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용서 합시다
마태복음 6:14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네 번째 말씀을 생각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당시에 가장 유력했던 사회 계층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도 바리새 종파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가장 유력한 신학 사상은 율법주의였습니다. 율법주의에서는 "무엇을 해라" 하는 것과 "무엇을 하지 말라"하는 계명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굉장히 복잡하고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하나님이 '하라'하신 것은 하고 '하지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한일에 대해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의 선행이 악행보다 많다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에 위로를 받게 되고 천국에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기독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잘못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다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하라고 한 것은 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리는 율법을 다 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행한 사람이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용서받은 사람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중요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율법주의의 형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율법주의가 강조되다 보니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리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지키는 사람을 정리하는 정죄와 고발 그리고 비판의 사회풍토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풍조 속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주어 졌습니다.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너희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서로가 비판하고 고발하는 살벌한 사회의 풍토를 지켜보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과 용서를 잃어버린 사회였습니다. 이럴때에 예수님의 교훈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시민의 삶의 놀라운 교훈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면서 천국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 천국의 시민이 되려면 서로가 용서하는 사람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 사회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번까지는 용섷라. 그러나 그 이상 용서한다는 것은 비참한 것이다" 그 당시 유명한 랍비의 문서 중에는 이런 선언이 있습니다. "세번까지는 용서하라. 그러나 네 번까지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고발과 정죄 그리고 비난이 난무하는 그 당시 사회풍토 속에서 예수님의 사람의 교훈을 배웠던 제자 베드로는 어느날 주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할까요? 한 일곱번쯤하면 되겠습니까?". 이 물음의 배후에는 '바리새 사람들은 두 번 용서하면 된다고 하고, 어떤 랍비는 세 번 용서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이니까 아무래도 일곱 번쯤은 용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주 큰마음 먹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주님께 드리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드린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두 번 혹은 세 번 용서한다고 했는데 일곱 번이면 많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말은 아직도 용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서 몇번째 용서한다고 회수를 세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녀가 부모에게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면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자녀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살아가다가 또 잘못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또 용서합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용서 할 때마다 용서의 횟수를 세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용서하기로 작정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용서한 숫자를 세고 있다는 것은 사실 용서할 의지나 의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한 횟수를 세는 것은 다만 복수나 벌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한번 두 번 거듭되면서 분노가 폭발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22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루에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까? 그리고 491번째는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 이란 말은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용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우리 삶의 주인이시라면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의 용서의 삶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유명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빚을 지고 있던 신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빚이 일만 달란트라고 했습니다. 한 달란트의 화폐 가치는 그 당시 한 사람의 일꾼이 6,000일을 계속해서 일해야 벌 수 있는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우리 돈으로 계산해도 엄청난 돈입니다. 이 신하의 형편으로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이 큰 빚을 지고 괴로워하는 신하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오늘 주시 말씀 25~2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갚을 것이 없는 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했습니다.
이 신하는 자기가 갚을 수 없으면서도 꼭 갚을 터이니 기한만 좀 연장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우리는 이 신하의 딱한 처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27절 말씀에서 임금이 이 빚진 신하에게 아주 파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액수의 빚, 평생을 다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이 왜 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까? 다만 이유는 한가지, 종을 불쌍히 여겨서 였습니다. 이 갚을 수 없는 빚을진 신하를 불쌍히 여긴 임금의 사랑 때문에 이 신하가 진 천문학적 숫자의 빚을 아주 없는 것으로 하는 탕감의 선언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웬 은혜입니까? 이 웬 사랑입니까?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데요? 오늘 주신 말씀 28절을 보세요. "그 종이 나가서 제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했습니다.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임금님 앞을 떠나자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기도 빚을 지고 있는 주제에 남에게 빚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글쎄 자기는 1부이자로 빚을 지고 동관에게는 2부이자로 빚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빚이 100데나리온 이었습니다. 자기가 임금님에게 탕감받은 빚에 비하면 60만분의 1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빚을 지고 있는 동관을 만나 붙들고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고리대금 사채업자가 요사이도 빚을 받으라고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9~30절을 보니까 그때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수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아주 격분했습니다. 괘씸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32절이하를 보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네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 말씀을 읽으면서 화가 난 임금이 우리를 향하여 "너는 어떠냐?" 하고 노려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눈을 들어 십자가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가 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까?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십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거짓 때문에, 우리의 간음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피와 물을 흘리시고 계십니다.
그 분은 골고다 언덕 위에서 보배로운 마지막 핏방울을 떨구시면서 갑자기 어두움이 덮치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무슨 빚을 말합니까? 우리가 하나남께 지고 있는 도덕의 빚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빚은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밑에 나아와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신 이 엄청나고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지은 죄를 주님께 아뢰면 그 순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 빚을 다 탕감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주님의 사랑으로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진빚, 작은 잘못을 용서 할 수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가 범한 죄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내가 더 큰죄, 평생을 두고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탐감받고도 그 은혜 그 큰사랑을 잊어버려서 그럼니까?
성경에 의하면 어떤 죄든지 사람을 받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끼리는 상대적으로 저 사람이 나보다 착한 사람이고, 나는 저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고,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과 밖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우리의 죄는 숨길 수가 없고 지옥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를 주님께서 탕감해 주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값없이, 은혜로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되고, 그리스도인이 된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죄, 큰 죄를 용서함 받았는데 왜 우리는 이웃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지금도 우리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일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계속적인 사랑과 용서가 없었다고 하면 우리는 이 시간도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예수님의 비유로 하신 말씀에서 나타난 악한 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 앞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하루는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끝난 후 그 자리에서 예배드린 아주 성미 사납기로 유명한 한 장군이 요한 웨슬레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죽어도 내게 총부리를 겨누는 놈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요한 웨슬레는 그 장군에게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장군님, 죽어도 용서하실 수 없으시다면 앞으로 죽어도 죄를 짓지 마셔야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란 말은 아닙니다. 우리 삶이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일이요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우리는 아직도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도 이웃에게 계속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용서의 대가와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작은 것은 기억하지마는 아주 큰 것은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정전으로 전등불이 껴졌다가 다시 불이 오면 전등불의 고마움을 알지마는 온 세상을 비쳐주는 태양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이 "내가 너를 정리치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용서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을 자주 잊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 언제나 내가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용서 하는 것은 약자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기 쉬운 행동이 무엇입니까? 같이 욕해주고, 같이 주먹 휘두르고, 같이 침 뱉는 일입니다. 이것은 본능적 반응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용서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강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야기 할 때a다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퍼부을 수 밖에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 편에 서서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바치겠다고 다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가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우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 앞에 감동을 바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평행을 드리겠다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 영국의 웰링톤 제독이 부대 안에서 악질적인 병사 하나를 총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형 받게 될 군인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너 분명히 들으라. 나는 너를 교육하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장계를 했지만 네 삶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 너를 위해 할 일을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너를 총살하는 것이다."
그때 처형당하는 병사의 친구 하나가 제독 앞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제독님, 제독님께서 저 친구에게 꼭 한가지 안 하신 것이 있습니다. 제독님은 저 친구를 용서해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 친구의 말에 웰링톤 제독의 마음이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웰링톤 제독은 총살을 집행하려던 이 병사를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글, 내가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처형직전 제독의 용서를 받아 살게된 이 병사는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의 피로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을 얼마나 용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메시지는 임금님의 얼굴을 통해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이 말씀대로 산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우리를 향해 저주하지 아니하고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므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스데반처럼 축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6:14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네 번째 말씀을 생각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당시에 가장 유력했던 사회 계층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종파도 바리새 종파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가장 유력한 신학 사상은 율법주의였습니다. 율법주의에서는 "무엇을 해라" 하는 것과 "무엇을 하지 말라"하는 계명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굉장히 복잡하고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하나님이 '하라'하신 것은 하고 '하지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내가 한일에 대해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비교해 보면서 우리의 선행이 악행보다 많다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에 위로를 받게 되고 천국에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기독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잘못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다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하라고 한 것은 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리는 율법을 다 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행한 사람이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용서받은 사람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중요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율법주의의 형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율법주의가 강조되다 보니까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리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지키는 사람을 정리하는 정죄와 고발 그리고 비판의 사회풍토가 조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풍조 속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주어 졌습니다.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너희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서로가 비판하고 고발하는 살벌한 사회의 풍토를 지켜보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사회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과 용서를 잃어버린 사회였습니다. 이럴때에 예수님의 교훈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시민의 삶의 놀라운 교훈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면서 천국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정죄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 천국의 시민이 되려면 서로가 용서하는 사람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 사회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번까지는 용섷라. 그러나 그 이상 용서한다는 것은 비참한 것이다" 그 당시 유명한 랍비의 문서 중에는 이런 선언이 있습니다. "세번까지는 용서하라. 그러나 네 번까지는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고발과 정죄 그리고 비난이 난무하는 그 당시 사회풍토 속에서 예수님의 사람의 교훈을 배웠던 제자 베드로는 어느날 주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할까요? 한 일곱번쯤하면 되겠습니까?". 이 물음의 배후에는 '바리새 사람들은 두 번 용서하면 된다고 하고, 어떤 랍비는 세 번 용서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이니까 아무래도 일곱 번쯤은 용서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주 큰마음 먹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주님께 드리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드린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두 번 혹은 세 번 용서한다고 했는데 일곱 번이면 많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말은 아직도 용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서 몇번째 용서한다고 회수를 세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녀가 부모에게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면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자녀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살아가다가 또 잘못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또 용서합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용서 할 때마다 용서의 횟수를 세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용서하기로 작정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용서한 숫자를 세고 있다는 것은 사실 용서할 의지나 의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한 횟수를 세는 것은 다만 복수나 벌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한번 두 번 거듭되면서 분노가 폭발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것에 불과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22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루에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까? 그리고 491번째는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 이란 말은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를 무한히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서 용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우리 삶의 주인이시라면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의 용서의 삶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유명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빚을 지고 있던 신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빚이 일만 달란트라고 했습니다. 한 달란트의 화폐 가치는 그 당시 한 사람의 일꾼이 6,000일을 계속해서 일해야 벌 수 있는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라고 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우리 돈으로 계산해도 엄청난 돈입니다. 이 신하의 형편으로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이 큰 빚을 지고 괴로워하는 신하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오늘 주시 말씀 25~2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갚을 것이 없는 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했습니다.
이 신하는 자기가 갚을 수 없으면서도 꼭 갚을 터이니 기한만 좀 연장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우리는 이 신하의 딱한 처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27절 말씀에서 임금이 이 빚진 신하에게 아주 파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액수의 빚, 평생을 다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주인이 왜 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까? 다만 이유는 한가지, 종을 불쌍히 여겨서 였습니다. 이 갚을 수 없는 빚을진 신하를 불쌍히 여긴 임금의 사랑 때문에 이 신하가 진 천문학적 숫자의 빚을 아주 없는 것으로 하는 탕감의 선언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웬 은혜입니까? 이 웬 사랑입니까?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데요? 오늘 주신 말씀 28절을 보세요. "그 종이 나가서 제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했습니다.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임금님 앞을 떠나자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기도 빚을 지고 있는 주제에 남에게 빚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글쎄 자기는 1부이자로 빚을 지고 동관에게는 2부이자로 빚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빚이 100데나리온 이었습니다. 자기가 임금님에게 탕감받은 빚에 비하면 60만분의 1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빚을 지고 있는 동관을 만나 붙들고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고리대금 사채업자가 요사이도 빚을 받으라고 폭력배를 동원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29~30절을 보니까 그때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수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아주 격분했습니다. 괘씸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32절이하를 보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네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 말씀을 읽으면서 화가 난 임금이 우리를 향하여 "너는 어떠냐?" 하고 노려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눈을 들어 십자가위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가 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까? 그 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십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거짓 때문에, 우리의 간음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피와 물을 흘리시고 계십니다.
그 분은 골고다 언덕 위에서 보배로운 마지막 핏방울을 떨구시면서 갑자기 어두움이 덮치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무슨 빚을 말합니까? 우리가 하나남께 지고 있는 도덕의 빚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빚은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밑에 나아와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신 이 엄청나고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지은 죄를 주님께 아뢰면 그 순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진 빚을 다 탕감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주님의 사랑으로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웃이 나에게 진빚, 작은 잘못을 용서 할 수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가 범한 죄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내가 더 큰죄, 평생을 두고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탐감받고도 그 은혜 그 큰사랑을 잊어버려서 그럼니까?
성경에 의하면 어떤 죄든지 사람을 받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끼리는 상대적으로 저 사람이 나보다 착한 사람이고, 나는 저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고,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과 밖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우리의 죄는 숨길 수가 없고 지옥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를 주님께서 탕감해 주셨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값없이, 은혜로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되고, 그리스도인이 된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죄, 큰 죄를 용서함 받았는데 왜 우리는 이웃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지금도 우리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일에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계속적인 사랑과 용서가 없었다고 하면 우리는 이 시간도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예수님의 비유로 하신 말씀에서 나타난 악한 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 앞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하루는 용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끝난 후 그 자리에서 예배드린 아주 성미 사납기로 유명한 한 장군이 요한 웨슬레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죽어도 내게 총부리를 겨누는 놈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요한 웨슬레는 그 장군에게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장군님, 죽어도 용서하실 수 없으시다면 앞으로 죽어도 죄를 짓지 마셔야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란 말은 아닙니다. 우리 삶이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일이요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우리는 아직도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도 이웃에게 계속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용서의 대가와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작은 것은 기억하지마는 아주 큰 것은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정전으로 전등불이 껴졌다가 다시 불이 오면 전등불의 고마움을 알지마는 온 세상을 비쳐주는 태양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이 "내가 너를 정리치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시는 용서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을 자주 잊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 언제나 내가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용서 하는 것은 약자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기 쉬운 행동이 무엇입니까? 같이 욕해주고, 같이 주먹 휘두르고, 같이 침 뱉는 일입니다. 이것은 본능적 반응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를 용서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강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야기 할 때a다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퍼부을 수 밖에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 편에 서서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바치겠다고 다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가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우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 앞에 감동을 바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평행을 드리겠다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전에 영국의 웰링톤 제독이 부대 안에서 악질적인 병사 하나를 총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처형 받게 될 군인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너 분명히 들으라. 나는 너를 교육하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장계를 했지만 네 삶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 너를 위해 할 일을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너를 총살하는 것이다."
그때 처형당하는 병사의 친구 하나가 제독 앞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제독님, 제독님께서 저 친구에게 꼭 한가지 안 하신 것이 있습니다. 제독님은 저 친구를 용서해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 친구의 말에 웰링톤 제독의 마음이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웰링톤 제독은 총살을 집행하려던 이 병사를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글, 내가 너를 조건 없이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처형직전 제독의 용서를 받아 살게된 이 병사는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의 피로사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을 얼마나 용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절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리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메시지는 임금님의 얼굴을 통해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이 말씀대로 산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우리를 향해 저주하지 아니하고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므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스데반처럼 축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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