치임을 보여준다. 신들의 회중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야웨의 최근 성취(전쟁 승리)는 특정 가치를 주창하는 즉 가치주창적(value-advocating)인 성취였음을 보여준다.
9-14절 단락은 혼돈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와 그 결과 야웨가 거룩한 회에서 얻은 수위권을 신화적 색채로 묘사한다. 이 단락은 마르둑과 바알의 승리를 생각나게 하는 용어들을 빈번히 사용하며 야웨의 우주적 통치권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말하고 야웨가 혼돈의 뱀을 격퇴한 승리 때문에 그 수위권을 획득했다고 환호한다. 5-18절의 구조는 거룩한 회(會)의 찬양, 하나님의 전투와 승리, 하나님의 의와 공평으로 떠받쳐진 보좌 등극, 그리고 승리의 개선행진과 축하연으로 구성되어 있다.38) 이것과 유사한 구조는 우가릿과 메소포타미아 문헌(신화)에서도 입증된다.39) 9-14절은 1-8절에서 나오는 시적 화자의 야웨 찬양의 이유와 거룩한 신들의 회(會)가 야웨를 찬양하는 이유를 분명히 제시한다. 야웨는 고대 바벨론의 창조신화에 나오는 마르둑이나 가나안의 바알신화에 등장하는 “승리하는 창조주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시는 창조주요 승리한 왕으로 선포된다. 그 이유는 우주창조를 위한 혼돈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에누마 엘리쉬나 바알신화처럼 야웨의 우주창조를 위한 전쟁이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이야기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시편기자는 우주창조를 위한 고대 근동의 신화들에 대한 시적인 암시나 은유, 혹은 단편적인 언급을 통해 야웨의 창조사역과 그것에 앞선 원시혼돈 세력과의 전쟁을 간접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만 묘사한다. 그러나 이 단락과 시편 74:12-17, 104:3-9, 욥기 38:8-11, 그리고 이사야 51:9-10(참조. 사 17:12-14; 27:1-2; 비교. 창 1:1-2)을 함께 읽어보면 구약성경의 창조신학도 고대근동의 창조신화와의 관련성 속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구약성경의 후기에 갈수록 절대적 유일신 신앙 경향이 보다 이른 시기의 일신교적인 신앙을 덮어쓰기하는 상황이 연출되지만, 구약성경의 창조신학은 확실히 고대 근동의 창조설화와 연접하여 해석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여기서 발견되는 야웨의 왕권을 확증짓기 위한 창조전쟁 주제는 가나안 신화나 메소포타미아 신화 둘 다에서 발견되는 우주창조를 위한 창조주 신의 전쟁 주제에 대한 이스라엘적 변용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9-14절이 밝히고 있듯이 거룩한 신들의 회(會)가 인정하는 야웨의 왕권은 바다와 라합에 대한 그의 승리에서 비롯된다. 그의 창조는 단지 “무로부터의 유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라 무질서로부터의 질서창조요 불의하고 거짓이 넘치는 세계에 인애와 진실, 의와 공평의 질서를 확정짓는 가치창조적인 창조다. 구체적으로 9-10절은 왜 야웨의 수위권이 거룩한 회(會)에서 공포되고 승인되는지를 말한다. 야웨는 바다의 등을 다스리시고 거역하듯이 솟구쳐 오르는 파도들을 진정시킨다. 9절은 뭍을 드러내기 위하여 물을 한곳으로 유폐시키는 창세기 1장 9절을 의인법적으로 재주형하는 것처럼 보인다.40) 10절은 원시 혼돈의 괴물인 라합을 부숴뜨려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고 선언하는데 이것은 심연(the Deeps, 창 1:2에서 원시혼돈 바다는 터홈[tĕhôm]]으로 무생물화 혹은 중성화)인 티아맛의 시체를 갈라 질서정연한 우주를 창조하는 마르둑을 생각나게 한다. 라합을 파쇄한 후에 하늘과 땅이 야웨의 통치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여기서 창조주 신은 왕으로 묘사되고 홍수(물들) 위에 보좌를 세워 그 위에 착석하심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으로 묘사된다(10절과 20:10 비교; 참조. 시 74:1-17; 104:3-9). 한 때 신적인 존재로 간주되던 그 땅에 있는 가장 높은 산들도 하나님의 통치영역 안에 편입된 피조물로 격하되었다(12절). 홍수(라합)에 대하여 거둔 그의 최근 승리와, 하늘과 땅, 산들과 신적인 거인들을 연속적으로 창조한 그의 강력한 창조역사에 대한 암시가 이뤄진다(12-13절). 남과 북, 다볼과 헤르몬은 각각 옛 신들의 이름들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북을 의미하는 차폰(ṣāpôn)은 북쪽의 깊숙한 곳(har-ṣiyôn yarkĕtê ṣāpôn)에 있는 시온을 함의하고 있다(시 48:2 “북방에 있는 시온산”). 13절은 야웨의 강한 팔과 손이 창조의 주(主)동력임을 드러낸다. 야웨의 창조는 물질적인 환경을 만든 공작적인 창조가 아니라 기존의 무질서 세력에 대한 권능 발현을 통한 전투적이고 대항적인 창조임이 암시된다. 그 신은 승리자(14절)로 묘사되며 그는 의와 공평이라는 보좌 연단 위에 착석해 있다(14절). 이 절은 야웨의 창조행위의 원천이 무엇인지, 야웨의 승리의 동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의와 공평이다.41) 의(체데크)와 공평(미쉬파트), 인애(헤세드)와 진실(에메트)의 구현이자 과시가 바로 창조임이 암시된다. 하나님 보좌를 아래서 떠받치는 가치가 의와 공평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개선을 앞서 향도하는 시종장 같은 역할을 하는 가치가 충성과 진실이라는 말은 야웨의 세계창조는 창조 직전의 무질서와 혼돈(인애와 진실의 결핍상황, 의와 공평의 붕괴상황)에 대한 극복이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세상 창조는, 원시바다를 갈라 피조물을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한 사건이다. 그것은 땅과 하늘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거주처와 안식을 제공한 사건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신적 자비심으로 가득 찬 행동이기에 인애와 진실, 의와 공평의 과시 사건인 셈이다. 의와 공평의 창조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것의 특별한 과시행위가 바로 창조행위라라는 것이다. 혼돈의 원시바다와의 전투 후에 이뤄진 창조사건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연결시키는 9-14절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뒷받침하는 본문이 시편 33:4-7이다.42)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이 두 본문을 함께 읽어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성난 파도, 혼돈의 들끓는 원시바다물에 대한 억제행위 곧, 세상에 야웨의 인자하심을 충만케 하는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야웨의 태고적 창조사역을 성례전적으로 구현하는 활동이 바로 역사 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의로운 행동, 치드코트 아도나이)이다. 이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충성과 진실, 의와 공평의 실현을 통해 매개된다. 의와 공평, 충성과 진실도 계약함의적인 단어들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이 피조세계인 창조질서와 맺고 있는 계약의 요소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한 충성과 진실, 의와 공평의 이름으로 창조질서를 지키고 유지하는 사명에 스스로를 속박하신다(비교. 창 8:22).
혼돈세력에 대한 승리를 거둔 후 있게 되는 야웨의 개선 행진시 충성과 진실이 그의 전위 호위병 구실을 한다. 야웨의 승리는 충성과 진실의 승리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의 백성들은 그의 얼굴(nimbus, halo) 빛에서 방출되는 빛 가운데서 행진한다(15-16절). 이제 개선 행진 장면은 승리한 용사가 통치자와 왕으로 공인되는 승리의 축하연 장면으로 바뀐다.43) 17-18절은 이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축제가 확증해주는 확신을 피력한다. 패배를 모를 것 같은 승리주의적인 확신과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고양된 의식으로 시편기자는 다윗의 후계자인 현역 왕에 대한 칭송으로 이 단락을 마무리한다. 하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뿔은 원수대적들 위에 높아진다. 이스라엘의 뿔이 원수들 위에 높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스라엘 왕이 원수들을 압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높아진 이스라엘의 뿔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확신은 그들의 왕이 나라의 방패로서 하나님께 굳게 결속되어 있다는 확신으로 발전된다. 이 활기차고 고양된 확신은 이 시편의 마지막 애가 단락(38-51절)에 의해 물론 산산조각날 것이다. 이 단락의 야웨 찬가는 시편 89편 전체를 애가로 만드는데 일조하는 음울한 배경으로 남는다.




왜 다윗 언약은 영원한 왕조 언약으로 발전하는가?-고대 근동의 창조신학(19-37절)
다음 단락인 19-37절은 환상 중에 나단(다윗)에게 말하는 야웨의 1인칭 신탁이다. 이 단락은 야웨의 우주적 승리가 다윗의 지상적 승리의 원형사건이며 야웨의 창조주적인 승리를 지상에 구현하기 위하여 다윗언약이 요청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주적인 승리가 하늘의 질서정연한 회복을 의미했는데 이 “하늘” 상황이 땅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야웨의 지상대리자가 필요하였다. 야웨의 창조주적인 승리 찬가 후에 다윗의 선택에 대한 환상이 배치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킨다.
19절에서 다윗은 인애를 덧입은 자, 용사, 택함 받은 자로 불린다. 20절에 보면 그가 바로 다윗임이 밝혀진다. 20절은 사무엘을 통해 은밀하게 일어난 다윗 도유 사건을 회상시키는 장면이다(삼상 16:12). 야웨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참조. 사 9:5-6; 11:1-9). 기름부음은 야웨의 통치권의 위임을 의미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야웨의 창조주적 지혜와 권능을 분여받아 창조주적인 창조사역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자다. 21-25절은 기름부음의 결과 다윗이 천하무적의 용사가 되었음을 증거한다. 사무엘상 17장부터 사무엘하 5장까지 이어지는 다윗의 전쟁승리는 야웨의 기름부음의 결과다. 그 기름부음의 결과 다윗 주변 사방 대적들을 차례대로 정복하여 왕중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24절에 따르면 그의 천하무적의 승리 행진은 야웨의 진실과 인애의 후견 속에 이뤄진 성취로서 본질적으로 원시 혼돈세력에 대한 야웨 승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활동이다.
25절에서 야웨는 물들의 억제 사명을 그의 총애하는 지상 부왕 다윗계열 왕에게 맡긴다(25절). 야웨는 다윗의 손을 높이 쳐들어 바다와 강들을 제압하게 한다(비교. 출 14:16, 21 바다 위에 손을 쳐들어 바다를 갈라지게 하는 모세). 강들과 바다는 창조질서에 대항하는 혼돈세력들로서 창조주 야웨의 원수들이다. 다윗은 창조주 야웨의 창조주적인 활동을 지상에 구현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윗의 높이 쳐들려진 손이 바다의 등을 다스리고 혼돈의 원시바다를 억제할 것이라는 신적 언질은 19-27절에 나오는 다윗에게 행한 일련의 약속들 중 절정의 약속이다. 이 일련의 약속들은 다윗 계열의 왕은 언제나 야웨의 신적 지원을 받을 것이고 어떤 적들도 그를 패배시키지 못할 것이며 그는 야웨의 맏아들이 될 것이며 그래서 지상의 모든 왕들 중에 가장 으뜸되는 왕이 될 것임을 보증한다. 야웨께서 이처럼 숨막히는 약속들을 하실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우주적 통치권 장악 획득으로부터 귀결된 것이다. 그의 우주적 통치권 장악은 9-14절에서 솟아오르는 바다에 대한 그의 왕적 억제, 라합 분쇄, 그리고 뒤이은 세상 창조라는 일련의 비유를 통해 묘사된다. 이제 우주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원시적 전투를 통해 확정된 야웨의 창조질서를 유지할 책임은 다윗과 그의 후손 왕들에게 위임되어 있다. 에누마 엘리쉬에서처럼 시편 89편에도 신의 승귀(昇貴)와 그의 지상 대리자가 차지한 제국주의적 헤게모니 사이에 있는 결속이 잠재되어 있다. 다윗은 야웨의 우주적 통치권을 지상에 확장하고 구현하는 지상 대리자 부왕(副王)이다. 이 독특한 관계가 계약(언약)으로 공식화되었는데 이것은 다윗 후손들과 그의 보좌의 영속성을 보증하는 언약이었다.44)
이처럼 야웨의 신화적 전쟁 주제가 야웨의 다윗 선택과 다윗 왕조 선택에 대한 신화적/신학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야웨께서는 이 신화적인 구조에 입각하여 다윗에게 하나의 영속적인 다윗 왕조를 약속해 주셨다. 당연히 이 영원한 왕조 사상은 사사 시대의 근본전승을 이루었을 시내산 계약 전승에는 낯선 사상이었다. 보다 오래된 시내산 계약 전승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정 도입이 이스라엘의 자기 이해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였고 동시에 종교적 위기를 의미하였다(삼상 8:6-8). 이스라엘은 이제 야웨의 백성이 아니라 야웨를 대신하는 중보자인 왕의 백성으로 강등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근동의 이웃 문명들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시행되어온 왕정이 이스라엘에 도입되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그 자체의 신념체계와 함께 도입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신념체계는 고대 근동의 창조설화였다. 고대근동에서는 이미 하나의 통합적인 종교적 신화, 특히 창조신화가 왕정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분쟁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생명, 창조, 질서(가나안에서는 바알, 바벨론에서는 마르둑)의 신과 혼돈과 파괴의 신, 대개 바다괴물로 대표되는 신(가나안에서는 바알, 바벨론에서는 티아맛)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이 두 신들 사이에(정기적으로 대개는 일년에 한 차례) 벌어지는 전쟁에서 생명과 창조의 신이 승리하여 왕으로 선포된다. 그는 자신이 거주할 궁궐을 짓고 자신의 승리를 기린다. 창조세계는 다시 질서가 회복된 것이다.45) 지상 왕은 이 신적인 왕의 대리자로서 부자관계를 형성하며 왕위를 차지한다. 이 때 지상 왕에게 부여되는 특별 책임이 지상에 공의(justice)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일이었다. 하늘 신의 지상대리자로서 지상의 왕은 기본적으로 우주질서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관리자요 수호자였던 것이다. 영원한 왕조를 약속한 다윗 언약의 정치신학은 바로 이런 신화적인 배경에서 온전히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26-37절은 이런 다윗의 창조주적 활동, 즉 바다와 강들의 제압 활동이 다윗 당대에 끝나지 않고 그의 후손들 대대로 계승될 것임을 선언한다. 따라서 다윗 왕조에 속한 모든 후손 왕들이 하나님의 언약대상자로 확대된다(사 9:5-6; 11:1-9; 렘 21:12; 22:15-16).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적어도 형식상으로 이 언약의 확장이 다윗 왕조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청에 의하여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26-27절은 다윗과 야웨가 부자 관계에 돌입할 것이라고 선언한다(시 2:7). 하나님이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엘 엘리온이듯이, 다윗은 지상 열왕들 위에 뛰어난 엘리온으로 선포된다.46) 28절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약적 투신은 영속될 것임을 강조한다. 29절은 이 야웨의 영속적인 헤세드가 다윗의 위(位)를 차지할 모든 후손 왕들에게로 확장될 것이다. 다윗의 보좌는 하늘의 날처럼, 즉 하늘이 존속하는 한 장구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것이다. 31-35절은 28-29절을 예해한다. 다윗과 그의 후손에게 베푼 하나님의 계약적 투신이 영속할 것이라는 선언이 이 단락에서 예시된다.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법도, 계명, 계약(출애굽기나 신명기에서 이 단어들은 시내산 언약 일체를 가리키는 말)을 지키는 데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막대기로 징계하고 역병으로 칠지언정(삼하 24장; 대상 21:1-27)(30-33절), 당신의 인애를 다윗 가문으로부터 거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 해처럼 장구할 것이라는 말의 의미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래 하사하셨던 진실을 변개하지 않을 것이다(33-34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반역과 가변성, 실패와 불실신성이 “인애와 진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결단한 그 하나님의 결단을 좌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다윗의 후손들이 범한 죄악에 의해 영향을 받아 하나님이 당신의 인애와 진실을 철회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에 다윗 언약은 영원히 유효한 언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은 다윗의 위를 영원히 차지할 것이며 그의 보좌는 태양처럼 장구할 것이다(36절). 그것은 달처럼 영원히 세워질 것이며(kûn), 궁창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진실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굳건히 세워질 것이다. 결국 이 단락에서 쟁점은 왕정 자체가 아니라 왕조의 영속성 문제다.47) 사무엘하 7장 뿐만 아니라 시편 89편 밑에 깔려있는 주제도 왕위 계승 문제, 즉 어떤 가문이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것인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다윗 언약이 방지하려는 것은 다윗 왕가가 왕권을 상실하는 상황4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 상실의 상황이다. 요약하자면, 이 시편 89편 1-37절은 다윗 왕조의 정통성(합법성), 왕조의 영속성, 그리고 정치적 헤게모니(hegemony, 지배권 혹은 우월적 지위), 이 세 가지를 확약해 준다. 그런 점에서 다윗 왕조의 정치학은 정치신학일 수밖에 없다. 다윗 왕조의 미래는 하나님의 진실과 충성에 달려있다는 의미다.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계약준수 의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인애와 진실은 하나님께서 인간 파트너에게도 동일한 덕성과 자질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 언약의 정치신학이 지배하던 유다왕국의 예언자들인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 등이 한결같이 다윗의 후손 왕들에게 인애와 진실을 비롯한 계약적 의무 준수(공평과 의의 실행자로서의 왕 역할)를 촉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시편 89:1-37에서 하나님의 창조 전투와 왕중왕으로서의 왕위 등극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참조. 시 74편). 특히 5-7절과 9-10절은 야웨가 창조 전투를 막 치렀음을 암시하고 9-13절은 혼돈과의 전투 직후에 있었던 창조활동이 있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전쟁하는 신과 보좌위에 앉은 하나님이 동일한 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야웨라는 사실이다.49) 5-18절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특성들을 마치 불가분리인 속성들인 것처럼 결합시키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늘의 어전회의 회중 한 가운데 보좌 위에 착석한 하나님과 동시에 혼돈을 무찌르고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임을 발견한다(9-18절).50)
1-37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1-4절(3절)과 19-37절 두 단락은 둘 다 다윗 언약에 대한 언급(1-4절, 27-37절[특히 35절])과 그것의 신화적 배경에 대한 암시나 명시에 의해 연결된다. 이것은무엇을 의미하는가? 1-37절의 당면 목적이 다윗 언약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설된 언약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야웨 하나님의 창조주적 승리가 우주창조와 세계질서의 확정을 초래하였고, 이 하늘의 승리를 지상에서 구현하고 대행할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당신의 창조주 사역을 지상에서 구현할 인물, 즉 인애와 진실, 의와 공평을 이 땅에 펼칠 인물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발견하였고 그를 지상 대리자(메시야)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태고적 감당하시던 혼돈의 바다와 강들 제압의 사명이 야웨의 맏아들인 다윗과 그의 후손들에게 위탁된다.51) 하나님의 창조주적 활동, 의와 공평을 세우는 일, 인애와 진실을 펼치는 일을 계속되어야 하는 한 누군가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들은 다윗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창조주적 활동, 바닷물 억제활동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다윗 언약은 순전히 하나님의 창조주적 왕적인 활동의 지상 대리자를 찾는 하나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하여 안출된 것이다. 27-28절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이 양두체제는 아버지 왕과 아들 왕의 공동통치를 의미한다.52) 이처럼 시편 89편의 정치신학은 세계의 통치가 하나님과 지상 대리자 인간 왕의 양두 체제의 손들에 달려있다고 보는 신학이다.
사무엘하 7:11-16과 비교해 볼 때 시편 89:1-37은 사무엘하 7장에서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던 두 가지 추가적 사실들을 천명한다. 첫째, 다윗 왕조의 영속성은 창조질서에 터하고 있다는 선언이다(36-37절). 둘째, 25절이 밝히고 있듯이 다윗 왕과 그의 후손 왕은 공평과 의를 세우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지상 대리자라는 점이다. 공평(미쉬파트)과 정의(체데크)를 세워야 하는 왕의 역할이 명확하게 규정된다는 점이다. 시내산 언약이 모든 백성들에게 계약의 기본조항의 준수를 요구한다면 다윗 언약은 백성들의 언약적 우두머리인 왕에게 공평과 의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53) 이로 보건대, 다윗 언약은 무조건적이고 영속적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에 터한 언약이지만, 인간 파트너의 계약준수 의무를 폐기하는 언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 파트너의 계약 준수여부가 계약의 유효성을 결정짓는 변수가 못되지만 여전히 다윗의 후손에게는 모종의 언약적 사명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54)




신화적 과거와 역사적 현실 사이의 인식론적 부조화
그러나 이 다윗 언약에 입각한 다윗 왕조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가? 다윗의 후손들은 창조질서의 적인 혼돈의 바다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있는가? 그의 인간적인 부왕 지상 대리자에 원시바다의 혼돈을 억제하도록 위임한 신적인 왕의 위임은 성공했는가?(비교. 시 93편) 왕조의 영속성을 보증한 하나님의 언질은 지켜지고 있는가? 이 시편의 마지막 단락이 보여주듯이(38-51절), 현실은 다윗 언약의 시효가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시편 89편의 전체 맥락은 다윗계열의 왕이 거둔 승리가 아니라 패배와 수치스런 전락이다. 시편기자가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탱시키겠다는 신적 언질-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지엄하신 거룩함으로 맹세한 바다-을 마무리하자마자 우리는 이것(언질)에 의하여 크게 놀라며 순식간에 기쁨을 잃어버린다(시 89:38-40, 50).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레벤슨이 지적한 것처럼 이스라엘에서 전쟁을 통한 창조설화는 야웨와 그의 약속들이 신용을 잃은 것으로 보이던 때에 생겨났거나55) 더욱 자주 낭송되거나 회고되었을 것이다. 주전 6세기에 유다 왕국이 파괴됨으로써 야웨의 태고적 신화적 승리에 대한 호소는 야웨의 태고적의 찬란한 영광과 당시의 현실 안에서의 그런 위력의 가시적 부재라는 대조상황을 예해하는 데 이바지하였을 것이다.56) 시편 89편 전체로 보면 신화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재라는 참혹한 현실 뒤켠에 한 발 물러나 앉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편 74편과 이사야 51장에서처럼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세계지배적 권능과 다함없는 신실성에 대한 찬미적 확언과 동시에 역사적 경험이라는 엄혹한 현실의 덜커덩거리는 부정합적 병치를 발견한다. 혼돈세력에 대한 야웨의 태고적 승리에 대한 환희에 찬 회고가 야웨의 인애와 사랑을 그토록 찬양하는 이스라엘의 비통한 패배와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혼돈과의 투쟁(the Chaoskampf) 신화에 대한 호소는 변증법적인 대항진술(상쇄진술, counterstatement)의 형식으로 역사적 사건들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신화적 진실과는 정반대로 진행되는 역사적 경험에 신화적인 다윗언약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허무주의의 심연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구책일 수도 있고 하나님이 고취시킨 신앙적 패기일 수도 있다.57) 신화의 하나님과 현실적 당면한 역사적 경험의 하나님 사이에 있는 대조가 의식의 지평까지 차올랐다는 것이다. 결국 신화에 대한 시편기자의 호소는 하나님의 태고적 위대한 구원행위가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돌파하는 신앙행위인 셈이다. 야웨의 구원행위에 대한 흥분에 찬 확언을 의심할 수 있는 근거들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행위가 되었다.


IV. 다윗 언약의 신화적 근거와 그 의미
다윗 왕조에 관한 나단 신탁에 따르면, 야웨는 다윗의 왕가를 입양했다. 그의 후손은 모두 야웨의 아들로 인정된다. 그의 후손이 죄를 짓더라도 징계를 받을지언정 결코 야웨와 다윗이 맺은 부자지간의 관계가 소멸되지는 않는다(삼하 7:14-15). 사울이 하나님의 은총을 잃고 폐위되듯이 그런 식으로 왕조를 잃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 전승에 의하면, 사울은 그의 죄로 인하여 폐위되었다(삼상 15장).
사무엘하 7장의 나단 신탁 본문의 독자들은 “도대체 어떤 토대 위에 이 엄청난, 영향력이 오래 지속되는 약속이 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편 89:1-37이 이 질문의 대답이 됨을 살펴보았다. 사무엘하 7:11-16의 나단 신탁에 대한 시적 혹은 신화적 변용(a poetic or mythological adaptation)이라고 볼 수 있는 시편 89:4-5, 20-38은 사무엘하 7장 나단 본문과 마찬가지로 시내산 언약을 다루는 본문들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정형화된 구문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확실히 여기서는 맹세(36절)와 증언/증인(38절)은 있으나 어떤 서언, 역사적 서론, 조약규정 본문의 보관, 축복과 저주 조항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조항들도 누락되어 있다.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 언약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취하여야 할 조건들의 누락은 전승사적으로 볼 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나단 신탁처럼 이 시편도 다윗이나 그의 후손 편에서 지켜야 할 기본조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대가(代價)를 치러서라도 다윗의 후손들을 굳게 붙드실 것임을 확실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기고 신적인 율법을 더럽힐지라도 그들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점보다 더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을 생생하게 대조시키는 곳이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언약에 연루된 의무조항들은 일방, 즉 어떤 상황에서라도 이 언약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하시는 종주이신 야웨에게만 부과된다. 어떤 다윗 후손도 하나님께서는 내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다윗에게 한 맹세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다윗 언약의 인간 파트너는 후손이 아니라 조상 다윗인 것이다. 다윗의 후손들은 중심 조건의 바깥에 있는 추가물이다. 그들은 오로지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증거하는 징표로만 언급될 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동맹이며 어떤 도덕적 분투도 이 언약의 효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요청되지 않는다.58) 시내산 조약(언약)의 역동성은 역사를 도덕으로 변환한 데 있었다. 그런데 다윗 언약의 경우 역사와 도덕은 더 이상 초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 왕실에게 독특하게 청구할 수 있는 어떤 요구도 이미 그것의 창건자에 의하여 충족되었기 때문이다.59) 오히려 다윗 언약은 일종의 “왕적 하사 언약”(a covenant of grant)으로서 역사의 흥망성쇠와 여러 변동사항들을 초월하여 유효한 약속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언약은 역사의 변동 아래서 흐르는 상수적 요소에 주목한다. 그 초역사적 상수는 하나님의 다윗 왕조에 대한 전적인 투신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투신이 항상 다스릴 것이라는 것이다(하나님의 투신이 지배적인 요소라는 말이다). 그래서 초점이 인간의 변동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항속성에 있다. 시내산 언약에 입각한 시험들이 인생의 불확실성과 따라서 부단히 갱신되어야 할 순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다윗 언약은 확실하고 불가침적인 신적 항속성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열왕기서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다윗 계열의 왕들을 부단히 참으신다. 그렇게 자주 제시된 이유(즉 다윗을 위하여) 때문에. 책 전체를 통해 후렴구처럼 퍼지는 말은 이렇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 15:4-5);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왕하 8:19)(참조.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왕하 19:34]).
앞의 주석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윗 언약은 신화적 언약의례들을 촉발시켰던 모종의 역사적 경험들(왕정 도입과 다윗제국의 등장, 그리고 몰락과 쇠퇴 등)의 충격 아래 신화적 과거(mythpoeic past)이라는 원형으로부터 출현한 모형물이다.60) 다윗 제국의 융성과 국제적 확장과 위세를 경험한 다윗 언약주의자들(시편 89편 기자)은 다윗 언약을 야웨의 우주적 승리와 통치에 근거지웠던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의 바알신화나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설화를 통째로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고대근동의 창조신학을 적절하게 전용하였다.61) 그들이 전용한 고대근동의 창조신학의 세 가지 요소는 첫째, 혼돈 세력들에 대한 신의 승리, 둘째, 그 승리한 신이 왕으로 환호를 받으며 옹립되고 등극하는 것, 그리고 셋째, 그를 위한 왕궁/성전 건설이 바로 그것이다.62) 이처럼 신화와 제의는 고대 근동 사회들에서 개인들과 나라들의 정치적 합법성(정통성)과 지위를 고양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63) 이런 과정에서 다윗 선택 전승은 다윗 왕조에 대한 영원한 선택 사상으로 발전되었고 급기야는 그것은 고대근동의 창조신학적 틀과 접목됨으로써 다윗 계열의 왕에게 우주적 보편적 통치권이 부여되었다고 믿게 되었다(시 89:1-38; 사 11:1-9; 시 2편; 110편). 이런 방식으로 다윗 계열의 연속적 왕위계승(등극)은 우주 그 자체의 구조들 안에서 근거를 갖고 있었으며 본질적으로 우주를 지탱하는 힘들과 깊게 결속되어 있었다. 우주의 질서정연함, 나라들과 사회의 안정성, 그리고 계절의 규칙성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위(보좌)의 안정성을 통해 확보되고 보증된다는 것이다.64)




V. 결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언약 안에서 왕조(정부 혹은 국가공동체), 예배(성전을 중심으로 드려지는) 백성들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영속적인 안전보장에 대한 약속을 발견했다. 심지어 그들은 다윗 언약을 지탱시키는 기본조항들이 파기될 때에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인애와 진실 때문에 다윗 언약이 유효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 언약을 지탱하는 데 실패하는 인간적 실패는 계약관계의 일시적인 후퇴(퇴행)일 뿐이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함께하심을 신뢰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38-51절이 암시하듯이,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역사는 결국 다윗 언약을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 다윗 왕권은 정치적인 실패작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바벨론 유수와 함께 사라져버렸고 포로기 이후 다윗 왕조를 복원시키려는 시도들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65) 그러나 다윗의 후손에 대한 사무엘하 7장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았다. 열왕기하 25장은 다윗의 후손이 앉을 그 보좌를 텅비워 둔채 황망히 종료된다. 위대한 다윗의 다윗보다 더 위대한 아들 아들이 출현하기를 기다리면서 열왕기하는 미완의 약속으로 허공 중에 걸려있다. 파산된 유다 왕국의 역사도 다윗 언약이 완전히 폐기되었음을 공증할 사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처음부터 인간 파트너의 협력을 산정해서가 아니라 엄숙한 맹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다윗과 그의 후손들에게 결박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당사자에게는 어떤 조건들의 성취 부담도 주지 않는 언약을 백성들과 맺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서적 언약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다윗 언약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마도 모세 언약과의 비교를 통해 그 의미가 분명해 질 것이다.
모세언약은 하나님의 해방과 은혜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무로 이행하는 조건적 언약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언약이다. 모세언약은 그 전승에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준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다윗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를 유발시키는 데 어떤 인간적 덕이나 선도 작용하지 않았음을 밝히는 무조건적인 언약이다. 이 언약은 인간의 반응여부에 상관없이 영원하다. 다윗의 위를 이을 후손을 영원히 일으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질 때문에 왕조가 존망지추의 위기에 몰렸을 때도 혹은 수십년 수백년 동안 끊어졌다하더라도 그 언약의 시효는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윗 언약의 주창자들(남왕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독특한 다윗 언약 때문에 북왕국에 대한 우월성을 내세울수 있었다. 여섯 번의 왕조교체를 겪은 북왕국에 비하여 남유다는 다윗의 위에 오르는 왕에 대한 한층 더 높아진 기대감을 갖고 다윗 왕조의 지속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다윗의 위는 하나님이 정한 우주창조의 일부라는 점에서 변개될 수 없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다윗 언약의 기둥인 다윗 왕조의 선택교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교리 못지않게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둘 다 책임없는 특권을 주장하려고 하는 죄악된 인간들에 의하여 왜곡될 수 있고 왜곡되어 왔다.66) 그러나 심지어 그런 왜곡이 없었다하더라도 그 교리들이 “특수자에 대한 유착” 때문에 눈에 거슬러 보일 수도 있다. 확실히 다윗 언약의 공식적인 규정 안에는 부인할 수 없는 인간적이고 자기이익 추구적인 요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두 교리 모두 정통 야웨주의적이고 특징적일 정도로 성서적이다.67) 이 둘 중 하나를 거절하면 단지 성서적 신앙의 특수성에 맞서는 것이며 인간의 죄악들과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민족과 특별한 개인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하시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만일 이 다윗 언약의 유효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시는 탄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상통치를 위한 영원한 대리자로 다윗과 다윗 왕조를 선택했다는 바로 이 다윗 언약의 핵심주장이야말로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메시야 대망 사상의 발아지점이 되지 않았던가?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시들은 다윗 왕조의 왕궁 제의 안에 투사된 이상적인 왕의 초상화를 반영하고 있다.68) 그런 초상화들은 신화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더러는 다른 문화들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심지어 이 신화적 요소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69)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윗 왕조의 사실상 실패는 주전 586년에 일어났으나 영적으로 보면 삼하 7:13(다윗의 후손)을 신약기독론의 관점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다윗 언약은 인간의 불순종, 실패, 그리고 죄악을 초극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를 송축하는 위대한 신학적 자산인 셈이다.


1) 다윗 언약에 드러난 다윗 왕조의 ‘정치학’은 ‘신학’의 일부이기에 “정치신학”이다. 다윗 왕조는 야웨 하나님의 통치를 지상에 대리하는 사명에 투신되어 있었기에 다윗 왕조의 정치학은 곧장 신학의 일부였던 셈이다.
2) Ben C. Ollenburger, Zion, the City of the Great King: A Theological Symbol of the Jerusalem Cult (JSOT supplement series 41; Sheffield: JSOT Press, 1987), 60; Moshe Weinfeld, “Covenant, Davidic,” in IDBS, 188-192.
3) W. Lee Humphreys, Crisis and Story (Mountain View: Mayfield Publishing Company, 1990), 68-69.
4) Humphreys, 60.
5) Frank 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Essays in the Hi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 (Harvard: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232.
6) J. William Whedbee, “On Divine and Human Bonds: The Tragedy of the House of David,” in Canon, Theology, and OT Interpretation: Essays in honor of Brevard S. Child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148-150.
7) Seow C. Leong, Myth, Drama, and the Politics of David's Dance(Harvard Semitic Monographs 46; Atlanta: Scholars Press, 1989), 178-203.
8) W. J. Dumbrell, “The Davidic Covenant,”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39(1980), 40.
9) 성전은 국가 후견신의 지상 거소로 간주되었고 왕의 궁궐은 그 신의 지상 대리자의 거소로 간주되었다. 도시국가나 제국은 통치하는 지배 신의 통제 아래 있는 신의 영지로 인정되었다. 성전 건립은 해당 국가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에 대한 해당 신의 통치 거점의 확보로 보여졌다. 이런 관점이 고대 세계에서는 중심적인 신학개념이었다는 사실은 문명사의 이른 시기에 유래한 창조서사시의 주지를 보면 충분히 분명해진다(에누마 엘리쉬 혹은 바알 신화). 이 서사시들에 보면 혼돈에 대항하여 질서와 조화를 확정하는 창조사역을 마친 후 그것을 주도한 신은 신들의 왕으로 선포되고 그 왕으로 옹립된 신은 자신의 승리를 경축하는 처소인 성전을 상납받는다.
10) Foster R. McCurley, Ancient Myths and Biblical Faith(Philadelphia: Fortress, 1983), 149-60; J. D.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The Jewish Drama of Divine Omnipotence(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78-99.
11) Dumbrell, 42.
12) Tryggve N. D. Mettinger, King and Messiah: The Civil and Sacral Legitimation of the Israelite Kings (Lund: CWK Gleerup, 1976), 42-47. 크로스는 18-29절을 신명기 역사가 편집층이라고 보는 반면에 메팅거는 22b-26절을 신명기 역사가 편집층이라고 본다.
13)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I(tr.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 Publishers, 1962), 310.
14) Cross, 247-254.
15) Cross, 233-237. 크로스는 시편 132편과 사무엘하 23장이 다윗 언약의 보다 더 오래된 형태라고 본다. 이 두 본문 안에서는 다윗 언약과 그것에 수반된 언약조항들은 “조건적”이다.
16) Michael D. Guinan, “Davidic Covenant,” i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 2(New York: Doubleday Company, 1992), 69-70.
17) Moshe Weinfeld, “Covenant, Davidic,” in IDBS, 190-191.
18) Cross, 264.
19) Robert A. Oden Jr., “Myth in the Old Testament,” Anchor Bible Dictionary vol. 4 (New York: Doubleday Publishing Company, 1992), 960.
20) Cross, 77-144.
21) Cross, 90.
22) Cross, p. viii.
23) Brevard S. Childs, Myth and Reality in the Old Testament (SBT 27; London: SCM, 1960), 15.
24) Cross, 103-105.
25) Cross, 108.
26)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116.
27) James M. Ward, “The Literary Form and Liturgical Background of Psalm LXXXIX,” VT 11(1961), 322-325.
28) Marvin E. Tate, Psalm 51- 100 (WBC; Waco, TX: Word Books Publisher, 1990), 413.
29) John Bright, Covenant and Promise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6), 58.
30) 1-37절(MT 2-38절)에는 중대한 본문비평적인 쟁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로 인칭어미와 관련된 이문들이라서 본문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주는 쟁점들은 발견되지 않아 대체로 MT를 그대로 따르나 아주 예외적으로 BHS의 권고에 따른다.
31) Cross, 160.
32) BHS 비평장치의 제안대로 MT를 ḥăsnĕkā(BDB, 340)로 고쳐 읽는다.
33) MT는 “당신의 인애를 입은 자들”로 번역되나 문맥상 마지막 인칭어미는 단수형이 되어야 한다. 많은 중세사본들이 읽은 것처럼 여기서는 단수인칭 어미를 취하여 “laḥăsîdĕkā”(your faithful one)로 읽는다.
34) 21절(MT 22절)의 접속사 아쉐르는 결과 혹은 목적절을 유도하는 접속사로 이해될 수 있다(so that ---may 혹은 so that ---will)(BDB의 아쉐르 용례를 참조하려면, 83쪽의 두 번째 칼럼을 참조하라: 예. 창세기 11:7 등). 20-22절은 결국 야웨의 기름부음의 결과가 천하 무적 다윗의 탄생에 결정적이었음을 강조하는 구문인 셈이다.
35) 26, 27절에는 3인칭 대명사와 1인칭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있는 계약적 결속감을 강조하는 구문이다.
36) 아만 동사의 니팔 미완료(ne’emeneth)가 사용되고 있다(37절과 비교), 이것은 에무나와 동일어근에서 나온 단어다.
37) 아만 동사의 니팔 미완료(ne’emān)가 정동사로 사용되고 있다(28절과 비교).
38) Mettinger, The Dethronement of Sabaoth (Lund: CWK Gleerup, 1982), 69-70. 전투, 왕권 획득, 그리고 성전(궁궐) 건축으로 이어지는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의 얼개에 대해서는 Cross, 147-163을 보라.
39) E. A. Speiser, Creation Epic (Enuma Elish), in ANE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61, 68f. 메소포타미아 문헌을 보려면, Enuma Elish I. 60-77 and VI. 57-72을 참조하라. 우가릿 문헌을 보려면 바알을 위한 집을 짓는 장면을 다루는 우가릿 본문들을 참조하면 된다. 바알을 위한 궁궐 건축을 다루는 본문들 (UT no 51= CTA4= KTU 1.4)은 보통 바알과 얌의 전투를 다루는 본문들(UT no 137= CTA 21= KTU 1.21 and UT n 68= CTA 2 IV=KTU 1.2IV) 뒤에 배치되어 있다.
40) Levenson, Sinai and Zion (San Francisco: Harper Publisher, 1985), 108-109. 바다는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둘 다에서 창조질서의 적이었다. 바다의 패퇴는 창조사역에서의 본질적 요소였고 창조의 신에게 왕권과 그 자신의 왕궁을 차지할 권리를 가져다주었다.
41) 의와 공도는 추상적 이름들을 가진 가나안 신들(Ṣidqu and Misoru)의 이름 냄새가 나는 말들이다. 가나안의 신들이 야웨의 창조사역에는 보조역할을 하는 하등신적 존재로 격하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42)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8장 안식과 재창조.”
43) Cross, 162.
44)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22-23.
45) McCurley, 12-17.
46) 이와 관련한 로버츠의 통찰은 경청할만하다. “야웨께서 주변 모든 나라들을 예루살렘의 다윗의 헤게모니 아래로 복속시켜 주실 것이며 그리하여 다윗 제국 내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은 민족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그리고 국수주의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우주적 보편적 평화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전의 근저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왕정 이데올로기에 담긴 이상이 당대의 다윗 계열의 통치자를 비판하는 무기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비록 원래는 다윗제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정형화되었을지라도, 그것은 이사야에 의하여 아하스나 히스기야의 군사주의적 활동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Roberts, “In Defense of Monarchy,” in Ancient Israelite Religion, eds. Patrick D. Miller, Jr. et al. [Philadelphia: Fortress, 1987], 387).
47) Levenson, “The Davidic Covenant and its Modern Interpreters,” CBQ 41 (1979), 205-229.
48) Levenson, “The Davidic Covenant and its Modern Interpreters,” 218. 레벤슨에 따르면 시편 78편의 마지막이 비록 다윗 언약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다윗의 선택과 왕위 등극을 다루고 있으며 실상 신적 위임으로 시작된 다윗의 통치는 이스라엘 구속사의 절정으로 본다.
49) Mettinger, The Dethronement of Sabaoth (Lund: CWK Gleerup, 1982), 149-150.
50) Mettinger, In Search of God: The Meaning and Message of the Everlasting Names(trans. F. H. Cryer: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98-99.
51) McCurley, Ancient Myths and Biblical Faith, 29-30.
52) 이런 양두체제의 인간적 대응물과 가장 근사한 제도는 아마도 섭정체제를 통한 아버지와 아들 왕의 공동 통치 형태일 것이다. 실제로 다윗이 죽기 전에 그의 아들 솔로몬은 아들로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또 왕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시편 89편에서는 야웨의 지상통치권의 그의 아들이자 그의 인간적 동역자인 다윗에게의 이양(위탁)은 야웨 자신의 쇠약 무력화의 결과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웨의 권력 이양 정도는 인상적이다.
53) Roberts, “The Davidic Origin of the Zion Tradition,” JBL 92 (1973), 343. “왕정 이데올로기는 공의를 촉진시켜야 하는 왕의 의무를 강조했고 공의를 실천하는 왕의 정책 수행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그들이 경험했던 강력한 지방 지도자들의 권력전횡과 억압적 권세남용에 대한 견제와 대항장치를 제공하였다... 이스라엘 왕들이 왕정 이데올로기에 공포된 이상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그 이데올로기는 나중에 예언자들이 특별한 왕들과 왕정의 고급관리들을 비판할 때 활용하게 될 공의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켰다. 특히 시편 89편에서 다윗 혹은 다윗 언약의 반열에 선 왕은 보통 역사적 인간의 차원을 훨씬 더 높이 초월한 위치에 배치되고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적 영역에 위치되어진다. 그의 권위는 신적 의지의 인간적 수용이나 왜곡이 아니라 창조된 우주적 구조의 일부로 주어진다.”
54) Levenson, Sinai and Zion, 99. 레벤슨은 맥락적으로 고려해 볼 때, 다윗과 그의 왕실은 시내산 언약의 기본 조항들의 준수의무로부터 면제된 것이 아니라고 논증한다. 다윗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토라, 율법, 규례들, 그리고 계명들을 범할 때 받게 될 벌에 대하여 말하는 시편 89:31-33의 전제는 그들도 여전히 시내산 언약의 규정들 아래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 기본 조항들의 준수실패는 채찍들과 막대기들의 징벌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다윗 가문의 왕들도 시내산 언약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이다.
55)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10장 성서적 유일신 신앙의 두 관용표현들.”
56) McCurley, 31.
57) Levenson, Sinai and Zion, 109.
58) Levenson, Sinai and Zion, 110. 레벤슨은 모세 와인펠드(Moshe Weinfeld)의 다윗 언약의 양식사적 연구결과를 언급한다. 와인펠트는 다윗 언약을 시내산 언약의 원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근동의 종주조약과 구별하기 위하여 “왕적 하사언약(covenant of grant)이라고 분류했다. 와인펠트에 따르면 이 왕적 하사 언약은 이미 실행된 충성과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언약이며, 종주 조약은 앞으로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인장치다.
59) Levenson, 99.
60) Lynn Clapham, Mythopeic Antecedents of the Biblical World-View and Their Transformation in Early Israelite Thought, eds. F. M. Cross et al.(Garden City: Doubleday &Company Inc., 1976), 108-119. 이스라엘 종교와 그것의 환경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두 학파 중 신화와 제의 학파는 왕정기의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신화적(mythopoeic) 주변 환경과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 학파는 자신의 입장을 주창하기 위하여 이 학파는 왕정기 시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제의 재구성을 위하여 제왕시편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입장은 왕정 이데올로기 안에 발견되는 역사적 요소들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며 심지어 부족연맹체 시대부터 유래하는 보다 더 오래된 서사시적 전승들이나 시적 전승들 안에서 발견되는 보다 더 강한 (역사적) 요소들을 설명할 수 없다. 또 다른 학파인 구원사학파는 이스라엘의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주요 언어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고 주장한다(110).
61) 에누마 엘리쉬의 관련 단락들은 I. 71-77과 VI. 57-72이다(ANET, 61-72과 68-69).
62) Mettinger, In Search of God, 96.
63) Seow, 4.
64) Humphreys, 70.
65) Dumbrell, 47.
66) Roberts, “In Defense of Monarchy,” 386;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116. 이 두 학자 모두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언약이 많은 경우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덕성을 해치는 역기능을 했다는 인정한다(비교. 미 3:7).
67)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I, 311.
68) Hae Kwon Kim, The Plan of Yahweh in First Isaiah(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Unpublished dissertation[2001]), 237-273.
69) Roberts, “In Defense of the Monarchy,”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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