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가 7:18-20)
본문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밝혀 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헬라 신화나 로마신화를 보면 전쟁, 보복, 복수, 증오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밝혀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본문 역시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로 시작됩니다.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죄악을 사유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유하신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노세”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 무거운 짐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53:6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서 죄의 짐을 옮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애국자는 국가를 위해 공산당은 공산주의와 그 사상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옮겨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내가 가져야할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구약시대는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유해 주셨습니다.
에배소서 2:1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이 사유함 받기 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2:5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죽었고 - 살았고” 그 사이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내 죄는 완전히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2. 남은 자의 허물을 넘겨주십니다.
18절을 보면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9:18을 보면 바알신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남은 자 7천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이 바알우상을 숭배했던 탓으로 장관도 대신도 신하도 모조리 바알을 숭배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에스겔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를 보면 “남은 자”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이방신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 섬기도록 남겨둔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숨겨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은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라고 했습니다. 남은 자의 허물이란 남은 자도 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들의 얘기로 바뀌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도 허물이 잇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았습니다만 욕심이 남아있고 유혹에 흔들리고 내 안에 못난 자아가 살아 꿈틀거리고 시기, 질투, 분냄 등 온갖 육의 열매가 매달려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죄를 사한다는 것을 다양한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넘긴다, 덮는다, 씻는다, 희게 한다, 대신한다, 기억도 안 한다, 넘어간다는 말은 곧 죄를 사유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18절의 경우는 “넘기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허물과 죄가 빼곡하게 기록된 노트를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결코 자랑할 수도 누구에게 내놓을 수도 없는 과거며 지은 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드려다 보시던 하나님이 “그냥 넘기는 게 좋겠다”며 책장을 넘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제 죄를 사유하고 넘겼다”고 친필로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동안 내가 저지른 죄, 내 행동, 내 삶을 하나님이 넘겨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 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책장마다 붉은 줄을 긋고 “너처럼 형편없는 녀석은 처음 본다. 너는 끝장 낫다. 너는 벌을 받아야 된다. 죄 값은 사망이다.
나는 너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고하노라”고 쓰셨다면 오늘 내 모습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완전합니다. 용서도 완전합니다. 그 사랑과 그 용서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404장은 1917년 레만이 만든 고전에 속하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그 가사야말로 하나님의 높고 큰 사랑을 마치 수를 놓듯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렇습니다. 그 크신 사랑 위대한 용서를 무엇으로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월간지 「좋은 생각」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영웅 나폴레옹이 폴란드에 진격했습니다. 농촌 마을의 영주가 나폴레옹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저녁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도착하자 영주는 문밖에까지 나가 영접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온 나폴레옹은 식사가 마련된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주인은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도 그 다음자리도 그냥 지나치고 세 번째 자리에 나폴레옹을 앉게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분이 나빠 얼굴을 찡그렸고 이 모습을 본 수행신하가 영주를 꾸짖었습니다.
“대 프랑스 제국의 황제 폐하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영주는 두려움이 없는 모양이군.” 그러자 영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는 제 부모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프랑스에선 황제폐하가 제일 높드시 저희 집에선 제 아버님과 어머님이 제일 높습니다.”라고.
시골영주의 번뜩이는 지혜, 그의 효성이 돋보이는 이야기입니다. 내겐 누가 제일 높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크고 위대합니까? 나를 사랑하시고 내 죄를 사유하시고 내 죄의 기록을 조건 없이 넘겨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노를 항상 품지 않으십니다.
18절 끝을 보면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추상같이 화내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진노는 잠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오랫동안 화내시고 앙심을 품고 원한을 품는다면 그 진노 앞에 견딜 자가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고 노는 잠깐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내고 진노하시고 매를 때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성내시면 무섭기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은 불같은 화를 내다가도 금방 풀고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화를 잘 내지 않던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오래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면을 보아야 합니다. 죄는 추상같이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 십니다.
그런가하면 외아들까지 보내사 죽게 하시고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만 보면 무섭고 사랑만 보면 버릇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면을 다 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4.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십니다.
19절을 보면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죄 용서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만 죄는 끈질깁니다. 그래서 머리를 다시 들고 일어섭니다. 독버섯처럼 다시 싹이 나고 일어섭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발로 밟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꼼짝못하게 능력의 발로 밟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나는 죄와 싸워 이길 힘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길 힘을 주시고 죄악을 밟아주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손으로 땅을 파면 하룻 동안 1미터를 파기가 어렵지만 포크레인으로 파면 50미터를 팔 수 있습니다. 부산까지 걸어가려면 한 달이 걸리지만 비행기를 타면 1시간에 갈 수 있습니다. 맨 몸으로 한강을 건너가기가 어렵지만 배를 타면 태평양도 건너갑니다. 나를 이기는 힘도 죄를 짓밟는 능력도 주님께 있습니다.
5.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십니다.
19절 끝을 보면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적이고 상징적 표현입니다. 죄는 무겁습니다. 공중에 던지면 굴러서 내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바다에 던지면 한없이 한없이 깊은 데로 가라앉습니다. 무거워서 다시 떠오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도말 하신다. 기억도 안 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깊은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놀라운 배려이며 은총입니다.
결론은 분명 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완전한 사랑, 완전한 용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결단이며 삶입니다. 첫째, 그 사랑을 믿고 용서를 감사합시다. 사랑을 의심하면 관계에 틈이 생깁니다. 감사가 없으면 삶이 황폐해집니다. 둘째, 바로 전합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겪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증언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지자 가짜 승려로 변장을 하고 집집마다 가게를 돌며 시주를 하고 있습니다. 승복도 사 입고 목탁도 구입을 했는데 문제는 시주할 때 외우는 주문이었습니다. 궁리 끝에 외울 주문도 만들었습니다. 어느 집 문간에서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주인 여자가 시주를 주기 위해 나와 보니 행색이며 외우는 주문이 가짜였습니다. 그래서 맞장구를 대꾸했습니다. “주나바라 주나바라” 주인 여자의 태도를 눈치챈 가짜 승려가 대꾸합니다. “가나바라 가나바라”.
어느 유모어 책에서 빼낸 이야기입니다. 확실치 않은 믿음은 고백도 증언도 희미합니다.
확실히 믿고 분명하게 증거합시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았습니다. 나는 용서받았습니다. 당신도 믿으면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증거합시다. 고백합시다.
본문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밝혀 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헬라 신화나 로마신화를 보면 전쟁, 보복, 복수, 증오로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밝혀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본문 역시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로 시작됩니다. 어떤 점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죄악을 사유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유하신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노세”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 무거운 짐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53:6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서 죄의 짐을 옮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애국자는 국가를 위해 공산당은 공산주의와 그 사상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옮겨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내가 가져야할 죄의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구약시대는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유해 주셨습니다.
에배소서 2:1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이 사유함 받기 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2:5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죽었고 - 살았고” 그 사이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내 죄는 완전히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2. 남은 자의 허물을 넘겨주십니다.
18절을 보면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라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9:18을 보면 바알신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남은 자 7천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이 바알우상을 숭배했던 탓으로 장관도 대신도 신하도 모조리 바알을 숭배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에스겔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를 보면 “남은 자”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이방신을 섬기거나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만 섬기도록 남겨둔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숨겨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은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라고 했습니다. 남은 자의 허물이란 남은 자도 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들의 얘기로 바뀌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도 허물이 잇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구원받았습니다만 욕심이 남아있고 유혹에 흔들리고 내 안에 못난 자아가 살아 꿈틀거리고 시기, 질투, 분냄 등 온갖 육의 열매가 매달려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죄를 사한다는 것을 다양한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넘긴다, 덮는다, 씻는다, 희게 한다, 대신한다, 기억도 안 한다, 넘어간다는 말은 곧 죄를 사유한다는 뜻입니다. 본문 18절의 경우는 “넘기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허물과 죄가 빼곡하게 기록된 노트를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결코 자랑할 수도 누구에게 내놓을 수도 없는 과거며 지은 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드려다 보시던 하나님이 “그냥 넘기는 게 좋겠다”며 책장을 넘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제 죄를 사유하고 넘겼다”고 친필로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동안 내가 저지른 죄, 내 행동, 내 삶을 하나님이 넘겨주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 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책장마다 붉은 줄을 긋고 “너처럼 형편없는 녀석은 처음 본다. 너는 끝장 낫다. 너는 벌을 받아야 된다. 죄 값은 사망이다.
나는 너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고하노라”고 쓰셨다면 오늘 내 모습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완전합니다. 용서도 완전합니다. 그 사랑과 그 용서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404장은 1917년 레만이 만든 고전에 속하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그 가사야말로 하나님의 높고 큰 사랑을 마치 수를 놓듯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그렇습니다. 그 크신 사랑 위대한 용서를 무엇으로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월간지 「좋은 생각」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영웅 나폴레옹이 폴란드에 진격했습니다. 농촌 마을의 영주가 나폴레옹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저녁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도착하자 영주는 문밖에까지 나가 영접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온 나폴레옹은 식사가 마련된 방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주인은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자리도 그 다음자리도 그냥 지나치고 세 번째 자리에 나폴레옹을 앉게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기분이 나빠 얼굴을 찡그렸고 이 모습을 본 수행신하가 영주를 꾸짖었습니다.
“대 프랑스 제국의 황제 폐하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영주는 두려움이 없는 모양이군.” 그러자 영주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자리는 제 부모님이 앉으시는 자리입니다. 프랑스에선 황제폐하가 제일 높드시 저희 집에선 제 아버님과 어머님이 제일 높습니다.”라고.
시골영주의 번뜩이는 지혜, 그의 효성이 돋보이는 이야기입니다. 내겐 누가 제일 높습니까?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크고 위대합니까? 나를 사랑하시고 내 죄를 사유하시고 내 죄의 기록을 조건 없이 넘겨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노를 항상 품지 않으십니다.
18절 끝을 보면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추상같이 화내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진노는 잠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오랫동안 화내시고 앙심을 품고 원한을 품는다면 그 진노 앞에 견딜 자가 누구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고 노는 잠깐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화내고 진노하시고 매를 때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성내시면 무섭기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은 불같은 화를 내다가도 금방 풀고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화를 잘 내지 않던 사람이 한번 화를 내면 오래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면을 보아야 합니다. 죄는 추상같이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 십니다.
그런가하면 외아들까지 보내사 죽게 하시고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만 보면 무섭고 사랑만 보면 버릇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면을 다 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4.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십니다.
19절을 보면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죄 용서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만 죄는 끈질깁니다. 그래서 머리를 다시 들고 일어섭니다. 독버섯처럼 다시 싹이 나고 일어섭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발로 밟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꼼짝못하게 능력의 발로 밟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나는 죄와 싸워 이길 힘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길 힘을 주시고 죄악을 밟아주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손으로 땅을 파면 하룻 동안 1미터를 파기가 어렵지만 포크레인으로 파면 50미터를 팔 수 있습니다. 부산까지 걸어가려면 한 달이 걸리지만 비행기를 타면 1시간에 갈 수 있습니다. 맨 몸으로 한강을 건너가기가 어렵지만 배를 타면 태평양도 건너갑니다. 나를 이기는 힘도 죄를 짓밟는 능력도 주님께 있습니다.
5.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십니다.
19절 끝을 보면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적이고 상징적 표현입니다. 죄는 무겁습니다. 공중에 던지면 굴러서 내게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바다에 던지면 한없이 한없이 깊은 데로 가라앉습니다. 무거워서 다시 떠오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도말 하신다. 기억도 안 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깊은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놀라운 배려이며 은총입니다.
결론은 분명 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완전한 사랑, 완전한 용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결단이며 삶입니다. 첫째, 그 사랑을 믿고 용서를 감사합시다. 사랑을 의심하면 관계에 틈이 생깁니다. 감사가 없으면 삶이 황폐해집니다. 둘째, 바로 전합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겪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합니다. 증언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먹고살기가 힘들어 지자 가짜 승려로 변장을 하고 집집마다 가게를 돌며 시주를 하고 있습니다. 승복도 사 입고 목탁도 구입을 했는데 문제는 시주할 때 외우는 주문이었습니다. 궁리 끝에 외울 주문도 만들었습니다. 어느 집 문간에서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주인 여자가 시주를 주기 위해 나와 보니 행색이며 외우는 주문이 가짜였습니다. 그래서 맞장구를 대꾸했습니다. “주나바라 주나바라” 주인 여자의 태도를 눈치챈 가짜 승려가 대꾸합니다. “가나바라 가나바라”.
어느 유모어 책에서 빼낸 이야기입니다. 확실치 않은 믿음은 고백도 증언도 희미합니다.
확실히 믿고 분명하게 증거합시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았습니다. 나는 용서받았습니다. 당신도 믿으면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증거합시다. 고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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