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전진합시다.
신명기 6:1~15
그 동안 여러분께서 기도해주셔서 두 주간 동안 미국 시애틀에서 모인 목회자 수련회와 샌디에고에서 모인 연합성회를 은혜 중에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미국 목회자 수련회가 이번이 네 번째인데, 세계지도력개발원(GCLI)에서 주관하는 세미나가 아주 좋다는 소문이 퍼져서, 이번 시애틀 세미나에는 옆의 도시 타고마와 오레곤주의 포트랜드, 그리고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목사님들이 오셨습니다. 개회는 호텔에서 했지만, 너무 여러분이 참석하셨기 때문에, 이웃 연합교회를 빌려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샌디에고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항이요 기후가 좋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미국에서도 은퇴하신 분들이 많이 가시는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지역 교역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연합성회가 샌디에고 교민 역사상 가장 잘 모이고 은혜 받은 성회가 되었다는 현지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제가 떠나 있는 동안 우리 한국에서는 세계 60억 인구의 잔치인 월드컵이 열리고, 더구나 우리의 간절한 기대였던 16강뿐 아니라 8강 아니, 4강에 진출하게 된 것은 우리로서는 흥분되는 일이요, 민족적인 사기가 앙양되는 자랑스러운 계기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 좋은 분위기가 계속 이대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한다면 하는 민족입니다. 그렇게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를 메웠지만 안전사고 하나 나지 않고, 사람들이 다녀간 자리의 뒤처리까지 잘해서 한국 사람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한국 민족은 대단한 민족입니다. 자랑스러운 국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서 가나안으로 향하던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는 데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 위험은 물론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민족이 직면한 것이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같은 위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지나서 가나안 국경까지 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얼마나 순종하느냐 하는 시험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그의 백성들의 장래를 염려했습니다. 모세는 이제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을 육감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조가 단호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 이하를 보세요.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모세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의 영혼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살게 될 때 그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알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길 것을 당부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데 도사리고 있는 네 가지 위험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첫 번째 위험은 하나님보다 지도자를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 국경으로 인도하기까지 모세는 없어서 안될 중요한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얼마 안 있어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앞에서 사라질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돌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그들을 떠나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을 때에도 하나님의 것은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해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지도자가 우리를 격려해줍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힘을 북돋아줍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도자가 아무리 뛰어나고, 안목이 넓고, 모든 방면에 모범적이고, 정열을 가지고 지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앞설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보다 지도자를 더 크게 사랑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존경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애정과 관심의 중심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의도가 방해를 받습니다.
이 지구상 60억의 잔치인 월드컵이 우리 나라에서 개최되고 있고, 이제 그 종반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축구는 세계인의 경기가 되었습니다. 가령 축구팀의 경우를 보세요. 2002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해서 8강이 아니라 4강에 오르게 된 데는 우선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을 꼽는데, 그것은 어느 주전 선수에 모든 기대를 건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의 팀웍을 강조한 것 아닙니까? 각자의 특성과 장기를 살려서 투입한 것이 주효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기는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깊은 관계를 다져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바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일을 잘 해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여기에서 초점을 잃었다면 모세가 손을 뗐을 때 그의 대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의 임무를 수행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백성들의 충성을 자기에게서 하나님께 돌림으로 여호수아의 일을 덜어주었습니다.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지도자를 하나님보다 위에 두면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전에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따랐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그가 바로 기다리는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그를 따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분명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습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신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합당치 못할 자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입니다.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도 그 앞에 엎디어 절하는 사람을 보고 붙들어 일으키면서 "나는 신이 아니요.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보다는 세속적인 권력의 자리나 직위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목자 안에 있는 양떼가 되도록 단결을 조성시켜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힘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더 돋보이는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이 집단은 연합되기보다는 분산되고 맙니다.
그렇게 볼 때 모세는 정말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두 번째 위험은, 궁극적인 목표보다는 눈앞의 편익에 시선을 두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서 6절 이하를 보세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해이한 상태로 주저앉아서 '앞날의 일은 될 대로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근면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건전한 가정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이 주가 되지 아니하고 이 험한 세상을 바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돕고, 서로 밀어주고, 서로 붙들어주고, 서로 아껴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서로 묶어주는 일을 힘써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궁극적인 목표보다는 눈앞의 편익에 초점을 두고 그저 편안하게 살려고 했다면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들의 몸과 마음은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저들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목표도 흐려지고 말 것입니다. 갑자기 폭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썩어들어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바쁘고 피곤해서 편리함과 타협하고 대치하지는 않았습니까? 보통으로는 그러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은 힘든 것보다는 쉽고 편한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교회입니다. 이 목표를 향해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습니다. 계속 이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부둥켜안고 나오는 분들이 정말 치유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실패한 사람이 나아와 승리의 확신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낙심한 심령이 나아와 새 소망을 가지게 되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심령이 나아와 생명의 길을 찾게 되는 감격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힘없는 교회가 아니라 힘있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 세상을 뒤집어엎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합시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세 번째 위험은, 규모가 힘의 크기라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사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규모는 방대했습니다. 장정만 60만이고 아녀자를 합치면 적어도 200만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숫자가 행진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조심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때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도달했습니다. 미래의 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옥한 땅이 있었습니다. 넉넉한 물이 보였습니다. 풍성한 열매가 맺은 과일나무,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 이하를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10절의 '네가 건축하지 않은 성읍'이란 말과 11절의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라는 말, 그리고 12절에 있는 '너는 조심하여… 여호와를 잊지 말고'라는 말씀을 우리가 읽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물건이 많이 준비된 집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힘의 보장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 6절과 7절, 그리고 9절에 보면 세 번씩이나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힘이 그 숫자나 재물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방의 잡혼이라는 풍속에 빠지고, 우상을 숭배하고,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신앙의 변형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을 잃어버린다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존재 의미는 상실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조심하지 아니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조심하여…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저와 같이 세계지도력개발원 강사로 수고하시는 이필재 목사님은 이민교회 목회자로서 소위 성공하신 분 중에 한 분이십니다. 이 목사님이 20여 년 전 미국에 가실 때 1불은 고사하고 동전 한푼 없이 어느 권사님이 비행기표 사주어서 미국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비행장에 내리니까 전화를 해야 데리러 나오는 분이 있겠는데, 전화할 돈이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지금 제게 돈이 전혀 없어서 전화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전화할 수 있는 돈을 벌게 해주세요" 하고 눈을 떴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큰 짐을 가지고 움직이지 못해서 고생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찾아가서 "저는 미국에 유학 오는 학생입니다. 지금 전화할 돈이 없는데, 제가 짐을 목적지까지 날라다 드리면 돈을 주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그러라고 해서 짐을 운반해드렸더니 4불을 주시더래요. 그걸 받아 가지고 미국생활이 시작이 되었는데, 이제는 큰 교회를 담임한 목사로 부족함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20여 년 전 미국 갈 때 입었던 옷, 셔츠, 넥타이를 그대로 간수했다가 1년에 하루는 꼭 그 옷을 입으시면서 고생스럽게 시작한 미국 생활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넉넉한 환경 속에 지내다 보면 가난하던 때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 많이 모이고 재정이 넉넉하다고 해서 꼭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힘을 모으고,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실과 진실이 입을 맞출 때, 교회는 힘이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엎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재벌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권력자가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학자가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힘을 모을 때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도 힘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는 네 번째 위험은, 내일을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영광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힘과 용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는 고개를 돌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말합니다. 여호수아 1장 11절에 보면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멈추지 말고 허락하신 그 땅,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계속 전진하라는 명령입니다. 지난날의 포근하고 따뜻한 영광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각오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날 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허리를 졸라매고 허락하신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 데 도전해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계속 전진하는 데는 어려움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전진해야만 했습니다.
일할 것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현상유지를 위해 안일하게 앉아 있다면, 이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교회는 신선하고 창의적이고 활력 있는 사람이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진이 아니면 퇴보합니다.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의 성공적이고 승리적인 삶의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갔습니다. 우리가 이 격변하는 세상에서 창조적으로 적응하면 승자가 되고, 적응하지 못하면 역사의 지각생이 되고 패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자랑스러운 우등생이 되고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초지일관의 정신과 시종여일한 태도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승리는 쉬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우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옆에는 수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한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계속 전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을 다 차지하시기를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 116:1-14): 고난 / 박조준 목사 (0) | 2021.11.29 |
---|---|
그 별을 바라보라(마 2:1-12) / 박조준 목사 (0) | 2021.11.29 |
말씀으로 개혁(행 19:8-20) / 이철신 목사 (0) | 2021.11.29 |
마지막 기도(삿 16:28-31) / 이철신 목사 (0) | 2021.11.29 |
드러난 헌신(막 15:42-46) / 이철신 목사 (0) | 2021.11.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