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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고후 5;16-19 )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9.

새로운 피조물 (고후 5: 16-19)

임 영 수 목사

 

 

 

우리는 인생의 도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는 외형적으로 특별하게 보여지는 사람보다는 매우평범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연히 사귀다 보면 사귈수록 그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외형적으로 매우 소박하고 인자한 인상을 받은 노인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스위스 사람으로 이름은 폴 투르니에입니다. 저는 그를 책으로, 사진으로,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몇차례 서신 교환도 했습니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저의 기억에 언제나 남아 있을뿐만 아니라 저의 저됨에 그분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매우 큽니다.

 

특별히 저는 그분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 이해에 남다른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 저 팔레스틴 지방에 살았던 다소 사람 사울은 그 시대 사람으로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유대 학자요, 종교가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아가 강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강한 자기의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는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사람이며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언제나 그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자기인식이 있었습니다.

 

"나는 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가운데서도 벤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의로는 흠 잡을 데가 없다." 고 생각하였습니다. (빌 3:5-6)

 

이 사울이라는 사람의 내면에는 자기자신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들어설 만한 작은 자리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이 자기시대 생의 도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됩니다. 그는 그의 생의 도상에서 사람을 대할 때 나름대로 평가기준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았는가?

 

바리새파 사람인가?

 

율법을 잘 준수하는가?

 

어느 지파 사람인가?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사울은 자기 시대에서 예수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알고 있었던 예수에 대한 정보는 그의 기준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은 율법을 어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조상들이 전해준 전통과 율법을 파괴하는 자이며 자신을 스스로 메시아라고 해서 많은 사람을 미혹케하다, 결국 십자가에 처형된 이단자였습니다.

 

사울의 예수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적대적이며 불쾌감을 주는 혐오스러운 인물이였습니다.

 

사울의 예수에 대한 그러한 인식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 대해서도까지도 적대감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라는 이름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 까지도 역사의 무대에서 없애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는 실제로 그러한 결심을 실천에 옮깁니다

 

사울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말살시키기 위해 전위대로 나섭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울은 어느날 초대 교회에 믿음과 덕, 지혜, 성령이 충만한 집사 스데반의 사형집행에 일조를 한 후 곧바로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마음대로 잡아 가두기도 하고, 처형할 수도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에 대한 적대감, 미움이 그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은 그가 전에 알고 있었던 예수를 전연 다른 차원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사울에게는 극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예수를 육신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됩니다.

 

전에 사울이 이해했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을 어기고 사회질서를 교란한 범법자로서의 죽음이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 이후에 사울이 이해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며, 그가 그렇게 죽은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구원사의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반사회적 인간,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아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마음, 새사람으로 하나님과 화해, 자신과 화해, 이웃과 화해에서 새 소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옛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하나님 자신과 우리를 화해하게 하실뿐 아니라 그들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신다는 사실과, 사울 자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새로운 소명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육신의 기준에서 이해했던 예수와 그리스도인을 전연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삶인가를 새롭게 조명 받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학주의 시대. 다원화 시대, 무종교 시대입니다. 진정, 오늘 우리 시대에서 살기 힘든 것은 의식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너무나 분열시키고 있는 오늘의 문화입니다.

 

그러한 분열 가운데서는 우리의 생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질 때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음으로 인해 현실에서 살아가기가 더욱더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질병이나 죽음을 면제받는 다는 보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회의적인 질문에 대해 오늘의 본문에서 들려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세상에서 이 이상 더 큰 복의 선언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이 복의 선언에는 우리가 우리의 생을 다시 한 번 전연 다른 관점에서 살아갈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모든 것을 육신(세상)의 가치에서 세상과 인생을 알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도록 변화의 생을 허락받은 사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강권하십니다. 그들이 맡은 직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키는 화해의 직분입니다.

 

낡은 피조물과 새 피조물과의 차이점은 낡은 피조물은 모든 것을 육신대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육신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해주는 지혜의 안목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 희망, 의미가 육신으로 판단하며 살아 갈 때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가졌던 성품과 모습들이 점점 사라져 갑니다. 그것은 이미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지난 날 당신은 어디에 있기에 보이지 않습니까? 묻게될 때 "지난날의 나는 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나는 내 잘난 맛에, 오기와 교만, 혈기,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우월감이 나의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혈기들이 다 빠져나가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전에 나는 열등감, 좌절, 분노, 적대감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사라는 특별한 명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국의 작가 찰스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크리스마스의 캐롤'의 주인공 스쿠리치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합니다.

 

소설속의 주인공 스쿠리치는 전당포 주인이며, 지독한 구두쇠입니다. 그는 성탄절 전야 꿈속에서 순진하고 꿈 많았던 자기자신의 어린시절의 모습, 그후 돈만 아는 지독한 구두쇠로 변해버린 현재의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도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허망하고 비참한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동안 자신의 인생 자체가 헛되게 살아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결국 구두쇠 스쿠리치는 성탄 전야의 꿈속에서 극적인 체험을 통해 새롭게 변화된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스쿠리치는 매우 자비심 많고 인자한 자선가로 변모합니다. 여기서 "옛날 스쿠리치는 어디 갔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옛날 스쿠리치는 죽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재물을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고 인생을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새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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