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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믿음(2) (빌4:10-13)

by 【고동엽】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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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의 믿음(2)  (빌4:10-13)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성경이 다 중요 하겠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신약성경의 중심이 되는 책은 ‘사도행전’이라고 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와 기독교의 시작을 보여주는 역사기록입니다. 신약성경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시작될 때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의 말씀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사도행전을 통해 로마서를 비롯한 이후의 성경들이 비로소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잘 보면 신약의 흐름과 성경의 맥을 가장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눕니다. 1장부터 12장까지의 전반부와 13장부터 28장까지의 후반부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인간역사에 반영되었는가를 알려줍니다. 인종으로 말하면 전반부는 유대인이 중심이고, 후반부는 이방인이 중심입니다. 처음 유대인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교회로 말하면 전반부는 예루살렘교회가 중심이고, 후반부는 안디옥교회가 중심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 땅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고, 교회 내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좋은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나중에 세워졌지만 교회 외적인 모델을 가장 올바르게 제시하는 바람직한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을 인물로 말하면 전반부는 베드로가 중심이고, 후반부는 바울이 중심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두 사람이 중심축을 이루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반부는 베드로의 믿음, 사역, 활동과 그의 영향력을 뛰어나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후반부는 바울의 주도합니다. 이방인으로 전해지는 복음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바울의 사역이 훨씬 더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민족과 열방이 구원을 얻는 것이기에 이방인을 위해 택한 그릇 바울의 믿음과 인격과 사역을 성경은 귀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빼놓고 신약성경을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사역의 중심에는 믿음이 뿌리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생각하고 배우는 귀한 시간에 바울의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바울의 두 번째 믿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과연 어떤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기뻐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빌립보서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은 남다른 애정을 갖고 시간과 여건이 허락될 때마다 빌립보교회를 방문하여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에 있는 어려움에 대한 소식도 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빌립보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돈을 보내어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되었고, 그들에게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바울의 편지는 1장부터 3장까지 신앙의 중요한 원리를 알려주고 4장 본문에 와서 바울의 간곡한 바램과 함께 그의 귀한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먼저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들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기뻐함을 말합니다. 크게 기뻐한다고 강조합니다. 주안에서 바울은 성도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를 볼 때마다, 믿음생활을 기억할때마다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만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의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유독 기쁨을 강조합니다. 짧은 성경에 기쁨이라는 단어가 무려 18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쁨,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슬프고, 짜증나고, 표정 없고, 무서운 것이 믿음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고, 주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또 기뻐하며 사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기뻐할 수 있을 때 기뻐해야 합니다. 기쁨의 순간을 슬픔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의 경우, 기뻐해야 할 때에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물론 있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기뻐할 수 있을 때 마음껏 기뻐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이요, 모습임을 잊지 마십시오.

   문제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도 기뻐하라고 바울이 말하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당한 형편이 그런 것입니다. 그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보통 사는 것도 힘든 때였는데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상황과 형편이 그야말로 말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가 여기에 오기까지 적잖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의 생명까지 위협받을 지경입니다. 무엇하나 그의 상황에 기뻐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뻐할 수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합니다. 문제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믿음이 뛰어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기쁨은 기뻐할 때의 기쁨과는 다릅니다. 잔칫집에서 기뻐하고 웃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초상집에서 기뻐하고 웃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고, 어쩌면 미친 사람의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바울의 기쁨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고 기뻐할 수 없을 때의 기쁨이라는 주어진 현실을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자기에게 당면한 모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수용하는 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기쁨의 중요한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평온할 때는 기뻐하고 웃고 즐기고 감사하다가, 고난이 오고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히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신세타령합니다. 그리고 탓을 잘 합니다. 남의 탓하고, 사람 탓하고, 환경 탓을 합니다. 이것이 바울과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기뻐합니다.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해도 원망과 불평 없이 그의 현실을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쓸쓸히 삶을 마친 다해도 어떤 사람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받아드릴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여기 기쁨의 의미입니다.

   어떤 삶의 형편에 처한 다해도 그 현실을 받아드리십시오. 탓을 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수용하십시오. 믿음은 바로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믿음의 놀라운 역사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능력이 나타납니다. 바울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귀한 믿음의 사람으로 주어진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족하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 바울은 이렇게 그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요,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자족하는 것입니다. 자족하지 않으면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이 자족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요, 본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돌아보며 내 욕심이 끝이 있는가, 없는가를 돌아보십시오.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이 가장 손쉽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가죽자루의 입을 좁게 하여 원숭이가 손이 겨우 들어가고 나올 정도로 만듭니다. 그리고 자루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넣어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습니다. 원숭이는 자루 속을 들여다보곤 손을 넣어 자루에 있는 먹이를 손에 쥡니다. 그리고 빼려고 하는데 손이 자루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손안에 쥔 먹이를 놓으면 들어 간대로 빠지는데 손에 쥔 먹이를 놓지 않아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결국 원숭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손만 놓으면 되는데 그걸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개씩 거위는 신통하게도 알 대신 황금을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이제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도대체 저 거위 속에 얼마나 많은 황금이 있기에 이렇게 매일 황금알을 낳나 생각합니다. 내가 빨리 부자가 되려면 저 거위의 배를 째서 그 안에 무수한 황금을 갖는 것이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거위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거위 배속에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땅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족하지 못한 인간의 욕망이 어떠한 가를 잘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야고보서 1장과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습니다. 욕심은 욕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죄를 동반하게 됩니다. 죄가 커지면 반드시 나쁜 결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족하며 살면 마음도, 몸도, 신앙도, 경건에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결국 자족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요, 인간의 모든 욕망, 욕심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늘 감사하면서 자족하는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셋째, 긍정적인 믿음입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말씀이고, 많이 인용하고 즐겨 사용하는 성경입니다. 이 말씀에 빨간줄을 그어 놓은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달력과 액자를 가장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가장 귀한 말씀이면서도 또 적잖이 오해가 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의 본질적인 부분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결코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믿고 마치 슈퍼맨처럼 모든 것을 다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되는 것도 많이 있지만 안 되는 것도 많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중요한 단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한다는 ‘행동’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보다 많은 부분에서 ‘태도’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태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긍정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어떤 여건 속에서도 주님과 더불어 간다면 모든 것은 될 수 있고, 가능하다는 긍정의 마음, 긍정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도 중요한 바울의 고백이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긍정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고난과 역경과 환란의 바람이 불어와 지금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하나님께 눈물과 통곡으로 간절히 기도하여 그의 상황이 한순간에 역전되기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그의 현실 앞에 그가 믿음으로 고백한 신앙은 바로 긍정의 믿음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으로 보는 아름다우 태도입니다. 바울의 능력, 믿음, 역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나는 할 수 있다, 된다, 가능하다, 희망이 있다, 포기하지 말자는 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태도가 강력한 믿음의 행동을 유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긍정의 태도와 자세, 긍정적인 믿음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약성경을 주도한 강력한 사람으로 세운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많은 부분에서 행동보다 태도가 중요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고,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는 결과위주와 행동양식에 따른 평가를 잘 내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은 결과보다 과정이고, 행동보다 태도를 중요하게 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야 세워지고, 높여야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믿음의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나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모든 영역과 삶에 긍정적인 태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이 성공하고 승리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삐뚤어지고, 태도가 좋지 않고, 자세가 바르지 못한 사람,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생각한대로, 그런 태도대로 인생을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생은, 믿음은 어떤 태도를 갖는 가부터 시작되고 거기에서 승패가 갈리는 것입니다.

   대중가요 가사를 만드는 작사가들의 모임인 ‘노랫말연구회’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슬픈 노래, 부정적인 삶을 노래한 가수들은 일찍 요절하거나 그들 노래의 가사처럼 슬픈 운명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발표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26년 현해탄에서 연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투신 동반자살했던 한국 최초의 여가수 윤심덕은 자신의 죽음을 찬미하듯이 ‘사(죽음)의 찬미’ 라는 노래를 부르고 죽었고, ‘애수의 소야곡’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긴 남인수는 1962년 ‘눈감아 드리오리’ 라는 노래를 남기고 41세의 한창 나이에 눈을 감았고, 영원불멸의 가수로 지칭되는 이난영은 그녀의 노래 ‘목포의 눈물’처럼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병으로 49세에 숨졌다. 1970년대 애절한 목소리를 팬을 울렸던 차중락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노래하다가 낙엽과 함께 가버렸으며, 신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배호는 ‘마지막 잎새’를 마지막 노래로 남겼다. 골수암으로 숨진 양미란은 ‘흑점’이라는 노래를 남겼는데 이는 그의 노래 가사 ‘태양의 흑점처럼 어두운 내마음’ 이라는 가사에서 이미 암의 불길한 징조를 보여준 것 같다. 1985년 폐결핵으로 숨져간 김정호는 이미 죽음을 예견하듯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라는 가사의 ‘님’이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발표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갔다.”

   어떤 시각과 어떤 자세를 갖고 살아가느냐고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의 판별법이 됩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생각이 부정적이고, 말이 부정적입니다. 물론 행동도 부정적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하나도 긍정적인 성과를 맺지 못하고 인생을 마칩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불바다입니다. 까만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까맣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낮이 올까, 하늘만 바라보다가 인생을 마칩니다. 긍정적인 태도, 믿음이 결국 우리를 긍정의 길로, 긍정의 행동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빌립보서를 통해 주시는 바울의 귀한 믿음을 기억하십시오. 그의 믿음은 기뻐하는 믿음, 자족하는 믿음, 그리고 긍정적인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해 힘 있게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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