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의 광맥 제 7장 프랑스 개혁신학사
프랑스 개혁신학사
프랑스 개혁신학사는 제네바와 같은 프랑스어권 개신교 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1533-1633년 까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개혁교회는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겪게 된다. 1506년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다. ‘위그노’라는 말에는 ‘스위스 연합의 타락’이라는 의미는 담고 있는데, 전설적인 인물 위고 왕의 귀신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천박하게 붙여진 이름이다.
박해 속에서 피어난 칼빈주의 신앙
프랑스 개혁신학은 극심한 박해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활발하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지만 프랑스 위그노들은 복음을 이해하고 바르게 깨달은 바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오랫동안 강력한 가톨릭 국가로 남아 있던 프랑스가 로마 가톨릭의 타락을 인식하게 된 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 소식을 접한 뒤부터이며, 특히 지식층이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에라스무스의 글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프랑스 개신교회는 대부분 칼빈의 저술을 접하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1555년 파리에 최초로 개신교 교회가 비밀리에 설립되었다. 이는 국가적인 통제와 왕의 지배를 받아오던 프랑스 사회에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프랑스칼빈주의자들은 교회의 체제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 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꿈을 갖고 활동하였다.
프랑스의 개혁신학은 지역 귀족들이나 상류층에게는 어느 정도 호응을 이끌어 냈으나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갈리칸 신앙고백서
프랑스의 정치권은 오랫동안 가톨릭의 영향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각 지방에 가톨릭과 대주교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이에 대해 ‘위그노’들의 교회는 상하 관계로만 맺어져 있는 교회 제도를 과감히 교정하는 헌장을 제정한다.
갈리칸 고백서를 만들어낸 프랑스 개신교회 지도자들은 대부분 칼빈과 베자의 숨은 지원과 도움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1599년에 세워진 제네바 아카데미는 프랑스 개신교 목사들의 사관학교와 같았다.
1559년에 채택된 ‘갈리칸 신앙 고백서’(Gallican Confession)는 프랑스 개혁주의 교회의 정립에 큰 발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고백서는 주로 칼빈의 제네바 신앙 고백을 근거로 하여 체제와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례가 첨가되었다. 교회와 목회자 상호간의 상명하복이라는 위계질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지역 교회는 내부 문제에 대해서 자치적인 통치권을 갖는다. 교회의 대표자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의 동등권 강조가 철저히 시행된 것은 유럽 교회 역사에 처음 있는 새로운 정치 체제였다.
대량 학살과 낭뜨 칙령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의 신앙은 책이나 학술적인 문서보다는 수난과 핍박 속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인 세력다툼에 의해 개신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면서 프랑스 프랑스개혁교회도 위기를 맞는다.
1562년 3월 1일 바씨에서 예배를 드리던 개신교 성도들을 학살한 사건을 필두로 해서 30년 동안 프랑스는 종교 전쟁과 내전이라는 참혹한 시기에 휩싸였다. 까뜨린느 메디치라는 태후과 기즈 집안의 합작으로 1572년 8월 24일 성바돌로매의 날에 이루어진 대학살은 그 절정이었다. 프랑스 갈빈주의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거나 그와 관련된 문서를 소지하면 체포되었고,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소책자를 가지고 있으면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개혁 신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활동한 기욤 파렐, 요리문답, 테오도르 베자, 삐에르 비레 등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피터 라무스
프랑스 개신교 신학자와 철학자 가운데서 가장 걸출한 인물중 하나가 삐에르 라 라메(라틴어 이름인 라무스로 호칭됨 Pierre de la or Ramus, 1515-72)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개신교로 개종한 라무스는 대학 교육과 과정의 개혁을 주장했다. 당시 유행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논리학을 배격하고 반스콜라주의 방법론을 제창한다. 박해를 피해 독일에 머물면서 프랑스 칼빈주의 교회에서 회중교회 체제를 세우고자 노력하다가, 베자와 충돌을 일으켜 프랑스로 돌아간다. 이후 1572년 성 바돌로매의 날에 피살된다.
라무스의 논리적 방법론은 실제적인 활용과 단순성을 강조한다. 그의 방법론은 교육적으로 활용가치가 높아서 휴머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반면에 라무스가 신학에 끼친 영향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라무스에 따르면 신학은 더 단순하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한다. 「기독교 종교에 대한 주석」(Commentary on the Christian Religion, 1576년)에서 신학이란 실제저긴 활용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바른 생활에 대한 가르침’(doctrina de benevivendo)이라고 새롭게 규정하였다.
라무스는 신학의 내용을 믿음과 실천으로 본다. 객관적인 계시를 연구하기 보다는 실제 경건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중세 교회가 아퀴나스의 스콜라주의의 반감에서 나온 반감이었다. 라무스는 가장 단순 명료한 논리체계를 선호했다. 라무스는 베자의 학문방법도 좋아하지 않았다.(중세 스콜라주의나 베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문 방법론을 택하고 있었다.) 교회론에서도 라무스는 회중교회를 선호했으나, 베자는 장로교회를 선호했다. 라미즘이라는 학문 방법론은 널리 퍼져갔고, 개신교 진영해어도 크게 지지했다. 이후 홀라누스(Amandus Polanus)의 조직신학체계와 알스테드(J.H. Alsted, 1588-1638)의 신학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17세에도 영국 청교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라무스의 사상은 윌리엄 퍼킨스와 에임즈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개신교신학자들
프랑스 개혁주의는 재능이 많은 기능인들과 휴머니즘을 공부한 부르주아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제네바에서 확신에 찬 프랑스 출신의 개신교 성도들이 이룩한 공헌에 영향을 받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과격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기존의 정권을 담당한 세력들에게 온건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였다.
삐에르 뒤 물랭
17세기 프랑스 개신교회는 휴머니즘과 부르주아의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지성적인 분위기와 스콜라적인 논리를 갖추고 위그노 목사들을 이끈 삐에르 뒤 물랭(Pierre Du Moulin)이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윌리엄 휘태커의 지도하에 개혁신학을 공부하였다. 삐에르 뒤 물랭은 앙리 4세의 누이 까뜨린느 두 부르봉(Catherine de Bourbon)의 궁정 목사로 프랑스 교회가 알미니우스로 기우는 것을 방지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교황제의 갱신」이라는 책으로 뒤 뻬롱 (du Perron)추기경의 공격을 반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양심의 안식을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앙뜨완느 드 라 로쉬 샹디외
개헉파 스콜라주의가 등장할 정도로 세밀한 신학의 작업이 시도된 것은 앙뜨완느 드 라 샹디와의 「하나님의 성경 말씀」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제네바로 건너가 개혁 신앙을 공부하면서 칼빈의 영향으로 신학을 정리한다. 파리에서 창설된 개혁 교회의 두 번째 목사가 되었다. 1559녕 첫 프랑스 개혁 교회 총회가 개최되고 ‘갈리칸 신앙 고백서’와 ‘교회 권징’을 채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샹디외는 로잔에서 스콜라적인 방법론을 개발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 끌라우드 오베리(Claude Aubery)의 철학강의를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파의 공재설을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샹디외가 개혁파 스콜라주의 방법론에 동조하게 된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휴머니즘에서 성장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삼단논법을 그대로 채택해고 있었다. 다음으로 반종교 개혁파 ‘예수회’의 개신교에 대한 공경이 주로 스콜라적인 방법론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논리가 필요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몽또방 아카데미
프랑스에서 개혁주의에 입각한 진일보한 신학 저술이 발표된 것은 1598년 앙리 4세의 낭뜨 칭력 발표이후이다. 한때 개신교 신자였던 앙리 4세는 ‘국가 속의 또 다른 국가’라고 불리는 관용을 베풀었다. 앙리 4세의 친구이자 협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필립 뒤 쁠레시 모르네는 칼빈의 제자로서 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저작에 대하여 독보적인 해석을 내 놓았다. 몽또방 개혁주의 아카데미에서는 다니엘 샤미에르가 교리와 어학을 두루 아우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로마 교회에 대항하는 신학 저술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들의 공격을 당해 사망하였다. 몽또방의 교수였던 앙트완느 가리솔(Antoine Garrissoles)은 「원죄의 전가」를 출판하여 죠쉬에 드 라 쁠라스(Joshua de la Placaeus)의 간접 전가설을 배격하였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루이 14세가 1685년 개신교의 자유를 허락했던 낭뜨 칙령을 철회함으로서 프랑스의 칼빈주의는 박해와 쇠퇴를 맛보게 된다. 위그노들은 네덜란드, 스위스, 브란데부르크, 영국, 아일렌드, 북아메리카 등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프랑스 개혁신학사
프랑스 개혁신학사는 제네바와 같은 프랑스어권 개신교 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1533-1633년 까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개혁교회는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겪게 된다. 1506년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을 ‘위그노’라고 불렀다. ‘위그노’라는 말에는 ‘스위스 연합의 타락’이라는 의미는 담고 있는데, 전설적인 인물 위고 왕의 귀신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천박하게 붙여진 이름이다.
박해 속에서 피어난 칼빈주의 신앙
프랑스 개혁신학은 극심한 박해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활발하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지만 프랑스 위그노들은 복음을 이해하고 바르게 깨달은 바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오랫동안 강력한 가톨릭 국가로 남아 있던 프랑스가 로마 가톨릭의 타락을 인식하게 된 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 소식을 접한 뒤부터이며, 특히 지식층이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에라스무스의 글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프랑스 개신교회는 대부분 칼빈의 저술을 접하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1555년 파리에 최초로 개신교 교회가 비밀리에 설립되었다. 이는 국가적인 통제와 왕의 지배를 받아오던 프랑스 사회에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프랑스칼빈주의자들은 교회의 체제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 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꿈을 갖고 활동하였다.
프랑스의 개혁신학은 지역 귀족들이나 상류층에게는 어느 정도 호응을 이끌어 냈으나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부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갈리칸 신앙고백서
프랑스의 정치권은 오랫동안 가톨릭의 영향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각 지방에 가톨릭과 대주교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이에 대해 ‘위그노’들의 교회는 상하 관계로만 맺어져 있는 교회 제도를 과감히 교정하는 헌장을 제정한다.
갈리칸 고백서를 만들어낸 프랑스 개신교회 지도자들은 대부분 칼빈과 베자의 숨은 지원과 도움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다. 1599년에 세워진 제네바 아카데미는 프랑스 개신교 목사들의 사관학교와 같았다.
1559년에 채택된 ‘갈리칸 신앙 고백서’(Gallican Confession)는 프랑스 개혁주의 교회의 정립에 큰 발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고백서는 주로 칼빈의 제네바 신앙 고백을 근거로 하여 체제와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례가 첨가되었다. 교회와 목회자 상호간의 상명하복이라는 위계질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지역 교회는 내부 문제에 대해서 자치적인 통치권을 갖는다. 교회의 대표자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의 동등권 강조가 철저히 시행된 것은 유럽 교회 역사에 처음 있는 새로운 정치 체제였다.
대량 학살과 낭뜨 칙령
프랑스 칼빈주의자들의 신앙은 책이나 학술적인 문서보다는 수난과 핍박 속에서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인 세력다툼에 의해 개신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면서 프랑스 프랑스개혁교회도 위기를 맞는다.
1562년 3월 1일 바씨에서 예배를 드리던 개신교 성도들을 학살한 사건을 필두로 해서 30년 동안 프랑스는 종교 전쟁과 내전이라는 참혹한 시기에 휩싸였다. 까뜨린느 메디치라는 태후과 기즈 집안의 합작으로 1572년 8월 24일 성바돌로매의 날에 이루어진 대학살은 그 절정이었다. 프랑스 갈빈주의자들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거나 그와 관련된 문서를 소지하면 체포되었고,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소책자를 가지고 있으면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개혁 신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활동한 기욤 파렐, 요리문답, 테오도르 베자, 삐에르 비레 등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피터 라무스
프랑스 개신교 신학자와 철학자 가운데서 가장 걸출한 인물중 하나가 삐에르 라 라메(라틴어 이름인 라무스로 호칭됨 Pierre de la or Ramus, 1515-72)를 손꼽지 않을 수 없다. 개신교로 개종한 라무스는 대학 교육과 과정의 개혁을 주장했다. 당시 유행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논리학을 배격하고 반스콜라주의 방법론을 제창한다. 박해를 피해 독일에 머물면서 프랑스 칼빈주의 교회에서 회중교회 체제를 세우고자 노력하다가, 베자와 충돌을 일으켜 프랑스로 돌아간다. 이후 1572년 성 바돌로매의 날에 피살된다.
라무스의 논리적 방법론은 실제적인 활용과 단순성을 강조한다. 그의 방법론은 교육적으로 활용가치가 높아서 휴머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반면에 라무스가 신학에 끼친 영향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라무스에 따르면 신학은 더 단순하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한다. 「기독교 종교에 대한 주석」(Commentary on the Christian Religion, 1576년)에서 신학이란 실제저긴 활용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바른 생활에 대한 가르침’(doctrina de benevivendo)이라고 새롭게 규정하였다.
라무스는 신학의 내용을 믿음과 실천으로 본다. 객관적인 계시를 연구하기 보다는 실제 경건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중세 교회가 아퀴나스의 스콜라주의의 반감에서 나온 반감이었다. 라무스는 가장 단순 명료한 논리체계를 선호했다. 라무스는 베자의 학문방법도 좋아하지 않았다.(중세 스콜라주의나 베자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문 방법론을 택하고 있었다.) 교회론에서도 라무스는 회중교회를 선호했으나, 베자는 장로교회를 선호했다. 라미즘이라는 학문 방법론은 널리 퍼져갔고, 개신교 진영해어도 크게 지지했다. 이후 홀라누스(Amandus Polanus)의 조직신학체계와 알스테드(J.H. Alsted, 1588-1638)의 신학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17세에도 영국 청교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라무스의 사상은 윌리엄 퍼킨스와 에임즈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개신교신학자들
프랑스 개혁주의는 재능이 많은 기능인들과 휴머니즘을 공부한 부르주아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제네바에서 확신에 찬 프랑스 출신의 개신교 성도들이 이룩한 공헌에 영향을 받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과격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기존의 정권을 담당한 세력들에게 온건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였다.
삐에르 뒤 물랭
17세기 프랑스 개신교회는 휴머니즘과 부르주아의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지성적인 분위기와 스콜라적인 논리를 갖추고 위그노 목사들을 이끈 삐에르 뒤 물랭(Pierre Du Moulin)이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윌리엄 휘태커의 지도하에 개혁신학을 공부하였다. 삐에르 뒤 물랭은 앙리 4세의 누이 까뜨린느 두 부르봉(Catherine de Bourbon)의 궁정 목사로 프랑스 교회가 알미니우스로 기우는 것을 방지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교황제의 갱신」이라는 책으로 뒤 뻬롱 (du Perron)추기경의 공격을 반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양심의 안식을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앙뜨완느 드 라 로쉬 샹디외
개헉파 스콜라주의가 등장할 정도로 세밀한 신학의 작업이 시도된 것은 앙뜨완느 드 라 샹디와의 「하나님의 성경 말씀」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제네바로 건너가 개혁 신앙을 공부하면서 칼빈의 영향으로 신학을 정리한다. 파리에서 창설된 개혁 교회의 두 번째 목사가 되었다. 1559녕 첫 프랑스 개혁 교회 총회가 개최되고 ‘갈리칸 신앙 고백서’와 ‘교회 권징’을 채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샹디외는 로잔에서 스콜라적인 방법론을 개발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 끌라우드 오베리(Claude Aubery)의 철학강의를 듣고 이를 받아들인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파의 공재설을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샹디외가 개혁파 스콜라주의 방법론에 동조하게 된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소가 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휴머니즘에서 성장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삼단논법을 그대로 채택해고 있었다. 다음으로 반종교 개혁파 ‘예수회’의 개신교에 대한 공경이 주로 스콜라적인 방법론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논리가 필요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몽또방 아카데미
프랑스에서 개혁주의에 입각한 진일보한 신학 저술이 발표된 것은 1598년 앙리 4세의 낭뜨 칭력 발표이후이다. 한때 개신교 신자였던 앙리 4세는 ‘국가 속의 또 다른 국가’라고 불리는 관용을 베풀었다. 앙리 4세의 친구이자 협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필립 뒤 쁠레시 모르네는 칼빈의 제자로서 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저작에 대하여 독보적인 해석을 내 놓았다. 몽또방 개혁주의 아카데미에서는 다니엘 샤미에르가 교리와 어학을 두루 아우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로마 교회에 대항하는 신학 저술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그들의 공격을 당해 사망하였다. 몽또방의 교수였던 앙트완느 가리솔(Antoine Garrissoles)은 「원죄의 전가」를 출판하여 죠쉬에 드 라 쁠라스(Joshua de la Placaeus)의 간접 전가설을 배격하였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루이 14세가 1685년 개신교의 자유를 허락했던 낭뜨 칙령을 철회함으로서 프랑스의 칼빈주의는 박해와 쇠퇴를 맛보게 된다. 위그노들은 네덜란드, 스위스, 브란데부르크, 영국, 아일렌드, 북아메리카 등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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