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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숭실 신앙 강좌-사도신경 심층 해설(10/24 수요일-김회권 교수)(210.2매)
주제: 기독교신앙은 여전히 가능하며 인류의 미래에 중요한가? 사도신경 신앙고백 심층 해설
1강 기독교의 공통 유산, 사도신경 고백의 의미--신앙고백은 얼마나 위력적인가?
사도신경은 매주일 그리스도인들이 공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교회나 신학교에서 사도신경을 깊이 있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도신경은 교회 밖에서 그리고 기독교 신앙 밖에서 기독교와 교회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조망점을 제시합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교회가 사도신경을 붙들고 계속하여 고백해옴으로써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정통 교회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캘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사도신경 해설을 첫 자리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가톨릭교회는 물론이요 모든 정통개신교회의 교파들이 한결같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으로서 기독교신앙의 근본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일치운동의 토대가 되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번 2007년 숭실인 신앙강좌는 사도신경 신앙고백을 심층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탈근대주의적인 의심과 다원주의 그리고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시대에도 여전히 기독교신앙은 가능하며 기독교신앙이 얼마나 위대한 유산인가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별 강좌의 제목:
1주차: 기독교의 공통유산, 사도신경 고백의 의미 -- 신앙고백은 얼마나 위력적인가?
2주차: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 --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 리는 이 세상에 악이 이토록 창궐할까?
3주차: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 신 나사렛 예수
4주차: 음부에 내려가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나사렛 예수 -- 지옥까지 널리 퍼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
5주차: 성령을 믿음 -- 성자의 요청으로 성부께서 파송하신 보혜사 성령
6주차: 거룩한 공회, 성도의 교통,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 미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1강의 얼개는 다음과 같다.
1. 기독교 신앙고백이란 무엇인가?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의 베드로의 주 고백의 의미
2.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적 상황
3. 사도신경의 내용과 의의
I. 기독교신앙 고백이란 무엇인가?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의 베드로의 주(主) 고백의 의미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다(막 8:27-30; 눅 9:18-21)
마 16: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5)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대문이)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곧 반석이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당신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인간적 조직이나 결사체와는 판연하게 구별된다. 교회가 주식회사, 동창회, 향우회, 가족, 국가 등 어떤 자연적 혹은 인위적 결사체들과는 구별되는 까닭은 교회의 머릿돌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고백 위에 건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부패하여 치리를 받고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수는 있어도 소멸되지 않는다. 교회의 머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현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현실 교회가 비록 아무리 실망스럽고 흠결이 많은 인간적인 모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직할통치를 받고 있는 거룩한 식민지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삼일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신앙고백 위에 건축된 교회는 로마제국보다 강하고 어떤 지상의 초강대국보다 더 강하다.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를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승천하셔서 세계를 통치하고 계시는 현재의 주이심을 믿는 신앙고백이다.
세계 역사는 사상과 이념으로 자기 이름을 내며 자기 왕국의 권세를 떨치려는 인간들의 건축토목적 분투로 가득 차 있다. 세계사에 출현하였던 제국들과 그것들을 다스린 전제군주들은 피와 폭력으로 그들의 성채와 호화로운 궁궐들을 건축한다. 세계사에 나타났던 모든 제국들은 세계를 경영하기 위하여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시도는 항상 바벨탑의 혼란으로 중지당했다. 우주의 대권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비하와 온유의 가치와 충돌한 어떤 인간적 건축물로 하늘 아래 존립될 수 없었다. 바벨탑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을 향한 교만, 자만, 압제적 지배, 그리고 권력의지의 무한한 강제를 의미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사는 하나님 나라의 건축과정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 자체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었다. 하나님의 명령과 진리에 복종하는 피조물들의 공동체, 생명연대 구조를 만드시려고 이 우주삼라만상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천지만물 통치의 위임을 맡은 왕적인 존재가 바로 아담과 하와였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 만물을 다스리기를 원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왕적인 존재로 세움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건축가들과 반대되는 방향이긴 하지만 인류역사를 통해 당신의 집(하나님 나라)을 건축하신다(엡 2:20-22; 사 28: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 건축가들이 버린 돌을, 즉 강력한 로마제국의 총독이 처형시킨 그 남자를 새로운 건물의 모퉁이돌로 사용하셨다(카를 하임, <개신교의 본질>). 그 위에다 그는 인간의 궁궐이나 성채들과는 전혀 다른 한 신령한 집을 세우신다. 그 신령한 집은 살아있는 돌, 즉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들의 인격(신앙고백)들로 건축된다. 이 영적인 집을 세우시는 방법은 인간의 건축방법과 완전히 반대된다. 여기서는 세상의 건축물과는 달리 인간 벽돌이 서로 겹쳐(連絡) 쌓여진다. 세상 건축가들의 눈에 볼 때는 지극히 위태로워 보이는 겹쳐 쌓여진 돌들의 연락(連絡)으로 지탱되는 건물은 땅 밑에 박혀있는 거대한 기초석에 의하여 지탱된다. 전체 건물을 떠받치며 가장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석층 주위를 선지자와 사도들이라는 마름돌이 에워싼다(엡 2:20-22; 요한계시록 21:14). 여기서 기초석 위에 건축된 신령한 집의 견고성은 살아있는 돌(신앙고백자)들의 연락, 즉 인격적인 신뢰와 위탁에 의하여 확보된다. 겹쳐 쌓여져 있지만 인격적인 신뢰와 상호위탁으로 연락될 때 이 신령한 집은 가장 견고한 구조물이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의 모임이나 단체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완전한 대리자)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요 1:12)들의 모임이다(마태복음 16:13-19).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마태복음 16:13-15에서 예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Caesar)를 주(主)요 신의 대리자(혹은 신)로 고백하는 로마 황제의 직할통치 아래 있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가이사의 은총으로 유지되는 도시 빌립보)에서 "누가 이 세상의 참된 주(主)인가?"를 물으신다(참조. 눅 3:1-3). 이 본문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항상 이 가이사랴 도상의 질문으로 소환된다. 누가 과연 이 세상과 개인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주재하는 주인가? 대한민국을 다스리는 주는 누구신가? 21세기를 주재하고 세계 운명을 향도하실 만왕의 왕은 누구신가? 대학의 미래를 결정하실 결정적인 주권이 누구에게 귀속되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결정적으로 구분짓는다. 먼저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알고 있는지 물으신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티나 레구신 호이 안드로포이 에이나이 톤 휘온 투 안드로푸](마 16:13) 제자들은 무리들의 예수 이해를 요약하여 답변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 참으로 정확한 관찰이었다. 세례 요한과 같은 폭풍치는 듯한 격한 회개 요구 설교와 하나님 나라 운동 때문에 예수는 세례 요한과 겹쳐 보였을 것이다. 예수는 일찍이 나사렛 첫 회당 설교를 마친 후 경악과 불신앙을 드러낸 청중들에게 자신을 외국인 사르밧 과부에게 인정받고 영접받은 엘리야와 비교한 적이 있다. 엘리야는 시대의 중심세력과 갈등을 빚던 고독한 예언자였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기적으로 민중들의 희망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예수는 아마도 이스라엘의 부패와 탄식, 특히 성전체제의 부패와 타락을 두고 예레미야처럼 반성전설교를 토해내셨을 것이며 눈물로 중보기도하셨을 것이다. 이 모든 면모가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 프로파일을 완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대중적인 단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궤뚫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너희들은)(강조 2인칭 복수대명사) 나를 누구라 하느냐?”[레게이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데 티나 메 레게테 에이나이](15절)고 물으셨다. 그 때 제자들을 대표하여(아마도) 시몬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아포크리데이스 데 시몬 페트로스 에이펜. 쒸 호 휘오스 투 데우 투 존토스[zaw[[자오]]의 현재능동분사남성 단수]=당신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God of the living]). 베드로의 이 고백은 “당신 자신이야말로 그 그리스도,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유다 왕국이 멸망당한 후 약 600년간 유대인들의 존재를 지탱시켜 온 신앙의 실체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끊어지지 않았으며 다윗의 후손이 와서 그 빈 왕위(왕하 25:25)를 다시 회복하여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 높여주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 외에는 유대인들을 이산과 유랑, 전쟁과 국토유린의 한많은 역사에서 건져 줄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스라엘의 국운을 회복시켜 주실 이상왕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다윗 계열의 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베드로는 이 신앙고백으로 예수의 지상 정치권력 장악을 부추기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가히 휘발유에 성냥을 긋는 행위였다. 적어도 복음서의 여러 장면은 예수가 왕으로 추대되거나 인정되는 분위기가 팽배했음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6:15 예수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다.
마태복음 19:28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너희들도 12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다.
마가복음 8장 22절 이하 장님 바디매오의 외침,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누가복음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자라고 바랐노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9:19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21절 자칭 유대인의 왕)
요한복음 12:15 예루살렘 입성시 스가랴 9:9의 인용,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 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마가복음 6:34 목자없는 무리를 위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요한복음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다(겔 34장 거짓 목자와 대비)
그 외에도 예수의 왕적 자의식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신앙을 나사렛예수에게 투사시켰다. 예수의 행동거지는 한편으로는 대중적인 기대에 부응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15절의 신앙고백을 바친 시몬에게 복을 선언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예수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결과였음을 밝힌다(마 11:25-27). 예수는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작정을 하신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길 것이며 하늘의 다스림을 지상에서 구현할 권세를 위임받을 것이다. 교회는 이처럼 베드로의 신앙고백(15절) 위에 건축되었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대문이)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당시의 로마 황제의 주권 고백을 반박하고 무효화하는 고백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로마 황제의 나라를 대체할 주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계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눅 2:1-2; 참조 행전 16:31). 예수님은 가이사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의 주라는 신앙고백을 유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여부에 따라 교회의 존폐가 결정된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당신은 그 그리스도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실 최종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성경에서 오랫동안 약속되어온 하나님의 대리자(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순종해 드리는 신적인 왕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많은 표적들과 사죄선언 등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대리 왕)라는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며 이런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는 단순한 자선기관이나 교양강의를 들려주는 종교학원으로 전락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드리는 모든 사도적 신앙 계승자들은 개교회의 마름돌과 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순간 우리의 신앙고백(가이샤라 고백)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돌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교회들은 마태복음 16장의 교회처럼 음부의 권세가 넘보지 못하는 생명의 진지에 미지치 못하고 퇴락하고 부패한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냉각시켰던 예수의 십자가 말씀을 놓쳤기 때문이다. 예수를 주요 스승이라고 고백했다면 예수의 행위를 모방해야 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부담을 안게 된다(요 13:13-15,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예수는 자신의 왕되심과 그리스도되심을 부인하거나 물리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20절). 당시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주는 엄청난 정치적 폭발력과 가연성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길은 그리스도의 길이지만, 유대인들이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시하신 그리스도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굴욕당한 유대인/이스라엘의 역사를 추체험하는 그리스도여야 한다. 죄로 인해 망가지고 심판당하고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져본 이스라엘/실패하고 부서진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되기 위하여 그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압축적으로 경험해야만 했다. 그래서 굴욕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 회복 드라마를 친히 재현하여야 한다.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많은 고난과 죽임, 삼일만의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사의 동선 그 자체였다. 베드로가 보기에는 너무나 예기치 않았던 메시야의 궤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인하는 듯한 행동을 한다.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당신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세차고 냉정하고 단호하게 떨쳐내신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의 일(고난과 굴욕을 거친 승귀와 영화)이 아닌 사람의 일(고난과 굴욕없는 영광의 길, 이스라엘 나라의 국권회복)에 몰두해 있기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유대 광야에서 만났던 바로 그 유혹자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직후 그리스도를 조종하려고 한 것이다. 예수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진실성을 십자가 말씀으로 검증하시려고 하신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요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주초가 되는 신앙고백이다. 가이사랴 주 고백, 신앙고백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름으로써 완성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 채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삶이 바로 신앙고백이요 이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 나라의 전위부대인 교회가 창립된다.
구약성서에서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 실체화되었던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 바실레이아=the reign of God)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집중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났다. 예수의 인격 속에 화육된 하나님 나라-몸소 하나님 나라인 예수의 인격, 메시지, 사역을 통칭-는 낡은 세계의 재편과 변혁을 의미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나사렛 예수의 생물학적 출생에서 시작되지 않고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의 제자들의 신앙고백(마 16:13-16, 특히 16절)에서 탄생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는 신앙고백-예수를 하나님에 의하여 파견된 대리자라고 고백-에서 시작되고 실체화되기 때문이다(크라우스, 조직신학, 14쪽). 나사렛 예수는 이 세상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 창조를 산파하고 향도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사역은 공동체 생활, 즉 사회생활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 안에서 낡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였음을 고지하였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간단없는 갈등과 충돌을 불러일으키며 인격, 제도와 법, 정치경제 및 종교 및 문화의 모든 요소에 위기를 불러일으키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결단”으로 소환한다.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 때에 즉 세계완성을 앞둔 길목에서 이 새로운 백성, 교회공동체에서 시작하고 현존하다. 성령의 피조물로서 교회는 도래하는 자유의 나라의 전위(前衛)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주기도문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외친다.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교회성장학적 신학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종말론적인 전위로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도 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 운동의 부정적인 객체로 전락할 불길한 중립성에 묶여 있다. 구원을 죽어서 천당가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지극히 타계주의적인 구원관을 극복하고 이 땅에 임하여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투신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세속주의적 무신론자들의 활천지가 될 것이다. 기독교신앙 고백은 이 땅에 임하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때문에 고난과 박해를 받아왔고 세계권력자들의 부단한 감시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의 모태가 되는 구약-히브리 사상의 무게중심은 이 땅과 역사 속에서 자라고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다. 요한계시록 22-21장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모두가 “땅”에 건설될 하나님 나라의 압축적인 비전이 아닌가? 기독교신앙은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 활동들 영역들에 하나님 나라의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이다. 땅과 역사, 그것을 사탄 세력이나 무신론 세력에 넘겨주고 하늘만 바라보는 것은 정통 기독교신앙이 아니라 영지주의적 이단사상이다. 이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은 육체 대신 영혼의 불멸이나 구원을 말하고 땅과 역사를 포기하게 만드는 악한 사상이다. 초대교회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예수의 몸의 부활, 그리고 그의 재림을 고백하다가 박해를 감수한 까닭은 하나님 나라가 부조리와 불의와 폭력과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임할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II.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적 상황
초대교회는 목숨을 걸어놓고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왕권을 공공연히 선언하다가 희생을 치렀다. 지상 권력자들이 기독교적 가치와 양심을 부정하고 유린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고백으로 맞서며 순교로서 신앙을 지켰다.1) 구약의 예언서들이나 다니엘서 등은 신앙고백으로 당대의 신앙적 위기를 대파국으로부터 건져냈다. 주전 8세기의 네 예언자들인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미가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고백함으로써 어떤 나라나 왕조와도 동일시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명성과 이름이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국의 존립이나 번영, 몰락이나 패망 여부에 상관없이 초월적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세계를 제패한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제국의 취약성, 임박한 멸망을 예언하고 야웨 한 분 만이 참 하나님임을 고백하였다. 안중근이나 주기철 목사, 숭실대학교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위세를 떨치던 바로 그 시점에도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며 하나님에 대한 지조를 지켰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의 칼 바르트, 디히트리히 본회퍼 등은 독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에만 복종하는 고백교회를 창설하여 나찌즘의 광기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왕권을 고백함으로써 지상 권력자들의 교만과 자기파멸적인 광기에 맞섰던 것이다. 이 신앙고백적 상황의 백미는 유대교와 로마제국 당국을 상대로 예수는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적 전통은 악한 정사와 권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에 대한 저항과 맞섬을 확정짓는 전통이었고 그것이 바로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속에 계승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런 신앙고백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들이, 막 8:38, 로마서 10:9-10, 고린도전서 12:3, 빌립보서 2:6-11, 그리고 요한계시록 22:20 등이다.
1. 예수는 저주받은 자인가? 주(主)인가?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주라는 고백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제일 먼저 시작한 신앙고백이요 복음선포의 형식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통치자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행자로 행세하면서 죄인에게 죄사함을 선언하며,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하다가 대적자들에게 의하여 무참히 죽음을 당했으나 다시 부활하신 스승 예수를 보고 그가 과연 하나님의 대행 통치자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시편 110편 1편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를 자신의 우편 보좌에 등극시켜 자신의 주권을 대행하게 하셨으니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예수는 주시라는 고백은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신앙고백 등과 같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요 복음선포 양식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1-3의 맥락에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지 여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령의 진정한 역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은 주님이라는 고백을 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것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시고 만유의 주로 높이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서 그 고백을 하는 자로 하여금 죄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주권영역에서 해방되어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이전함으로써(골 1:13) 구원을 얻게 하는 고백이다. 이 예수=주라는 고백은 세상 지혜로는 할 수 없다(고전 1-3장). 누가 이 세상의 지혜로 동족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가 십자가에 달려 처절히 죽어간 그 예수를 그 연약한 패배자를 온 세상과 온 인류의 주님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고백하면 순종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겠는가? 오로지 성령이 사람들의 영적 눈을 뜨게 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대한 진리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2)
사도행전 2:34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약간 다른 말이다. 당시에 주(主, kyrios)라는 말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신적 대권을 가진 왕을 의미하였다. 고대 로마 제국 안에서는 제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만 사용된 호칭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종교의 창시자에게도 주(主)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황제의 주권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로마 총독 관저(官邸)가 소재하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다(마 16:16).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主) 고백을 요청하실 때는, 우리가 우리에게 절하라고 하는 거짓 주들을 거절하고 배격하는 담력을 발동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일은 어제나 오늘이나 박해와 따돌림을 초래하는 일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목사님, 우리가 로마 제국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네요. 우리가 로마제국에 태어났으면 사자 밥이 되었을 텐데요. 우리가 이 자유로운 시대에 태어나서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 로마제국시대 때에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할 때 대가(代價)를 치뤘던 것처럼,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와 다원주의 시대에 주 예수 한 분만에게 모든 충성을 바치고,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이자 고통을 초래하는 행위임에 틀림없다.3)
그리스도라는 말은 부왕(副王)이라는 뜻이다(Second King). 헬라어 그리스도(christus)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마시아흐’(massiaḥ)를 번역한 단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신정통치의 인간 지도자를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 후기에 갈수록 마시아흐는 다윗의 왕위에 오를 이상적인 왕을 의미하는 명사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조선에는 아버지 왕 옆에 아들 왕이 아버지 왕의 보좌 오른 편에 작은 보좌를 갖다 놓고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런 왕을 섭정(攝政) 왕(王)으로 불렀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 왕을 의미하였다. 주전 8세기의 유다 왕 웃시야가 재위 기간 중 마지막 십년 이상을 문둥병에 걸려, 별실(別室)에 거하면서 나라를 다스린 적이 있다. 그 때 왕세자였던 아들 아하스가 웃시야 왕을 도와서 섭정 역할을 했다. 아하스 왕은 웃시야 왕의 보좌 옆에 작은 보좌를 오른쪽에 설치해놓고, 아버지 왕을 도와 섭정으로서 나라를 대리 통치한 것이다.
신학적인 의미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代理) 왕(王)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부왕(Second King)을 뜻한다. 부왕은 항상 아버지 왕의 오른편에 앉아 아버지 왕와 함께 공동통치를 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왕(副王)을 뜻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런 의미의 부왕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우신 것이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이런 정통적인 이해는 성령의 조명과 감화감동 사역의 결과다. 신앙은 성령의 선물이다.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마음 눈이 열리지 않는 사람들의 눈(배교자)에는 예수가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죽은 것처럼 보인다(신 21:22-23; 비교. 갈 3:13).
2. 입술로 드리는 고백, 가장 궁극적인 고백-종교박해자 혹은 취조관 앞에서의 입술 고백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본문은 박해 상황을 상정한다. 이 경우 입술의 시인이 궁극적인 시인이다.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유대교 당국자들에게, 나중에는 로마제국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어 입술로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음을 믿었다는 이유로 고초를 당하고 산업을 빼앗기고 파문을 당하였다. 입술로 드리는 신앙 고백은 최종적이고 가장 전폭적인 신앙고백이었다.
3. 예수가 주(主)로 등극하게 되는 자세한 논리적 과정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본문은 다툼을 통해 수월적인 존재(높아지려는)가 되려는 모든 원초적인 권력의지에 대한 가장 심오한 신학적 성경적 비판을 담고 있다. 이 말씀은 허영에서 비롯된 다툼,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마음, 인간의 권력의지 등에 대한 성경의 궁극적인 답변이다. 경쟁과 각축의 잠정성과 허무성에 대한 신적 비판이며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한다. 빌립보 2:1-5은 복음에 합당한 삶, 천국시민들의 교회생활상은 일치와 연합임을 말한다. 특히 3절은 이기적인 야심이나 헛된 자만심에 의해서는 어떤 일도 하지 말고 오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한다. 4절은 성도들은 무릇 모두 자신의 이익들을 돌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권면한다. 5절은 결론적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태도는 그리스도의 태도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6-11절은 그리스도의 마음 태도를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마음 태도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절대순종과 겸손이다. 이 절대 낮춤과 순종이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여야 할 근거가 된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탈취(하르파그몬=harpagmon=robbery, ουχ αρπαγμον το ειναι ισα θεω)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 자신을 무화(無化)시키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는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얻기 위하여 동산 중앙의 선악과 열매를 탈취한 사건을 회상한다.4) 둘째 아담은 첫째 아담이 걸어간 길을 창조적으로 반전(undo)시키신다. 아담은 불순종과 자기존대와 오만한 시도를 통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였으나 예수는 근본 하나님이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기비하요 낙차 큰 자기강하였다. 자신을 낮추시되 죽기까지-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이 극단적 자기비하가 그의 주권과 왕권의 항구적 근거가 된다(행 2:23-38; 막 10:35-45). 자기를 만물의 찌기같이 비우고 낮춘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최고로 높이셨으며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의 이름은 “주와 그리스도”다. 초대교회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역사하고 작용하는 원리를 알았다. 로마 황제처럼 군사적인 정복자가 무력시위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절대겸손으로 자기를 비우는 자가 인류를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내어줌(radical availability)을 통해서 다스리신다. 다스린다는 말은 자신의 모범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 오게 하는 것, 모방과 추종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다. 우리로 하여금 그를 모방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의 이름 권세다. 그의 주권이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의 주권적 위력을 맛본다(행전 3장).
그리스도의 주권 고백은 이 어그러지고 패역한 세상에서는 대항문화요 대항공동체를 건설하는 주초다. 특히 로마 황제 가이샤를 주(kyrios)라고 고백하는 빌립보 사람들 한 복판에서 십자가에 달려죽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정치적 모반이요 저항이요 체제전복이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거짓 주들의 폐위운동이요 축출이다. 빌립보를 하나님 즉 그리스도의 식민지로 만드는 운동이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이 그들의 품격과 자랑으로 로마제국의 신민(subjects=citizens)임을 증명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는 천국시민권자다운 품격과 자랑(자부심)을 드러내어야 한다. 11절에는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방법이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가장 낮춘 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 즉 예수님의 가치를 주가치로 숭상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셈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의 왕과 천국의 시민은 스스로를 낮추고 강하하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높혀진 인물들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자가추진 엔진에 의하여 발동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작동된다. 하나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비하 위에 구축되어 있으며, 자신을 남보다 더 낫게 여기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 나사렛 예수를 공공연히 주라고 고백하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 나라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키고 전복하며 거짓 주들을 역사로부터 퇴출시키고 폐위시키는 데 있다. 예수를 주라고 공공연하게 고백하고 그 고백을 삶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나라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복된 공격이다.5) 결국 거짓 주들과 왕들이 폐위되고 퇴출되면 하나님께만 홀로 영광과 존귀를 바칠 수가 있다. 하나님께 바쳐질 영광과 존귀를 가로채는 경쟁주들과 왕들의 완전한 무장해제가 일어난다(골 2:15; 엡 1장과 6장 10-14절; 고전 15:22-28; 벧전 3:18-22). 모든 천상적 존재들과 유성과 항성들(신으로 숭배되는 천체들 및 천사들)의 마성적인 힘은 분쇄된다. 그러나 로마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종교박해관 앞에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롬 10:9; 고전 12:3). 아무도 성령의 내적 강력에 휩싸이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이 잠정적으로 경쟁과 업적지향, 공로주의적 세상에 자기를 높이려는 자들, 권력의지의 생생한 충돌 현장에서 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4. 예수가 저주받아 죽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고백했던 초대교회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 21:23)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5.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로 승귀되셨다는 신앙고백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6. 몸의 부활 고백은 영혼불멸을 주장했던 헬라 세계에서 초대교회가 던진 가장 거룩한 도발이었다.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롬 1: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7. 재림 기대는 초대교회 신앙고백의 핵심이었으며 초대교회는 재림하실 예수가 세계의 심판주가 되실 것을 믿었다.
막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계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살전 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8. 하나님 나라는 새롭게 된 땅에 건설된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III. 사도신경의 내용과 의의
사도신경은 모두 일곱 가지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첫째, 나는 전능하신 그리고 선하신 영적 및 물질세계의 창조주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둘째, 동정녀에게 탄생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셋째, 나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 승천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넷째,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다섯째, 나는 거룩한 공회이자 성도의 교통인 교회를 믿습니다.
여섯째, 나는 심판과 심판의 면제인 죄사함을 믿습니다.
일곱째, 나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신앙 싸움에서 그 당시의 질문과 대답에서 유래하였다(로흐만, <사도신경해설>). “교리사적인 전승의 근거를 상실한 신학은 재빨리 평면화되고 비생산적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전승의 증거들을 취급한다. 사도신경은 개방되고 비판적인 대결 가운데서 상대화 하면서 이해되어지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신경의 삶의 자리는 아마 초대 교회의 세례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세례받는 자에 의해 고백된 것이 아니라, 세례 베푸는 자가 질문의 형식으로 제의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세례 사건에서 지시한 바와 같이 구속력을 지니는 신앙의 결단에 일치한다. 3세기의 세례문답으로부터 신앙고백의 선언적인 형식이 생겼다. 교회들은 상세한 부분에서 상이성을 갖는 세례고백들을 형식화 했다. 로마 교회에서 사용된 것이 가장 영향력이 많은 고백으로 되었다. 4세기에 사도신경은 어느 정도 첨가와 변화가 일어나며, 6세기 서부 코오트 지역의 스페인과 갈리엔(프랑스)에서 작성된다. 이 텍스트는 오랫동안 서방교회에선 경전화가 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정치적 발전에 연결되어 있다”(로흐만, 같은 책).
사도신경의 믿음(신앙): “나는 믿습니다. 아멘.”
레온하르트 라가츠는 믿음을 적극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의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서적인 믿음의 이해에는 이 그리스도를 뒤따름, 그 나라의 바른 실천이 문제가 된다. 참된 믿음은 앎에 있지 않고 신뢰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은 이해, 통찰, 인식을 지향하되 신뢰에 찬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입술에서 시작된 신앙은 손과 발 신체 활동을 통해서 완성된다. 신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진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고 일련의 교리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기독교신앙은 사랑과 신뢰 안에서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하는 인식이다. 믿음은 진리의 신실한 계약의 영역에 닻을 내린다. 믿음의 요소는 존속성, 항속성, 신뢰성(의리)이다. 믿음은 미리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히 11:1-3).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약속을 이 세상에서 앞당겨 구현하는 모험을 가리킨다. 나사렛 예수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사람들에게 철저한 삶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믿음으로써 산을 옮기는 것을 기대하는 때, 예수도 바로 이런 의미의 믿음을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교신앙은 이 물질적 세계관의 일차원성으로부터 우리 자아와 문화를 해방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사회에서 "일차원성"(하나님과 접촉을 상실한 자기폐쇄성)에서 제한되고 평균화된 삶의 이해와 그에 상응하는 실천적인 경향에 긴장감을 느끼며 부딪친다. 하나님 없는 무신론적 자기충족성의 세계가 바로 일차원적인 세계다. 하나님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는 세계, 자폐증적인 자기충족성이 바로 일차원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은 지금 우주의 창조주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기 방에 갇혀 문명의 레고놀이에 몰두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성서적 믿음은 인간학적인 또는 구원론적인 개인주의나 집단주의 위에 일방적으로 고착되지 않는다. 나와 우리, 우리와 나는 통일성 안에서 함께 듣고 말해져야 한다. 이런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있어서 인격적인 결단에서 사도신경은 생성되었다. 이 결단은 과거와 분명한 생의 상황과의 결별을 뜻하며 인격적인 희망과 책임 아래에서의 좁은 길을 선택함을 뜻한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고립화된 개인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이 고백을 드림으로써 형제자매의 포괄적인 사귐 안에로 들어간다--단지 수평적, 사회적으로가 아니라 수직적, 신학적으로 견고하게 짜여진 사귐과 우정으로 초청된다. 사도신경에서 기독교신앙고백은 자기응시나 자기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명령과 초청)에 대한 대답으로서 성 취되고, 그리스도를 뒤따르고, 그 자신을 넘어서서 그 대상과 관계된다.
그것은 일곱 가지 사실(진실)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1) 나는 믿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영지주의의 물질세계 부정, 현실생활의 가치부정).
로흐만 보설: “신학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과학의 지배 아래서 신학의 진리는 시대착오로 지난 시대의 유물로 낯선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나님의 주제에 대해 쉽게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나는 동부 유럽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의 체제 아래서 동부유럽의 사회와 문화는 "하나님"이란 주제를 인류의 연대기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한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주제는 작은 역할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이 시대의 문화와 문화적인 유산과의 관계에서 종교는 침묵을 지켜야 했고 최고의 적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앎, 양심, 삶과 죽음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인격적인 참 모습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관성이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여 특별히 해방하는 현실로 경험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교회의 위치가 사회의 중심 영역에서 물러났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그 사신(메시지)을 가지고 교회 밖에서, 그리고 비기독교인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성서적으로 인격적인 삶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적인 삶과도 관계된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분리될 수 없게 관계되어 있다. 성경 계시의 주제는 평화와 정의의 새 나라에 대한 동경을 말한다.......같이 서부 유럽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의 크레도(Credo)는 생과 현실성의 문제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에 관한 주제가 그 자명성을 상실했다는 것, 세속화된 공업 사회에서 이 주제를 이해시키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한탄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개방된 사회의 전망의 빛 에서, 하나님에 관한 주제는 생각해 볼만한 것이며, 믿을 만한 주제가 되는 기회로 포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한국여신학자 협의회-“‘아버지’ 하나님 삭제하라”는 요구 검토)
로흐만 보설: 나사렛 예수가 말한 이름에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강조가 표현되어 있는 것을 신약학자들은 확인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날카롭게 한다. 즉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변화시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섬세한 현재, 사랑과 신뢰의 동기를 전면에 표출시키고 가장의 권위적인 요소를 뒷전으로 물러나게 한다. 예수의 호칭은 압바(Abba)이다. 이 개념은 희랍어로 표현된 아버지(pater)보다 어린애다운 친밀한, 간단한 호칭이다.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의 전적인 주권과 아버지의 초월적인 권위를 표현할 줄 알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가부장적인 권위 아래서 이해하는 것은 중대한 오해였다. 사도적인 아버지 이름을 기독론적으로 정착할 숙고가 중요하다. 전적으로 비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다.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압바" 연구에서 아버지의 모습과 탕자의 비유가 표현하고 있듯이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권위적인 사고방식의 연장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대한 폐기를 지시한다.
폭력이 없는 전능의 하나님
구약적인 전능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출애굽 사건과 계약의 콘텍스트를 주목해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은 악한 파라오체제로부터의 해방 사건에 기초되어 있다. 또한 신약에서 하나님의 전능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경험되고 부활 사건을 고려하여 증거된다. 사도적인 부활 사신의 전망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능은 나사렛 예수의 운명 안에서 구 체적이 된다. 성서의 증언의 이해에 의하면 여기에 영과 힘의 놀라운 표시가, 즉 폭력 없는 사랑의 탁월성과 전능이 있다. 폭력 없는 사랑의 힘은 전능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고백자가 알아야 될 방향을 지시한다. 이것은 모든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이기심을 몰아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어떤 지표를 제시할 수 있는 방향이다. 전능한 아버지에 대한 고백의 참된 아멘은 폭력이 없는 사랑의 실천에서만이 현실적으로 증명된다.
세계긍정과 세계비판의 과제로서의 기독교신앙-땅과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 신앙고백의 의미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세계를 외면하고 계시지 않다.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 하고 새로운 현실을 일으키려는 결심을 지니고 있다. ⑴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신학적인 세계 이해의 기본 구조를 규정한다. "창조는 우연성에서 기초되고, 그 존속은 항구성에 있다." 이 둘은 강조되어야 하고, 분리될 수 없는 상호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의 신앙은 세계를 비신화화하고, 가치와 상태의 모든 절대화를 거부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창시적인, 종말론적인 긍정의 빛 안에 있다. ⑵"하늘과 땅"의 표현의 의도는 시간에 제약된 표상들과 함께 서 있다. 이 의도는 시간에 제약된 표상들과 함께 서있다. 이 의도는 관찰과 자료가 변할지라도 불변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창조는 그의 가시성에서, 물적인 존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구분, 피조물인 하늘의 현실을 망각하고, 기술 공학의 세계를 유일한 본질적인 현실성으로 높이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정도를 넘게 되었다(휘브리스).
그래서 인간 존재는 유한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피조물이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 피조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서적으로 "영광의 인간학" 세계와 인간의 자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조자란 생의 한가운데의 시작과 마지막에 하나님의 계약 안에 받아들여진 창조와 관계된 존재이다. 인간 존재의 권리는 하나님 자신 안에 기초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무조건 가치가 있다.
(2) 나는 믿습니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현설[假顯說]에 대항-예수의 인성을 부정)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신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기절설, 소생설, 시체도난설, 유령환상설에 대하여 대항하는 신앙고백)
-하늘(하나님 우편 보좌로부터)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재림불신론 대항)
로흐만 보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사도신경의 핵심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는 짧은 명제에서 오스카 쿨만은 초대 교회 신앙의 고백에 대한 그의 연구를 요약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 교인들의 신앙의 진술은 끈덕지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운명을 선회한다. 그 출발점은 동시에 기독교 운동의 중심점이고, 역사적인 근거이고, 교리적인 기초이다. 그리스도의 고백에서 사도적 신앙의 심장은 고동친다.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독론적인 집중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반적인 종교사의 전망에서 볼때 하나의 도전이고 파격이다. 사도는 이것을 거침돌(Argernis)이나 어리석음(Torhit)으로 간주한다(고전 1:18-23). 사도신경은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불쾌감을 일으키는 이 역사에서 하나님의 현재를 고백한다. 우리의 고난과 삶의 역사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무감각적인 밖에서 개선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같이 고생하시고 투쟁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의 도래할 나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 안 에서"현재한다.
종교사적으로 중요성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를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희망의 정치적인 구원론적인 차원,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와 예루살렘의 영광에 대한 기대는 메시아의 기대와 연결된다. 메시아의 칭호와 관련하여 베드로가 예수에게서 고난의 주제를 배제시키려고 할 때,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였다(유대교와 그리스도의 결정적 차이다). 그의 사명은 정치적인 의미를 애당초 거부했다. 예수의 지배는 봉사에서 실현된다. 해방을 시키는 사랑의 말과 행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했다. 그는 구속사적인 약속의 성취자였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의 사명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생활의 성격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형식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밀접한 연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에게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주는 우리 신자를 향하여 사용되는 칭호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가 희랍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주"는 정상적인 인간의 이름을 지닌 역사적인 인격에서 나타났다. 신앙의 고백의 근원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생과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구속력이 있는 삶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신성고백): 아들을 보내심에서의 하나님의 출애굽
하나님 아들의 주제는 고대 이집트와 신약의 헬레니즘 환경에서는 자주 사용된 잘 알려진 개념이며 예수에게서만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에서도 구약적, 유대적인 맥락에서 이해된다. ⑴하나님 아들의 동기는 먼저 그리스도 역사의 내적인 차원을, 예수와 아버지와의 유일한 관계를 표현한다(요한복음 5장, 14장-천의무봉한 인격적 연합과 신뢰). 그의 행위와 고난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일어난다는 확신은 공관복음서의 예수에게서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⑵하나님 아들의 주제는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외부로 향한 그리스도 역사의 차원, 즉 그의 선교, 봉사를 규정한다. 이것은 신약적인 “하나님 아들에 대한 이해”의 근본 방향을 규정한다. ⑶아들의 사명과 운명은 우리의 운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 아들"에 관한 주제를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의 신성의 주제"가 설명된다. 사도신경은 우리의 구원과 해방의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한다.
모든 지배권의 가치전도로서의 주 예수
내용면에서 주(큐리오스, 主) 주제와 연결된 세 가지 국면이 신앙의 기독론에 있어서는 특징적인 것 같다. 첫째로 주님이란 고백은 그가 구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안내판을 말한다. 주의 칭호는 확실히 부활에 관계된다. 둘째는 주님의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현재와 그리스도인의 현재가 규정된다. 셋째로 이 고백에는 개인과 교회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류와 전 피조물의 운명이 드러난다. "주"의 고백은 역사적인 현실에서 표현된다. 예수의 주권은 고백자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인 영역에 증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교의적인 일치에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 중 특히 왕의 직무가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강조에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정치적인 책임을 위한 노력이 수반된 것은 우연일 수 없다(벧전 2:5-9).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윤리적인, 정치적인 생활에 상응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믿음을 갖고 고백할 수 있다. 따라서 주 예수를 증언하고 뒤따르는 두 방식, 즉 교회의 영역과 세계의 영역은 구분되어야 하나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를 갖는다. 바울은 우리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역사의 관련성에서 물으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주님을 뒤따르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진력하는데서 정치적인 차원이 열린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다른 우상들과 맞선 것처럼 모든 새로운 바알과 가이사의 신성에 대하여 양심적으로 맞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정녀에게 나신 그리스도 고백
말씀의 성육신, 영의 인간화는 사도신경의 중심주제이다. 기독론적인 주제에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있고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본성으로만 환원시키려고 한 순수한 단일성주의의 경향은 교회사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두 화살(신성과 인성) 중의 어느 하나가 상실될 때, 믿음의 기초도 흔들린다. "성령으로 잉태하사"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이 짧은 명제로서 나사렛 예수의 출생과 근원에 대한 문제의 초점은 맞추어지고 대답된다.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그의 출신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의 근원은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한 수태 이외 다른 어떤 것도 문제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그의 영에 의한 주도권의 관여이다. 사도신경에는 성육신의 성탄절 역사의 운동, 방향, 흐름이 분명하게 파악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인간적인 역사이다. 양자 중의 어떤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는 처소엔 인간의 이성, 활동, 경건성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문제이다. 거기에 하나님 자신이 현재한다>. 동정녀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어떤 동역적인 협력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권과 은총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이 놀랍도록 혁명적인 성격으로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혁명적인 대답에서, 인간의 독자적인 구원이 아닌 은혜의 역동성을, 잔인한 인간성이 아닌 은총을 입은 인간성을 주목해야 한다.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시종일관 은혜의 신학에 관련된다.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는, 강제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오는가에 대한 사신이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사........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의 성육신을 논의한 후, 기독론의 참 인간성에 대한 문제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인식은 고대 교회에서 결코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는 신약성서의 배후에서 시작한다. 예수의 인간적, 물질적인 성격을 완화시켜서 상징적인 가상으로 환원하려고 한 가현설은 고대 기독교가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시험이었다. 예수와의 만남에서 인격적인 현실성의 어떠한 영역도 제외되지 않는다. 신약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그렇게 경험했다.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지시로서, 그 구원이 인간의 전체적인 삶과 세상의 모든 현실에 관계된다면, 사도적인 그리스도의 증거는 우리의 윤리적인 책임을 확립시킨다.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윤곽을 보여주며, 그를 따르는 자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각인해주고, 그에 대한 신앙을 구속력있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빌라도 아래서"라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력하게 부각시켜 준다. 이로써 그리스도 신앙의 현실성과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진다. 이것은 역사적인, 정치적인 구체성에서 수행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빌라도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인 관련성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위치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실제로 중요하다. 칼바르트는 빌라도의 이 역할을 관심있게 추적하였다. 바르트는 그의 논문 "정당성"과 "법" 에서 예수와 빌라도와의 만남을 기술한다. 국가의 제도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바울의 지시는 오늘날에도 주목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물론 교회사적으로 이 지시가 오용되어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고난받으사"라는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마지막 날의 수난을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예수의 출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전 삶과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싶다. 그의 삶의 스타일은 고행을 하고 있는 금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생의 기쁨을 동시대인들과 같이 나누었다. 그의 주변의 반응으로 보아서 그가 어떠한 생활을 영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복음서의 시각에 의하면, 고난의 삶은 예수에게서 불행한 삶을 뜻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그의 사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이다.
죄와 죄의 결과는, 신경의 첫 조항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둘째 조항의 배경에서 표현된다. 예수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파괴적인 것의 파괴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했다. 그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한 목적에서 이해되어 져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을 하나님께 저항하는 인간적인 죄의 힘을 타파하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이해한다. 적극적으로 믿는 자는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은 자"를 뒤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십자가의 사건은 교회의 정초와 사도적인 신앙의 근거를 위해서 중심되는 주제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쉽게 평면적으로 도식화하려들고, 십자가 신학에 본래적으로 내재하는 그 다양성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요셉 라칭거(현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하면 십자가는 타자를 위한 전적인 자기 희생, 즉 아가페 사랑의 철저성으로 나타나 있다. 복음서들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사랑의 철저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적용된다. 십자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 십자가의 역사적, 전기적인 배경들이 주의 깊게 관찰되어야 한다. 십자가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구체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의 결과는 쓰고 끔찍하다. 그는 끔찍스런 육체의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만일 그의 십자가가 사랑의 결과에서 유래하지 않았다면 믿음과 희망의 기반은 흔들렸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괴로와하심
십자가의 이 종말론적인 구원론적인 면들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검토되고 보충되어야 한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진 거기에서, 우리의 삶이 끝장난 거기에서 우리를 찾아 발견했다. 십자가의 이 종말론적인 차원의 숨은 의미를 밝혀 우리들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종말론적인 역사에서 우리의 구원사, 즉 하나님과의 우리의 화해, 우리의 해방과 구원이 문제인 것이다. 구원론의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저편에, 역사의 피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에, 죄와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여기에, 소외의 조건들 안에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는 우리의 역경과 순경에 함께 계신다.
그래서 예수의 삶은 남을 위한 삶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위태롭다, 위험하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고난 받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헌신은 바로 억압된 자와 소외된 자, 삶의 권리를 빼앗긴 자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사" 라는 말은 신학의 숙고를 위해서, 신앙의 실천을 위한 윤리적, 정치적인 결과를 위해서 중요하다. ⑴십자가의 회상은 삶과 이해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십자가의 기억은 모든 역사 속에 스며있는 고난의 땀을, 역사의 상처를 장미로써 위장하려 하지 않는다. ⑵신약성서적인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이 바로 정치적인 사건에 현재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다.
쓰라린 최후까지
"죽으시고" "묻히시다"라는 이 진술은 십자가 사건의 최후적인 성격과 예수의 인간성의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드러낸다. 하나님 아들의 우리와의 연대성은 인간의 최종적인 한계로서의 죽음에서도 보여진다.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말은 사도신경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이 시작하는 것을 본다. 한편 칼빈과 대부분의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지옥행"은 신화론적으로 이해되었다. 나는 루터와 칼빈이 사도신경의 어두운 진술을 같 은 관점을 가지고 해석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지옥행은 삶 전체에 관련된 예수의 해방의 역사의 넓이와 깊이를 지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의 부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우리는 하늘과 땅, 우리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 삼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십자가는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역사적인 현실성을 넘어서는 부활은 파악될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 부활 자체는 역사적인 검증의 성격을 넘어선 문제이므로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성과 관계를 갖고 있는 증언의 차원은 남아 있다. 기독교의 부활 사신은 좌경의 진영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죽음의 힘을 극복한 희망의 사신으로서 이해되고 실제로 그렇게 증거된다. "삼일"이란 시간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공백으로 남아 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시간이 삽입된 것 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교의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삼일"은 부활 사건의 현실성을 상징적-변증법적으로 비현실화시키고 그 현실성을 제거하려는 일체의 유혹과 맞서게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유일회적인 부활 사건을 의미한다.
신약의 관점에 의하면 부활에서는 최종적인 자와 최종적인 것이 문제이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모든 인간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서 성취된다. 동시에 부활은 최종적인 것을 지시하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신약 성서의 부활의 증언에서 우리는 이 면을 간취할 수 있다. 완성된 해방과 화해의 새 창조는 부활 신앙에서 보면 상호 관련성을 갖는다. 부활의 이 종말론적인 지평이 이해된다면 부활사건의 최종적인 성격은 보다 더 잘 드러날 것이다. 부활의 매체는 설교, 믿음, 그리고 부활의 프락시스이다.
부활의 결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제적이. 이 부활의 현실적인 결과들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관계 된다. 그 중에 우리를 가장 괴롭힌 것의 하나는 숙명론의 유혹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활의 현실성과 신앙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부활신앙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자포자기를 타파한다. 부활의 사신은 십자가 아래서, 역사의 숙명적인 경향과 극복을 부활의 빛에서 보면서 집요하게 좌절과 체념과 대결한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새로움의 가능성은 신앙고백의 전망에서 결코 파탄된 것은 아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거기에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시리라..........
우리는 여기에서 "오르사, 앉다, 다시 오시리라"는 시간의 세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신경이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와 미래를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이 본질적인 면을 우리는 교의학에서 주목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 오늘, 내일의 시간들에게 불변의 주제인 것이다.
승천은 근원적인 신앙을 "신화화"한 것이고 "실체화"한 것이라는 두 비판은 검토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실천에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부활과 성령 강림과 연결된다. 부활과 오순절은 사도들의 신앙의 프락시스의 기초이다. 승천의 주제는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급하게 비신화화될 수 없을 것이고, 우선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역사는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재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해방하고, 구속력을 갖게 하는 의미에서 기독교의 희망 전체와 관련된다.
심판에서의 구원
최후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와 구별된 일반적인 주제일 수 있다. 심판의 주제는 기독론적으로 구체화해야 할 것이다. ⑴ 교회 전승들의 개념과 분위기를 어둡게 한 최후 심판의 주제가 기독론적으로 채워진다면 그러한 분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결단과 구별없이 기준과 분별없이 영위되지 않는다. ⑵ 이 전망에서 보면, 최후 심판의 전승에 관련된 다른 요소도 청산된다. 즉 신약성서적인 종말론과 심판의 말들을 이런 대칭적인 방식으로 고착화시킬 수 없다. ⑶ 예수의 사신에서부터 최후 심판의 기준은 드러난다(마 25:31-46). ⑷ 예수의 구원사의 관련에서 최후의 날은 궁극적인 해방의 날, 그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⑸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 자에 대한 기대와 전망은 바로 개인의 삶에 관계한다. 이 전망은 거짓된 판단과 인간적인 심판으로 뒤엉켜진 것에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는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이 진술은 시대와 관련성을 갖는다. 여기에 예수 사신의 중심적인 주제, 죽 하나님의 나라가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의 아들의 삶에서는, 따라서 기독교인의 신앙에서는 개인적인 업적의 성취나 교회 자체의 어떤 과제의 성취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 그의 끝없는 나라가 중요하다.
(3) 나는 믿습니다. 성령을. 혹은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로흐만 보설: 성령을 믿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영을 망각했는가?
성령은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을 실재화하신다. 성령은 참여의 힘이다. 인간은 이미 첫째 조항과 둘째 조항에 서의 창조자의 피조물로서 역사적인 고난과 죽음의 고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계약의 동반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의 동반자이다. 하나님은 주체적인 존재로서 인간에게 말을 건다. 우리의 대답을 기대하고 그의 업적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기대한다. 겉으로가 아닌, 우리들의 내면적인 참여를 그는 기대한다.
성령은 현재하는 그리스도시다. 영은 예수의 사신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프락시스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주는 영이시다"라는 이 공식은 신학적인, 윤리적인 성격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움직여진 사랑이 영의 최종적인, 표준적인 은사와 영의 현재를 결정한다. 예수의 부재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공허에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별의 시간은 체념의 시간이 아니라 세계 속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시간이다. 압도적인 영의 현재는 신약성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주님의 현재로서 파악된다. 이러한 관련성에서 "주님은 영이시다"라는 명제도 현재에 대한 고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자유한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
그리스도 영의 현재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내재적인 세계에서 일어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 세 번째 강조로써 자유한 인간의 신학적인 의미가 아주 명백해진다. 성령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유한 아들을 창조한다. 예수의 영의 분명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얻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성령을 지시하는 것은 동시에 다음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신에게만 시선을 집중 하고, 자신 속에서만 맴돌고, 초월과의 다리 - 이웃과 하나님과의 다리 - 를 파괴한다면 그러한 동경은 그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 자기 경험은 자기 구원이 아니고, 발견도 아니다.
성령의 운동은 외부의 갱신을 목표한다. 성령의 운동은 인간 밖으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이것을 가능케 한다. 성령론은 교회론과 종말론을 지나 더 나간다.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로서 먼저 교회의 영이다. 성령의 몸은 교회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상하는 것은 신약 성서적인 교회론의 명쾌한, 가장 생산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에 거한다는 성령의 장소규정은 구체적인 신앙의 공동체를 단순하게 받아들이거나 교회를 인간적인 현상에다 그대로 내맡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밖을 향한 선교의 첫 발걸음은 교회의 내적인 삶과 밀접히 이어져 있다. 교회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교회와 함께 교회를 넘어선다. 밖으로 향한 증거는 교회사와 교리사의 넓은 흐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성서적인 성령론의 열려진 전망은 자주 가려졌고 좁혀졌다. 성령의 교리화, 개인화, 제도화는 저지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시대에 제약된 것을 혹은 유토피아적인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의 역동성을 바르게 평가하고, 우리의 신학과 교회로부터 영의 망각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여러 사상가들의 신학적인 증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4) 나는 거룩한 공회와 거룩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로흐만 보설: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를 나는 믿습니다
사도신경이 성령에 관해서 말한 다음 곧 같은 조항에서 교회에 관해 말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가장 진실된 표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와 복종이다. "교회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에 상응하는 최대의 봉사는 생동하는 예배를 위한 노력이다. 교회는 전체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거룩한 목적을 위한 분리된 성도들의 공동체다. "에클레시아"(교회)는 부름받은 자들(the called)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거룩한 교회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교회다. "거룩" "보편성"이란 개념들은 분리되었으되 세계 안에서 그리고 세계를 위하여 봉사하라는 부름을 듣고 전 세계와 연대하라는 부름도 된다. 교회는 자신의 한계(닫힌 경건과 거룩)를 넘어서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공동체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교회의 열려있는 관계의 지평을 가장 잘 표현한 신학적인 개념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회의 독점물이 아니고 전 인류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교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이자 세계의 미래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교회의 현재를 폐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상대화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출발하게 한다. 교회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당파와 영속적으로 제휴하지 못한 채 역사의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여 달려간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인 당파를 신앙의 고백에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과 동시에 지역과 시간을 초월한 성도들간의 역동적 사귐이다. 이 사귐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사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까지 나누는 총체적인 사귐이다.
성도들의 사귐이 교회에서 엷어지고 사라진다면 교회의 이해는 천박해지고 교회의 삶은 빈곤해진다. 성도의 사귐은 성도끼리의 사귐 이상을 의미한다. 한 시대의 주변화된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를 이루는 사귐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사귐이다.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면은 동시대인들과의 친교에서 드러난다. 초대 신약성서 교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형제자매적 운명공동체적인 공동체 정신과 실천이었다. 초대교회의 운동은 분명히 형제적인 공동체의 사귐운동이었다(행 2:42). 성도들의 사귐의 사회적, 경제적인 차원에서까지 이뤄졌다. 성도들의 사귐은 사회 윤리적인 정치적인 현실성을 수반하는 임무를 갖는다. 성도들의 사귐의 약속이 가장 강력하게 실현되는 장이 성례전이다.
(5) 나는 죄사함을 믿습니다.
(6) 나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7) 나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로흐만 보설: 오늘의 신학은 기독교의 부활이란 말을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비신화한다. 그리고 영혼 불멸 이념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부활 희망을 인간적인 전체 현실성과 관계시킨다. 이 관점은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에서 살지만,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는 육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지시를 따르려면 우리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생을 바라보아야 한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을 일반적으로 대조시키는 것은 성서적인 사고에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희랍적인 사고와는 달리, 시간과 영원은 성서적으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론적인 근거에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역사를 향해서 온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 사이의 이 순위 질서는 성서적으로 분명하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최후의 진술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첫 진술없이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영원한 삶을 성서는 알지 못하다. 하나님과 생명의 해체될 수 없는 이 밀접한 결속은 생명의 시초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방향과도 관계된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되는 영원한 삶은 사랑이 없이 생각될 수 없다. 사랑은 영원한 삶의 기초이고, 근본 성격이다.
이상의 일곱 가지 신앙고백은 각각의 대항 명제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신경은 주후 1-4세기 동안에 정통 기독교신앙과 대립하는 여러 가지 이단 잡설들과의 경쟁과 각축을 통하여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고자 하는 사도전통의 계승자들에 의하여 확정되었다. 이 일곱 가지를 믿으면 정통 사도적 기원을 가진 신앙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 사도신경의 틀 안에서 머무는 기독교를 정통 기독교라고 부른다.
사도신경의 전설적 기원은 12사도의 세계선교를 위한 흩어짐에서 발견된다. 12사도들의 무리가 성령강림 이후, 선교하기 위해 온 세계로 파고 들어가야 할 것을 결단했을 때, 그들은 선교를 위한 신앙의 규범, 하나의 공동의 신앙 규범에 일치하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기초되었다. 12제자는 각자의 관심을 짧은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사도신경은 세례받는 자에 의해 고백된 것이 아니라, 세례 베푸는 자가 수세자에게 던진 질문들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도신경은 수세자가 인격적으로 기꺼이 동의하는 아멘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접목될 때 제기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어진 의미에서의 “앎”이 아니고 사랑과 신뢰 안에서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하는 인식이다. 믿음은 미리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신뢰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직면하여, 사람들에게 철저한 삶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믿음으로써 산을 옮기는 것을 기대하는 때, 예수도 이와 같은 방향에서 믿음을 생각한다. 우리는 신앙고백에서 고립화된 개인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이 고백을 드림으로써 형제자매의 포괄적인 사귐 안에로 들어간다.
2007년 숭실신앙 강좌 2강(김회권 교수, 10월 31일 수요일)(117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악이 이토록 창궐할까?
초록: 나는 믿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태는 제지되지 않은 폭력과 무질서, 악의 범람이며 이 악에 대하여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는 상황이다(post-Holocaust theology=유대인 대학살 이후 신학, 엘리 위젤의 문제제기). 즉 심판과 하나님의 개입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제 길을 가는 혼돈의 세상은 전능하시면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 존재를 믿지 못하게 한다(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은 첫째, 사랑 때문에,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 존중(인간다움의 존중.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스스로에게 하신 맹세와 자기 속박적 약속)이라는 교육적 의도 때문에6) , 그리고 셋째, 악마/악에 대한 완전한 승리(폭력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진리에 의한 승리)를 위하여 억제되고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공권력은 억제된 전능이요 숨은 전능일 뿐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변증법적으로 옹호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도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으로 옹호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은 처음에는 의심되지만 결국 옹호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하심은 동시에 부정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변증법적으로 옹호된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동시에 지극히 선하심(아버지되심)을 옹호하고 증명한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섬세한 현재, 사랑과 신뢰의 동기를 전면에 표출시키고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요소를 뒷전으로 물러나게 한다. 이 개념은 희랍어로 표현된 아버지보다 어린애다운 친밀한, 간단한 호칭이다.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의 전적인 주권과 아버지의 초월적인 권위(전능)를 아빠라는 단어 안에 표현할 줄 알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인가? 그렇게 전능하시고 추상같은 하나님이 아빠라니!!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표현하고 있듯이 아들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권위적인 가부장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대한 폐기를 지시한다. 예수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권능을 집중적으로 경험하고 공공연히 드러내셨다(축사, 치유 사건, 기타 표적 이적 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임과 동시에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정통 기독교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당신의 선하심을 완성하고 그의 전적인 무력함 속에 감춰져 있을 때가 많다. 구약적인 전능의 사상은 출애굽 사건과 계약체결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전능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서 경험된다. 사도적인 부활 사신의 전망에서 보면, 하나님의 전능은 나사렛 예수의 운명 안에서 구체적이 된다. 여기에 영과 힘의 놀라운 표시가, 즉 폭력 없는 사랑의 탁월성과 전능이 있다. 폭력 없는 사랑의 힘은 전능한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고백자가 알아야 될 방향을 지시한다(헐리우드적인 공의는 폭력으로 폭력을 응징한다). 전능한 아버지에 대한 고백의 참된 아멘은 폭력이 없는 사랑의 실천에서만이 현실적으로 증명된다(마틴 루터 킹).
천지만물의 창조주 성부 하나님, 억제된 전능성을 보유하고 종말의 순간까지 인간에 대한 심판을 유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로서 하나님, 즉 “보편적인 하나님”에 대한 앎과 이해를 가져온다. 사도신경(신구약 성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 및 피조물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다. 세례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지역의 하나님, 사적인 구원자가 아니라 전체의 현실에 관계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온 세계 안에 일어나는 일은 필시 하나님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창조자의 비교될 수 없는 절대성과 보편성의 강조는 전 구약의 경건성과 삶의 양식을 꿰뚫고 흐른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관심은 세계적이고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은 단지 인간의 구원에 집착하지 않고 온 피조물의 구원에 궁극적인 관심을 갖는다. 기독교인의 세계인식은 성부 하나님의 세계인식과 잇닿아 있다(마 5:46-48). 온 세상을 섭리하고 양육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을 묘사하는 시편 84편, 104편, 그리고 마태복음 5:46-48을 보라. 하늘과 땅의 창조자라는 신앙고백과 폐쇄적인 선민주의, 민족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천지에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돌보심을 믿는 고백이다. 천재지변, 핵겨울, 빙하가 녹아 온 세계를 다시 빙하시대로 몰아넣는 기상이변의 공포, 이 모든 것을 조정하시고 초극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세계의 궁극적 책임운영자요 주인이시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하나님은 천지(세계)를 외면하고 계시지 않다. 하나님은 홀로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으려 하고 새로운 현실을 일으키려고 결단하고 행동하신다. 창조의 신앙은 세계를 비신화화하고, 가치와 상태의 모든 절대화를 거부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창시적인, 종말론적인 긍정의 빛 안에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로서 이 세상의 미래에 무한 책임을 지시고 계시는 아버지시다. 권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말하듯이 이 세상 자체의 육체성과 물질성이 악과 고난의 원인이 아니다. 육체와 물질은 하나님의 영적 실재, 영적 진실이 궁극적으로 표현되는 매개물이요 영역이다. 물질과 육체를 매개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로 영적이며 진실로 궁극적이다. 우리가 물질과 육체를 동반한 사랑을 표현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요일 3:18; 야고보서 2장). 즉 물질세계 및 현실세계는 하나님의 관심영역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 주제들이다. 바로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피조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3:16이 말하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고백의 진실은 창조주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계약적 신실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위한 계약적 신실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사건이다.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을 한 때 심판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을 통하여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시지 못하셨다. 하나님은 죄악의 소멸을 위하여 죄인을 소멸시킨 적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일찍이 노아홍수를 통하여 당신이 지으신 땅을 다시 원시바다의 혼돈(混沌=물에 가득 잠김, 침수됨. 홍수물에 가득 잠김을 의미. 혼동과는 다른 의미. 혼돈은 혼동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임)아래로 침수시켜 보신 적이 있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죄악된 인간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후회하신 적이 있으시다(창 6장).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창조자되심을 포기한 적이 없으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긍정 아래 있다. 이 절대적인 긍정 안에서 심판도 있고 홍수도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당신과 화목하게 복원하시기 위하여 심판도 집행하시고 파멸의 홍수도 보내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절대적으로 긍정하시고 이 세상을 갱신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시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재활용주의자시다(recyclist God).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라는 말은 피조세계에 대한 무한 계약적 책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매력에 마음이 움직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신 당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계약적 투신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파송하신, 보내신 사랑이시다. 피조물의 부패, 변질, 반역을 초극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으로 주체적=자기결정적=자발적이고 자의적이고 자원적인 사랑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삶, 사역 안에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둘째 항목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신앙고백이 된다.
I. 전능하시면서도 선하신 하나님: 선한 창조질서와 악의 끈질긴 존속
1.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혹은 선하심을, 아니면 둘 다를 의심하게 되는가?
-의인이 박해를 받고 고난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을 때?
-아무런 죄없는 순진한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의 폭력에 의하여 짓이겨 질 때, 미군이 쏘아댄 네이팜탄에 얼굴의 반을 잃어버린 한 베트남 소녀가 불구덩에서 불붙은 몸으로 살려달라고 소리쳐도 하나님은 전혀 응답이 없을 때?
-새벽기도 갔다오는 교우가 강도를 만날 때, 폭행을 당할 때
-엘리자베스 엘리어트의 <전능자의 그늘>에 나오는 다섯 명의 휘튼대학생 출신 20대 선교사가 남미 아우카 식인종에게 죽어갈 때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셨는가?
2.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할 때?
-도덕적인 인간일수록 가공할 정도의 무력으로 자신의 선을 지키고 관철시켜야 한다.
-선과 의를 위한 모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무능하거나 덜 전능한 하나님 대신 지상의 인간들(상대적으로)이라도 무장하여 의/선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3.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할 때? 하나님이 의롭지 않다고 생각될 때?
-모든 악행은 정당화된다(토스토에프스키)
-도덕적 무정부주의, 윤리적인 허무주의, 상대주의가 정당화되고 인간세상은 자멸의 길로 치닫는다.
4. 언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선하심을 의심하게 되는가?
-악행에 대한 응징이 너무 지체되거나 아예 이뤄지지 않을 때(전도서 8:11)
찰스 비어드의 해석-너무 천천히 돌아가는 하나님의 공의의 맷돌. 악을 잘게 가루가 될 때까지 부수시는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나 느리게 돌아가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무기력, 무행동을 고발한다.
5.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인간의 책임에 위임하였다.
자유의지와 책임의 저울에다 이 세상 운영을 위탁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행을 즉각 막아야 될 의무나 책임이 있는가? 오로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고등피조물로 만든 그 원칙을 배반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위에서 기대하는 것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동원해서는 안 된다.
사도신경의 첫 번째 신조는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이다. 우리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난관과 장애도 극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동시에 고백하는 것이다(요일4:8; 애3:22; 아8:7).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전능하시면서도 동시에 선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잘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는 이렇게도 많은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왜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존재할까? 하나님은 아예 자신감에 넘쳐서 선한 창조질서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일을 기꺼이 허락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전능하심과 동시에 선하심)은 허구적 신념에 불과한 것인가? 왜 하나님은 충분할 정도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후원하거나 공공연히 지원해 주지 않는가? 세상은 악인의 손에 장악되었는가? 아니면 이 세상은 대등한 힘과 권능을 가진 선신과 악신의 영원한 각축장이 되었는가? 2차세계 대전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에 하나님은 연루되어 있지 않는가?(엘리 위젤의 ; 욥기와 전도서의 절규를 들어보라) 이 질문들은 20세기 실존주의-부조리 문학과 철학의 핵심주제다. 까뮈, 싸르트르, 토스토에프스키, 러셀, 엘리 위젤 등 숱한 철학자들과 문학가들이 이 질문들과 씨름하였다. 특히 20세기 최대의 논리학자요 수학자, 철학자였던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신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능하기는 하지만 선하지는 않는 신이 존재하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전능하지 못한 신이 존재한다.
과연 우리는 현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그러나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징을 받지 않은 채 자행되는 엄청난 악행을 보면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다스리심을 확신하는 데 심각한 인식론적 부조화를 경험하고 있다(전도서 2-4장). 그래서 심지어 구약성경 안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업무태만(사보타지) 때문에-충분히 공의를 드러내지 않고 약자를 돌보는 일에 충분히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고-힐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존 레벤슨은 그의 책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악의 끈질긴 잔존>(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이라는 저서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재정의한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억제된 전능성이요 하나님의 전능성은 극적으로(변증법적으로=일단 한번 부정되고 의심되었다가) 옹호되고 신원되는 전능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행을 견디면서 심지어 전능하지 않은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까닭은 악의 세력이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들을 다 쓸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며 진실로 전능한 하나님임을 증명하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 중간기간 동안에 수난을 당하고 온갖 비방을 당한다. 이런 하나님의 전능성은 은닉된 전능성이요 억제된 전능성이요 이 세상의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폭력 앞에 쓰러지는 듯 약해보이지만 사실상 죽음의 권세까지 온전히 격파하는 전능성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전능성은 모든 인간의 악행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는 그런 전능성이 아니라 악에 의하여 상처받고 망가지는 것을 견디는(?) 전능성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인간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유대인 수백만이 살려달라고 소리칠 때 전능하신 그는 왜 손도 까딱하지 않았는가? 그의 전능성은 어디로 갔는가? 왜 하나님은 악행을 보고도 못 본 체 하거나 오히려 악인의 창궐과 발호를 방관하며 심지어 비호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예레미야 12장 1-4절을 보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악행의 비호자가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시편 37편과 73편; 시편 89편을 보라). 그럼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악인의 창궐이 하나님 탓인가? 아니면 악인을 소멸시켜야 할 인간의 책임감을 무한하게 확대하고 있는 상황인가? 우리는 너무 종종 인간 사회 안에 일어나는 악행의 파도를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아서 그런 악행이 창궐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너무 성급한 아니 다소 비겁한 책임전가다. 인간사회에 일어나는 악행의 파도는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에게 일정량 책임이 전가되어져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나의 작은 불의와 불법, 이기주의가 엄청난 악행의 파도를 부르지 않는가? 나의 이기심과 잔혹한 개인주의가 반사회적인 범죄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인간 세상의 친절과 자비를 경험하지 못한 성장장애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엄청난-유영철급 살인마-범죄자가 되어 우리 사회를 타격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엄청난 악행은 사회구성원들의 도덕적인 몽매상태,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이기적 행동, 거짓, 불법이 집적되어 부메랑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의 악행을 곧장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보타지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바른 추론이 아니며 비겁하기까지 한 논리처럼 들릴 수 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존 레벤슨과 같은 유대인 신학자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새롭게 정의된 하나님의 전능성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동시에 붙들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은폐된 전능성임을 거듭 강조한다. 하나님도 악행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은 그 자체로 잘 경험되지 않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의지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이 없이는 인간역사 속에서 실현될 수 없는 전능하심과 선하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전능성은 인간의 순종을 통하여 완성되는 전능성이며, 하나님의 절대주권도 인간의 자발적이고 협력적인 복종에 의하여 완전해 지는 그런 겸손한 절대주권이시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현실역사 속에 자행되는 악행들은 과연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가 어떤 공격에도 유지될 수 있는 견고한 구조인가를 검증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저지되지 않는 악의 무차별 공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이 세상 창조질서는 충분히 선한가?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방해받지 않은 악의 창궐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전능성과 절대주권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과연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선한 창조질서가 그것을 무효화하려고 덤벼드는 악의 격렬한 도전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한가를 기꺼이 검증하신다. 이 검증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은 진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임과 동시에 선하신 하나님임을 스스로 증명하신다. 악의 끈질긴 잔존은 선한 창조세계의 내적 취약성을 고통스럽게 일깨우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한 창조세계가 악과의 싸움을 통하여 변증법적으로 선해져야 함을 일깨워주신다. 악의 공격과 도전에 의하여 악을 경험하면서도 선을 의지적으로 지향하여 선한 창조질서를 구현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는 태초의 창조시점부터 내재적으로 선한 창조질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악의 도전과 공격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의미에서의 “선한” 창조질서였다(헬라철학-“물질세계는 최악의 상태”; 힌두교-“물질세계는 비실체적이고 비영속적인 환영[幻影]의 세계”). 아직 악과의 싸움을, 악의 도전을 거치지 않은 꿈꾸는 순진무구성의 세계로서의 선한 질서인 것이다. 이 정태적, 잠재적인 의미의 선한 창조질서가 실제적인 의미에서 “선한 창조질서”로 발전하려면 변증법적인 부정을 거쳐야 한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성이 송두리째 도전받고 위협당하는 위기가 발생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는 결코 선하지 않으며,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의 의도대로(창조주의 절대주권의 목적대로) 보호하고 지탱할 능력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의 전능성과 선하심이 송두리째 부정당할 위기 한 복판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과 전능성(절대주권)을 온전히 증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은 극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극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악당들이 독무대를 이루듯이 현실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오직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출현한 선한 주인공에 의하여 악당들의 무대는 파탄당하여야 하고 의심받고 부정당하던 선하고 전능한 주인공이 홀연히 승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태초에 한 번 과시되고 종말에 다시 과시될 때까지 세찬 의심과 부정의 대상이 된다. 태초와 종말의 중간시기인 현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일시적인 패배를 맛볼 수도 있고 하나님의 권위는 의심당하거나 훼손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중간기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고백함으로써 세상의 현상세계를 초극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 인간의 능동적인 순종과 신뢰에 찬 복종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의심받고 있는 하나님과 함께 현실적인 악,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몰아내면서 새 하늘과 새 땅 창조의 공동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전능하시면서도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 세상에 창궐하는 악과의 싸움에 엄청난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제국과 맞싸운 무기가 바로 이 신앙고백이다. 본회퍼가 히틀러 파시스트 제국과 맞싸울 때, 주기철 목사가 일제의 군국주의와 맞싸울 때 휘두른 무기가 바로 이 전능하시면서도 선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 전능성에 대한 고전적인 논의는 하나님의 패배불가능성, 하나님의 수난 및 피공격 불가능성을 강조하고 모든 하나님의 실패처럼 보이는 현상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탓으로 돌렸다. 악의 기원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하려고 한 오만한 반역적 천사장이 악의 기원이며 이 타락한 천사의 꾐에 빠져 역사 속에 악을 육화시키는 인간의 자유 남용이 악의 실재라는 주장이다(창 3장; 유다서). 모든 악을 사단과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인간에게 귀속시킨 것이다. 이 이론은 사단(Satan=대적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정해 주는 한계 안에서 신비로운 이유 때문에 제한적으로 악한 활동을 하도록 허용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 설명은 악의 피해자에게 약간의 위안을 줄 수 있을지언정, 악 자체를 제거하고 극복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악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 안에 내재된 일종의 프로그램이라고 보는 존 레벤슨의 입장을 좀 더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잔존하는 악은 하나님과 인간의 신뢰관계 위에 구축될 하나님 나라의 항구적인 위협세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악은 선한 창조질서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면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가 극복하려고 한 일종의 창조이전부터 있던 혼돈세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보시기에 선한 피조세계(창세기 1-2장)는 이미 선재하던 악과 혼돈세력에 대한 대항질서요 대안질서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충분히 전능하지 못하여서 태초의 창조시 그 혼돈세력을 제거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주권을 변증법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피조물의 대표인 인간이 보는 앞에서 당신 자신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악과 혼돈세력을 세계 안에 잔존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악은 창조 내재적인 질서나 사건이 아니라 창조이전의 문제상황인 셈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통하여 극복하려고 했던 문제상황인 셈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선한” 창조질서는 창조이전부터 존재하던 악과 혼돈세력의 간단없는 공격과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선한” 창조질서인 셈이다.
하나님은 이 “선한” 창조질서가 악의 공격과 대면하면서 악과 혼돈의 위력을 경험해가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한” 질서가 되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때때로 잠자고 있는 것처럼, 활동중지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신다. 야웨의 절대주권이 자주 혼돈세력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억제되거나 탈취당한 것처럼 무기력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당신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드러내는 일에 너무나 느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억제된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하심의 역동적 재활성화를 요청하는 구약성경의 애가형 시편들이 여기저기서 분출하는 것이다. 시편 44편에 의하면 자연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도 가끔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시 44:18, 23-27).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편 97편도 하나님이 왕이 아닌 상태(무기력증 잠자는 상태)에서 되돌아와 다시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노래한다. 시편 74편과 89편에서도 애가의 주인공들은 하나님께 깨어나라고 일어나라고 탄원한다. 다시금 혼돈과 악의 세력을 억제하시고 선한 세계를 창조하실 때의 바로 그 전능성을 과시해 달라고 간청한다. 천지를 창조할 때(악을 처음으로 거의 완전 무장해제시킬 만큼 강력하게 악을 제압하신 사건) 과시했던 그 엄청난 창조적 권능을 다시금 과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시 44편; 78편; 89편). 잠자고 있는, 억제된 전능을 다시 보여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탄원들과 애가들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구약성경에 의하면 이 억제된 전능성은 종말에 악이 무장해제되는 종말론적 전쟁 때에 가서야 다시금 봇물 터지듯이 과시되기로 예정되어 있다. 즉 태초와 종말 두 시점에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거침없이 발휘되고 태초와 종말의 두 극점 사이의 중간시점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고 긍정하도록 요청받는다. 이런 점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은 현실초극적인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현실 묘사적인 고백도 아니요 현실반영적인 관찰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재해석을 통한 신앙고백이다.
왜 하나님은 시간의 중간기인 이 현실 안에서는 당신의 전능을 억제하셔야 하는가? 왜 바로 당장 당신의 전능으로 지상의 완전한 정의와 공평을 정립하면 안 되는가? 구약성경의 기자들은 악의 창궐을 보고 지성적으로 설명하여 하나님을 곤경으로부터 건져내려는 사람들이었던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존 밀톤처럼 현재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재가 된다고 주장하는 과도한 시적 영감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 당장 악을 날려 보내주소서”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시 92편; 렘12: 1-3과 시편 1편과 대조해 보라). 창궐하는 악을 보고 하나님께 개입해 달라고 소리치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세 가지 선택이다. 계속 하나님과 논쟁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개입을 이끌어내는 것,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 마지막으로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은 입장이다. 세 친구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선하신 창조주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주권에 저항하는 악의 세력들을 무력화시키는 길을 갈 수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리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은 하나의 정태적 공식이 아니라 준(準)예전적 행동이다. 하나님 전능성에 대한 이 변증법적인 고백은 악과 혼돈세력(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세력)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을 이 세계의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행위(악 억제 및 질서창조 및 유지행위)에 저항하고 적대하는 세력들을 향하여 싸움을 거는 신앙고백이다. 창조행위가 어떤 기존의 세력에 대한 싸움이라고 해석하는 입장은 후대 유대교 및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creatio ex nihilo=creation out of nothing)와 배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창세기 1:2은 말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 땅을 토후 봐보후(void and formless=황무지)로부터 만들었다. 토후 봐보후가 창조의 원자료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중립적인 무로부터가 아니라 해악스러운 원자료를 가지고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無, nothing)는 존재의 반대인 무(無)가 아니라 어떤 나쁜 것(something negative)을 의미한다. 무로부터의 창조교리인(creatio ex nihilo)에서 nihilo는 nihil, nothing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어떤 방향으로 활동하는 실재하는 힘을 의미한다. 쓰레기더미, 변소, 톱밥이 가득 찬 작업장 위에 위엄에 찬 대궐을 건축한 왕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다. 난지도같은 쓰레기 하치장 위에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nothing 즉 “카오스”를 비존재, 존재결여로 동일시하는 입장은 자연주의적 입장이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입장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텅 빈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존재케 하고 창조하는 일은 더 이상 불의, 혼돈, 무질서에 대한 정의의 승리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가치중립적인 자연과학적 행동에 불과하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인간에 의하여 재활성화될 수도 없고 모방될 수도 없고 계속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갖는 정치신학적 차원을 놓친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행위는 혼돈세력을 무장해제시키고 유폐시키는 정치적 행동이다. 창세기 1장에서 분출되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위엄으로 가득 찬 명령들은 하나님 자신이 혼돈세력을 억제하여 선한 창조질서를 창조해 내는 창조주이자 절대왕권을 가진 왕이심을 증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명령들은 도덕적(moral) 및 정치적 차원을 가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강조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도덕적 행위라는 의미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혼돈세력에 대한 명령행위이며 역사 속에 활동하는 불의, 억압, 어둠에 대한 의로움 평화 사랑 빛의 승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활동은 가치내포적이고 가치확정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자연과학적 행동에 가깝기보다는 정치적 윤리적 행동에 가깝다. 불행하게도 현대자연과학은 자연과학의 영역을 도덕과 영적 세계(차원)로부터 집요하게 분리시킨다. 도덕과 자연과학의 분리를 통하여 과연 서구사상은 하나님의 창조행위 안에 있는 도덕적 영적 차원을 사상(捨象)시킨다. 특히 현대 서구신학은 창세기 1장에 담겨있는 정치신학적 차원을 잘 모른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창조사건이 혼돈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억제명령 사건이요 어둠과 무질서를 무장해제시키는 정치적 사건이라고 읽을 때 우리는 이런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II. 구약의 하나님(아버지)과 신약의 예수님의 관계
많은 신자들은 구약의 하나님 아버지는 엄청나게 추상같고 엄한 하나님이고 신약(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너무나 자상한 하나님 아버지라고 느끼고 있다(김회권, “도올 김용옥 자세히 읽기,” <기독교사상> 2007년 6-8월호 참조). 구약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오금이 떨리고 신약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 사이를 서로 대조시키려고 한다(2세기의 이단 마르시온파의 입장). 그러나 위에서 공부한 것처럼 구약의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억제된 전능성을 보유한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의 죄를 응징하시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악행의 피해자시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만이 독생자를 파송하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실 수 있다. 요한복음 5장과 14장을 자세히 읽어보라. 예수님은 철두철미 구약성경의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온전히 계시하였으며, 이 세상 인간의 악행을 알고 그 악행의 피해자가 되어 가시면서도 인간을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려고 하였던 그 아버지 하나님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억제된 전능성의 전형이다. 하나님은 악행의 피해자가 되어줌으로써 악행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를 박탈하셨다. 그 최후의 무기는 죽음이다. 악/혼돈/악마는 죽음을 무기로 인간을 지배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그 죽음의 세력에 삼킨바 되었다가 그 죽음을 죽이시고 부활하셨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 확증된 진리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의 결과를 뒤집어썼다. 죽음이 바로 죄의 결과다. 예수님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파괴적인 것의 파괴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했다. 그의 고난은 악/죽음의 극복을 위한 목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예수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인간적인 죄의 힘을 타파하려는 하나님의 공격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공격이지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 이해된다. 죄와 갈등으로 괴로와하는 자리에, 소외의 조건들 안에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와 함께 계신다.
III.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함축적 의미
1.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을 위하여) 그리고 성령님과의 교제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영생=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 요 17:3; 요일 1:1-2).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2. 어떻게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그의 돌보심에 완전히 맡기며 그의 풍성한 선하심을 기대하며 매일 감사를 드리며 삽니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시 136:1; 갈 2:20).
3.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함이라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4.당신은 어떻게 성령의 교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성령에 의해,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성령에 의하여 나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접목되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만찬을 나눔, 기도 안에서 자라갑니다. 은혜와(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자라감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향해 의도하신 선한 일을 하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요약하면, 성령의 교제 가운데 사는 길은 (가) 신앙고백(고전 12:3)과 쉼없는 기도생활(8:11-14)을 통해서, (나) 교회를 구성하는 다른 신자들과의 영적 교제 속에서(성만찬, 세례), (다) 영적 성장과 진보를 통해서입니다.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고전6:17,19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5.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습니까?
복음입니다(하나님 아버지의 천지창조, 하나님 아들의 파송, 아들의 고난과 부활승천, 성령의 강림, 종말과 심판, 그리고 영생). 이 복음이 사도신경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6. 사도신경의 첫 번째 대목은 무엇인가?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7.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당신의 믿음을 고백할 때 당신은 무엇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난관과 장애도 극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전능하심과 선하심의 완벽한 결합).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애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8. 당신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압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자비로운 삶, 십자가상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승천(왕노릇하심)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한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받을 만큼 집요하고 신실하며, 동시에 너무나 강해서 그것에 대항해서 어떠한 것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1:3 이는 하나님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9.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사랑이 가득찬 하나님이라는 진리로부터 당신은 어떤 위안을 받습니까?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기 때문에 어떤 역경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참조 롬 8:28).
10. 이 고백은 당신의 개인적인 고백에 그칩니까?
아닙니다. 이 고백은 나의 개인적인 고백일 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이요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 선지자들 그리고 순교자들과 함께 모든 시대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땅위에서 그를 섬기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나는 사랑하는 힘을 가진 하나님과 힘있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나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11. 왜 사도신경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합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그가 누리는(즐거워하는) 관계 속에서 아들과 딸들로 양자 삼아 집니다(명령하시고 복종을 기대하는 그 분을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최적).
롬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갈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12. 하나님의 사랑이 측량할 수 없는 능력임에도, 왜 이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악이 존재하는 것입니까?(미국 PCUSA와 다른 부분)
악의 기원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하려고 한 오만한 반역적 천사장입니다(창 3장; 유다서). 이 사단(Satan=대적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정해 주는 한계 안에서 제한적으로 악한 활동을 하도록 허용받고 있습니다. 악의 창궐에는 두 가지 진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의 모든 활동은 로봇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한히 창조적으로 활동합니다. 이 자유의지와 악마가 결합될 때 엄청난 악의 파도가 일어납니다(나찌즘과 스탈린). 둘째, 하나님께서 악을 즉각 응징하시지 않고 시차를 두고 응징하기 때문에 악이 정의의 둑을 넘어 홍수처럼 범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전 8:11). 그러나 악은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한가를 변증법적으로 증명하는 소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악의 범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됩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3.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과 자유 가운데 더불어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개체성과 일치성을 동시 향유하는 존재). 하나님과 함께, 서로 서로, 세계와 함께, 우리의 구별되는 능력은--이성, 상상력, 의지 등등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부가 우리 삶 속에 반영되어지도록 다른 이들의 사랑스러운 친구로 창조되어졌습니다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4.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창조물로서, 우리는 이 땅을 위해 무슨 책임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방법과 같이 지구를 돌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의 산물들이 공정하고 지혜롭게 사용되어지도록, 우리가 가진 것을 남용함으로써 고통받지 않도록 그리고 미래의 세대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구의 풍부함과 선함을 기쁨으로 유지하도록 지켜줄 책임이 있습니다.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5. 우리가 죄에 빠져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었습니까?
예 또는 아니오 입니다. 죄는 다른 이들과 함께 왜곡되어지고, 혼란스러워진 모든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 우리의 동료 사람들 그리고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하는 것을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바 그 목표가 없어졌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우리의 구별된 인간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올바로 사용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굽어지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입니다
요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 우리의 깨어진 인간성을 회복할 시간이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전적으로 그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서, 심지어 죽음의 때에 이르도록 그 자신을 내어 줌으로,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토록 완전히 다른 이들을 위해 사셨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이었음을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은혜에 의해 우리가 믿음으로 그에게 순종할 때 우리의 인간성이 신적 형상으로 회복됩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골1:15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의 섭리(providere=미리 조정하다, 미리 보다, 준비하다-pre-seeing)에 대해 당신은 무엇이라 이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호하실 뿐 아니라 또한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귀 기울이십니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돌보심으로 그것을 유지하고 통치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십니다.“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시145:15)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위해 악으로부터 선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선으로 굴복시키지 못할 어떤 악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는지:”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18.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당신은 어떤 위로를 받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께서 나의 삶 속에서 매일 나를 지켜보시고, 축복하시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신실할 때(믿음이 충만할 때) 나를 강하게 하시고, 용기를 잃고 슬퍼할 때 나를 위로하시고, 내가 실패한다면 나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나 자신을 완전히 위탁한다면 역경가운데 참고 인내하며, 축복가운데 감사하고 불의에 대항하는 용기를 은혜로 받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나를 괴롭힐 수 없고 하나님께서 나의 선하심에 돌아서지 않는다는 확신을 은혜로 받게 됩니다.
시146:9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사58: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시42:11; 고후4:8-10)
2007 숭실신앙강좌 3강 (김회권 교수, 2007년 11월 7일)(82.7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나사렛 예수
I.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요 1:18; 3:16)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 고백이다. 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 독생자라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獨生 子)라는 말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다. 독생자라는 말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는 아주 독특하게 형성된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 뜻이다. 출생도 아니고 입양도 아닌 방법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요 1:1-3; 1:18; 3:16; 5:18, 19-43; 8:25-26, 54-55, 56-58; 빌 2:6-11; 골 1:15-16; 히 1:1-8).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특징적 관계는 엄청난 자기비하를 통한 절대적이고 자발적 순종이다. 빌립보서 2:6-11에 의하면 인간의 육신을 입고 탄생하신 사건 자체가 독생자의 순종의 결과다(탄생: 요한복음으로 말하면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파송이요 마태와 누가복음식으로 말하면 인간으로 태어난 사건. 사람이 된 사건). 하나님의 독생자가, 즉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세상으로 오신 사건 자체가 엄청나게 낙차가 큰 하강이요 순종이다(아래 그림 참조).
둘째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 중에서도 종의 형체를 가졌다. 종은 순종의 화신이다. 이사야 42장, 49장, 50장, 52-53장에는 야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야웨의 종”이 등장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면 고난을 감수하는, 그것도 억지로가 아닌, 지극히 자발적으로 고난을 자취하신 종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고난을 통해서라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고난받는 종(이사야 55:10-11, 파송받은 말씀)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비운 결과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비운 결단의 절정인 것이다. 매순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해 온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절정의 때에 복종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허락하신다. 마지막 절정의 복종과 순종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의 삶은 매일 매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이고도 감미로운 마음으로 복종하다가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순종의 불꽃으로 산화하는 삶이다.
II. 동정녀에게 나신 그리스도 고백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신적 기원(독생자 예수,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을 강조하는 한편 동시에 인간적 탄생을 강조한다. 예수는 여자의 후손(창 3:15; 갈 4장)이다. 예수가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고백은 예수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뱀의 머리를 치명적으로 타격하실 구원자로 오셨음을, 그리고 여자의 후손의 죄 아래 팔린 운명의 연대적인 공감자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말씀의 성육신, 영의 인간화는 사도신경의 중심주제이다. 기독론적인 주제에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있고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본성으로만 환원시키려고 한 순수한 단일성주의의 경향은 교회사의 한 부분을 장식했다. 두 화살(신성과 인성) 중의 어느 하나가 상실될 때, 믿음의 기초도 흔들린다.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잉태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다. 여자의 후손이 아니면 예수가 죄 아래 팔린 인간의 운명과 연대할 수 없기에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성령으로 잉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신 분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이 짧은 고백은 나사렛 예수의 출생 과정에서 드러난 죄인된 인간에의 연대성과 인간과의 거룩한 구별성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을 신앙고백 안에 포함시킨 이유는 아마도 이 두 가지 초점을 신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탄생부터 성령의 강력한 주도권이 작용했음을 고백한 것이다(아마도 마리아의 고백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한 수태 이외 다른 어떤 것도 문제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고 탄생되었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또한 성령의 권능으로 탄생되었다(행 2장).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역사 속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주도되는 구원역사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 태어났다는 고백은 인류구원의 결정적인 전환점인 성탄절이 하나님의 역사이고, 인간적인 역사라는 점을 강조한다. 양자 중의 어떤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1:18-25은 이 점을 잘 예해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능동적 자발적 순종이 함께 동역함으로써 성령에 의한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이 실현된다. 성령의 잉태 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경악하고, 그 신탁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혹감에 빠진다. 마리아의 말을 전해들은 정혼한 남편 요셉도 당혹하고 마리아를 통한 성자의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무위로 그칠 뻔 했다. 여인의 태를 거룩하게 기습하신 성령의 주도적 역사는 인간 경험과 상식에게 놀람, 경악, 기습적 당혹을 선사하면서 추지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왜 이 당혹스러운 성자의 성령 잉태를 신앙고백의 중심에 배치했을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동정녀 잉태와 탄생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전복하고 쇄도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하심을 한껏 드러내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잉태에 있고 하나님의 기습적인 통고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재적인 역사발전에 의거한 성자의 출생을 유도하지 않고 성령의 수직적인 계시에 의한 간섭으로 인간구원을 일으키신 것이다. 성령의 잉태는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절대주권적 의지와 권능의 과시사건이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모험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의지와 권능이 인간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에 의하여 완전히 구현된다는 점이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라는 말이 추가된 것이다. 성령에 의한 동정녀 성자 잉태와 출생에 관여된 모든 피조물들은 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천사 가브리엘, 마리아, 그리고 다윗의 자손 요셉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이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가 일어나는 순간에는 인간의 이성, 활동, 경건성은 잠시 판단중지를 경험했으며 당사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뜻이 성취되도록 자신들의 경험과 상식을 괄호 안에 묶여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동정녀 탄생에서 두 가지 요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어떤 동역적인 협력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권과 은총에 대한 마리아의 대답이 놀랍도록 혁명적인 성격으로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혁명적인 대답에서, 인간의 독자적인 구원이 아닌 은혜의 주도성과 역동성을, 잔인한 인간성이 아닌 은총을 입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주목하게 된다. 이처럼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시종일관 은혜의 신학의 일부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는, 강제할 수 없는 사랑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오는가에 대한 사신(使臣, messenger)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인간의 순종과 자발적인 협력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원사건이다(이런 점에서 첫째 것만 강조한 로흐만은 다소 한계를 보인다). 가브리엘은 성령의 잉태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하늘로 올라가버리지 않고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을 기대한다. 또한 엘리자벳의 인간적 권고도 사용하셔서 처녀잉태, 동정녀 잉태의 충격에 빠진 마리아의 감정을 달래시고 수습하신다.
III.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사........
사도신경은 이 본디오 빌라도의 고난 신조를 삽입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철저한 역사적 근거를 확보한다.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했다는 고백이 어려운 만큼이나 예수가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어려웠다. 예수가 특정 역사의 시점에 태어나 로마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유대인의 운명에 정확하게 연대했다는 사실은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이기 이전에 유대인/이스라엘의 대표자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인식은 고대 교회에서 결코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는 신약성서의 배후에서 시작한다. 예수의 인간적, 물질적인 성격을 완화시켜서 상징적인 가상(假像)으로 환원하려고 한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은 고대 기독교가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시험이었다(요한복음이 이 점을 가장 날카롭게 의식하는 복음서). 신약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으로 경험했다. 또한 사도들에게도 예수는 역사적 조건에 얽매인 채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다.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지시로서, 그가 가져온 구원이 인간의 전체적인 삶과 세상의 모든 현실에 관계된다면,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사도적인 증거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책임을 확립시킨다.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윤곽을 보여주며, 그를 따르는 자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각인해주고, 그에 대한 신앙을 구속력있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단지 의존해야 할 구세주가 아니라 우리가 따르고 모방해야 할 주이시기도 한 것이다.
“빌라도 아래서”라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강력하게 부각시켜 준다. 이로써 그리스도 신앙과 이 세상 현실과의 관계가 분명히 밝혀진다. 예수의 공생애는역사적인, 정치적인 구체성에서 수행되었고 그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위세와 대비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빌라도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인 관련성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위치는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칼 바르트는 빌라도의 이 역할을 관심있게 추적하였다. 바르트는 그의 논문 “정당성과 법”에서 예수와 빌라도와의 만남을 기술한다. 국가의 제도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바울의 지시는 오늘날에도 주목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롬 13장). 물론 교회사적으로 이 지시가 오용되어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국가체제의 공권력을 대신한 빌라도가 예수의 박해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 국가의 잠재적인 반역성과 무신성(godlessness)을 증거한다.
“고난받으사”라는 이 말은 흔히 예수의 마지막 날의 수난을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의 출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전 삶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삶의 스타일은 고행을 하고 있는 금욕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생의 기쁨을 동시대인들과 같이 나누었다. 그의 주변의 반응으로 보아서 그가 어떠한 생활을 영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복음서의 시각에 의하면, 고난의 삶은 예수에게서 불행한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십자가는 그의 사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이었다. 그는 불행 자체를 즐긴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득 찬 생명을 즐겼으나 의도적으로 불가피하게 로마제국의 공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에 의하여 박해를 당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제국에게 박해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유대인의 운명에 동참하기 위한 수난이었고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시달리는 온 인류의 운명에 대한 연대성의 과시였다.
빌라도 아래서 겪은 예수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파괴적인 것의 파괴를 위해서 필요 불가결했다. 그의 고난은 악의 극복을 위한 목적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예수에게 가해진 십자가상의 폭력(로마제국의 폭력)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의 집행이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인간적인 죄의 힘을 타파하려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이해된다. 적극적으로 믿는 자는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은 자”를 뒤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의 고난을 회피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본디오 빌라도의 나라를 향해 선포되었기 때문에 본디오 빌라도의 저항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성도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IV. 특정한 시공간의 사건이 어떻게 인류의 구원사건이 되는가?
왜 2000년 전 팔레스틴 골고다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초공간적 초시간적 효력을 갖는(구원의 효력을 갖는) 사건으로 격상되었는가? 예수의 부활 때문이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 이상의 사건이다. 부활은 시간과 영원의 접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것은 한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 부활이요 특정한 공간에서 일어난 부활이지만 그것의 효력은 영원하고 우주적이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효력을 갖는 사건으로 승격된 것이다. 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성육신-낙차 큰 하강 주(主)와 그리스도로 부활, 승천, 존귀케 되심
사람 중에서 종의 형체. 영적 피조물, 인간, 동물 모두 예수=주(主) 고백
(요일 1:1-2; 요 1:1-2) (빌 2:6-11; 행전 2:31-34)
십자가 -아버지의 뜻을 위해
고난을 당하심.
(사 55:10-11, 빌 2:6-11)
십자가에 달려죽기까지 복종하심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특정 시간(2000년전)과
특정 공간에 일어난 사건-보통 역사적 사건과 동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빈 무덤이 됨-죄와 죽음의
정복(고전 15:51-58); 죄사함 실현(롬 4:25).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죄 용서 사실을 확증하는 사건
(히 9:11-2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이 되고
인류 구원의 사건이 된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전도사가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때 성령은 듣는 자에게 믿음을 창조하셔서 신자가 되게 하셨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의 언어는 성령의 그릇이 된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을 위한 죽임이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나를 위한 그리고 나를 대신한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고후 5:16-18).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성령이 강림하여 죄악의 권세는 쇠락하게 된다. 즉 구원이 임한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을 다스림을 의미한다.
V. 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인류/나의 구원사건이 되는가?(요 19장).
1.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한 당사자들
1)당국자들
대제사장: 사두개파(Sadduces)라고 알려진(옛 제사장 가문인 사독 Zadok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아주 세속화된 성직자들. 이름만 성직자들이지 매관매직으로 성직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세속화된 삶(권력과 부를 독점) 이외에도 부활과 천사의 존재 등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리새인들: 재야 평신도 청교도 운동가들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지 못하여 현재의 고난(로마제국의 식민지)이 임하였다고 해석하여 엄격한 율법 준수만이 고난을 끝내고 메시야의 왕의 도래를 촉진시킨다고 믿었다. 국민 총거룩(Gross Holiness Product)의 증가가 메시야의 도래를 앞당긴다고 보았다.
서기관들: 헤롯과 대제사장들에 빌붙어 사는 신학자들
장로들: 지주계급들, 친로마제국의 토착세력들
헤롯당들: 로마제국의 묵인하에 이스라엘지역을 다스리던 하수인들 세력. 아주 음란하고 폭력적인 가문이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그리고 헤롯당은 서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으나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단결하였다. 이들의 공통 이익은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 체제의 고수였다. 시기와 질투, 그들의 이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그들은 빌라도의 손을 빌지 않고 광장에 끌고 나와 돌로 쳐죽일 수도 있었다(행전 7장: 스데반 집사의 경우처럼).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 하에 죽은 죽음인 것처럼 믿게 하려고 빌라도의 십자가형을 이용한다. 신명기 21:22-23은 말한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들은 예수의 세 가지 언동 때문에 예수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한다: (1) 안식일 정결예법 등의 파괴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칭 (3)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어 버리겠다고 위협한 죄(성전 훼방죄).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는 죽음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어 믿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가 로마제국의 황제를 대적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였다고 고소한다. 예수 자신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2) 가룟 유다와 제자들: 예수님의 친밀한 사랑을 받은 유다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넘겨주고 자신들의 신병안전을 도모하였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았을 때에도 제자들은 검거되거나 체포되지 아니하였다. 유다는 자신의 메시야적 이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린다. 유다는 돈을 탐하여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다.
3) 빌라도: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였으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내어준다. 예수가 정치적 소요나 반역을 꾀할 인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4) 하나님 아버지: 인류의 죄를 대신 짐지고 대신 심판을 받을 중보자를 찾고 계셨으나 인간 중에서 찾지 못해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파송하심. 죄인들을 심판해야 하기도 하셨으나 또한 그들을 사랑하여 용서하여 새 사람을 만드셔야 하셨던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죄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 육신에 죄를 정하여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무한 긍휼 때문에, 죄인의 죄를 심판하시고 그 죄인을 용서하셔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가셨다. 예수 죽음의 궁극적 신학적 책임 소재가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
5)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지가 예수 죽음의 원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죄인 용서, 죄 심판의지)을 이루어 드리려는 자발적 순종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셨다. 예수는 잃어버린 양떼들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팔레스틴의 정치와 종교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선한 목자로 투신하셨다가 죽음을 자초하셨다.
2.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마가복음 10:45: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한 죽음(테텔레스타이-it is paid off)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22
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3.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는 주장에 공감이 되는가?
갈라디아서 3:10-13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벧전 2:22-24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4. 왜 예수는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십자가형에 처해 졌는가?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극적으로 표현한다. (2)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죽었음을 드러낸다(신 21:23; 갈 3;13).
5. 죄의 기원과 죄인이 된 인간
(1) 창세기 3:10, 11, 12, 16, 17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죄의 결과)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죄=하나님이 금지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행위. 금지의 위반; 죄의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음. 즉 누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 분명하지 않다)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책임전가)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책임전가)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유혹하는 자와 여자의 후손, 인류간의 적대적 관계)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심판-죽음과 죽음의 권세아래서 종신토록 수고. 농사일이 저주의 대표가 된다)
(2) 로마서 5:12; 3:23: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한 사람이 범한 실수 때문에 온 인류가 이토록 참담한 재난을 당하다니!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의 해설을 보자. 루이스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지구적 고통이 왔다는 주장이 매력이 없게 여겨질 수도 있음을 일단 인정한다(<고통의 문제>, 84-85쪽). 현대의 여러 사조들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성경의 주장에 대하여 저항한다. 인간의 죄를 바로잡기 위하여 고통을 초래하며 간섭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불쾌한 간섭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1)정신분석학은 억제와 억압은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며 (2) 수치심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죄책감을 고취시키는 기독교에 대하여 정신분석학의 저항은 드세다. 그러나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이 진노마저도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아담의 타락의 의미를 영적 유전자 유전설의 유추를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아담과 그 후손들은 순수인간의 종의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볼 수 있다. 순수인간의 경우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기를 양도하는 것이 고통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양도가 즐거움을 의미하였던 낙원에서의 아담의 범죄는 결과적으로 자기양도가 고통을 동반하는 현상을 낳는다(123쪽). 죄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획득형질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그들에 의하면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악한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성은 유전에 의해 모든 세대에게 전달되었으며, 아담의 타락 사건은 인간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뀐 사건이었다. 즉 그것은 사람을 구성하는 그 구성요소들의 관계가 교란된 사건이었으며 그 요소들 중 하나가 내부에서 뒤틀려져 버린 사건이었다. 죄인은 하나님에 반역한 인간 변종이다. 마치 위험한 무기를 들고 아버지에게 덤벼드는 반역적인 아들과 같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이와 같은 반역적 본성 가운데 빠져 있던 인류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6. 예수가 십자가에서 달려죽은 사건은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간 죄에 당신의 죄도 포함되는가? 예! 포함된다(요한일서 2:15-17).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의지력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지성의 힘은 빈약하고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은 너무나 연약하다. 우리 스스로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신(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써 살아가도록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피조물다운 제한성과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구원은 우리 밖에서(extra nobis) 우리를 위하여(pro nobis) 외부에서 와야 한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다 지불하였다: 테텔레스타이. tetelestai=paid off-요한복음 19:30)로 주려 왔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예수는 구약성경에 의하면(신 21:23) 가장 비참한 죽음-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죽음-을 당하였다(갈 3:13; 벧전 2:22-23). 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제자들을 박멸하려고 다메섹으로 질주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우편에 앉아계신 부활한 예수와 충돌하였다. 박해자 바울은 충격에 빠진다.
“아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지금 뜨거운 지옥 불구덩이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어야 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네? 빌라도에게 십자가위에서 처형당한 그 나사렛의 방랑 전도자 예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분명히 그는 저주받은 자처럼 죽었는데,,,,, 그는 저주받은 자처럼 단말마의 외침-“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친다(막 15:34)-을 외치고 죽지 않았던가?
바울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다가 하나의 해결책을 계시받는다.
“그렇다. 예수는 저주받아 죽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자의 자리에 서주셨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 않고 누군가의 죄 때문에 죽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은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구나.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죽었으므로 결국 모든 사람들이 죽은 셈이나 마찬가지다(고후 5:14-15). 따라서 이제 나는 죽은 몸이다. 내가 산다면 그것은 예수가 덤으로 준 삶이며 그 삶의 주인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갈 2:20).”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확정짓는다. 철학적으로 말해서 2000년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몇 만리의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구원의 효력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왜 역사적으로 한 특정한 시대에 한 특정한 공간에서 일어난 한 특별한 개인의 죽음(과 부활)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사건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사건은 시간/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은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다(히 10:19-22). 우리 마음의 모든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다(막 15:38-39).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초역사적,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효력을 가진 구원사건이다. 이런 초시간적 초공간적 효력을 가지는 죽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산 길을 열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의 휘장을 영단번(once for all generations)에 찢으신 사건”이라고 한다(히 9:26). 예수 죽음을 자신의 대신 죽음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휘장파열이 일어난다. 영단번에 드려진 제물은 구약시대의 반복적으로 드려진 제물과 대조된다. 예수는 동물희생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드리는 구약제사(세상 모든 종교에서 드려지는 제사포함)를 한번 죽으심으로 영단번에 완성하신다. 영단번에 죽은 사건이기 때문에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효력을 갖는 제사가 된다.
7. 그 외에 십자가의 피로 이 세상에 어떤 혜택이 베풀어졌는가?
(1) 에베소 2:13-14: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 사람과 사람의 화해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 골로새 1:20: 땅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007 숭실신앙강좌 4강(김회권 교수)(140.5매)
음부에 내려가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나사렛 예수--지옥까지 널리퍼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
요약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는 로마제국의 권력통치를 대표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죽어 매장되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죽음과 부활 중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셨다고 고백한다(한국교회의 사도신경 고백은 이 “음부에 내려가사” 부분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 세계의 다른 나라 교회들에서는 이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으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고백한다(엡 1:20-23).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중 가장 신비하고도 모험적인 고백이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보좌 등극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여 죽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역사적 사실이다.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목격하고 경험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주장부터는 흔히 말하는 실증주의적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기에도 난점이 있고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기에도 너무 신비로운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 상식과 종교적 상상력을 초월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늘에 오르심은 부활보다도 더 믿을 수 없는 사도들의 증언이자 신앙고백이다. 사도행전 1:9-11에 따르면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은 제자들뿐이다. 그들도 구름에 가리워져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하지는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지상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생애를 보내시고(이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집중 강론하심) 예수님은 다시 오실 기약을 남기고 하늘에 오르셨다. 그가 오르신 하늘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를 말한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말은 그가 죽은 자의 공동체인 스올(sheol, 陰部)로 굴러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의 승천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로드맵(roadmap)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등극하신 것을,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세상 통치를 위임받아 세계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을 도대체 어떻게 믿으며 확신할 수 있을까? 요한복음 14-16장(14:26; 15:26; 16:7)과 사도행전 2:31-36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예수님은 지상의 마지막 단계의 사역에서 자신이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보혜사 성령이 지상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강림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으셨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방해와 모략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일이 지상에서 계속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기보다는 신자들에 의하여 고백되었다.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탄생된 사건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고백이 증명되었다.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공동체(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탄생)가 존재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하나님의 副王)가 되셨음을 증명한 것이지 무엇이겠는가?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가? 만물을 말씀(명령)으로 붙들고 계신다. 첫째, 만물의 유지와 그것에 대한 섭리와 통치다(히 1:1-4). 둘째, 지상의 권력자들과 영적 권력자들의 권력기반을 해체하고 무장해제시키는 일을 하신다. 모든 반(反)하나님적인 가치관과 질서와 체제와 관습을 허물어뜨리는 일을 하신다. 역사적 격변과 변혁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진실로 지배하고 통치하시는 왕임을 증명한다. 셋째, 예수님은 만물의 목적에 맞게 만물의 존재의미를 충만케하고 완성시키는 일을 하신다. 교회가 이 만물을 통치하시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을 매개하는 결정적인 도구다. 그리스도의 뜻에 저항하는 모든 인간 결사체와 제국과 세력들을 분쇄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할 때까지 역사하신다.
I.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의 첫 사역: 성령 파송(행 2:22-36)
이 단락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2부격인데 예수님의 공생애,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강림이라는 구원사의 각 단계에 대한 가장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행 2:1-21)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인류역사에 가져온 의미를 표현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즉 하나님의 친정(親政)체제를 여는 부왕의 사역 시작)의 결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이처럼 교회는 오순절에 태어난 성령의 피조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하는 기관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사역을 계승하는 지체다.
결국 성령은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요청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파송하신 하나님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의 또 다른 자아(the other self)다. 그래서 성령의 다른 이름은 예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린다. 성령(聖靈), 즉 거룩한 영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하게 만드는 영이다. 교회는 곧 오순절 성령의 사역이 지상 역사에 남겨놓은 유산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의 효력이 바로 성령의 강림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들과 민족 경계로 갈라서게 하였던 바벨탑의 저주를 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생생한 증거다. 오순절 성령은 언어가 불통된 민족들과 나라들, 계층과 계급, 지역감정과 역사적 구원(舊怨=오래 묵은 원한 관계)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복속시키는 하나님의 의지의 도구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령강림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가 이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았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예수님은 음부에 내려가 썩지 않고 오히려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메시야(=그리스도), 부왕(副王= 버금왕)으로 등극하신 것이다. 만왕의 주와 그리스도로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최초의 통치행위는 성령 파송 사건이다(33절). 그래서 성령강림은 명실 공히 주와 그리스도로 존귀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출현”(再臨)이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목격되고 경험되는 영광과 권능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사건이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사람들, 심지어 그를 찌른 사람들의 눈에도 환히 보이는 방식으로 재림할 것이다.
기승전결의 짜임새로 구성된 이 단락은 예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되었는가를 보여주며, 성령 파송이 있기까지의 예수님의 사역을 논리적이며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1.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공생애(22절)
2.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23절)
3. 음부에 내려가신 예수님(벧전 3:19)
4.부활하신 예수님(24, 25-28, 29-31절)-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증하여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25-32절)
5. 승천하셔서 성령을 파송하신 예수님(행 2:33, 34-36)-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 승 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34-36절)
첫째,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바 권능에 찬 공생애 사역이다. 나사렛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귀신을 추방하고 온갖 불치병을 고치는 권능과 기적을 과시했다(너희 가운데, 너희 앞에서, 너희도 아는 바에). 당시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다스림)의 실체를 경험했다. 둘째, 예루살렘 권력당국자들과 로마제국 권력이 예수님이 일으키는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생명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장되었고 죽음의 권세가 그를 얼마간 지배하였다. 부패가 시작될 뻔하였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만인이 보고 경험하여 아는 사실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신 부활사건이다(다윗의 예언 인증).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목격되고 관찰되었다. 넷째, 하나님이 부활하신 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 들어 마침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왕으로 등극시킨 사건이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작별하고 돌아왔지만 예수님에게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선뜻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만 시편 110편을 통하여 예수님의 우편 보좌 등극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기까지는 예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보좌 복귀에 대하여 담대한 확신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강림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다시 공공연히 관찰되고 목격되는 사건이다. 다락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던 제자들은 오순절 첫 날에 요엘서 2:28-32(겔 36:25-27, 렘 31:31-34 등)에서 약속된 성령의 불세례(충만)를 받게 된다. 이 성령 세례 사건 이후에야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보좌등극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구약성경(시 16편; 110편; 욜 2:28-32)의 그리스도의 부활 및 성령강림 약속 말씀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순절에 경험한 신비로운 방언 분출, 기쁨 충만, 용감무쌍한 예수 부활 증언,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의 강고한 결속감과 연대감 형성, 그리고 당국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파력은,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확신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공생애, 십자가 죽으심, 부활, 승천 등 모든 것은 이제 과거사역이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의 현재사역은 오로지 성령을 파송하셔서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성령의 새 가죽부대로 결속시키고, 잘 결속된 제자공동체, 성령 충만한 증인들을 온 세상에 파송하시는 사역이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등극하셨다는 진실은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의 새 포도주를 담는 교회공동체와 성령의 권능으로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의 계급적, 계층적, 인종적, 민족적, 사회경제적, 문화적인 "자아"(기득권)를 부인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증명해 내야 할 진실로 남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려는 제자들은 그들 자신이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 갱생 및 갱신, 소생을 경험한 부활의 체험자들이어야 한다. 자아를 변혁시키고 갱신시키는 성령충만과 성령세례를 경험한 신자들만이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1.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공생애(22절)
베드로의 오순절 회개촉구 설교는 청중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강력한 공생애를 펼친 것은 예수님의 적들도 인정했다는 점을 착안한 것이다(행 10:37-39).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라는 말은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도 그가 사람들을 경악시키는 기적(奇蹟)과 이적(異蹟)을 행했음을 인정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만일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활동이 음유 시인처럼 알쏭달쏭한 풍자시를 읊거나 약간 비주류적인 정치 시사평론을 제기하는 데 그쳤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갈릴리발(發) 태풍처럼 사람들을 움직여서, 이스라엘의 낡은 종교를 파열(破裂)시키자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2.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23절)
23절은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을 전격적으로 기소하는 베드로의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자신들 가운데서 베푸사 자신들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지만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다고 고소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예수를 돌로 쳐 죽이지 않고 나무에 달아 죽이려고 했던가? 그 당시 로마 총독부 당국은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공동체가 한 개인을 돌로 죽이는 일에 대해서는 죄형법정주의라는 이름으로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예수를 로마제국의 법정 절차에 따른 재판(裁判) 없이 죽일 수 있었고, 산헤드린의 결의로 유대인 공동체가 한 두 사람을 돌로 쳐 죽여도 로마 총독부 당국이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신명기 21:22-23은 하나님께 중대한 죄를 범한 죄인을 공동체가 나무에 매달아 죽이되 그 시신을 하루 이상 매달아 두면 그 땅을 더럽힌다고 규정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종교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이유는 민중들에게 나사렛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의 죽음임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3. 음부에 내려가신 예수님(벧전 3:19)
사도신경의 고백에 따르면 예수는 “죽으시고” “묻히셨다.” 죽고 묻혔다는 점은 나사렛 예수가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의 운명에 연대했는가를 보여준다. 하나님 아들의 인류와의 연대성은 인간의 최종적인 한계로서의 죽음과 매장에서도 보여진다.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라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말은 사도신경의 특수성-나사렛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신학적 성격을 부각-을 나타낸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이 시작하는 것을 본다. 한편 칼빈과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예수의 지옥행"을 신화론적으로 이해했다. 로흐만이 인정했듯이 루터와 칼빈은 실제로는 사도신경의 이 어두운 진술을 같은 관점을 가지고 해석했다고 보여준다. 예수의 지옥행은 죄인으로서 인간의 유한한 삶 전체에 관련된 예수의 해방의 역사의 넓이와 깊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최악의 상황, 신의 부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지옥 혹은 음부는 다시는 소생의 희망이 없는 곳, 하나님의 최후 심판만이 기대되는 곳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최후심판마저도 최후 심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하늘과 땅 모두, 심지어 우리가 지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그리스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부활하신 예수님(24, 25-28, 29-31절)-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증하여 부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25-32절)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과 그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편 16편을 인증한다. 시편 16편에서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의 앞에, 그리고 자신의 오른 편에 항상 계신 주(主) 야웨를 보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우편에 계신 야웨 때문에 자신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마음과 육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뻐한다고 노래한다. 시편 16:10에서 다윗은 자신을 무덤에 내던지시지 않을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피력한다. 또한 시편 16:10에서 다윗은 “당신의 거룩한 자로 하여금 부패를 보지 않게 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드러낸다. 베드로는 여기서 다윗의 고백이 십자가상에서 드린 그리스도의 고백적 기도를 미리 대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다윗이 주(主)라고 부른 이가 바로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임을 논증한다(29-31절). 따라서 베드로는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죽음과 부패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가 가졌던 확신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던 이상왕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넘어 부활을 확신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죽어서 부패되지 않고 부활할 것을 확신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죽음의 구렁텅이에 던져졌던(사울에게 박해받던 시절, 밧세바 사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세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무덤 속에서 썩지 않고 그 때마다 영적으로 소생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소생되고 갱신되었듯이, 예수님도 죽어 매장될 수는 있지만 썩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확신하고 마침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시편 16편의 시나리오대로 그리스도가 죽으실 수는 있어도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예수님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이나 부활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중적인 공부 시간에 시편 16편을 갖고 당신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셨을 수도 있다.
29-31절에서 베드로는 이 시편 16편의 시적 자아인 다윗은 궁극적으로 다윗 자신이 아니라 다윗의 위에 앉을 그의 후손의 죽음과 부활 드라마를 미리 말한 예언이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은 죽었고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29절). 다윗은 자신의 후손 중에서 하나님 나라를 견고히 세우실 것이라는 사무엘하 7:12-16의 약속에 의하여 시적 영감을 고취받아 음부에 내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시 부활하실 그의 이상적인 후손 왕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미리 말했다는 것이다(30-31절).
32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의 약속에 따른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성취 행동임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리신지라.”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임을 공포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펼치시고 큰 권능을 펼치신 사건은 모든 사람이 다 목격한 사건이기에, 베드로가 “너희 모두가 아는 바라”고 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제자들만 목격했기 때문에 “우리들만이 아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강력한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기적과 이적을 베푼 사건은,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다 목격한 사건이다. 이것은 CNN 뉴스 기자와 연합통신 기자도 다 동영상으로 찍을 수 있는 실선적(實線的)인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한 사건은 실선적(實線的)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願)하실 때만 그리고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목격되고 경험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점선적(點線的)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은 모든 신문기자들의 카메라에 촬영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원하실 때 나타났다가 원하실 때 사라지셨기 때문에, 이것은 엄격한 의미의 역사적 사건이라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역사적 사건은 사건이로되 초역사적(超歷史的) 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영원의 포물선과 시간의 직선이 만나는 접점에서 일어난 사건인 셈이다. 따라서 이 일을 보고 경험한 증인들이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로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의 증인은 제자들 공동체 “우리”인 것이다.
이 점을 로흐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자가는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역사적인 현실성을 넘어서는 부활은 파악될 수 없는 비밀에 속한다. 부활 자체는 역사적인 검증의 성격을 넘어선 문제이므로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성과 관계를 갖고 있는 증언의 차원은 남아 있다.”
사도신경이 강조하는 “삼일만의 부활”이란 고백 또한 재대로 음미되어야 한다. 강력한 서스펜스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삼일의 시간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공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십자가의 비통함과 참혹함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시사한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이 삼일이라는 시간이 삽입된 것은 교의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삼일”은 부활 사건의 현실성을 상징적-변증법적으로 비현실화시키고 그 현실성을 제거하려는 일체의 유혹과 맞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유일회적인 부활 사건을 의미함과 아울러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과도기가 극한 불확실성을 동반한다점을 경각시킨다.
하지만 부활의 현실적인 결과들은 우리 시대의 고통을 비신화화시킨다. 그 중에 우리를 가장 괴롭힌 것의 하나는 숙명론의 유혹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활의 현실성과 신앙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부활신앙은 운명에 대한 체념과 자포자기를 타파한다. 부활 메시지는 십자가 아래서, 역사의 숙명적인 경향과 극복을 부활의 빛에서 보면서 집요하게 좌절과 체념과 대결한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새로움의 가능성은 신앙고백의 전망에서 결코 파탄된 것은 아니다.
5. 승천하셔서 성령을 파송하신 예수님(행 2:33, 34-36)-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
이 단락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힌다(34-35절). 33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파송을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파악한다. 33절의 상반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령 파송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행하신 첫 사역인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요청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파송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3위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1054년 동서방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필리오케(and from the Son) 논쟁을 자세히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양측의 논쟁은 언어적 자구의 뉘앙스를 사이에 둔 논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로마교회로 대표되는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from the Father and the Son) 출원하신다”고 주장하였고 콘스탄티노플로 대표되는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성령이 출원하신다”고 주장했다. 요한복음 14-16장과 사도행전 2장을 종합해 보면, 아들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께서 성령을 파송하신다. 따라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합의와 연합으로 성령을 파송하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은 일차적으로는 아들 하나님을 증거하고 아들 하나님의 사역을 바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보혜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토대로, 그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를 증거하실 성령은 둘째 보혜사인 것이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강조되듯이 성령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가지고 당신 자신을 증거하실 “또 다른 보혜사”인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고 보좌 우편으로 되돌아가 주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착수하셔야만 제자들에게 오시도록 예정된 또 다른 보혜사였다. 따라서 성령이 강림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우셨음을 의미한다. 성령 강림은 예수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의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에게 심어준 가장 강력하고 즉각적인 확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마 28:18-20; 행 7:55; 빌 2:10-11).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주(主)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깨달았는가? 아니면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는가?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요한복음 14:26, 15:26, 16:7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의 논리적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시면 아버지께 요청하여 제자들을 위하여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았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서 처음으로 착수했던 최초의 통치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主)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착수한 통치행위는 성령을 파송하신 사건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심을 증거하는 영(靈)이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 주권(主權)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확신하려면 성령 충만에 이르러야 한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는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 단지 감미롭게 순화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意志)와 책임감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을 만큼 성령충만한 신앙고백을 드리지 못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령의 단기적 과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보혜사 역할이었다. 예수님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 속에서 감미로운 순종 모드(mode)로 전환된 제자들을 자유자재로 다스리신다. 성령으로 달구어지고 감동된 제자들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시고 아주 사이가 나쁜 인간 관계에 머물던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같은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고립된 개인들이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루되, 성령의 능력에 무장해제된 개인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33절에 의하면 그들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과 공동체에게 일어난 사태의 외양과 현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위대한 공생애를 실선적(實線的)인 사건으로 목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과 주장만 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의 신앙(信仰) 여부(與否)에 상관없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취상태를 경악과 당혹, 의심과 경이 속에서 쳐다보고 있다. 새 술에 취한 듯 세계 만방의 지방 언어로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하는 이 사건의 일차적 목격자요 관찰자로 서 있다.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사건은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만민(萬民)이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선 사건이다.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은 실선 사건(實線 事件), 부활과 승천은 점선 사건(點線 事件), 오순절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방언 현상은 다시 실선 사건(實線 事件)인 것이다. 국외자들이 볼 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아직도 미궁(迷宮)에 쌓여있다(다빈치 코드의 대담한 주장을 보라). 예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진리다. 존 스토트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제시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간접적인 증거, 방증은 그 자체로는 무기력하다. 빈 무덤설, 시체도난설, 기절설(氣絶設), 환생설(還生設) 등을 반박한다고 예수 부활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빈 무덤설, 시체 도난설, 기절설, 환생설 등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는 물론 반증하는 데도 무기력하고 불충분할 뿐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에게 과학적으로 설복시킬 만큼 공개적인 증거가 약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방식으로 증거해야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데는 증명 방법이 중요한데 그것은 증인의 역량에 있다. 증인의 삶과 사역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대되는 삶과 사역이어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갈릴레오나 케플러식으로 증명(證明)하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게 할 수는 있다. 부활의 증인은 법정(法廷) 진술(陳述)처럼 증거 능력을 가져야하고 신빙성있는 진술과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 표방하는 가치를 내면화(內面化)하고 육화(肉化)시켜서, 죽음의 권세를 압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는 것은 믿지 못할망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도 믿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개연성(蓋然性)이 있다고 인정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부활 사실을 증거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한 여러 방식의 신(神) 존재 증명(證明)(우주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았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
34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약간 다른 말이다. 당시에 주(主, kyrios)라는 말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신적 대권을 가진 왕을 의미하였다. 고대 로마 제국 안에서는 제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이사)에게만 사용된 호칭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종교의 창시자에게도 주(主)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황제의 주권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로마 총독 관저(官邸)가 소재하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다(마 16:15).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主) 고백을 요청하실 때는, 우리가 우리에게 절하라고 하는 거짓 주들을 거절하고 배격하는 담력을 발동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부왕(副王)을 일컫는다(Second King). 헬라어 그리스도(christus)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마시아흐’(massiaḥ)를 번역한 단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신정통치의 인간 지도자를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7) 신학적인 의미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代理) 왕(王)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부왕(Second King)을 뜻한다. 부왕은 항상 아버지 왕의 오른편에 앉아 아버지 왕과 함께 공동통치를 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왕(副王)을 뜻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런 의미의 부왕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이다.
35-3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원수(怨讐)를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것은 원수를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고전 15:20-2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서 주와 그리스도 역할을 하신다는 말이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고대 앗수르의 왕국 조각물이나 문헌(文獻)을 참조하면 된다. 고대 앗수르의 신상(神像)들이나 왕의 원정 전쟁을 기록한 부조물들 중에는 원수의 목을 밟고 있는 앗수르 대왕(大王)을 묘사한 부조(浮彫)가 많이 발견된다. 예수님은 원수인 사망을 완전히 정복하여 무력화시킬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고, 때가 오면 왕권(王權)과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가 불가불 왕노릇 하는 시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이 정적(靜寂)인 느낌이 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이 보좌에 앉아있다”는 말은 아주 역동적인 통치행위를 묘사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1:1-2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붙드는 일을 하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다. 누가복음 24:47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이다. 죄를 정결케 하는 예수님의 과업은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저항하는 진지와 요새가 되어버린 개인의 자아와 집단 이념과 기득권을 거룩하게 분쇄하는 일이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 전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확장시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동일한 사역이다. 결국 누가복음 24:47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되돌아오는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세계를 통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교회가 사람들의 죄와 반역, 불순종과 불신앙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진실은 의심되고 타기(唾棄)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들 자신조차도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임을 믿으면 믿는 우리가 그의 다스림에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영향을 받게 되어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主)를 지금 이 시간 믿지 못하면, 다른 주(主) 앞에 절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절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거짓 주들에게 절하지 않아도 되는 용기와 담력을 얻지 않았는가?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절하고 나면, 우리에게 절하라고 요구하고, 윽박지르고 회유하며, 공갈치는 거짓 주(主)들을 단칼에 칠 수 있는 담대함과 자유가 생긴다. 예수님께 제대로 절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경배해 보라. 엄청난 자유와 용기가 생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거짓 주(主)들이 우리의 양심을 세차게 정련(精鍊)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순교를 의미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면 부동산 투기 못한다. 이런 때 일수록 우리의 예수 주(主) 고백은 위력을 발휘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일은 우리의 정신적 담력을 단련(鍛鍊)시켜 주고, 엄청난 자유를 확보해 준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들은 스승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으나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에 의하여 완전히 부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위로 지상의 인간 권력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III. 베드로의 구원설교(행 2:37-42)
37-38절은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경악하는 청중들의 적대적 반응을 보여준다. 이 두 절은 베드로의 논리적이고 설득렸있는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예루살렘과 유다 청중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베드로의 영적 권위를 부각시킨다.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이여”라고 부른다. 그 다음 그들은 탄식을 터뜨린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넘겨준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양심이 찔린 청중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하고 성령의 선물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킨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38절).
회개(悔改)한다는 말은 참회한다는 말과 다르다. 참회는 도덕적 가치 판단이 중심이 된 도덕적 반성(反省)인데 회개는 도덕적 반성이 채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영악하게 계산해서 가던 길을 바꾸는 행위다. 예수를 저주받아 죽은 자로 여길 것인가? 아니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고백할 것인가? 회개한다는 말은 예수를 저주받아 죽은 자가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고 고백하는 것이다(고전 12:1-3). 예수를 저주받아 죽은 자라고 믿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대속적인 죽음을 죽었다”고 믿고 자신의 옛 사람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롬 6:3-5; 고전 15:3; 갈 2:20). 이것이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죄사함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자유임과 동시에 죄의 권세, 즉 동일한 죄를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습관적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죄사함을 누리는 사람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지는데,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의 통치 아래 머물도록 격려하고 돕는 보혜사 하나님이시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이 약속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먼 데 있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된다(39절). 성령은 원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자들에게도 선물로 주어진다(행 10:44-47; 11:17; 15:8). 39절은 성령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보편적으로 주어질 것임을 가리킨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유대인들을 넘어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포섭시키는 보편적인 사랑의 영이시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의 오순절 설교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과 유대 청중들에게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함으로써 종료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단지 죽어 혼백(魂魄)이 천당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의 길을 거절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는 길로부터 돌이켜 살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에서 돌에 맞아죽은 제사장 바라갸(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예후 왕과 함께 바알주의자들을 척결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의 피를 흘린 죄(대하 24:20-22)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범해진 모든 범죄의 죄값을 치르는 세대였다(마 23:35-36).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불순종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세대라는 것이다. 모든 패역을 총집결시킨 세대라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무력항쟁을 북돋우는 과격한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멸망당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스스로 자기 구원의 길을 강구하다가(로마제국과 무력항쟁을 벌임으로써) 자멸의 길로 접어드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패역한 세대의 시대정신으로부터 돌이키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이 경고한대로 한 세대가 못 되어 유대인들은 열심당원들의 선동과 지도력 아래 속수무책으로 66년경에 로마제국에게 항쟁을 벌였다. 나라는 멸망당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항쟁에 참여하지 않고 갈릴리의 펠라 지역으로 피신하여 영적 지도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패역한 세대로부터의 구원은 이처럼 단지 영적인 권고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주의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동산 투기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광풍, 패역한 맴모니즘(mammonism)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경쟁과 탐욕으로 담금질된 세대로부터, 그 시대의 왜곡되고 비인도적인 중심가치, 지배가치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 원자적 파편주의, “나만 살아야 한다”는 독점주의, 과잉 욕망을 추구하는 쾌락주의가 우리 공동체를 패망으로 몰아가는 패역적 에너지들이다. 이 에너지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다.
베드로의 설교가 양심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예수 안에서 침수되어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제자의 수가 3,000명이나 되었다. 예루살렘 사도 교회는 120문도에서 3,000명 이상의 대형 회중으로 급성장하였다. 42절은 이런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변화에 한 가운데 12 사도들의 공동체적 가르침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에는 각각의 은사를 통해 공동체를 섬긴다는 점에서 은사민주주의가 형성되었지만 여전히 영적 위계질서는 남아있었다.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서로 떡을 떼며 기도하는 데 전력투구한 것이다.
IV.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탄생-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공동체 탄생(행 2:43-47)
이 단락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직접적인 결과를 보도한다.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전위와 거점이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의 오순절 설교 과정에서 사도들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갔다. 경건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의 손을 통한 기사와 표적은 대중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통치 현장을 생동감있게 체험하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전투적인 사랑의 공동체라는 진지(陣地) 구축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적인 사랑의 공동체 탄생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믿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육체적 현존을 포함하여 모두 다 함께 있었다. 함께 있음의 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영적 지도 아래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가족같은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둘째, 모든 물건을 통용하였다. 그래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 돈과 재물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적 위력이나 휘광(輝光)을 발휘하지 못했다. 셋째,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서 모이기를 힘썼다. 예배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다. 회중적인 공예배에 투신한 것이다. 넷째, 그들은 회중적 공예배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또 안온하고 가족적인 친밀함이 지배하는 공동체인 집을 중심으로 모여 공동식사를 하였다. 46절의 “떡을 떼며”라는 표현은 성만찬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나누는 성만찬을 한 것이다. 성만찬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나눠진 공동체적인 애찬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국외자들인 예루살렘 백성의 칭찬을 받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래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의 숫자를 날마다 더하셨다. 이런 공동체의 일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목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줄기에 붙어있는 포도나무 가지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에 친밀하게 접촉된 가지만이 결실한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성령충만을 경험하다가, 강력한 영(靈)의 공동체(共同體)에 소속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구원받지 않은 자처럼 급격하게 완악해지고 경화(硬化)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강력한 구원을 경험하고 강력한 간증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계속 유지해주고, 영적 고도(靈的 高度)를 온전히 유지시켜주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하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급격한 영적 경화(硬化)와 냉담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위에서 묘사한 그 강력한 성령 충만의 공동체 즉 물질적인 차원까지 소통(疏通)하는 신코이노니아(syn-koinonia) 공동체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공동체이고, 가족과 같은 친밀함과 돌봄, 책임감과 의무로 결속된 공동체다. 구원받은 신자가 이런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으면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본문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와 유사(類似)한 사상처럼 들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본문이 제시하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은 초대교회 시대의 한 때만 있음직한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일회적(一回的)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 사건은 성령충만한 개인들과 공동체 안에서 실현될 수 있는 삶의 모습이다. 성령이 지배하는 공동체는 물질까지 포함하는 나눔의 공동체, 즉 유무상통의 공동체다. 표준적인 성령경험 안에 어느 시점에서든지 반드시 실현될 수 있는 공동체적 모습이다. 이 단계를 거쳐야만 우리는 초대교회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이런 총체적 유무상통의 공동체를 이루어 이 땅에 예수님의 통치권을 확정하자는 것이다. 이런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엄청난 영적 흡인력을 드러낸다. 하루에 삼천 명씩 제자의 수가 증가되기도 한다.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는 엄청난 카리스마와 더불어 유무상통의 역동적인 잔치스러운 교제는 주변 세계를 뒤흔들고 전복시키는 변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
이처럼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의 교제는 말과 혀로만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지갑을 열어젖힌 교제였다. 초대교회는 집에서 탄생해 성전을 통해 확장되고 다시 집을 통해 내실적 성장을 기했다. 오순절 성령은 집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을 덮쳤다. 가족과 같은 친밀한 공동체가 초대교회의 모태가 되었는데 이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활동무대는 집을 벗어나 성전으로 확장되었다. 성전은 예루살렘 당국자들과 일반백성들에게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유감없이 증시(證示)하는 공적 증언 무대였다. 46절에 따르면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였다. 그들은 “집에서” 성령 받고,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집회한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접수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자들이 말하는 전투적인 아가페 공동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떡을 떼며 공동체적인 식사를 통해 가족 공동체적 친밀감을 고양하고 바깥 세계를 향한 증언 공동체로서의 담력을 함양해 간다.
이처럼 45-46절은 초대교회가 어떤 점에서 전투적인 아가페 공동체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겨 하나님과 동급(同級)으로 숭배하는 돈, 재산, 동산, 부동산을 공동체 앞에 바쳐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성령께서 자연적 양심의 공감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강도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예민하게 느끼는 마음을 각각의 성도에게 심어주신 것이다. 성령충만한 마음은 막걸리 한 잔 마셔서 컬컬했던 마음이 묘해지고 격앙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지갑을 열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쓸 공동체적 자산(資産)을 만들만큼 자유해지는 상태다. 성령충만한 마음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처럼 여겨졌던 사유재산(私有財産)을 하나님께 바쳐 이웃을 사랑하는 데까지 활짝 열린 마음이다.8) 오늘날 돈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거의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도 돈의 힘에 초연한 척 할 수 없다. 돈을 경멸하는 사람도 돈의 힘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돈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하여 돈을 순교시킬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성령에 강력하게 사로잡힐 때만이 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앞에 제 본분을 다하는 유순한 종이 된다.
사유재산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 제도를 상대화시킬 만큼 강력한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힌 전투적 아가페적 공동체는 돈을 신으로 숭배하는(마 6:22) 집단과 조직을 초토화(焦土化) 시켜버림으로써 그것을 구원한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공동체의 사랑을 전투적인 사랑이라고 부른다. 전투적 사랑의 특징은, 전투에서 진 자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자신들의 동산과 부동산을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내놓고 자기 재산을 아무 대가없이 양도(讓渡)하는 이 엄청난 담대함과 자유는 성령이 창조해 주신 자유요 사랑의 능력이다. 이 자유케 된 사랑이 돈을 신처럼 숭배하는 개인들과 집단을 무력화시키고 초토화시키기 때문에, 전투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설복(說服)으로 가능한 일이지 강제적인 법이나 이념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절대로 사회주의(社會主義) 법(法)이나 프롤레타리아 유일정당인 노동당의 이념으로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또한 히피적인 군중심리나 집단정신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한국교회가 진정한 성령충만을 경험하면 반드시 이 단계(段階)를 거칠 수밖에 없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충만함을 물질적으로 표현하게 마련이다. 성령충만한 상태가 영(靈)으로 표현되지 않고, 물질과 육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영과 육은 변증법적(辨證法的)인 순환 관계를 이루며 서로를 표현한다. 성령충만 할수록 물질에 자유해 진다. 성령충만 할수록 내가 가진 물질, 계급적 위치, 나의 기득권적 이득을 강하게 부인하고 그것들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자유함이 더 커진다. 개개인이 이것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집단정신이나 집단 이데올로기 이름으로 개인의 양심을 강압하거나 위협해서 실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V. 거기에서부터 산 자 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시리라(딤후 4:1-4)
우리는 여기에서 “오르사, 앉다, 다시 오시리라”는 시간의 세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사도신경이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와 미래를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주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세계의 창조자), 오늘(세계의 구원자), 내일(세계의 완성자)의 시간들 안에서 불변의 주체요 대주재시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보좌 앉으심은 세계 심판 및 개인 심판의 근거와 토대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이 세계를 감찰하시고 통치하시다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러 오실 것이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계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야말로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존립근거와 사명 수행의 능력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실천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부활과 성령 강림,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속적 통치행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활과 오순절은 사도들의 신앙의 프락시스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승천과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주제는 신학과 교회로부터 성급하게 비신화화될 수 없을 것이고, 우선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역사는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재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통치하시다가) 세계를 변화시키고, 해방하실 것이라는 고백은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게 선사하는 가장 위대한 희망이다.
결론
예루살렘에 탄생한 초대교회는 유대 당국과 로마제국의 음모와 담합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사형수 나사렛 예수의 죽음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체포되어 끌려가는 예수님을 뒤로한 채 뿔뿔이 도망친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 이렇게 용감무쌍한 증인 공동체로 재집결한 것은 합리적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다. 프로이드를 비롯한 역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한 제자들의 보상심리적 행동이라고 주장하나 제자들의 남은 생애와 그 이후에 전개된 기독교 복음의 전파 과정을 보면 이런 심리역동적 설명은 턱없이 무기력하고 불충분한 가설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고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 비겁하고 무기력한 오합지졸같은 제자들이 용감무쌍한 신코이노니아 공동체, 전투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형성할 수 있었다는 사도행전의 주장을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을 수 없다.
갈릴리의 첫 제자들은 갈릴리발(發) 태풍이신 나사렛 예수를 처음 만나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얼마나 경탄하며 열광하였던가? 하나님의 아들이 현신하여 땅 위를 걸어다닌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마 16:16)? 유대인 모두가 다 아는 바처럼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 까지는 얼마나 강력한 이적과 기적의 공생애를 펼치셨던가? 그런데 예수님이 무기력하게도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어 버리시자 제자들은 얼마나 낙담했던가? 십자가에 끌려가는 예수님을 뒤로 한 채 자신들만 살려고 줄행랑치던 그들의 적나라한 모습은 또 어떠했던가?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장사한 지 3일 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장면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스승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깊은 죄책감에 찌들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얼마나 두렵고 당혹스러운 일이었을까? 제자들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져가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일부 제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수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났고, 모든 사람들에게 다 관찰되거나 경험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미궁(迷宮) 속에 빠진 사건이거나 적어도 논란(論難) 중에 쌓인 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증거주의에 입각하여 제판하는 법정의 증언대(證言臺)에서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깊은 확신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 번 보았다고 부활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두 일곱번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일곱 번 나타난 것은 나타날 만큼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서 수제자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련다”라고 말하며 다시 옛 생업으로 되돌아간다. 초기 제자들 모두가 베드로와 함께 밤에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갔다. 이것은 단지 하룻밤 소일을 위해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3년 동안 보냈던 갈릴리 신학수업 경험을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되돌리겠다는 말이자 예수님과 함께 이룰 꿈이 깨어진 이상 이제 과감하게 다시 세상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역소명(逆召命)을 위한 결단(決斷) 표명이었다.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소명이 아니라 생업을 위하여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활 신앙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신앙은 감각 경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해야만 진정한 부활신앙이 생기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을 구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증거하는 증인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의 비밀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겨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체 도난설과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믿게 된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시체도난설을 믿고 있다. 시체도난설은 부활 신앙보다 훨씬 더 믿기가 쉽고, 순교자의 순교적 전도 없이도 전파될 수 있는 사상이다. 시체도난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부활 신앙보다 훨씬 더 빨리 퍼질 수 있었을 법한 사상이다. 자연인인 인간의 이성에는 어떤 소식이 빨리 전파되고 설득력이 있을까? 시체를 도둑맞았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되었다는 설은 일부 로마 병정들에게만 통하고 전혀 전파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예수가 부활했다는 믿음은 250년경 즈음에 로마 제국의 모든 변방에까지 퍼졌다. 완전히 고사리가 늪지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듯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버린 것이다. 이 두 믿음의 전파 속도와 범위의 차이는 목숨 바치는 증인의 유무에 달려있었다. 시체도난설에는 목숨 바치는 증인이 없는데 비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는 목숨 바치는 선교사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가 주(主)라는 고백은 성령 강림 없이는 있을 수 없고, 성령의 공중 내습(來襲)없이는 예수가 주(主)라는 확신이 자랄 수 없다. 예수가 주(主)라는 고백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예수가 주(主)라는 고백이 없으면 전(全) 재산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바칠 만큼, 하나님 앞에 자기의 전(全) 존재를 쏟아 부을 공동체에 대한 결속감을 느낄 수도 없다. 이런 사랑의 진지(陣地)가 형성되지 않고는, 세상에 대하여 공세적(攻勢的)인 복음을 외칠 수 없다. 이런 강력한 사랑의 진지가 구축되지 않으면 로마 제국의 변방과 그늘에 주저앉아 있는 연약한 자들, 노예들, 어린이들, 포로들, 군인들, 여인들의 희망이 되기까지 자기를 내어주는 선교사들이 나올 수 없다. 사도행전 2:37-43은 아주 미미한 출발을 보였던 교회가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 세계인의 복음이 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을 조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전투적인 아가페 사랑의 진지 구축 장면이다.
2007숭실신앙강좌 5강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김회권 교수) (88.5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사도신경 고백 중 가장 약한 부분은 성령에 대한 고백이다. 로흐만이 지적한대로 서방교회의 역사는 성령 망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성령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고 형식적이었다. 성령의 인격성, 성령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성령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 성령과 교회(신자), 성령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등 모든 면에서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은 한층 더 심화된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성령은 성자의 요청에 의거하여 성부 아버지로부터 출원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해설하며 심화된 이해를 가져다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효과(죄사함 갱신)를 개별 신자들에게 적용시킨다. 성령에 대한 지식은 삼위일체장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14-16장, 누가복음 1-4장, 사도행전 2:31-36, 에베소서 1장, 5장, 로마서 8장 그리고 고린도전서 2-3장, 12-14장 등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수인계(요한복음 16:1-11)
요한복음 14-16장은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을 담고 있다. 이 세 장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부 하나님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이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하여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을 파송하신 하나님이시다. 구약시대에 예언자를 파송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송하셨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본질은 자기연소, 자기비움, 자기희생적 사랑이다(요일 4:8; 요 3:16, 5:18).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새로워지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신적 권능과 권위를 연소시키고 소모시킴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랑하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끊임없이 당신을 주신다. 빛나는 태양이 하루 종일 스스로를 태우며 온 땅에 빛과 열(에너지)을 창조하듯이 하나님께서도 홀로 스스로를 태우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연소시킨 후에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시 19:1-4). 이 세계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창조열정의 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 이 세계를 유지하시기 위하여 말씀으로 붙들고 계신다(히 1:1-4). 창조질서가 무질서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세계를 붙들고 계신다.
전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마치 물 분자 구성에 비유할 수도 있다. 물은 H20로 구성되어 있다. 산소 원자 하나에 수소 원자 둘이 합하여 물이 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명령하시고 아들 하나님은 이 명령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그 명령을 집행하신다. 아들 하나님은 또한 기도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움직이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명령을 통하여 일하시고 아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을 북돋우시고 아들이 이루신 명령의 결과를 인간에게 적용시킨다. 아버지의 명령을 아들이 이해하도록 돕는 하나님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명의로 활동하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그 부활을 가지고 일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과 수직적 위계질서의 위에 계신 분이라면 또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파송하신다는 점에서 성령 하나님도 성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나님이다. 이에 비하여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항렬이 비슷해 보인다. 마치 형제간처럼 여겨진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에 싸여 있다. 신학적 설명 시도 자체가 무모할 정도로 신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밝히 드러난 하나님에 대한 비밀에 대해서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주시는 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존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서론 부분 “계시”의존적 하나님 인식). 어떤 교부들(터툴리안, 오거스틴
)의 설명도, 어떤 위대한 신학자들의 설명도(몰트만, 칼 바르트, 갑바도기아의 세 동방 교부들) 비의하고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을, 성령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고전 2장).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사정을 통달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실 수 있다.
2. 성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표현하실 때 대리자를 통하여 표현하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 존엄한 위엄을 표현하는 대리자들은 천지만물, 천사들, 이스라엘 백성들, 왕과 제사장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집행하고 실행하는 대리자들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하나님의 대리자들의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의 화신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군가의 순종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펼치고 당신의 나라를 확장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상쇄시키는 위대한 순종과 신앙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분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과 거의 같은 말은 태초에 한 위대한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이 있었다는 말이다.
3. 성령 하나님: 성령님은 예수님의 일을 이 땅에서 계승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시고 격려하시는 원(元) 보혜사(믿음의 격려자와 고취자)라면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을 때 이 세상에 오시도록 약속된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신자 안에서, 교회 안에서 계승하신다. 성령님의 가장 핵심사역은 예수님을 둘러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가르치는 일이다.
죄란 무엇인가, 의(義)란 무엇이며, 그리고 무엇이 심판당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시는 진리의 영이다(요 16:8-11). 유대인들에 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 죽임을 당했다고 믿어졌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당하게 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이 모든 유대인들의 억지주장과 거짓된 확신을 완전히 뒤엎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증거하다가, 즉 의를 행하다가 자초한 사랑의 고난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성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예수님이 심판을 당한 것임을 알려주기보다는 하나님께 되돌아가기 위한 것, 하나님께 드려온 자신의 복종을 완성시키기 위한 자발적인 죽음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성령님의 깨우침을 받고 납득된 사람은 이미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요 영생을 누리는 사람이다.
보혜사 성령 안에서 누리는 절대 평안(요한복음 14:25-31)
나사렛 예수의 일생의 특징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무한 복종이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의 죄인들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배반과 거절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세상의 잃은 자들을 사랑하던 예수님은 유대 종교당국자들에게 깊은 반발과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예수님은 그들이 뒤집어 씌운 죄를 묵묵히 지고 어린 양처럼 온순하게 붙잡혀 죽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절대복종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한편 죽기까지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상실이요 절망이었다. 제자들은 깊은 불안과 심리적 동요를 겪으며 해체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 죽음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며 자신의 죽음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영속화하며, 세계적으로 확산시켜가며, 시간을 넘어 계승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는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요한복음 14장 전체는 예수님의 죽음과 제자들과의 이별이 가져올 유익과 구원을 설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과 불안은 너무 깊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 자신들의 인생의 전부였던 사랑하는 스승, 주와 왕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오는 상실감, 그리고 기대와 희망이 깨어지는 고통이 제자들의 마음을 깊은 불안과 근심으로 몰아갔다. 그들은 평안을 잃고 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다.
요한복음 14:25-31은 제자들의 근심과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키는 결정적인 위로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육신을 입은 예수님, 창에 찔리면 그대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예수님을 잃으면 보혜사 성령을 받는다.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의 자아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분이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고 삶의 구체적 상황에 적용시켜 주는 진리의 영이다. 한 때는 육체로 계시다가 죽음의 지배를 받았던 예수님이 이제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죽음을 무기력하게 만드신다.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다. 보혜사 성령은 죽음의 공포, 상실과 실패, 좌절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깊은 불안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하신다. 잠간의 상실은 영생을 얻기 위한 예비절차에 불과하며 잠간의 이별은 영원한 연합을 위한 중간단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하고 서로 안에 거하게 하는 진리의 영, 위로의 영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가? 죽음의 공포, 재산 상실, 생명 상실, 건강 상실, 모든 좋은 것들의 상실과 모든 좋은 분들과 좋은 것들과의 강요된 이별을 감당하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 십자가에 달리려 체포당하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 웃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종 된 예수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주가 되었다고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 또 다른 한편 보혜사 성령님을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을 수 있다. 둘 다 진실이다.
결국 보혜사 성령은 세상의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을 친히 겪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천로역정, 미우라 아야꼬, 우찌무라 간조). 예수님을 따르다가 세상의 위로와 평안을 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보혜사 성령이 주시는 절대평안이 찾아온다.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주는 평안은 죽음의 공격에도 파괴되지 않는 절대적인 보금자리에 들어와 있는 영혼의 평안이다. 보혜사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어떤 피조물들도 빼앗거나 무너뜨리지 못하는 절대 평강이다. 평강은 샬롬이다. 성령의 열매가 희락과 평강이다.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다. 어떤 원자 폭탄도 파괴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방호벽, 상황초월적인 평강과 희락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어떤 세상 임금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 평안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에 잠긴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떠나 십자가의 수치와 굴욕을 감수하는 예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폭풍이라면 그 폭풍 안에서도 절대평강을 주시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믿어야 한다. 이 보혜사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 임금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이 왕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기도한 것처럼(단 6:10) 어떤 환난에도 동요되지 않고 자신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기도에 몰입하는 교우들은 절대적인 평안을 누릴 수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임금이 강요한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위한 임무교대를 하시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요한복음 14-16장이 성령을 파송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성자의 하나님 우편보좌 복귀--->성령 오심), 성령과 성자의 순차적 임무교대와 유사한 측면을 강조한다면, 사도행전 2장은 성자의 주도적인 성령 파송행위를 부각시킨다.
승천하셔서 성령을 파송하신 예수님(행 2:33, 34-36)-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베드로
사도행전 2:33-36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증하여 예수님 승천의 성경적 근거를 밝힌다(34-35절). 33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파송을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파악한다. 33절의 상반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령 파송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셔서 행하신 첫 사역인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요청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파송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3위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에서 1054년 동서방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던 필리오케(and from the Son) 논쟁을 자세히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양측의 논쟁은 언어적 자구의 뉘앙스를 사이에 둔 논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로마교회로 대표되는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from the Father and the Son) 출원하신다”고 주장하였고 콘스탄티노플로 대표되는 동방교회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 성령이 출원하신다”고 주장했다. 요한복음 14-16장과 사도행전 2장을 종합해 보면, 아들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께서 성령을 파송하신다는 주장이 참된 진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합의와 연합으로 성령을 파송하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은 일차적으로는 아들 하나님을 증거하고 아들 하나님의 사역을 바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첫 보혜사였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토대로, 그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를 증거하실 성령은 둘째 보혜사인 것이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강조되듯이 성령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가지고 당신 자신을 증거하실 “또 다른 보혜사”인 것이다.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고 보좌 우편으로 되돌아가 주와 그리스도의 사역에 착수하셔야만 제자들에게 오시도록 예정된 또 다른 보혜사였다. 따라서 성령이 강림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올리우셨음을 의미한다. 성령 강림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의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에게 심어준 가장 강력하고 즉각적인 확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마 28:18-20; 행 7:55; 빌 2:10-11).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주(主)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는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깨달았는가? 아니면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는가?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요한복음 14:26, 15:26, 16:7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 강림의 논리적 관계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시면 아버지께 요청하여 제자들을 위하여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았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서 처음으로 착수했던 최초의 통치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主)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착수한 통치행위는 성령을 파송하신 사건이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심을 증거하는 영(靈)이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게 된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 주권(主權)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확신하려면 성령 충만에 이르러야 한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믿는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한 감정이 단지 감미롭게 순화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意志)와 책임감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을 만큼 성령충만한 신앙고백을 드리지 못하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령의 단기적 과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보혜사 역할이었다. 예수님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 속에서 감미로운 순종 모드(mode)로 전환된 제자들을 자유자재로 다스리신다. 성령으로 달구어지고 감동된 제자들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하시고 아주 사이가 나쁜 인간 관계에 머물던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같은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고립된 개인들이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루되, 성령의 능력에 무장해제된 개인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신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성령을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33절에 의하면 그들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과 공동체에게 일어난 사태의 외양과 현상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위대한 공생애를 실선적(實線的)인 사건으로 목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과 주장만 들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들의 신앙(信仰) 여부(與否)에 상관없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취상태를 경악과 당혹, 의심과 경이 속에서 쳐다보고 있다. 새 술에 취한 듯 세계 만방의 지방 언어로 예수님의 부활과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하는 이 사건의 일차적 목격자요 관찰자로 서 있다.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사건은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만민(萬民)이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실선 사건이다.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은 실선 사건(實線 事件), 부활과 승천은 점선 사건(點線 事件), 오순절 성령강림의 결과 나타난 방언 현상은 다시 실선 사건(實線 事件)인 것이다. 국외자들이 볼 때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아직도 미궁(迷宮)에 쌓여있다(다빈치 코드의 대담한 주장을 보라). 예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진리다. 존 스토트가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제시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간접적인 증거, 방증은 그 자체로는 무기력하다. 빈 무덤설, 시체도난설, 기절설(氣絶設), 환생설(還生設) 등을 반박한다고 예수 부활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빈 무덤설, 시체 도난설, 기절설, 환생설 등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는 물론 반증하는 데도 무기력하고 불충분할 뿐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에게 과학적으로 설복시킬 만큼 공개적인 증거가 약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른 방식으로 증거해야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이라고 증명하는 데는 증명 방법이 중요한데 그것은 증인의 역량에 있다. 증인의 삶과 사역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기대되는 삶과 사역이어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갈릴레오나 케플러식으로 증명(證明)하지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게 할 수는 있다. 부활의 증인은 법정(法廷) 진술(陳述)처럼 증거 능력을 가져야하고 신빙성있는 진술과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이 표방하는 가치를 내면화(內面化)하고 육화(肉化)시켜서, 죽음의 권세를 압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는 것은 믿지 못할망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도 믿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판단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주장이 개연성(蓋然性)이 있다고 인정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부활 사실을 증거해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한 여러 방식의 신(神) 존재 증명(證明)(우주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은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았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
34절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리우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선포한다.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약간 다른 말이다. 당시에 주(主, kyrios)라는 말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신적 대권을 가진 왕을 의미하였다. 고대 로마 제국 안에서는 제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이사)에게만 사용된 호칭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종교의 창시자에게도 주(主)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황제의 주권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로마 총독 관저(官邸)가 소재하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다(마 16:15).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主) 고백을 요청하실 때는, 우리가 우리에게 절하라고 하는 거짓 주들을 거절하고 배격하는 담력을 발동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부왕(副王)을 일컫는다(Second King). 헬라어 그리스도(christus)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마시아흐’(massiaḥ)를 번역한 단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는 신정통치의 인간 지도자를 의미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왕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 신학적인 의미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代理) 왕(王)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부왕(Second King)을 뜻한다. 부왕은 항상 아버지 왕의 오른편에 앉아 아버지 왕과 함께 공동통치를 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왕(副王)을 뜻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런 의미의 부왕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이다.
35-3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원수(怨讐)를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것은 원수를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고전 15:20-2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서 주와 그리스도 역할을 하신다는 말이다. 원수를 발등상 삼는다는 표현을 이해하려면 고대 앗수르의 왕국 조각물이나 문헌(文獻)을 참조하면 된다. 고대 앗수르의 신상(神像)들이나 왕의 원정 전쟁을 기록한 부조물들 중에는 원수의 목을 밟고 있는 앗수르 대왕(大王)을 묘사한 부조(浮彫)가 많이 발견된다. 예수님은 원수인 사망을 완전히 정복하여 무력화시킬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고, 때가 오면 왕권(王權)과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라를 바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가 불가불 왕노릇 하는 시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이 정적(靜寂)인 느낌이 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이 보좌에 앉아있다”는 말은 아주 역동적인 통치행위를 묘사하는 말이다. 히브리서 1:1-2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붙드는 일을 하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다. 누가복음 24:47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일이다. 죄를 정결케 하는 예수님의 과업은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저항하는 진지와 요새가 되어버린 개인의 자아와 집단 이념과 기득권을 거룩하게 분쇄하는 일이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 전파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확장시키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동일한 사역이다. 결국 누가복음 24:47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되돌아오는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이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세계를 통치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교회가 사람들의 죄와 반역, 불순종과 불신앙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진실은 의심되고 타기(唾棄)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들 자신조차도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임을 믿으면 믿는 우리가 그의 다스림에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영향을 받게 되어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主)를 지금 이 시간 믿지 못하면, 다른 주(主) 앞에 절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절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거짓 주들에게 절하지 않아도 되는 용기와 담력을 얻지 않았는가?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고 절하고 나면, 우리에게 절하라고 요구하고, 윽박지르고 회유하며, 공갈치는 거짓 주(主)들을 단칼에 칠 수 있는 담대함과 자유가 생긴다. 예수님께 제대로 절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경배해 보라. 엄청난 자유와 용기가 생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거짓 주(主)들이 우리의 양심을 세차게 정련(精鍊)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순교를 의미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면 부동산 투기 못한다. 이런 때 일수록 우리의 예수 주(主) 고백은 위력을 발휘한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일은 우리의 정신적 담력을 단련(鍛鍊)시켜 주고, 엄청난 자유를 확보해 준다. 베드로와 열 한 사도들은 스승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버렸으나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에 의하여 완전히 부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위로 지상의 인간 권력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결론: 성령을 믿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성령을 망각했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이신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이룬 구원(십자가와 부활)을 실재화하신다. 개별화시킨다. 현재화시킨다. 성령은 개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드라마에 참여케 하는 영적 권능을 선사하신다.
성령은 신자의 현재적 삶 속에 현재하는 그리스도시다. 영은 예수의 사신(使信)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공생애적 삶 속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누가복음은 성령복음서). “주는 영이시다”라는 선언은 기구화되고 권력기관화된 교회 공동체와 이 세상 질서의 한 부속품으로서 살아가는 개별신자들에게 부단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나님 나라)하도록 격려하고 압박하는 변혁적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마치 엘리야가 남긴 겉옷을 들고 엘리사가 요단강을 파하여 마른 땅을 만들어 걷듯이,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가 남긴 겉옷과 같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움직여진 사랑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넘어서 성령의 최종적인, 표준적인 은사와 성령 자신의 현재적 사역범위를 결정한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의 부재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채 남겨진 공허에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 고독으로 방치된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금 변증법적으로 연합하는 시간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고별 시간은 체념의 시간이 아니라 세계 속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시간이다. 성령의 도래와 더불어 제자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육박하고 당국자들과 권력자들의 홈그라운드로 전진한다. 압도적인 성령의 현재는 신약성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주님의 현재(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로서 파악된다. 성령 충만한 경험 속에서(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소유되는 경험)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하나님으로 겹쳐 경험된다. 이러한 성자와 성령의 내적 관련성에서 “주님은 성령이시다”라는 명제가 성립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이면서도 성령을 통해 신자들과 교회 공동체 속에 현존하시고, 교회와 신자들을 통해 이 세계 안에 현존하신다. 교회가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현존하심을 고백하지 못하면 온 세상은 무신론의 지배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자유한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을 촉진하는 성령 하나님-거룩하고 공변된 교회 공동체
그리스도 영(성령)의 현존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내재적인 세계에서 일어난다. 성령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자유케 된 신자들(자녀들)을 창조한다(롬 8:15-17). 개별적 욕망, 계급적 계층적 이데올로기적 굴레, 즉 모든 비진리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성령은 하나님께 소속시키는 영이시다. 성령의 분명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얻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만일 구원받았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자신(인종, 계급, 계층 등)속에서만 맴돌고, 초월과의 다리 -이웃과 하나님과의 다리 -를 파괴한다면 그러한 행동은 구원의 상실을 초래할 것이다. 본질적으로 성령은 교회공동체의 영이시다. 개인을 구원하시자마자 공동체에 접목시키신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자마자 이 세계 생존공동체의 핵심문제에 시선을 맞추게 되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해답이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성령의 운동은 개별신자에게 죄사함과 중생을 창조해주시면 또한 개인밖의 외부, 사회구조의 갱신을 목표한다. 성령의 운동은 인간 밖으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이것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성령론은 교회론과 종말론을 지나 더 나간다. 성령은 현존하는 그리스도로서 먼저 교회의 영이다. 성령의 몸은 교회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상하는 것은 신약 성서적인 교회론의 명쾌한, 가장 생산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에 거한다는 성령의 장소규정은 구체적인 신앙의 공동체를 단순하게 받아들이거나 교회를 인간적인 현상에다 그대로 내맡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현존하시지만 교회의 직제나 기구에 속박되는 그런 영이 아니시다. 교회의 밖을 향한 선교의 첫 발걸음은 외부사회를 갱신하려는 성령의 원래적인 사명과 잇닿아 있고 교회는 이제 세상을 향한 성령의 변혁적인 공격의 전위부대가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교회와 함께 교회를 넘어선다. 이런 성령의 거룩한 추동력에 의해 실행되는 교회 밖을 향한 교회와 성령의 증거는 교회사와 교리사의 넓은 흐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마치 성령은 교회 안에서만 활동하기로 작정하신 종파적인 인간 정신의 대표자인 것으로 오해받았다. 원래의 광활하고 변혁적인 성서적 성령론의 열려진 전망은 기구화되고 권력기관화된 교회에 의하여 자주 가려졌고 좁혀졌다. 이 점은 성령의 교리화, 개인화, 제도화를 초래하였으나 이것은 마땅히저지되어야 한다(몬타누스 운동에 대한 초대교회의 억압).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이상에서 고백된 성령의 포괄적이고 광활한 역동성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거룩한 공회와 거룩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이 성령에 관해서 말한 다음 곧 같은 조항에서 교회에 관해 말하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가장 진실된 표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배와 복종이다. 거룩성, 보편성, 사도적 계승, 단일성이 교회의 표지다. 교회의 세 가지 기능은 말씀 선포, 성례전 집행, 그리고 치리다. 교회 예배는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절실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고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예배 동안에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진 모든 인간적인 권력들과 업적들과 성취물들을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놓을 수 있다.
교회의 본질에 상응하는 최대의 봉사는 생동하는 예배를 위한 노력이다. 교회는 전체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거룩한 목적을 위한 분리된 성도들의 공동체다. 이 거룩한 공동체는 전체로부터, 그러나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분리된 공동체다. 이 거룩한 공동체는 모든 세대들을 통하여 배출된 성도들의 교제가 가능함을 믿는다. 인종, 세대, 계급, 피부색의 차이를 초월하는 성도들의 공변되고 거룩한 교제를 믿는다. 전체로서의 세상으로부터 “에클레시아”(교회)는 부름받은 자들(the called)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거룩한 교회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교회다. “거룩” “보편성”이란 개념들은 분리되었으되 세계 안에서 그리고 세계를 위하여 봉사하라는 부름을 듣고 전 세계와 연대하라는 부름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한계(닫힌 경건과 거룩)를 넘어서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공동체다.
이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교회의 열려있는 관계의 지평을 가장 잘 표현한 신학적인 개념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회의 독점물이 아니고 전 인류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교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이자 세계의 미래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교회의 현재를 폐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상대화하고 종말로부터 역진해 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출발하게 하며 맞이하게 한다. 교회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당파와 영속적으로 제휴하지 못한 채 역사의 오메가 포인트를 향하여 달려간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인 당파를 신앙의 고백에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자본주의나 공산당이나 어떤 인간적인 이념도 종말의 질서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기 시대보다 몇 발짝씩 앞서 달려가려고 하는 교회의 전진을 가로막을 수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과 동시에 지역과 시간을 초월한 성도들간의 역동적 사귐이다. 이 사귐은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사귐이 아니라 물질적 기반까지 나누는 총체적인 사귐이다.
성도들의 사귐이 교회에서 엷어지고 사라진다면 교회의 이해는 천박해지고 교회의 삶은 빈곤해진다. 성도의 사귐은 성도끼리의 사귐 이상을 의미한다. 한 시대의 주변화된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를 이루는 사귐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사귐이다.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면은 동시대인들과의 친교에서 드러난다. 초대 신약성서 교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형제자매적 운명공동체적인 공동체 정신과 실천이었다. 초대교회의 운동은 분명히 형제적인 공동체의 사귐운동이었다(행 2:42). 성도들의 사귐의 사회적, 경제적인 차원에서까지 이뤄졌다. 성도들의 사귐은 사회 윤리적인 정치적인 현실성을 수반하는 임무를 갖는다. 성도들의 사귐의 약속이 가장 강력하게 실현되는 장이 성례전이다.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총체적인 사귐에 들어갈 용기를 고백하는 것이다.
2007년 숭실신앙강좌 사도신경 6강(11월 27일, 김회권 교수)(72매)
6주차: 거룩한 공회, 성도의 교통,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 미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이어졌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우편 보좌-섭정 왕, 버금왕의 자리)에 앉으시는 왕위 등극을 의미한다. 주와 그리스도에로의 영광스러운 복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셔서 온갖 굴욕을 참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음부에까지 내동댕이쳐진 비하의 경험을 거친 후 다시 하나님의 우편보좌로 복귀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육신하시기 전, 즉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복종을 드리기 전의 지위와는 다른 지위를 의미한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역사와 개인의 삶을 심판하시는 주(主)가 되신 것이다. 구약성경(다니엘 7장 13절)과 외경 에녹서 등에는 심판의 권세를 가진 미래의 메시야를 인자(人子)라고 부른다(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부른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거기에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역사의 종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라고 고백한다. 미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시작되는가? “저리로서(저기로부터)”이다. 어디가 “저리로서(저기로부터)”인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 바로 “저리로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르다,” “앉다,” “다시 오시리라”는 세 개의 연속적 동사와 그것과 연결된 약속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동사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역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부활 승천하셨고(유일회적 과거완료사건), 현재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의 지위를 가지고 세계를 다스리시고(그 다스림이 감춰져있다-성령충만한 자의 눈에만 환히 보인다!), 미래에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이 최후 심판-미래적 심판에 대한 전망은 거짓된 정치적 종교적 판단과 인간적인 심판으로 멍들고 고문당하고 박해당한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평강으로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된다.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마 26:63-68),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일제 치하의 신사참배의 경우에서 보듯이 악마적 국가권력을 비신화화하고 상대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딤후 4:1-2).9) 한국교회사가인 박용규는 일제신사참배 강요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탱해 온 두 가지 원동력은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전천년설 종말론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신사참배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교단들인 장로교 동양선교회 성결교 동아기독교선교회 등이 모두 전천년설 재림종말론을 신봉하는 교단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935-1945년 전천년설이 이 10년간을 특징짓는 중요한 주제였다는 것이다.10)
특히 전천년설적 재림신앙은 요한계시록 20:4에 근거하고 있는 재림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비하여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도록 노력해야 하나 재림 이전의 대배교 사건, 전쟁과 기근, 지진, 적그리스도의 출현 대환난 등이 재림의 징조로 나타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그의 왕국은 갑자기 불가항력적인 능력으로 실현될 것이며 이 때 유대인들은 회개할 것이며 매우 중요한 존재로 등장할 것이다. 천년기 왕국 동안에 악의 세력은 그리스도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말기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죽었던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하여(고전 15:52; 살전 4:16-17) 공중으로 올라가 예수를 영접하고 내려와서 그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주장이다.11) 한일합방 이후부터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과 전천년설 종말론에 심취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 때 묵시록 주석서들이나 예수의 재림에 관한 저서들이 다수 출간되었다.12) 이 가운데서도 1920-1930년대 한국교회의 말세의식을 심화시킨 인물은 길선주다. 그의 재림론은 전천년설주의 재림론이었으며,13) 그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지구상에 이루어질 지상낙원 변화무궁세계 무궁안식계를 주장했다.14)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확고한 재림신앙과 천년왕국신앙으로 일제의 천황숭배사상에 맞설 수 있었다. 대부분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장로교와 관련된 전천년설주의자들이었다. 일제는 이 역사적 전천년설에 입각한 그리스도인들의 재림신앙을 가장 위험시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에 해당하는 국체변혁의 죄목에 해당하도록 조작했다.15)
장로교 전도사였던 방계성의 예심종결서와 박관준 장로가 1935년 신사참배 반대를 위해 평안남도 도청을 방문하여 일본인 학무국장과 나누었던 회담내용 가운데 신사참배 저항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예심종결서에서 일제는 방계성을 가리켜 일본제국의 국체변혁도 필연 초래할 “그리스도 독재와 지상천국 소위 천년왕국의 실현을 기망하고 이 건설에 협력할 목적 하에서 신사참배 등 반신의적 정책에 반대하여 기독선교적 교리 선명에 노력해 온 자”라고 말한다.
박관준은 일본인 학무국장과의 대화에서 “당신은 현세에 나타나 있는 지상 국가만 눈에 보이는 모양이오. 눈을 밝히 뜨고 만국 만왕을 호령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왕국의 세계를 한 번 바라 보잇오.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불경하면 진노의 채찍을 면치 못하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지상 심판을 당신뿐 아니라 일본 제국도 면할 길이 없을 것이오”라고 선포했다.16)
이것은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신사참배 저항 동기가 기독교의 재림신앙과 천황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말세관이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재림신앙 때문에 신사참배 저항자들은 검거되어 심한 박해를 받았는데, 성결교, 동아기독교 및 안식교는 심지어 교단이 해산되고야 말았다. 재림신앙과 관련된 말세론과 천년왕국신앙은 전쟁에 대한 심판적 시각과 기독교적 평화사상을 대변하고 있으며 당시 일제의 전쟁수행과 침략정책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암묵적 비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리스도의 왕권과 천년왕국의 지상 건설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제의 통치, 즉 국체에 대한 암묵의 도전을 상징한 것으로 여겨진다.17)
그러나 신사참배 강요를 비롯해 황민화 정책이 심화되고 중일전쟁과 총동원체제가 진행되면서 말세적인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기독교의 재림신앙이 타계주의적 현실도피를 조장하기보다는 현실비판적 예언자적인 기풍을 드러냈다. 따라서 일제는 기독교의 재림신앙을 철저히 억압하려고 교리를 자세히 연구했으며 종교법안에 의해 주요 교파들을 통합하면서 동시에 소종파들을 해산시켜 일체 검거했을 만큼 자신들의 정책에 어긋난 어떤 교리나 신앙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의 재림신앙은 타계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역사변혁적이고 체제전복적인 신앙을 대표하였다. 예수 재림에 대한 신앙이 겉으로는 내세지향적인 모양으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알짬에 있어서는 강렬한 현실변혁적 역동성을 발산했다는 것이다. 예수 재림 신앙에 대한 합리적이고 현세주의적인 비판은 초월신앙의 역사적 동력을 축소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18)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한국교회가 붙든 재림신앙은 다미선교회나 소종파가 외치는 재림신앙이 아니라 공공성과 역사성을 작렬시킨 재림신앙이었다. 재림신앙은 예수의 재림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 일제에 대한 주 예수의 심판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신앙이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계 22:20)라는 외침은 기독교신앙을 박해하는 악의 세력들에 대한 신속한 심판집행을 열망하는 기도언어였다.19) 따라서 일제가 한국교회의 재림신앙을 일본 국체변혁 음모라고 보는 것은 어찌보면 정곡을 찌른 관찰이요 우려였다.
한국장로교회의 재림신앙은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김익두 목사는 종말적 희망의 설교로 일제의 압박에 찌들려 허탈해진 이들에게 의기를 심어주었다. 실제로 그 자신이 ‘태양신과 싸운 이들’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예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 희망과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 회복을 절대 신뢰하여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극복하였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종말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20)
겁내지 말고 결사문에서 서서 요단강 저 언덕을 보시라! 저기서 예수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들고 기다린다... 천국은 이 육신을 벗고 불노하는 영혼이 장차 갈 나라이니, 그 나라는 영원이요 무궁이다. 오늘이야말로 참 천국이 가까웠다. 그러므로 부디 회개하라.
주기철 목사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저항하면서 신자들에게 종말적 희망으로 확실한 소망을 주었다. 부흥설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경 구절을 많이 보여주면서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종말에 대해 기다림과 인내의 신앙을 길러 어려운 삶에서 승리할 것을 역설하곤 하였다. 그리고 크리스챤의 근본적인 삶의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에 따라서 성취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재림을 통한 종말적 희망 가운데서 그가 순교의 잔을 마실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사참배를 단호하게 거부한 손양원 목사의 굳은 신앙 절개도 재림주 예수 그리tm도의 왕권과 재림을 통한 종말의 영광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서 나왔다. 특히 그는 마태복음 24장의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언을 통해 재림을 소망하였다. 그의 유명한 설교인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에서 재림의 임박성을 강하게 표현했는데, 손 목사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곧 도래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손양원 목사의 경찰 심문조서에 따르면 손양원 목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천년왕국이 시작되면 “천황제인 우리 국체도 변혁을 면할 수 없는 운명에 있는 것이다....천년간 이상왕국시대가 출현하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 되신다...이 때 우리 일본 국체도 완전히 멸망하게 되어 통치권을 소유하는 천황 폐하도 불신자이기 때문에 그 지위를 상실당하고....”라는 증언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21)
예심종결서22) 에 나타나는 이기선 목사의 국가관은, “또 일제의 천황이라도 여호와 신께로부터 통치권을 부여 되어서 일본을 통치하도록 명령을 받고 잇는 것에 불과 하므로 신의를 전해서 이것을 빼앗을 수도 있으니 필경 일본제국의 정망도 한갓 여호와 신의 뜻대로 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이기선, 예심종결서).23)
또 일제는 한상동을 천국왕국 실현운동의 소동을 하는 동시에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론을 하여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24) 한상동 목사도 예수의 재림으로 일본은 멸망당할 것이며 기독교포교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국체변혁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25)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한 한상동 목사는 말세가 이미 도래하여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는 현 사회는 조만간에 멸망하고 지상신국(地上神國)이 건설될 것이므로, 동지들이 견고한 신념을 가지고 다수 동지를 획득하여 목적을 달성하자고 했다(“예심종결결정문”).26)
마지막으로, 재림신앙은 성결교단을 일제가 해산시킨 이유가 될 정도로 일제에 위협적이었다.27) 1943년 12월 29일에 선포된 성결교 해산성명서는 재림신앙이 일제의 치안유지에 위해를 가했다는 자책이 담겨있다. “재림으로 그리스도가 왕권을 장악하여 온 세계를 다스린다는 사상은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신관에 대해서도 성서의 해석에 기초하여 여호와 이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현재의 우리의 심경으로 보면 실로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입니다.”28) 이처럼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천년왕국 신봉자들이라고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29) 한국장로교회와 성도들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환란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곧 재림하신다는 확신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역설적인 사실은 1920-1930년대에 부흥운동을 주도한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외에 성결교회의 이명직과 정남수, 감리교회의 김종우 유석홍 신흥식, 장로교의 김인서 등은 말세 재림을 강조하는 타계적 내세지향적 설교와 회개 신생을 주제로 한 내면적 신비주의적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당시 고양되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내의 진보적인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는데 십년 후에 전개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는 이 재림신앙이 오히려 강력한 일제 저항의 무기요 역사적 변혁세력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30) 박정신이 잘 지적한 것처럼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는 종말론적 내세주의 신학은 오히려 하나의 ‘희망의 신학’으로 기능하였다.31)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고백은 주 예수가 현재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시고 계심을 믿는 신앙고백의 논리적 귀결이자 일단의 신앙적 도약의 결과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행위가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환난기요 시험의 시간이 지배한다. 이 때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그 극한 환난을 초극해야 한다.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를 철수시킨 종말의 시간(하나님의 임재의 썰물 시간이 끝난 직후에 오는 밀물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에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사 18장). 이 밀물같은 쇄도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내실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사는 자, 롬 6:10-13)와 하나님을 향하여 죽은 자(눅 15:32)가 섞여 있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마 13:24-30). 알곡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추수가 되겠으나 가라지에게는 심판의 바람이 되어 허공 중에 흩뿌려져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시 1:4-6).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은 앉아계심의 결과 최적의 시간이라고 산정되는 시간에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무엇보다도 순교적인 신앙으로 지상의 악마적 권력으로부터 온갖 박해를 감수하며 영적 지조와 절개를 지킨 사람들에게 크나큰 위로의 시간이 될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61:1-3).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종말의 시점에 다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이 역사의 중간기는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역동적 임재를 철수시킨 것처럼, 세상의 운명이 악한 자들의 손 안에 맡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역사의 중간기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무기력하고 패배당한 신인 것처럼 행동하신 후에 즉 심사숙고와 정중동의 휴지기를 보낸 후, 돌연히 마침내 종말의 시점에 당신의 역동적 현존을 역사 속에 드러내실 것이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주권적 통치행위를 썰물처럼 철수시켰을 때 이방 왕들과 이방주권자들이, 즉 이방신들이 마치 역사의 중심 무대를 활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아니 종말이 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강력한 현존을 역동적으로 드러내신다. 이처럼 다이내믹하게 역동적인 현존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시에 모든 무신론자들과 도덕적 허무주의자들을 날려버리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철수되는 역사의 중간기인 썰물시기에는 많은 무신론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갯벌이 훤히 드러나기에 배가 떠날 수 없는 때인 것이다. 종말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은 이 썰물과 밀물의 순환을 중단시키시고 무차별적으로 당신 자신의 역동적인 심판행위를 환히 부각시킨다.
그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심판은 무엇을 위한 심판인가?: 주 고백의 완성인가? 영원한 갈라냄인가?(빌립보서 2:6-11)
1.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고 가르고 구분하는 심판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에 다시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3:16-21; 딤후 4:1-6, 7-8). 알곡과 가라지를 나눌 심판이요 양과 염소를 나눌 심판이요(마 25:31-46),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나누는 심판이다(마 7:24-27).
2.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와 의의 면류관을 받을 자를 특별히 구별하여 상주시기 위하여 심판하신다. 공력을 검증하기 위한 심판이다(고전 3장).
3. 지상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곧 어린 양의 인을 이마에 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들리움을 받아 공동 심판자가 된다(마 19:28-30; 고전 6장 1-6; 골 3:1-40; 계 14장; 참조 전도서 11-12장; 심판의 지연을 이유로 죄를 담대하게 짓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보려면 잠 8:11).
4. 심판은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절차다. 따라서 인자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심판하실 리가 없다는 일부 서구 신학자들의 주장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고 잔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죄용서와 구원의 은총이 위대하고 찬란한 것이다.
5. 그리스도인들의 미래는 심판하실 그리스도다. 심판을 두려워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천상의 세계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순교자급 성도들이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즉 심판을 요청하는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계 4-5장).
6. 우리는 최후 심판의 예비적인 경험들을 이미 생전에 경험하고 있다(죄와 죽음, 질병, 재난 등...이런 것들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의 돌보심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심판의 징후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류 일반에게 닥치는 재난과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배타적으로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비행기 추락으로 순직한 다그 함마술트 유엔사무총장, 44세에 목포 앞바다에서 한 소녀를 구하려다가 익사한 아펜젤러).
그런데 그리스도의 심판은 단지 미래 사건인가? 아니다. 미래의 사건임과 동시에 현재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통제하고 조정하고 방향짓는 현재적 사건이다. 그 의미가 이미 우리의 현재의 삶을 틀지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현재가 된 사건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심판의 확실성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요 3:31-36).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의 확실성을 믿는 성도들은 지혜로운 청지기(불의한 청지기-눅 16장)처럼 거룩하고 냉정한 이해타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최후 심판(백보좌 심판-계시록 20장)에서 자유로운가?
정상적인 성도의 경우라면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사유화되는 독점물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전 인류를 지탱할 공동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교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이자 세계의 미래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교회의 현재를 폐기시키지 않고 갱신시키며 주변 세계를 변화시킨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발산하는 변혁에너지의 발전소가 되도록 초청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늘 성령충만(성령범람)을 통하여 지역과 당파적 교파적인 교회를 상대화하고,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 관심사항(공평과 정의)에 눈뜨게 한다. 교회가 예수님과 하나님, 그리고 성령을 독점한 것처럼 오만하게 주장하지 않고 전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에 가장 진실하게 자신을 복종시키고 전 우주적인 심판을 통해 새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출발하게 한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여가 바로 구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죄사함과 영생의 확신은 단지 주관적인 신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죄 용서 경험은 죄악의 형벌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는 경험이다. 따라서 죄악의 권세와 형벌로부터 자유케 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살수 있고 자신의 품성 혁신, 인격성장, 이웃사랑의 심화, 세계갱신을 위한 대의명분에 참여할 에너지를 충분하게 공급받는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의 사죄의 확신은 세례에 의하여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성만찬은 죄사함의 확신 속에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축제의 계약체결적인 식사다.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통체험은 죄의 용서경험이다. 죄사함을 받고 난 성도에게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의 요구요, 성장을 위한 요구요, 상급을 얻도록 격려하는 요구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왜 많은 교회중심의 신자들에게는 죄사함의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죄사함 선언 속에 이웃에게 지은 죄로부터의 죄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죄의 근본과 본질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자기를 신격화시킬 정도로 자기 주장의지를 관철시키는 행위라고 본다. 자기주장 의지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계약파괴가 죄의 본질이라면 이웃과의 관계 단절은 그 본질이 외형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죄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의 극단이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죄사함이란 말은 이웃과의 관계단절로부터의 돌이킴을 포함한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매번 고백될 때마다 시민의식-정치의식(공평과 정의의식)의 성숙을 가져다준다.
마침내 성도들이 지상에서 누리는 죄사함의 확신은 영생의 확신으로 승화되고 발전된다. 기독교인의 영생은 몸의 부활을 통해 구체화된다. 따라서 성도의 미래는 몸의 부활을 통한 신령한 사회공동체 생활이다. 사도신경은 그 당시 만연하게 퍼져있던 희랍적인 영혼불멸을 배척하고 몸의 부활신앙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몸의 부활사상은 물질적 육체적 차원의 삶이 가지는 항구적 가치를 고양시키는 결정적인 지렛대가 아닌가? 육체의 부활은 기독교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의 통전성을 나타난다. 성서적인 사고는 인간과 세계의 이해에 있어서 전적이고 통전적이다. 영혼과 육체, 물질과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육체의 부활이란 기독교적 희망이 전체적인 현실과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역사참여적인 에너지가 발생될 수밖에 없다. 영혼 불멸의 이념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부활 희망을 인간적인 전체 현실성과 관계시킨다. 이 관점은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에서 살지만,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바라는 영생이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최후의 진술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첫 진술없이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영원한 삶을 성서는 알지 못하다. 하나님과 생명의 해체될 수 없는 이 밀접한 결속은 생명의 시초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방향과도 관계된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역동적인 최후 심판에서 신자는 궁극적 구원(이전 죄의 용서와 장차 아예 죄지을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되는 구원)을 약속받는다. 죄사함은 단지 영혼의 정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신령한 육체를 덧입는 몸의 부활로 절정에 도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는 내면적 경건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를 매개하여 사는 사회적 인격적 관계 안에서도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몸의 부활을 긍정하고 강조하는 고린도전서 15:35-57과 빌립보 3:20-21은 너무나 중요한 본문이다.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창 2:7)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사 25:8)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호 13:14)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35-57)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사도신경은 그 당시 헬레니즘 세계를 지배하던 영혼 불멸 이념과는 달리 몸의 부활 희망을 인간적인 전체 현실성과 관계시킨다. 이 관점은 육체를 매개하여 이뤄지는 사회적인 삶의 총체적 갱신을 예고한다.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에서 살지만,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고백에 충실하려면 물질적 육체적 생존 조건 아래서 이뤄지는 이 세상의 질서 속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착근시키려는 노력을 배가시켜야 한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을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대조시키는 것은 성서적인 사고에 전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몸을 갖고 영위하는 사회생활에서의 천국과 영생, 죄사함을 경험하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룰 하나님 나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죄사함의 은혜는 몸을 갖고 사는 삶(사회적 인간관계적인 삶)에서 더 이상 죄악에 연루되거나 참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역사를 향해서 온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 사이의 이 순위 질서는 성서적으로 분명하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최후 고백은 “나는 전능하사 땅과 하늘(물질계과 육신계 공간세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첫 진술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영원한 삶을 성서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과 생명의 해체될 수 없는 이 밀접한 결속은 생명의 시초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방향과도 관계된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되는 영원한 삶은 사랑이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사랑은 영원한 삶의 기초이고, 근본 성격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는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가 지키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묵시론적으로 음울하고 참담해 보이는 이 역사 세계를 거룩하게 해체하시고 창조적으로 재주형하셔서 만물이 그의 다스림 아래 순복할 때까지 온 세계를 다스리실 것이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를 하나님께 갖다 바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순간이 미래의 진면목이 될 것이다(고전 15:20-25).
1) 2,000년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고백은 325년의 니케아 신앙고백(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고백, 삼위일체 고백), 4세기의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를 공인하고 성령의 신성성을 특별히 강조한 4세기(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공히 고백한 5세기(451년)의 칼케돈 신앙고백, 16세기 종교개혁의 신앙을 집약한 1561년의 벨지움 신조,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 신조, 17세기 청교도 신앙을 요약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히틀러의 나찌즘에 대항한 20세기의 바르멘 신앙고백,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사회참여의 결여를 회개하고 뉘우치며 복음전도와 함께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천명한 1974년의 로잔 언약 등은 기독교 신앙위기를 신앙고백으로 돌파해 낸 발자취를 담고 있는 신앙고백들이다.
2) 김세윤,『고린도전서 강해』,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294-299.
3) 김회권,『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서울: 복있는 사람, 2007) 77-98.
4) 김회권,『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으로 읽는 모세오경 1』, 55-58.
5) 한스-요아힘 크라우스,『조직신학』, 박재순 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16-23.
6) 톰 크루즈 주연의 미국 영화 마이너러티 리포트(Minority Report)는 잠재적인 범죄자들이 범행 직전에 그들을 체포해 투옥시키는 범죄예방(pre-crime) 체제의 폐해를 다룬다. 만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인간의 범행의지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그것을 막아버리는 그런 전능하심이라면 인간은 죄는 짓지 않겠지만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이런 범죄예방적 공권력의 무한정한 사용 안에서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인간의 주체성을 박제하지 않는 전능하심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7) 후기에 갈수록 마시아흐는 다윗의 왕위에 오를 이상적인 왕을 의미하는 명사로 사용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조선에서는 아들 왕이 아버지 왕의 보좌 오른 편에 작은 보좌를 갖다 놓고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런 왕을 섭정(攝政) 왕(王)으로 불렀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 왕을 의미한다. 주전 8세기의 유다 왕 웃시야가 재위 기간 중 마지막 십년 이상을 문둥병에 걸려 별실(別室)에 거하면서 나라를 다스린 적이 있다. 그 때 왕세자였던 아들 요담이 웃시야 왕을 도와서 섭정 역할을 했다. 요담 왕은 웃시야 왕의 보좌 오른쪽 옆에 작은 보좌를 설치해놓고, 아버지 왕을 도와 섭정으로서 나라를 대리 통치했다.
8) 한스 요아힘 크라우스, 『조직신학. 하느님의 나라-자유의 나라』, 박재순 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437-438.
9) 한국교회의 전천년설 신봉과 재림신앙 중시는 전적으로 한국선교의 첫 25년간 한국에서 선교한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출신 선교사들의 영향이었다.
10) 박용규, 『한국교회사 2. 1910-1960』(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731-733.
11) 이만열,『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 운동』(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225.
12) 이만열, 같은 책, 251-271.
13) 이만열, 같은 책, 262-263.
14) 이덕주, “영계 길선주 목사의 말세신앙,”『초기한국기독교사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15) 이만열, 같은 책, 265-266.
16) 박영창,『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서울: 두란노, 1998), 118(정동성, 같은 글, 52에서 재인용).
17) 구라타 마시히코(藏田雅彦),『일제의 한국기독교탄압사』(서울: 기독교문사, 1991), 66.
18) 김용복, “민족사와 예수 재림신앙 - 기독교 종말론의 역사적 인식을 위한 신학적 단상,”『활천』(2004년 6월호).
19) 이광진,『요한계시록 연구』(서울: 크리스천헤럴드, 2003), 256-257.
20) 정동성, 같은 글, 56.
21) 藏田雅彦,『일제의 한국기독교탄압사』, 72-73. 손양원 목사와 일제의 심문관 사이에 오고간 박진감 넘치는 대화는 박용규, 같은 책, 725-727쪽에 소개되어 있다.
22) 예심종결 결정서의 한국어 번역문은 조수옥 증언, 와따나베 노부오 목사 기록, 김산덕 역,『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일본 통치 하에서 저항한 증언』(서울: 엘맨, 2002), 119-122쪽에 실려있다. 이 예심종결 결정서는 일제의 시각으로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기독교신앙을 비판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천황숭배를 우상시하는 이유, 천황을 단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필멸적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의 주장, 십게명에 근거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의 주장, 예수의 공중 재림 신앙과 말세관에 경도된 기독교인의 태도 등을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에 가면 신사참배 기독교인들의 활동 양상에 대한 전망이 나온다(121-1220: “이와 같은 독선적 성서관에 의한 말세론에 근거하여 우리 나라를 포함해서 현존 각국의 멸망과 천년 왕국의 건설의 필연성을 확신하고 이에 실현은 신의 예정이라 신의 뜻을 체득하여 예수교 충신자의 협력도 역시 예정 중에 있고 충신자들은 반드시 이에 협력할 책무를 신에게 대해 부담하고 있고 그 협력방법은 저들 신의 계명을 준수하여 참배는 물론 그 외의 반(反)신적 정책에는 극력 반대하고 앞서 말한 독선적 해석에 기초한 교리의 선명성에 따라 이에 공명하는 동지를 다수 획득하여 이에 이르고 우리 나라 개국 이래의 국가관념 및 국민감정을 요란케 하고 현존 질서의 혼란, 동요를 유발시켜 궁극에는 현질서를 붕괴하고 만세일계의 천황이 계시는 우리 일본의 국체변혁을 필연적으로 초래하여 기독 독재의 소위 천년 왕국 건설을 실현시키려고 익망하고 그 건설 협력의 목적으로 그 주의 사상의 선포에 광분하고....... .”
23) 안용준, 같은 책, 256.
24) 김양선, 같은 책, 242.
25) 박용규, 같은 책, 726-727.
26) 안용준, 같은 책, 318-319.
27) 이만열, 같은 책, 267.
28) 김승태 편역,『일제강점기 종교정책사 자료집. 기독교편, 1919-1945』(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384.
29) 조수옥 증언, 와따나베 노부오 목사 기록, 김산덕 역,『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일본 통치 하에서 저항한 증언』(서울: 엘맨, 2002), 115.
30) 이만열, 같은 책, 18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한국기독교의 역사 II』(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189-192.
31) 박정신,『근대한국과 기독교』(서울: 민영사, 1997),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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