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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의 믿음 (말3:6-12)

by 【고동엽】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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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의 믿음  (말3:6-12)

지난주간 우리는 또 한번의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중동의 한복판 아프카니스탄에서 한국인 21명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들은 모두 분당에 있는 샘물교회 성도들입니다. 방학을 맞이하여 단기선교를 떠난 팀들이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번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단기선교를 다녀왔고, 이 땅의 많은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세계선교의 비전을 품고 척박한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지금도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샘물교회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고, 한국교회가 기도하고, 또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들이 무사히 풀려 나와 더 이상의 아픔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납치한 탈레반은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학생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강경 수니파 무장 정치세력입니다. 탈레반(Taleban)이라는 단어가 ‘학생’이란 뜻입니다. 모하메드 오마르(Omar)가 이끄는 탈레반 세력은 1996년 가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2001년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밀려나갔습니다. 또한 탈레반은 2001년 9. 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Laden)이 이끄는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지원했습니다. 이들이 주로 공격하는 대상은 물론 반정부활동이고, 그 배후에 있는 미국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관련된 나라들입니다. 하지만 더 내면적인 공격의 대상은 기독교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을 믿는 강경파들입니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기독교에 당했다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공격하기에 죽음도 불사합니다. 이들은 그들이 믿는 지하드라는 전쟁을 가장 영예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년이 된 무슬림의 모든 남자들은 이슬람의 종교법으로 지하드에 참가할 의무를 부여합니다. 지하드에 참가한 전사들의 생존자에게는 전리품의 분배를 얻습니다. 그리고 사망자는 순교자로 추앙하여 천국의 약속이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도들은 지하드를 위한 일이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잃는 일을 명예로 알고 더욱 강경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이토록 이들을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테러단체로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한 진정한 삶을 왜곡합니다. 한마디로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참 하나님을 바로 아는 제대로 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선지자들의 귀한 믿음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과연 성경에서 가르치는 참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일까요?

   첫째, 쓰임 받는 믿음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호세아, 학개와 같이 소 선지자에 해당됩니다. 말라기는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늦게 활동한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본 것처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신실한 믿음으로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을 완공합니다. 성전을 짓고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 평화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진행되고, 절기를 지키는 축제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삶의 의미와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인간 삶에 악함 때문에 처음 성전을 지으며 열정적이던 이들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제사장들의 타락이 무섭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도 십일조와 제물을 바치는 일에 점점 등한시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이 금하시는 이방인과의 혼음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일을 반복합니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이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결국 이 범주에서 누구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열정도 사랑도 식어지고, 믿음도 헌신도 없어지고, 다시 예전의 왕들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이제 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할 때에 하나님은 한 사람 말라기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토록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인간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처음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소망과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 가운데 읽은 본문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심고 전하기 위해 말라기 선지자는 세워졌고, 그는 하나님을 위해, 백성들을 위해 참 좋은 일, 선한 일에 쓰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한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일에, 가장 좋은 일에 쓰임 받는다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인간은 누구나 쓰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분명한 목적과 뜻을 따라 이 땅에 사람으로 온 모든 인생은 어떤 일에든지 쓰임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른 막대기도 사용하시고, 돌들도 사용하시고, 동물의 입도 때론 여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인간은 결국 한 평생을 살면서 자기가 알든지 모르든지 뭔가에 쓰임을 받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명적 존재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그냥 아무렇게 살지 않습니다. 어떤 짧은 시간도 인생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을 향한 변치 않는 법칙입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일에 쓰임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뭔가에 쓰임을 받는 인생이라면 좋은 일에, 하나님의 일에,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경우 좋은 일이 아니라 나쁜 일에, 악한 일에, 사탄의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번에 납치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것이 과연 누가 기쁜 일입니까? 세계와 민족을 테러와 죽음과 두려움의 공포로 몰아가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들이 나쁜 일에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따라다녔어도 결국 그는 나쁜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넓은 의미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가 팔지 않아도 주님은 자기 길을 가십니다. 결국 유다는 나쁜 일에, 사탄에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비참하게 인생을 끝냈고, 오늘까지 많은 사람의 입에 저주스러운 이름으로 오르게 된 것입니다.

   뭔가에 쓰임 받는 것이 신앙이고, 우리의 인생이라면 기왕이면 좋은 일에 쓰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살리고 즐겁게 하고 위로하는데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 나는 어떤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가를 돌아보십시오. 혹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사람을 실망시키지는 않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쓰임 받는 것이 믿음이고, 인생입니다. 좋은 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찾는 믿음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죄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죄를 짓는 자신도 안타깝고,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 시키는 때에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아프게 했던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보통 사랑이 아니고, 보통 인내가 아닐 것입니다. 한번 사랑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한번 선택한 인간을 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잘못한 것에 따라 벌을 내리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없겠지만,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시는 분이어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돌아오면 살려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특히 잘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죄짓고 하나님과 사람을 실망시킨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 용기를 가지고 다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죄인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은 아주 간절하고,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이사야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주님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찬송가의 가사에도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가룟유다와 베드로는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두사람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것이 같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았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쓰임 받는 인생 앞에 모두가 사탄의 쓰임을 받은 경험이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차이점도 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끝낸 사람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 하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오직 이 차이밖에는 없습니다. 똑같이 죄를 짓고,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고, 똑같이 괴로워했지만 한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한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다는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일어서 회복하여 한때 나쁜 일에 쓰임 받았지만 이젠 하나님의 더 큰 일을 위해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나 죄인이고, 살면서 너무도 많은 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지난주간도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죄인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길뿐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인정하여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함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들이 잘못한 구체적인 문제는 바로 헌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규례에 따른 헌금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십일조에 대하여 올바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하여 말라기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들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8절과 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구별하여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 책망 받을 모습입니다. 그러나 늦지 않았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셨고, 다시 회복하고 바르게 드릴 수 있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의 결론은 다시 바른 헌금생활, 드리는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주님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영광의 삶은 우리의 소중한 보물을 드리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헌신적이고, 감사함으로 드리는 우리의 예물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될 때 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모든 것에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일터와 사업과 직장에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것이 없도록 넘치고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반드시 갚아주시고, 어떤 것으로든지 갚으십니다. 당대가 아니면 후대까지 갚으십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헌신해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예비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좋은 일에 쓰임 받는 믿음, 하나님을 찾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 이것이 말라기 선지자의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해 힘있게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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