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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가정〈창세기 29장 10~20절〉

by 【고동엽】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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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가정〈창세기 29장 10~20절〉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내어 울며……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로다.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에게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數日) 같이 여겼더라.

 

세상에는 이른바 연애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만큼 뜨거운 연애를 한 사람은 아마도 그리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은 야곱의 가정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랑에는 몇 가지 시금석(試金石)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첫째는 시간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참을 수 있는가를 지켜보면 사랑의 진위(眞僞)를 판명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연애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결혼을 일단 유보시키면서 한동안씩 공백기를 갖는 커플들이 눈에 띕니다.

저는 그런 커플들을 볼 때마다 상대방에게 '선전포고'하도록 권하고 싶습니다. '3년을 기다려라'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만일 3년 이상 기다릴 수 있으면 믿을만하지만 한 달도 기다리지 못하다면 거짓 사랑이니 미련없이 헤어지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화끈한 사랑을 나누었더라도 돌아서야 할 때는 단호한 태도로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기다린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난 것은 도피하던 노상(路上)에서 였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외롭고 힘든 때입니다. 그런상황에서 라헬을 만났으므로 쉽게 뜨거워질 수 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서로가 외롭기에 쉽사리 사랑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맞다든가 성격이 맞다든가 모든 여건이 맞아서라기보다는 이 외로움이라는 요소가 열렬히 사랑하게 만든 도화선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7년입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상태로 7년 동안을 기다립니다. 본문에 보면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20절)"고 말씀합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뜨겁게 절실하게 사랑했으면 칠년 세월이 수일처럼 여겨졌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랑은 이 칠 년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7년이 더 보태어져서 앞을 가로막습니다. 결국 14년을 기다려서 라헬과의 사랑을 이루게 됩니다. 역시 이들의 사랑은 꽤나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가히 에로스적인 사랑의 대표 격이라 할만합니다. 본문에서 라헬은 곱고 아리땁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 아름다움으로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가뜩이나 외로운데 아리따운 라헬을 만났으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장 14년을 참고 기다려서야 이 사랑이 결실을 봅니다.

그 점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야곱은 그 사랑으로 해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굴욕도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의 시금석 그 둘째는 수고와 희생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얼마나 희생할 수 있는가, 얼마나 수고할 수 있는가, 수고하되 기쁨으로 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수고하면서도 기쁩니다. 수고를 수고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면 수고가 고통스러워지고 수고를 굴욕으로 받아들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불명예스럽기만 합니다.

야곱은 오로지 라헬을 향한 사랑만으로 14년을 수고하여 하루같이 지냈습니다. 종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기쁨으로 얼마든지 참아냈습니다. 라헬 역시 이 야곱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뜨거운 것도 좋고 일편단심인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

서는 잘한 것이 못됩니다. 사랑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인 문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이요 세속적이요 욕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야곱은 결혼지참금 턱으로 14년간의 노동을 지불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여자 라헬을 얻기 위해 머슴살이도 마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결혼식을 저녁에 치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저녁에 결혼식을 올리는 습속이 남아 있습니다.

요즘에는 미국사람들도 저녁에 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바쁜 낮 시간을 잡아 하객들에게 불편을 주기보다는 모두들 일과가 끝난 다음이면 피차에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필이면 어중간한 오후 시간을 잡아 결혼식을 치르는 일이 많은데, 아무래도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주최측에도 불편하고 하객들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저녁 시간을 잡으면 잔치의 분위기도 한결 깊이를 더할 것 같습니다. 한번 새겨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불편한 시간을 잡아 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오후 3시쯤에 예식을 올리고는 어디에서 피로연이 있으니 가셔서 많이 잡수시라고 광고합니다.

점심식사도 아니고 저녁식사도 아니니 어쩌라는 것이냐 해도 할말이 없을 노릇입니다. 억지로 대접하는 것도 같고, 그래서 억지로 먹어주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억지춘향입니다.

억지로 대접할 것도 없고 억지로 먹어주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꼭 그렇게 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런 억지춘향식의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치에 걸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개선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저녁 예닐곱 시쯤에 식을 올리고 바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을 축복해 준다면 한결 오붓할 것 같습니다.

비합리적인 줄 알면서도 시속(時俗)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따르려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만사에 합리적으로 대응할 것입니다. 감정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해서야 되겠습니까?

히브리사람들이 저녁에 결혼식을 가지는 데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고 하루를 말씀합니다. 저녁이 먼저입니다. 곧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은 해가 지면 새 날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침해가 떠오르면 새 날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네의 관념과는 반대이지요. 히브리사람들이 저녁에 식을 올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외국에 나가 있다보면 호텔 연회장에서 저녁에 결혼식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일과가 끝난 예닐곱 시나 8시, 심지어는 밤 9시에도 식이 있습니다. 식에 이어서 하례객들에게 피로연 겸 저녁식사를 대접하는데, 보기에 퍽 합리적인 것 같았습니다.

야곱의 결혼식을 봅시다.

그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 조명이래야 기름을 사용하는 호롱불이 고작입니다. 그 희미한 호롱불을 켜놓고 식을 올리는 데다 신부는 얼굴도 몸도 베일로 가려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부가 바뀌어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 그곳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연애했으므로 신부는 당연히 라헬이어야 하는데, 신방에 들어온 것은 그 언니인 레아입니다.

야곱은 그 밤이 새고 나서야 자신과 첫날밤을 보낸 신부가 라헬이 아닌 레아인 것을 알았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요, 운명이 좌우되는 순간입니다.

레아는 라헬에 비하여 그리 예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안력(眼力)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언니를 두고 동생을 먼저 시집보낼 수 없어서 그랬는지, 신부의 아버지 라반은 이렇게 하여 레아를 야곱의 아내로 주게 되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첫날밤을 지내고 나서야 그 모양이 된 것을 알았으니 일은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어야 합니까? 따지고 보면 야곱 자신부터가 반성해야 할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지금 외삼촌 라반에게 호된 속임수를 당했습니다마는 일찍이 야곱도 가끔 외삼촌을 속이려한 적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참으로 엄청난 실수를 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지난날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던 장면, 여러분도 기억하시지요? 눈이 어두운 아버지가 음성을 들어보니 분명 야곱인데, 몸을 더듬어 털이 난 것을 보니 에서인가도 싶습니다.

음식을 가지고 들어와서도 에서인 양 행세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래도 미심쩍습니다. "그새 어떻게 사냥을 했느냐"고 물어보자 야곱은 "하나님께서 짐승을 순적히 만나게 해 주셨다 라고 시치미를 뗍니다.

거짓말까지 해서 아버지를, 그것도 눈이 어둡다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렇게 못된 계략으로 축복을 받아낸 사람입니다.

그 같은 죄의 값으로 치자면 신부를 바꿔치기 당한 것쯤은 대수로운 일이 못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할까요.

이때라도 야곱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손해졌더라면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와 형님을 속인 죄 값을 받는구나' ----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순종하여 레아와 함께 평생을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야곱은 두 자매를 다 아내로 취하여 자식을 낳고 삽니다.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147세로 고달픈 삶의 여정을 마치게 될 때, 그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도 장사된 막벨라 굴에 그 자신도 묻어달라고 유언을 합니다.

이리하여 야곱은 결국 레아와 나란히 묻혔습니다. 라헬은 외롭게 혼자 떨어져 딴 곳에 묻히고 맙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야곱은 일생을 지낸 연후에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레아야말로 마음으로부터 나를 사랑했던 여자다'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라헬도 레아도 야곱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그토록 투기가 심한 라헬이지만 죽어서까지 투기를 부릴 수는 없었습니다.

긴 인생을 살면서 야곱은 생전에 두 여자에 대하여 마음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라헬에 대해서는 '나를 괴롭히고 어렵게 만든 여자'라 생각했을 성싶고, 레아에 대해서는 '내가 알뜰히 위해주지 않았는데도 평생을 날 위해 살아준 여자'로 고맙게 여겼을 것 같습니다. 레아를 막벨라 굴에 장사한 것이나 자신도 그 곁에 묻히기를 바랐던 것을 보아서 그런 심경을 짐작해볼 수 있겠습니다.

라헬은 사랑도 뜨겁고 질투가 많아 불같은 여자입니다. 사랑과 질투가 종이의 양면 같다고도 하고 흔히 사랑을 하면 으레 질투가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질투하는 사랑은 유치한 사랑입니다. 질투처럼 맹목적이고 바보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마음도 상하고 결과도 나쁘게 되기 마련입니다. 희랍 신화에도 있지 않습니까? 질투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여 이간시키려는 악마의 시험입니다.

질투가 사랑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악마의 시험에 빠진 상태입니다. 질투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질투는 사랑의 타락일 뿐입니다.

언제나 사랑의 질(質)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라헬은 아리따운 여자였고 열렬한 사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질투가 많았습니다. 질투해서 얻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질투는 양쪽을 다 죽입니다. 또한 라헬은 보통으로 질투하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재주가 있고 두뇌회전이 빨라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사랑의 소원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소동을 피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죽이겠다고 까지 하면 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본문 말씀 30장 1절을 보십시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妬忌)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 걸핏하면 죽는다고 소리치는 여자와 함께 산다는 것은 여간 피곤한 노릇이 아닙니다. 때마다 죽겠다고 투정인데, 사실은 죽겠다고 할 때마다 죽이겠다고 하는 마음도 함께 있습니다. 살의(殺意)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절대로 두 가지의 표현은 삼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헤어지자'라는 말과 '죽겠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헤어지자, 그만두자 ---- 마지막 떠날 때에 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미리부터 그런 소리를 하면 협박이 될 뿐입니다. 죽어버리겠다, 죽고 싶다 ---- 이것은 가장 나쁜 말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기에는 죽이고 싶다는 살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는 생명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이런 말을 입밖에 내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뜻도 신앙도 미래도 자식도 전혀 안중에 없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감정에 주도되어버린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라헬은 감정주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헬은 독자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면서도 그 라헬의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했습니다. 라헬에게 온유한 마음, 평안한 마음을 넣어주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라헬은 우상을 섬기고 또 가지고 다녔습니다.

야곱의 거룩한 가정의 한 구석에 우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이 먼저인데 라헬에게는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야곱 또한 라헬을 사랑한 나머지 이 우상 섬기는 일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사랑해야만 불같은 사랑이든 물 같은 사랑이든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열렬히 사랑한 결과가 '내가 죽겠노라'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노합니다. "성태(成胎)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30 : 2)" ---- 하나님이 먼저라며 책망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물론 사랑은 좋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으로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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